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왕기상하

나아만의 나병을 고친 엘리사

이창무 2015. 4. 30.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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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겨울 열왕기하 공부 제 3 강 


나아만의 나병을 고친 엘리사


말씀/ 열왕기하 5장 

요절/ 열왕기하 5: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오늘 말씀의 주요 등장인물은 제목에 있는 그대로 나아만과 엘리사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님이 이 두 사람을 동시에 언급하신 적이 딱 한 번 있습니다. 누가복음 4장 27절입니다.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저는 이 말씀을 통해 엘리사가 평생 동안 나병을 고쳐 준 사람이 나아만 단 한 사람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그 능력 많은 선지자가 왜 한 사람 밖에 고치지 못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는 엘리사의 사역에는 능력과 필요 이상의 요소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오늘 말씀은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었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엘리사는 사람의 필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능력을 베풀었습니다. 자주 듣지만 늘 다시 새겨야 할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 1 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답,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으로 충만해 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아람은 현재 시리아의 옛 이름입니다. 당시 이스라엘과 아람은 서로 크고 작은 전쟁을 벌이는 원수지간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아람의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참모 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겸직한 정도의 고위직 인물 이었습니다. 또 나아만은 아람 왕이 아끼는 심복이자 실세 중의 실세였습니다. 그는 전에 아람이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풍전등화의 위기 가운데 처했을 때 승리를 이끌어 나라를 구해 낸 적이 있었습니다. 조선에는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아람에는 나아만 장군이 있었습니다. 나아만 자신은 그런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만 성경은 이 일이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나아만에게 한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생겼습니다. 천형 즉 하늘이 내린 형벌이라 불리는 나병에 걸린 것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보았을 것입니다. 권력도 있고 재산도 있는데 안 해 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라 안과 밖의 최고의 의료진으로부터 집중적인 치료를 받았습니다. 침도 맞고 뜸도 뜨고 좋은 약재는 다 구해서 먹었습니다. 그러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지기만 했습니다. 림몬의 신전에 엄청난 금액의 시주를 하고 빌고 또 빌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아만은 절망 중에 탄식하였습니다.' 나병만 아니라면 완벽한 인생인데 왜 하필 나에게 이런 몹쓸 병이 찾아왔는가?' 그런데 이런 그에게 예기치 않은 곳에서 구원의 소식이 임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나아만의 집에는 전에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 땅에서 포로로 끌고 왔던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이 소녀는 나아만의 아내의 하녀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소녀가 여주인에게 고하였습니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소녀는 사마리아에 있는 엘리사라는 선지자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기껏해야 포로로 끌려 온 여종의 말입니다.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무시당하고 묻혀 버릴 가능성이 99%였습니다. 게다가 한 나라의 군대장관으로서 적국에 가서 치료를 받으라니 나아만으로서는 받아들이기에 너무 부담스러운 제안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나아만 장군은 소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워낙 절박하니까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왕에게 나아가 이스라엘로 보내 주시기를 구하였습니다. 아람 왕은 기꺼이 나아만의 이스라엘 행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냥 보내지 않고 직접 친서를 써서 이스라엘 왕에게 보냈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소녀는 분명히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에게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람왕은 왜 나아만을 이스라엘 왕에게 보냈을까요? 이는 아람 왕의 생각에 선지자를 움직이려면 이스라엘왕의 권력을 등에 업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아만은 은 십 달란트(350Kg)와 금 육천 개(68.4Kg)와 의복 열 벌이라는 엄청난 큰 예물을 준비하였습니다. 이는 나아만은 나아만대로 선지자를 움직이려면 큰 물질이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 권력과 물질이 나아만이 엘리사로부터 고침을 받는데 효과가 있었을까요? 


7절을 보십시오. 아람 왕의 편지를 받은 이스라엘 왕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이스라엘 왕은 자기 옷을 찢으면서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소리쳤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왜 이렇게 오버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아람 왕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왕의 머릿속에서는 순식간에 이런 시나리오가 그려졌습니다. '일 단계, 아람 왕이 나아만을 치유해 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한다. 이 단계, 이스라엘은 나아만은 치료에 실패한다. 삼 단계, 아람왕은 이를 빌미로 삼아 이스라엘을 침공한다.‘ 이스라엘왕은 위기의식에 사로 잡혀 불안감과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반면 엘리사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엘리사는 당당하게 나아만 그 사람을 내게로 오라고 말합니다. 같은 일에 대해서 엘리사와 이스라엘 왕은 반응이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저는 여기서 이스라엘 왕의 말에서 이상한 점 한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자신이 나아만을 고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하나님만이 나아만을 고치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께 나아가서 나아만을 고쳐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갑자기 안 하던 기도를 하기 어려우면 적어도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보는 시늉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왕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엘리사를 찾지도 않습니다. 대신 아무 죄도 없는 옷만 북북 찢었습니다. 반면 아람 땅에 끌려갔던 어린 소녀는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가 나병을 고칠 수 있다는 단순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한 마디 복음을 전함으로 어두운 나아만의 인생에 한줄기 희망의 빛을 던져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타이틀도 있고 알기도 잘 알지만 믿음이 없었습니다. 신하들에게 너희는 깊이 생각하라고 깊은 생각을 요구하지만 믿음 없이 생각만 깊이 하면 뭐합니까? 깊이 생각해 본 결과가 고작 옷을 찢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다는 말은 바로 이렇게 이스라엘에 도움을 받고자 온 나아만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는 나라가 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목자로 삼으셨다는 말은 양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그런 목자가 되기 위해서 대단한 그 무엇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돈이 없고 권력이 없어도 문제없습니다. 생각이 깊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하는 어린 소녀의 믿음이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는 열정이 있으면 충분합니다. 이런 믿음과 열정이 없으면 목자가 오히려 양들이 부담스러워하게 됩니다. 전도의 기회가 있어도 침묵합니다. '왜 이렇게 다들 문제가 많고 사는 게 힘드냐? 나도 힘들지만 너도 참 힘들구나'하며 탄식만 하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좋은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나아만이 나병이 아니었으면 이스라엘 땅에 올 일이 있었겠습니까? 엘리사에게 나병에 걸려 이스라엘을 찾아온 나아만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기막힌 찬스를 만난 셈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나사로가 중한 병에 걸렸을 때 제자들에게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양들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안암골에 목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우리가 양들을 향한 단순한 믿음과 열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목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나아만은 그제야 번지수를 잘못 찾아왔음을 깨닫고 엘리사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가지 않고 수많은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갔습니다. 자기 몸만 보여주면 되는데 왜 이렇게 했을까요? 이는 나아만이 엘리사를 쫄게 만들어서 자기 말을 잘 듣도록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기가 죽어 나아만 앞에 나와 넙죽 엎드렸습니까? 10절 말씀을 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엘리사는 현관 문 밖으로 얼굴을 비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사자를 내보냈습니다. 게다가 요단 강물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는 듣도 보도 못한 요상한 처방전만 달랑 하나 알려 주었을 뿐입니다. 사실 이 처방전은 레위기 14장에 나오는 나병환자에 대한 정결 규례와 비슷합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나아만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11절과 12절을 보십시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나아만은 화를 내면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엘리사가 국빈인 나에게 이런 대접을 할 수 있는가 자존심이 몹시 상했습니다. 근래 받아 본 적이 없는 이런 대우에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나아만의 생각으로는 엘리사가 당연이 밖으로 나올 줄로 알았습니다. 나아만의 생각으로는 엘리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손을 병든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 줄로 알았습니다. 아마도 이런 방식이 아람에서 병자를 고치는 방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내 생각에는' 나아만에게는 자기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아람에서는 자기 생각대로 사람들이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가 자기 생각대로 반응하지 않으니 당황스러웠습니다.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으라니 더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강물로 치자면 자기 고향에 있는 아바나 강과 바르발 강이 훨씬 더 수량도 풍부하고 수질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기껏 센터 앞 정릉천만한 요단강에서 몸을 씻으라니 전혀 나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나아만의 목적과 엘리사의 목적이 서로 달랐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아만의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나아만은 그저 나병에서 낫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나병이 나은 다음에는 그 전처럼 똑같이 림몬신을 섬기며 똑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똑같은 삶을 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의 목적은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엘리사는 기꺼이 나아만의 나병을 치유해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병의 치유는 더 큰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징검다리였을 뿐입니다. 엘리사의 목적은 나아만을 예배자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분만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사가 영접하러 나오지 않은 것은 나아만이 하나님이 아니라 엘리사 자신이 능력 베푸는 줄로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특별한 치유 의식을 하지 않은 것은 어떤 의식이나 주술이 낫게 한 줄로 착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만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만을 요구했습니다. 아람에 있는 선지자들은 일종의 종교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것으로 밥벌이를 하는 전문 직업인들이었습니다. 여기에 익숙해 있던 나아만은 엘리사의 숨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화를 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엘리사도 자칫하면 이 일이 외교 분쟁으로까지 번질 가능성까지 있다는 점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과감하게 나아만에게 도전했습니다. 우리도 다 처음에는 나아만처럼 자기의 현실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예배자가 되기 위해 교회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입니다. 저도 처음엔 외로운 한 마리 하이에나처럼 캠퍼스를 방황하다가 목자님들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위로를 받으려고 어떤 사람은 병 때문에 어떤 사람은 친한 사람 때문에 등등 다양한 이유로 옵니다. 다 좋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우리의 목적이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복 받고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기 위해 나아와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진통이 따릅니다. 오해를 하고 목자를 원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위대한 전환이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리 신앙년수가 오래 되어도 영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은 유치한 상태에 머무를 수 밖에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단순하게 순종하는 예배자가 되면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다만 은혜로 문제들을 친히 해결해 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할 때 더불어 능력도 주어집니다. 이 순서가 반대로 뒤집혀서는 안 됩니다. 이 순서가 뒤집히면 기독교는 바로 바알이나 림몬 숭배나 다를 바 없는 우상숭배로 전락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추를 누르는 대로 척척 토해내는 자동판매기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엎드려 경배해야 할 높고 영화로우신 만유의 주이십니다. 그분의 말씀 앞에 내 생각을 내려 놓고 절대 순종해야 할 만왕의 왕이십니다. 내가 먼저 내 생각과 다른 말씀이라도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자로 살아야 합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순종하는 사람을 낳습니다. 예배자만이 예배자를 낳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순종의 제사를 드리는 참된 예배자가 되고 또 그런 사람들을 낳고 키우는 엘리사와 같은 목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나아만이 만약 여기서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계속해서 나병으로 고통 받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우상숭배자로 살다 심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나아만의 종들이 나타나 선지자가 당신에게 어려운 일을 하라면 했을 텐데 쉬운 일인데 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나며 설득했습니다. 나아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나아만은 비록 종들의 말이었지만 귀를 기울이고 옳은 말에 수긍을 하고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 그대로 요단 강에 몸을 담갔습니다. 여섯 번만 담그지 않고 엘리사의 말대로 끝까지 일곱 번을 담갔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헐어서 진물이 내리던 나아만의 살이 맑고 투명한 어린아이의 피부처럼 뽀송뽀송해 졌습니다. 괴물 같던 모습이 조지 클루니를 닮은 꽃 중년의 미남자으로 변모했습니다.


이에 나아만은 엘리사에게로 도로 와서 감격적인 간증을 하였습니다.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나아만은 이제 더 이상 살아계신 유일한 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외에 다른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다만 림몬의 신당에서 왕의 제사를 도울 수 밖에 없음을 용서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에게 감사의 표시로 예물을 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이 예물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나아만이 한번 더 받으라고 강권했지만 엘리사는 끝까지 거절하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불만을 크게 품은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였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거리가 없어 들에서 가져 온 이상한 식물로 국을 끊여 먹다가 집단 식중독에 걸릴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예물을 한 푼도 받지 않고 그냥 보내라 하니 게하시는 너무 아쉬었습니다. 이방인인데가 부자인 사람에게 조금 받았다 한들 무슨 문제인가 싶었습니다. 게하시는 나아만을 쫓아가 엘리사의 이름을 팔아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챙겼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이 모든 일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게하시가 아무데도 간 적이 없었다고 발뺌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탐욕과 거짓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한 게하시는 저주를 받아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나아만과 게하시 두 사람의 운명이 엇갈리는 모습을 봅니다. 나아만은 이방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나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반면 멀쩡한 이스라엘 사람이었던 게하시는 저주 받은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나아만의 변화는 단순히 나병이 치유되고 피부가 바뀐 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나아만은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로 알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나아만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변화되었습니다. 나아만은 이제 더 이상 우상 숭배를 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께만 예배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합니다. 나아만의 삶과 헌신의 대상이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놀라운 변화는 나병이 치유되는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게하시는 받지 말아야 할 것을 받았다가 인생이 망해 버렸습니다. 4장에 보면 엘리사는 수넴 여인이 주는 식사 대접과 작은 방은 감사하게 받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가져온 보리떡 20개와 채소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왜 끝까지 나아만이 주는 예물은 거절했을까요? 4장에서 받은 것은 순수한 호의에서 나온 것이라면 나아만에게서 받으면 병 고침을 주고 그 사례를 받는 거래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사가 자기 자신은 감추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나길 바랐을 뿐입니다. 그러나 게하시가 저지른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역사가 사람이 한 역사로 뒤바뀌어 버렸습니다. 게하시의 탐욕스러운 행동은 결코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큰 죄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은혜되게 하지 못하고 은혜를 한낱 거래로 전락시켜 버렸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신앙과 이방 종교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이방 종교는 철두철미하게 신과 인간의 거래입니다. 인간은 신에게 공물을 바칩니다. 그러면 신은 그 인간을 보호해 주고 복을 내립니다. 그러나 여호와 신앙은 철두철미하게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은혜에서 시작해서 은혜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나아만을 큰 공을 세워 아람의 구원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은혜로 이스라엘 소녀의 입을 통해 구원의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은혜로 나아만을 나병에서 고침받아 깨끗케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밭갈던 농부였던 엘리사를 부르셔서 엘리야의 후계자로 삼으셨습니다. 은혜로 엘리사에게 갑절의 영감을 불어 넣어 주셔서 능력의 역사를 펼치도록 하셨습니다. 게하시가 엘리사 곁에서 사환으로 섬길 수 있었던 것도 은혜였습니다. 그 덕분에 나아만이 고침을 받는 역사적인 사건을 직접 목격한 것도 은혜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피로 용서 받고 구원 받은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더러운 죄를 이기고 정결케 될 수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우리가 목자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가 된 것이 은혜입니다. 내가 못했어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현장을 옆에서 구경만 해도 은혜입니다.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격 없는 인생들에게 한량 없는 은혜,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베푸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거래는 양쪽이 영광을 나누어 가집니다. 그러나 은혜는 홀로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는 은혜를 알고 은혜를 고백하고 은혜를 나타냄으로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아는 자, 그는 하나님만을 예배합니다. 은혜를 아는 자, 그는 댓가를 바라지 않는 나눔과 섬김을 실천합니다. 우리 모두가 은혜를 알고 은혜 안에서 하나님을 즐거워 하며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14.1.19., 이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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