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왕기상하

가서 일곱 번 씻으라

이창무 2015. 4. 30.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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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Summer Bible Camp 첫날 저녁 은혜


가서 일곱 번 씻으라

■ 말씀 : 열왕기하 5:1-14

■ 요절 : 열왕기하 5:10

“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 


한 시대를 풍미한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인으로 손꼽히는 분 중에 이어령 교수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제게 각별한 분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분과 본관이 같은 우봉 이씨 종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가 고등학교 때 이분의 책을 읽고 깊은 영향을 받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당시 이어령 교수님은 철저한 무신론자였는데 그분의 글 중에 내가 예수님 당시에 살았으면 그에게 가서 돌을 던졌을 것이라고 하셨던 대목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 분이 2007년에 70살의 나이에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이 되셨습니다. 지금은 여러 권의 신앙 서적도 내셨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사랑하는 딸이 암에 걸리고 실명의 위기를 맞게 되었을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난생 처음 하나님께 기도를 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권세와 명예를 다 가졌지만 나병으로 고통 받다가 하나님께 치유 받은 나아만이 등장합니다. 그가 회복을 체험하게 된 것은 말씀에 순종해서 요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번 수양회를 통해서 말씀 속에 일곱 번 몸을 담그고 변화와 회복을 체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아람은 어떤 나라일까요? 아람은 현재 시리아의 옛 이름입니다. 아람은 본래 힘이 없는 약소 국가였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왕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조공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앗수르 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강대국으로 급성장했습니다. 이후 북이스라엘과 아람은 서로 크고 작은 전쟁을 벌이며 원수 지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나아만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아람의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참모 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겸직한 정도의 고위직 인물 이었습니다. 또 나아만은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였습니다. 그는 왕의 심복이었고 최측근이었으며 실세 중의 실세였습니다. 또한 나아만은 큰 용사로 불렸습니다. 그는 전에 아람이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풍전등화의 위기 가운데 처했을 때 승리를 이끌어 나라를 구해 낸 국가의 영웅이었습니다. 모든 국민들이 그를 존경하고 칭송했습니다. 조선에는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아람에는 나아만 장군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나아만이 현재의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까? 성경은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나아만이 지금 위치에까지 오르게 된 것은 나아만 혼자만의 능력과 지혜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존귀하게 하셨기 때문에 존귀케 된 것입니다. 나아만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아람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에만 한정되어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방 나라도 주관하시는 분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아만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큰 공을 세우게 하시고 현재의 위치에 오르도록 섭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나아만도 인정하고 있었을까요? 아니었을 것입니다. 나아만은 모두가 다 자기의 능력과 지혜로 자기가 피땀 흘려 이룬 업적으로만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아만은 하나님을 모르고 나만 알고, 나 잘난 맛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나만’에서 나를 길게 늘려서 ‘나아만’이라고 부른 것은 아닐까요?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일이 잘 안 풀리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반면에 일이 잘 되면 자기 힘으로 다 된 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성공하고 잘되고 높아졌다고 해서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높이셨기 때문입니다. 내 힘과 지혜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요 착각입니다. 얼마 전 힐링 캠프라는 프로그램에 가수 박진영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박진영은 불과 26살 나이에 20억을 벌었습니다. 미국에 진출해서 빌보드 차트 10위권에 자신의 곡을 3곡이나 올리면서 바라던 명예도 얻었습니다. 그런데 박진영이 말하기를 어느 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자신의 성공은 하늘에 계신 어떤 절대자가 자신을 도와주지 않고서는 결코 이룰 수 없었던 일이라는 것을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날마다 창문을 열고 하늘을 향해 ‘감사해요’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고 은혜 베푸시지 않으셨다면 아무도 이 자리에 올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은혜 베푸시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도 날마다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고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릴 줄 아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나아만이 계속 잘 나아가기만 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한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나병에 걸린 것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나병은 반드시 문둥병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증세가 심각한 피부병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일단 나병에 걸리면 피부에 부스럼이 나고 진물이 흐릅니다. 살이 썩어 들어 가고 몸에서 악취가 납니다. 국가의 영웅이었던 한 백전노장의 얼굴은 나병으로 흉측하게 일그러져 가고 점점 괴물처럼 변해갔습니다. 나아만은 나병 치료를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보았을 것입니다. 권력도 있고 재산도 있는데 안 해 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라 안과 밖의 최고의 의료진으로부터 집중적인 치료를 받았습니다. 침도 맞고 뜸도 뜨고 좋은 약재는 다 구해서 먹었습니다. 그러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해고 치료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람의 최고신인 림몬 신전에 엄청난 금액의 시주를 하고 빌고 또 빌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앗수르의 백만 대군을 물리쳤던 나아만이었지만 나병 앞에서는 더 이상 손쓸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사람, 모든 것을 다 갖춘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도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명적인 약점과 허물을 한 가지씩은 다 갖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데 속으로 썩어 들어가고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빠져 들어 이제는 헤어날 수 없는 중독과 습관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와 아픔들, 열등감과 좌절감을 지속적으로 안겨 주는 약점과 핸디캡 등이 그것들입니다. 다른 것을 다 가져도 그 한 가지 때문에 내 인생은 불행하다고 느껴집니다. 그 일만 생각하면 우울해집니다. 그 한 가지만 없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 같은데 좀처럼 그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한 가지 문제가 우리 인생을 한 없이 불행과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 안에서 어떤 문제도 해결될 수 없는 문제는 없습니다. 그 문제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그 해답을 주십니다. 이번 여름 수양회가 우리가 그 해답을 얻는 수양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나아만의 집에는 전에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 땅에서 포로로 끌고 왔던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이 소녀는 나아만의 아내의 하녀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멀고 먼 타국에 포로로 끌려와 노예 생활을 하느라 이 아이가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참으로 슬프고도 기구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이제 소녀는 이곳 이방 땅 한 가운데서 최고위층 인사에게 복음을 전할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소녀는 여주인에게 고하였습니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소녀는 사마리아에 있는 엘리사라고 이름하는 선지자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소녀에게서 믿음과 심정을 발견합니다. 소녀는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에게 구원의 능력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소녀가 처한 상황을 보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신할 수 있었지만 소녀는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또한 나아만은 민족의 원수이기도 하며 자신을 가족과 생이별하게 만든 개인적인 원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녀는 나아만을 미워하지 않고 나병에 걸린 그의 안타까운 처지를 동정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믿음과 심정이 담긴 말일지라도 포로로 끌려 온 여종의 말인데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무시 당하고 묻혀 버리기가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나아만 장군은 소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워낙 절박하니까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왕에게 나아가 소녀의 말을 보고하고 이스라엘로 보내 주시기를 구하였습니다.

나아만이 구원의 소식이 자기 집에 포로로 끌려 온 하녀에서 나오리라고 기대해 본 적이 있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의 소식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의외의 곳에서 임하기도 합니다. 우리 중에는 예수님을 통해서 인생 문제를 해결 받을 줄 기대했던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까지 안티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일대일 목자님과 말씀 공부를 시작한 이유는 목자님을 설득해 무신론자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나 목자님으로터 구원과 생명의 소식을 듣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목자님이 수수한 옷을 입고 겸손하게 말씀을 하시니까 하찮게 여기고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일대일 성경 공부를 시작한 사람들은 결국 구원과 영생의 축복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5절과 6절을 보십시오. 아람 왕은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만을 보냈습니다. 보내되 그냥 보내지 않고 은 십달란트(350Kg)와 금 육천 개(68.4Kg)와 의복 열 별이라는 큰 선물을 딸려서 보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엄청난 재물이 나아만이 치유되는데 꼭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녀는 분명히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에게 가라고 했는데 나아만은 왜 이스라엘 왕에게로 갔을까요? 이는 아람 왕과 나아만은 선지자라도 왕의 권력 앞에서는 꼼짝 못하고 그의 말을 들을 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를 해결하는 전형적인 세상의 방식입니다. 돈의 힘, 권력의 힘, 돈과 빽만 있으면 뭐든지 다 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센델 교수는 최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란 책을 냈습니다. 센델은 이 책에서 우리 인생에서 반드시 필요한 가치들은 정작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사랑과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구원과 영생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권력의 힘으로 죄를 은폐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죄사함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아람 왕의 편지를 받은 이스라엘 왕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7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왕은 자기 옷을 찢으며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며 소리쳤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왜 이렇게 오버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아람 왕이 나아만을 치유해 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한 뒤에 이를 빌미로 삼아 이스라엘을 침공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왕은 피해 의식에 사로 잡혀 불안감과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반면 엘리사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엘리사는 나아만 그 사람을 내게로 오라고 말합니다. 엘리사는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칩니다. 같은 일에 대해서 엘리사와 이스라엘 왕은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서 발생한 것입니까? 이는 하나님을 의지하느냐 자기를 의지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성령에 사로 잡힌 사람과 사단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과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믿음으로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이렇게 실제 우리 삶의 모습에 얼마나 크고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모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나아만은 그제서야 번지수를 잘못 찾아왔음을 깨닫고 엘리사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가지 않고 수많은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갔습니다. 자기 몸만 보여주면 되는데 왜 이렇게 했을까요? 이는 나아만이 엘리사 앞에서 일종의 무력 시위를 한 것입니다. 엘리사의 기선을 제압하고 그를 쫄게 만들어서 자기 말을 잘 듣도록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기가 죽어 나아만 앞에 나와 넙죽 엎드렸을까요? 10절 말씀을 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엘리사는 현관 문 밖으로 얼굴을 비치지도 않고 대신 사자를 보냈습니다. 게다가 요단 강물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는 듣도 보도 못한 요상한 처방전만 달랑 하나 알려 주었을 뿐입니다. 나아만은 국빈 자격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한 신흥 강대국 아람의 국방 장관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이렇게 푸대접했다가 국가 간 분쟁으로 비화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엘리사는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한 것입니까? 엘리사는 원래부터 건방지고 무례한 사람이었을까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을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만들려고 의도적으로 이렇게 한 것입니다. 엘리사는 개인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리한 선지자로서 나아만 앞에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구원을 바라고 나아오는 사람은 마땅히 겸손과 순종으로 나아와야 했습니다. 여기에는 나아만 아니라 나아만 할아버지라도 예외가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지체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저 죄인이고 종일 뿐입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목사님이 인도하는 국가 조찬 기도회에서 기도할 때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목자님들이나 수양회 강사들은 사실 외적으로 크게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분들이 성경에 기초해서 복음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할 때 그리고 성경적 가치관에 기초해서 조언을 해 주실 때, 그 때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우리들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밥 사줄 때는 유빈 누나, 에스더 언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줄 때는 대통령보다 유엔사무총장보다 더 권위가 있는 목자님입니다. 목자는 설령 자기는 그렇게 못 살아도 항상 바른 말씀만을 전해 주고자 애를 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말을 마음으로 새겨 듣고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목자님이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순종해 들었더니 쫄딱 망했다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저는 아직까지 아무도 못 봤습니다. 대신 죄로 인해 망가졌던 한 사람의 인격과 마음이 회복되고 삶이 새롭게 되는 일들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전에 먼저 우리가 가진 겸손의 무게를 달아 보십니다.

엘리사의 방향에 대한 나아만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11절과 12절을 보십시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나아만은 화를 내면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엘리사가 국빈인 나에게 이런 대접을 할 수 있는가 자존심이 몹시 상했습니다. 근래 받아 본 적이 없는 이런 대우에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나아만의 생각으로는 엘리사가 당연이 밖으로 나올 줄로 알았습니다. 나아만의 생각으로는 엘리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손을 병든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 줄로 알았습니다. 아마도 이런 방식이 아람에서 병자를 고치는 방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내 생각에는’ 나아만에게는 분명한 자기 생각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아람에서는 자기 생각대로 사람들이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가 자기 생각대로 반응하지 않자 나아만은 그 상황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으라니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강물로 치자면 자기 고향에 있는 아바나 강과 바르발 강이 훨씬 더 수량도 풍부하고 수질도 좋은데 기껏 센터 앞 정릉천만한 요단강에서 몸을 씻는다고 전혀 나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사실 요단 강물 자체에 무슨 효험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엘리사가 나아만에게 요구했던 것은 다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이었습니다.

복음은 나아만처럼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거치는 돌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은 유대인에게는 거치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인간의 경험과 추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제자들조차도 이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버려두고 뿔뿔이 다 흩어졌었습니다. 돈의 힘, 권력의 힘, 명예와 자존심을 생명처럼 여기는 이 시대 사람들도 여전히 십자가가 자신에게 생명과 구원을 길이라는 진리를 받아들이기 힘들어 합니다. 또한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의 복음도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자기의 행위로 자기의 공로로 구원을 얻는 종교입니다. 꼭 종교가 아니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가치관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너는 착하게 살아라. 그러면 네가 보상을 받을 것이다.’ 이 말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착하게 살아도 선행을 쌓아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지는 것이며 우리는 그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할 따름입니다. 이 또한 사람의 생각으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길입니다. 이렇게 분명 복음 진리에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요소가 있습니다. 복음은 내 생각을 버리라고 요구합니다. 자기 정당화와 자아 숭배를 다 내려 놓으라고 요구합니다. 오직 복음 외에는 다른 어디에도 구원이 없다는 것을 알고 복음을 붙들고 거기에 매달리기를 요구합니다. 혹시 이런 요구가 기분 나쁘고 불쾌하게 들립니까? 화가 납니까? 나아만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마터면 구원을 코 앞에 두고서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돌아갈 뻔 했습니다. 그깟 자존심 한 번 세우려다가 남은 일생을 나병 환자로 저주 받은 인생을 살 뻔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자기 욕망과 자존심을 뛰어 넘어 진리를 진리로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한 줌 밖에 안 되는 내 생각을 고집하기 보다는 온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생각에 자신을 굴복시키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자유를 얻게 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13절을 보십시오. 나아만이 만약 여기서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면 그는 계속해서 나병으로 고통 받으며 마지막 희망의 끈마저 놓쳐 버리고 절망 속에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나아만의 종들이 나타나 말하였습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오늘 말씀에는 종들이 참 훌륭합니다. 나아만은 이스라엘에서 잡혀 온 여종과 이 종들이 없었다면 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군대 장관이었던 나아만과는 달리 종들은 겸손과 순종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아만은 이런 종들이 곁에 있었다는 점에서 복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곁에 이런 종들과 같은 목자님들이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얼마나 또 복 받은 사람들입니까?

종들은 엘리사가 어려운 일을 행하라고 나아만에게 요구했다면 행하지 않았겠느냐며 나아만을 설득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나아만이 반발한 이유 중에는 엘리사의 요구가 너무 쉬웠다는 점도 있습니다. 나아만은 이제까지 자기 의지와 성실로 이 자리까지 올라 온 사람이었습니다. 차라리 엘리사가 나아만에게 도를 닦거나 수련을 하라고 했다면 받아들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단지 일곱 번 요단강물에 몸을 씻으라니 나를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리냐 나아만은 이렇게 반발했던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나아만의 위대한 점은 자기 생각이 있었지만 이를 끝까지 막무가내로 고집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군인이었지만 딱딱하지 않고 유연했습니다. 비록 종들의 말이었지만 귀를 기울이고 옳은 말에 수긍을 하고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 그대로 요단 강에 몸을 담갔습니다. 여섯 번만 담그지 않고 엘리사의 말대로 끝까지 일곱 번을 담갔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나아만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헐어서 진물이 내리던 살이 희고 투명한 어린아이의 피부처럼 뽀송뽀송해 졌습니다. 괴물 같던 얼굴이 꽃 중년의 미남자으로 변했습니다. 더러운 몸으로 왔지만 깨끗해져 돌아갔습니다. 이제까지 나아만은 아람의 신인 림몬 신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나아만이 강물에 몸을 씻은 것은 신약 시대의 세례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요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는 죄를 씻는 것을 말합니다. 일곱 번 몸을 잠기게 하라는 것은 온전히 남김 없이 죄를 씻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죄를 씻어야 합니다. 찬송가 259장은 묻습니다.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더러운 죄 희게 하는 능력을 그대는 참 의지 하는가?”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보배로운 피로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온전하게 되는 회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수양회의 남은 말씀 강의의 수를 세어 보니 일곱 번이 있습니다. 이는 일곱 번 몸을 담그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가 수양회 일곱 번의 말씀에 온 몸을 푹 담글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로 죄 씻음을 받고 변화되는 새 역사를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과거 저도 나아만 장군처럼 나만 아는 독불장군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교만했느냐 하면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지만 나는 그 무를 창조했기 때문에 내 이름이 창무다’ 이런 참람한 말까지 서슴지 않고 하던 자였습니다. 저는 처음에 목자님을 무신론자로 만들기 위해 그 다음에는 성경에 나오는 각종 죄인들의 다양한 삶을 발견하는 재미로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대학 2학년 때 요한복음 말씀을 공부하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죄인들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저의 이야기로 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제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비참한 죄인이고 병든 자인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여태껏 자기 잘난 맛에 살아 왔는데 아주 죽을 맛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자님께 따졌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면 기쁨과 행복을 맛보게 된다고 하셨는데 저는 더 불행해졌다고요!” 그러자 목자님은 ‘올 것이 왔군요’하시면서 빙긋이 웃기만 하셨습니다. 저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음으로 영접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과거로 돌아갈 것인가 기로에 서서 고뇌하였습니다. 그 때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말씀을 기초로 소감을 깊이 쓰던 중에 나 같은 비참한 죄인을 위해 외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의 강물에 풍덩 뛰어들어 은혜를 만끽하였습니다. 저는 죄 씻음을 받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후로 하나님은 나병처럼 온 몸에 번져 있던 죄의 종기들을 뽑아내셔서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저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종으로, 엘리사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메신저로 쓰시고 계십니다. 2학년 여름 그 운명의 순간에 제가 말씀을 거부하고 떠나 버렸다면 지금 내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제가 여전히 붙들고 있는 자기 생각들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려 놓고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수양회에 오기 전의 상태나 돌아갈 때 상태나 다를 바가 없다면 얼마나 허탈하겠습니까? 기왕 수양회에 왔는데 우리가 그냥 갈 수 없습니다. 말씀에 나를 잠기게 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으면 깨끗하게 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회복과 변화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 수양회에 올 때와 갈 때가 딴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먼저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자존심과 교만과 자기 생각을 다 내려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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