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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사도행전

성령의 보내심을 따라

by 목자 이창무 2025.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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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사도행전 제 17 강 / 이창무

성령의 보내심을 따라

말씀 / 사도행전 13:1–12
요절 / 사도행전 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서론 – 복음의 강이 시작된 곳

서울에는 한강이 흐릅니다. 수많은 다리가 그 위에 놓여 있고, 고층 빌딩들이 그 양옆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정말 장관이지요. 서울의 심장과도 같은 이 강은 도시의 생명줄이고, 우리 시대 문명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이 웅장한 한강의 시작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흔히 “양수리쯤 아닐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강원도 태백의 깊은 산속, ‘검룡소’라는 아주 조용한 샘에서 시작됩니다.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숲길을 따라가다 보면, 고요한 숲 아래에서 마치 속삭이듯 조용히 솟아나는 샘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시작된 물줄기가 수많은 지류를 만나고, 산과 골짜기를 지나면서 점점 커져 마침내 한강이라는 거대한 강이 되어 도시를 가로지르고 수많은 생명을 적시는 젖줄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사도행전 13장은, 세계 선교라는 거대한 복음의 강물이 처음으로 방향을 틀고 흘러가기 시작한 지점을 보여줍니다. 그 복음은 지중해를 건너 로마 제국 전역을 적셨고,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시작은 화려한 궁전도, 정치가들의 회의실도 아니었습니다.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던, 안디옥 교회의 조용한 예배 모임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겉보기에는 아주 소박하고 평범한 자리였지만, 하나님은 그 자리를 통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음의 흐름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다시 복음의 강이 흘러나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시대, 이 교회에서, 또 한 번 복음의 시작이 일어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복음의 사람들을 준비시키시고, 어떻게 교회를 통해 복음의 물줄기를 흘려보내시는지를 함께 깊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은 복음의 사람들을 준비시켜 보내십니다

지금까지 사도행전은 예루살렘과 사도 베드로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13장을 기점으로, 이제는 사도 바울의 이방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는 복음 역사에 있어 결정적인 전환점이며, 그 중심에 있었던 교회가 바로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는 귀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들은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단련하며, 날마다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깨어 있던 공동체였습니다.

성경은 안디옥 교회 안에 있었던 이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행 13:1). 이 한 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은 참으로 다채롭습니다. ‘니게르’라는 별명으로 보아 흑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므온, 북아프리카 출신의 루기오, 헤롯과 함께 왕궁에서 자란 귀족 마나엔, 그리고 따뜻한 감성형 바나바와 논리적인 분석형 사울까지—출신도, 문화도, 성격도 각기 달랐지만,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종’이라는 정체성 아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다양함을 포용한 이 공동체는 무엇보다 말씀 안에 뿌리 내린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이 공동체에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 13:2). 이 ‘시키는 일’은 이미 사도행전 9장에서 하나님께서 밝히신 바 있습니다. “그는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게 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그러나 그릇은 그냥 쓰이는 법이 없습니다. 불 속에서 단련되고, 어둠 속에서 깎이고 비워져야 참으로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사울은 지난 15년간 말씀을 묵상하고, 자아가 깨지는 훈련의 시간을 걸어왔습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잊혔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을 때,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를 따로 세우라.”

안디옥 교회는 이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했을까요?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 13:3). 첫째로, 그들은 기도했습니다. 이미 성령의 음성을 들었지만, 다시금 금식하며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늘날 기업들이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전략 회의나 태스크포스 회의를 여는 것과는 다르게, 안디옥 교회에는 표결도, 다수결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 앞에 무릎 꿇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기도하는 자들에 의해 움직이고, 무릎 꿇는 자리에서 방향이 결정됩니다.

둘째로,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가장 귀한 사람들을 아낌없이 보냈습니다. 바나바는 교회의 설립자였고, 사울은 그가 키운 후계자였습니다. 이들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움켜쥐지 않고 과감히 내어놓았습니다. 붙드는 것이 아니라 보내는 것,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열어주는 것, 그것이 복음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교회는 하나 되어 순종했습니다. 선교사 파송은 몇몇 지도자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온 교회가 한마음으로 금식하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손을 얹어 그들을 파송했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믿음의 응답이었습니다.

사실 이 파송의 장면은 하나님께서 먼저 보여주신 모범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가장 귀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그 자체이셨고, 기도로 사명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보내는 교회의 원형, 그 모범이 바로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말씀 중심의 교회, 다양성을 품은 공동체, 성령의 음성에 민감한 사람들, 그리고 깊은 순종으로 응답하는 교회. 이 네 가지가 안디옥 교회를 세계 선교의 전초기지로 세웠습니다.

안디옥과 안암은 같은 ‘안’ 자 돌림의 형제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안디옥 교회를 얼마나 닮았을까요? 우리 안암UBF 역시 말씀에 헌신된 공동체입니다. 과거에도, 지금도 말씀의 종들이 존재하며, 곧 다가올 여름 수양회에서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들이 말씀을 섬길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기둥 같은 사람들을 선교지로 파송했다는 점에서도 우리는 안디옥 교회를 닮았습니다. 세계 어느 선교지를 가도 안암 출신 선교사님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것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역사는 과거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새로운 일을 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말씀과 기도로 단련된 공동체이냐? 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있느냐? 너희 가운데 가장 귀한 이들을 기꺼이 보낼 수 있느냐?” 그리고 우리가 준비되었을 때,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안암골을 불러 시키는 일이 있다. 너희는 그들을 따로 세우라.”

우리는 붙들고만 있지 않고 기꺼이 보내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의만 하기보다 먼저 무릎 꿇고 기도하는 교회, 성령의 지시 앞에 즉각 순종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깊이 뿌리내리고, 하나님의 음성 앞에 마음을 활짝 열고, 우리 중 가장 귀한 이들을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아낌없이 보내는 공동체로 준비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울러 내년 5월 17일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 선교대회가, 새로운 복음의 물줄기를 여는 역사적인 시간이 되기를 함께 기도합니다.

2. 하나님은 지혜로운 출발로 복음의 여정을 시작하십니다

안디옥 교회가 기도로 준비하고 눈물로 파송한 두 사람, 바나바와 사울의 발걸음은 어디로 향했을까요?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행 13:4). 두 사람의 출항 장면은 세상의 눈에는 그리 특별하게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실루기아 항구에서 떠날 때 유튜브 라이브 방송도 없었고, 드론이 따라다니며 멋지게 촬영한 영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조용한 항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정의 첫걸음이었습니다. 복음이 지중해를 건너 대륙을 가르고, 민족과 문화를 초월해 흐르기 시작한 출발선, 하나님께서는 그 시작을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 섬에서 열어가신 것입니다.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행 13:5). 그들이 도착한 첫 지역은 구브로 섬의 동쪽 항구도시, 살라미였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곧장 유대인의 회당으로 향합니다. 그곳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면서도 말씀을 사모하며 메시아를 기다리던 자리였습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훗날 로마서에서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백성에게 먼저 복음을 들려주시고, 그곳으로부터 세상을 향해 복음의 문을 여셨습니다.

구브로에서 회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 첫 선교 사역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바나바는 이 섬의 공기와 그 안에 스며든 냄새들까지도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섬 사람들의 풍습과 정서를 몸으로 알고 있었고, 사울 역시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회당의 언어, 예배의 형식, 사람들의 눈빛과 마음의 결까지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이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가장 잘 알고, 가장 깊이 품을 수 있는 곳에서 복음의 여정을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닌, 철저히 지혜로운 출발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갈릴리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제자들 또한 갈릴리에서 전도 훈련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 하셨지만, 그 출발점은 언제나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우리의 일상과 삶의 반경 안에서, 복음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은 먼 미래의 위대한 계획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발끝이 닿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거대한 전략이나 화려한 기획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복음을 시작하신 방식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주십니다. 복음의 시작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을 품고 기도하는 데서 시작되고, 차가운 디지털 화면을 넘어 한 통의 전화로 마음을 여는 데서 시작됩니다. 상처받은 이에게 따뜻한 위로의 한 마디를 건네는 데서, 주님의 손을 내미는 것이 바로 복음의 출발점입니다. 우리가 가장 잘 이해하고 품을 수 있는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일상 속 자리에서, 복음의 씨앗이 심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지혜로운 복음의 시작입니다.

찬송가 505장에도 이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먼 곳에 나가서 전하지 못해도 세상 모든 사람 다 듣고 그 사랑 알도록 전하고 기도하고 매일 증인이 되겠다.” 우리가 멀리 가지 못하더라도, 복음은 가까운 자리에서 전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만나는 사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 이름, 그 얼굴이 복음의 여정이 시작될 수 있는 지점입니다.

주님께서 지혜로운 출발로 복음의 문을 여셨던 것처럼, 우리도 삶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복음의 씨앗을 심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발걸음이, 하나님 나라를 향한 위대한 여정의 첫걸음이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 걸음이 이어져 내년 전국청년대학생수양회에 천 명의 청년이 참석하는 놀라운 은혜로 연결되기를 함께 기도합니다.

3. 하나님은 진리로 거짓을 꺾고 복음을 증거하십니다

복음의 첫 여정을 시작한 바울과 바나바는 구브로 섬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관통하며 마침내 바보라는 도시에 도달합니다. 그곳에서 이들은 뜻밖의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행 13:7). 그는 로마 제국의 총독이었습니다. 세상의 권세자요,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지혜 있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지혜란 단지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란 진리를 들을 줄 아는 귀이며, 진리를 향한 갈망의 마음입니다. 서기오 바울은 그 지혜로 바울과 바나바를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였습니다.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이 짧은 문장 안에는 진리에 대한 갈망, 복음을 향한 목마름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의 입장에서는 첫 선교지에서 믿을 수 없는 기회, 바로 큰 ‘대어’를 낚을 수 있는 순간이 주어진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빛이 비추는 곳에는 어김없이 어둠도 함께 나타납니다. 이들은 그곳에서 엘루마라는 이름의 마술사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유대인이었지만, 마법과 속임수로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하며 총독 곁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자였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 법사”, “○○ 선생”처럼 사람들의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총독의 마음이 복음에 열리는 것을 보고 방해하기 시작합니다. 왜곡된 말로 흔들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대적합니다. 진리의 빛이 그의 어둠을 드러내자, 그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저항한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그는 엘루마를 향해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행 13:10–11). 주의 손이 엘루마 위에 임하자 그는 즉시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안개와 어둠이 그의 눈을 덮었고, 그는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더듬으며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 장면은 바울 자신의 회심 사건을 그대로 닮아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찬란한 빛에 눈이 멀어버린 바울, 그 순간 그는 육의 눈을 감았지만 영의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는 알았습니다. 참된 회개는 때로 눈을 감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엘루마에게도 그 길을 열어 주고자 했습니다. “너도 잠시 눈을 감고, 하나님 앞에, 진리 앞에 서 보아라.”

이 모든 장면을 누가 지켜보고 있었을까요? 바로 총독 서기오 바울입니다. 그는 단지 말로 듣는 복음이 아니라, 거짓을 꺾고 어둠을 물리치는 복음의 능력을 자기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행 13:12). 복음은 단지 말이 아닙니다. 논리나 설명만이 아니라, 실제로 현실을 흔들고 어둠을 꺾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으며, 선포될 때 능력이 되어 생명을 살리고 세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 속에도 수많은 ‘엘루마들’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특정 인물이라기보다는 “진리는 상대적이야”, “돈이 최고지”, “자기만의 진리를 찾아”라는 이름으로 우리 삶에 스며드는 왜곡된 가치관입니다. 이 시대의 공기처럼, 문화처럼 우리의 영혼을 혼탁하게 만들고 복음을 비현실적이고 낡은 이야기로 밀어내고 있습니다. SNS는 죄를 트렌드로 포장하고, 주변 사람들은 죄책감 없는 삶을 당연시합니다. 어쩌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 시대의 엘루마에게 조금씩 눈이 멀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이 시대의 바울이 되어 진리를 선포할 자는 누구냐?” 지금 이 땅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선포되는 담대한 진리입니다. 침묵이 아니라 말씀의 검이고, 전략이 아니라 영적인 권세입니다. 복음은 지식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이 한 문장이 살아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한 사람의 마음을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품고, 한 영혼을 위해 진리로 나아갈 때, 이 시대의 서기오 바울들이 복음을 믿고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어둠 짙은 시대 속에서 진리의 빛을 비추는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방해하는 수많은 어둠의 세력 가운데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담대히 복음을 증거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능력과 진리의 권세를 믿고, 이 시대를 향해 한 치의 두려움 없이 외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삶으로 증거하고, 그 권세로 영혼을 깨우며, 거짓을 꺾고 진리를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오늘도 우뚝 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 - 복음의 물결에 응답하라

사도행전 13장은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한 한 교회를 통해, 어떻게 세계 선교의 문이 열렸는지를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줍니다. 안디옥 교회는 말씀과 기도 위에 세워진 공동체였습니다. 출신과 배경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 되어,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귀 기울였고, 그 음성에 순종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기꺼이 파송했습니다.

그 시작은 참으로 조용했습니다. 함성도 없었고, 스포트라이트도 없었으며, 화려한 무대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겸손한 순종 위에 놀라운 역사를 덧붙이셨습니다. 복음은 구브로 섬을 넘어 로마 총독의 마음에까지 이르렀고, 거짓은 무너졌으며, 진리는 드러났고, 하나님의 권능은 살아 움직였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단지 먼 과거의 기록이 아닙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울려 퍼지고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내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나님은 오늘도 기꺼이 “예!”라고 응답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이 부르심 앞에서 우리는 때로 머뭇거리며 망설이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한 준비를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작지만 진심 어린 한마디를 기다리십니다. “주여,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이 한마디에 하나님은 역사의 물결을 더하시고, 우리의 작은 헌신을 복음의 큰 강물에 실어 놀랍게 사용하십니다.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쓰임받습니다. 어떤 이는 복음의 최전선에서 공격수처럼 달려가고, 어떤 이는 동역자를 파송하는 수비수로 그 자리를 지킵니다. 또 어떤 이는 눈에 띄지 않는 골방에서 마치 골키퍼처럼 묵묵히 무릎 꿇고 중보합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원팀’입니다.

우리 모두가 복음의 물결에 기꺼이 응답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고, 그분의 역사에 쓰임받는 축복의 여정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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