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역대기상하

백성의 죄 문제를 위해 기도하는 솔로몬

이창무 2015. 4. 30.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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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역대하 3강


진정한 왕도(3) : 백성의 죄 문제를 위해 기도하는 솔로몬


말씀/역대하 6:1-7:22

요절/역대하 6:21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얼마 전에 한 목자님께서 이런 질문을 던지신 적이 있습니다. "제자 수양회와 역대하 말씀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사실 이제까지 제자수양회 주제 강의로 역대하 말씀을 들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것 같습니다. 수양회와 관계없이 그냥 계속 진도를 나가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이 말씀은 제자도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기도문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제자들의 기도입니다. 제자도의 핵심 요소 중 하나가 바로 기도임을 말해 줍니다. 주기도문은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작해서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제가 생각하기에 '오늘 본문은 주기도문의 역대기 버전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어떠한 내용의 기도를, 어떠한 자세로 드려야 할 지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임이 서로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기도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솔로몬이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캄캄한 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 내가 주를 위하여 거하실 성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로소이다" 언제 하나님께서 캄캄한 데 계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딱 부러지게 똑같은 말씀을 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구약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독특한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시내 산에서부터 나타났던 빽빽한 구름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빽빽한 구름 속 캄캄한 데 계신 것 같았습니다. 또 잠깐 동안 임재하신 후에 곧 사라지셨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 신비하고 두려운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인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이제 신비롭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더 가까이 그리고 항상 뵈올 수 있는 성전이 곁에 있습니다. 백성들에게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같은 성전을 자기 손으로 지었으니 솔로몬에게 이보다 더 큰 영예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3절부터 11절을 보시면 솔로몬은 성전 건축이 자기 손으로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으로 이루신 일이라고 증언합니다. 성전 건축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선택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다윗과 솔로몬을 성전 건축자로 선택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성전 건축 역사에 있어 다윗과 솔로몬의 헌신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의지와 열심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역사의 기초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언약에 신실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원동력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솔로몬 성전이 언약의 완전한 성취라고 볼 수 있을까요? 이 성전이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가 맞습니까? 답은 '그렇지 않다'입니다. 왜냐하면 솔로몬 성전은 B.C. 586년에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완전히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그럼 솔로몬 성전은 무엇입니까? 솔로몬 성전은 장차 이루어질 완전한 성전의 모형이고 그림자였을 뿐입니다. 그림자가 있다면 실체가 있고 모형이 있다면 원형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전의 실체와 원형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도다!'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며 바로 이곳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 언약의 완전한 성취입니다. 또 다시 무너지는 일이 결코 없을 영원한 성전이 되십니다.


 

12절과 13절을 보십시오. 솔로몬은 이제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폈습니다. 하늘을 향해 손을 편 모습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형적인 기도 자세입니다. 무릎 꿇음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간절한 마음으로 나아갔음을 나타냅니다. 솔로몬이 백성들 앞에서는 왕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저 종이었기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또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 앞에서 기도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솔로몬의 기도가 개인적인 기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나라를 어깨에 짊어지고 온 백성을 등에 업은 기도를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백성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오늘 말씀은 진정한 왕도 시리즈의 세 번째 말씀이자 마지막 말씀입니다. 우리가 왕은 아닙니다. 그러나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은 왕도를 익히고 실천해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참된 왕은 어떤 왕이냐? 오늘 말씀을 보면 ‘기도하는 왕’입니다. 기도하되 자기 문제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를 짊어지고 기도하는 왕, 중보기도 하는 왕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 직분을 받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양을 섬기는 목자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목자는 일단 양들을 위해 말씀으로 양육을 잘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 양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입니다. 목자의 기도 없이 양은 변하지 않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는 어떻습니까? 자녀를 진정으로 위하는 아버지는 기도하는 아버지입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는 어머니가 하나님의 사람을 낳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놀라운 비밀 중의 하나는 성도들이 장차 주와 함께 이 땅을 다스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C.S.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에서 네 명의 주인공 아이들이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아슬란'의 승리 이후 왕으로 즉위하는 모습으로 이 진리를 기막히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장차 이 땅에서 왕 노릇할 우리가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이 땅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의 일들, 더 나아가서 전 세계를 마음에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 받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사무엘상 12장에 보면 사무엘이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리라" 그런데 이 말을 하는 시점이 언제냐 하면 사사 직에서 은퇴를 하는 고별 설교에서 한 말입니다. 은퇴를 한 이후에도 백성들을 위해 계속 기도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현역으로 있을 때는 기도를 얼마나 더 열심히 했겠습니까? 심지어 기도를 쉬면 내가 여호와 앞에 범죄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고서 큰 찔림을 받았습니다.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쉬지 않고 범해 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가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분들이 저를 위해 기도하셨을까요? 우선 제 목자님께서 많은 기도를 하셨을 것이고, 한 번도 내색은 안 하셨지만 분명 눈물로 기도하신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명절에 친할머니 집에 가서 처음으로 가족 예배를 인도했을 때 국수교회 권사이셨던 할머니가 제 손을 붙잡고 이런 말씀을 하셨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20년 동안 새벽 기도 때마다 기도해 왔는데 이제야 응답을 받았구나." 할머니 집에서 할머니가 다니시던 교회까지 가려면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합니다. 할머니는 20년 동안을 쉬지 않고 날마다 새벽에 40분을 걸어서 고개를 넘어 가 저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많은 분들의 중보기도에 힘입어 현재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기도를 쉬게 되면 소위 '먹튀', 먹고 튀는 몹쓸 인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양들과 자녀들과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는 종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가 자기 뿐 아니라 공동체를 함께 짊어지고 기도하는 성숙한 주님의 제자로 자라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4절부터 42절까지는 솔로몬의 기도문입니다. 이를 가리켜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라고도 부릅니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째, 다윗 왕조를 위한 기도입니다. 14절부터 17절까지입니다. 지금까지 솔로몬이 체험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4절에서 고백한 대로 언약을 지키셨고 은혜를 베푸셨던 하나님이십니다. 문제는 앞으로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미래에도 계속해서 다윗 왕조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겠다는 언약을 지켜달라고 간구합니다. 솔로몬이 기도한 대로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지키시리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관건은 언약의 한쪽 당사자인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이 언약은 왕도 신실하게 율법을 준행해야 한다는 단서 조항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왕들은 이 점에서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따랐습니다. 그 결과 시드기야 왕을 마지막으로 다윗 왕조는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실패하지 않을 왕, 율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지킬 유일한 한 왕을 세우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아들을 보내어 다윗 왕조의 실패를 만회시키시고 다윗과 맺은 언약을 성취하셨습니다.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언약을 성취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둘째, 백성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18절부터 39절까지입니다. 먼저 21절까지를 보면 솔로몬은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기에 앞서 성전이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는 장소가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죄가 용서 받고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성전의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이 바로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장소라는 점입니다. 어떤 신학자가 말하길 성전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꽂아놓은 마이크라고 했습니다. 이 마이크에 대고 기도를 하면 그 소리가 증폭되어 하늘에까지 닿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돌려 성전을 주목하여 보십니다. 귀를 성전에 기울이십니다. 혹시 '내가 드리는 기도가 허공에 뿌려진 메아리로 흩어져 버리지는 않을까?'라고 생각해 본 적 없으십니까? 우리의 기도가 하늘에까지 닿는다는 사실을 보증할 수 있습니까? 네, 보증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하고 영원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리는 모든 기도를 하나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다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다음으로 솔로몬은 백성들을 위한 일곱 가지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첫 번째 기도제목은 백성 중에 범죄가 발생했을 때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공의를 세워달라는 기도입니다. 두 번째 기도제목은 이스라엘의 범죄 때문에 전쟁에서 패하였을 경우 회복시켜 달라는 기도입니다. 세 번째 기도제목은 이스라엘의 범죄 때문에 기근이 발생했을 경우 다시 비를 내려달라는 기도입니다. 네 번째 기도제목은 땅에 재앙이나 질병이 발생했을 때 복구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다섯 번째 기도제목은 좀 의외입니다.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성전을 향해 기도하면 그 부르짖음을 들어달라는 기도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한 대로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여섯 번째 기도제목은 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기도제목은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이방에 포로로 끌려갔을 경우 성전을 향해 드리는 기도를 들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포로기 선지자 다니엘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꼭 하루 세 번씩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을 향해 열린 창 앞에서 기도했습니다. 40절부터 42절은 마무리 기도로서 제사장과 모든 성도들과 왕에게 구원과 은혜와 은총을 입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상에서 솔로몬의 기도를 들으면서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솔로몬이 너무 비관적이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들지 않으십니까? 솔로몬은 백성들이 범죄하게 될 것을 아예 기정사실로 전제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범죄 때문에 패전, 기근, 재앙, 질병 등의 징벌이 임할 것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수백 년 후에 실제로 일어나게 될 바벨론 포로 생활까지 미리 내다보고 있습니다. 성전이 봉헌되는 이 좋은 날 너무 우울하고 어두운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현실입니다. 36절이 말하듯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범하게 되어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 사실을 가리켜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이라고 불렀습니다. 경사진 언덕 위에 공을 올려놓으면 저절로 아래로 굴러 내려가듯이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이 개입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죄를 향해 굴러 떨어집니다. 제가 성경을 잘 모를 때는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늘 사람에 대해서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을까요?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기대를 둔 만큼 상처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사람에게 요구하고 윽박지르고, 좌절하면 분노와 정죄로 갚아 주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실망을 주었던 사람이 누구일까요? 바로 제 자신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무엇을 상상하든 늘 상상했던 것 이하의 제 자신을 만났습니다. 여기가 내 바닥인가 싶으면 꼭 다음에 더 깊은 바닥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적 타락 교리를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말하지만, 저는 제 자신을 보면 전적 타락 교리를 도저히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모든 기대를 다 접고 포기해야 하겠습니까? 한 때 그럴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포기는 결코 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갈보리 산 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뚝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기대하지 말고 기도하자.” 사람에게 기대하지 마세요. 사람에게 기대해 봐야 나올 것은 죄 밖에 없습니다. 실망하고 상처 받고 분노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대신 하나님께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세요. 하나님께 기도할 때 희망과 용서와 회복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희망을 두는 인본주의자는 헛된 꿈을 꾸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철저한 현실주의자입니다. 현실을 직시한다면 기도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습니다. 기도만이 우리의 살 길입니다. 기도 외에 답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 다 함께 이렇게 외쳐 보면 어떨까요? "기대하지 말고 기도합시다."



그러면 솔로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어떠합니까? 7장 1절부터 3절을 보십시오.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자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했습니다. 불을 내리신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를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이제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인증을 받았습니다. 가축에게 주인이 불로 낙인을 찍듯이 하나님께서 성전에 불로써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으셨습니다.



4절부터 10절은 성전 낙성식에 관한 말씀입니다. 낙성식은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수만 마리의 제물이 드려졌습니다. 또 레위 사람들로 구성된 찬양대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낙성식에 이어서 초막절 절기를 지냈다는 점입니다. 솔로몬이 의도적으로 낙성식 날짜를 이 기간에 맞추어 무려 보름간 이어지는 성대한 축제를 연 것입니다. 온 백성들이 다 함께 먹고 마시며 찬송하는 가운데 성전 봉헌을 축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솔로몬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은혜로 말미암아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했습니다.



11절부터 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성전 건축을 모두 마친 솔로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번에도 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성전에서 올리는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겠다고 분명하게 약속해주셨습니다. 하늘에서 들으시고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땅을 고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찾을 때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성전에서 회개하고 겸손히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지 항상 주목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기도를 듣기 위해 그리고 응답해 주시기 위해 귀를 기울이시겠다고 다짐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거룩하게 하신 성전은 얼마나 소중하고 특별한 곳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이 주는 자부심은 아주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건물로서 성전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17절부터 2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땅에서 뿌리째 뽑혀나가고 성전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십니다. 언제 그렇습니까?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고 경배할 때 그렇게 됩니다. 성전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말씀과 예배를 상실한 성전은 그저 빈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도 무시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우상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성전이 있으니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망하지는 않을 거야!'라고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망했습니다. 이방인들의 조롱 거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포로 생활에서 돌아 온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됩니다. 건물로서의 성전의 재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말씀과 참된 예배로 돌아오는 일이었습니다. 곧 회개입니다.



앞에서 기도만이 살 길이고 해답이라고 하였습니다. 단, 그 기도는 회개를 동반한 기도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기도하되 그에 앞서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회개 없이 그저 징계를 면하게 해달라는 기도, 삶의 변화 없이 그저 문제 해결에 급급한 기도는 하나님께 응답을 기대하기에 전혀 합당치 못한 기도입니다. 진정으로 기도 응답을 바란다면 이제까지 걸어왔던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합니다. 말씀에 불순종했던 삶,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면서도 동시에 물질이나 세상 쾌락을 추구해 왔던 삶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교제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를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기도의 목표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선물 보따리가 아닙니다. 어떨 때 보면 우리 모습이 꼭 퇴근하신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는 맛난 것을 움켜쥐고 자기 방으로 쑥 들어가 버리는 자녀들 같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때 아버지가 얼마나 허탈하고 섭섭한 지…… 경험해 보신 분들은 잘 아십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자녀가 감사를 표현하고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함께 즐거워하고 아버지께 사랑 고백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 떼를 써서 무언가 바라는 것을 얻어내려 함이 아니라 좋으신 하나님, 인애와 긍휼이 풍성하신 아버지의 얼굴을 뵈옵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 이보다 더 큰 기도의 응답은 없습니다. 죄로 멀어졌던 당신의 자녀가 다시 돌아와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얼굴을 보이는 것, 이보다 더 큰 하나님의 기쁨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솔로몬이 백성들의 죄 문제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께 응답을 얻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솔로몬이 말년에 어떻게 망가지는지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솔로몬이 한 것은 무엇이든 평가절하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에게도 우리가 꼭 배워야 할 훌륭한 점들이 있습니다. 특히 백성들을 향한 목자의 심정으로 중보기도한 점을 잘 배워야겠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에 있어서도 솔로몬보다 더 큰 이셨습니다. 때로는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 때로는 새벽 미명에 일어나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의 많은 부분을 제자들과 양들을 위한 중보기도에 할애하셨을 것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7장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양들을 위해 드리셨던 아주 긴 중보기도가 나옵니다. 이를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체포되시기 직전에 드린 기도입니다. 자신의 죽음이 코 앞에 있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예수님은 자신보다도 양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하물며 평상시에는 양들을 위한 중보기도에 얼마나 힘을 쏟으셨겠습니까? 히브리서 7장 25절에 따르면 이 예수님께서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자기 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당연히 예수님의 기도 생활도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야고보 선생님이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자인 우리가 땅에서 기도하면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이 땅을 고쳐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기도하신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연약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님처럼 우리도 수많은 유혹 가운데 죄에 빠져 넘어지기를 잘 하는 연약한 양들과 자녀들과 교회와 나라를 위해 탄식 가운데 중보기도 하는 이 시대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14.11.02, 이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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