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역대기상하

요아스가 타락한 이유

이창무 2015. 4. 30.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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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스가 타락한 이유


역대하 24:2.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 17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 18.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그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오늘 말씀에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요아스 왕이고 다른 한 사람은 요아스 왕의 고모부인 제사장 여호야다입니다. 요아스 왕은 유다 왕 아하시야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때 요아스의 아버지 아하시야는 북이스라엘에 갔다가 예후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아하시야를 대신하여 요아스의 할머니인 아달랴가 정권을 잡았습니다. 아달랴는 악명 높은 아합 왕과 이세벨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습니다. 비록 여자였지만 권력욕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달랴는 혹시라도 자기 권력에 위협이 될까하여 손자들을 모조리 다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요아스는 태어나자 마자 부모를 잃고 할머니 손에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고모부인 제사장 여호야다가 요아스를 남몰래 빼돌렸습니다. 위험천만하게도 성전 안에 있는 비밀의 방에 요아스를 두고 칠년 동안 키웠습니다. 마침내 요아스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정도 나이가 되자 아달랴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만약 실패할 경우 잔혹한 아달랴에게 고문을 당하가 참혹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런데 반란은 성공을 거두었고 요아스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비록 왕위는 다윗 왕가에 속한 요아스에게 있었지만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실질적인 권한은 여호야다가 쥐고 있었을 것입니다. 요아스에게 여호야다는 어떤 사람이었겠습니까? 단순히 고모부는 아니었습니다. 요아스에게 여호야다는 일단 죽음에서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친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요아스에게 여호야다는 사실 상 아버지였습니다. 요아스에게 왕도를 가르쳐 준 스승이었습니다. 이런 요아스가 감히 여호야다의 말을 어길 수 있었겠습니까? 좋든 싫든 요아스는 여호야다의 말을 따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 여호야다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야다의 지도 아래 유다 백성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2절에서 말하는 바대로 여호야다가 살아 있는 날 동안에 요아스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야다도 세월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어느새 머리가 희어져 백발이 되고 기력이 쇠하여 가다가 마침에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17절에 보면 여호아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요아스 왕을 찾아왔습니다. 방백들이 무슨 말을 했을까요? 18절에 보면 방백들이 요아스에게 우상 숭배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음이 분명합니다. 만약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 있었다면 이때 어떻게 했겠습니까? 요아스는 당연히 여호야다의 자문을 구하고 아마도 유다 방백들에게 곤장을 쳐서 돌려 보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야다가 없는 요아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요아스가 방백들의 말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아스 역시 마음 속에 이미 방백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를 하고 싶은 욕망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야다가 죽자 마자 하나님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호야가 살아 생전에도 요아스에게는 하나님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히 생명의 은인이자 아버지 같은 여호야다에게 반항할 수 없었을 뿐이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요아스의 마음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요아스가 떠나고 싶었던 대상은 하나님보다는 먼저 여호야다였을지도 모릅니다. 요아스도 성인이 되면서 자아가 형성되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제사장 여호야다가 짜 놓은 틀이 너무 견고해서 여기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어 답답하게 느꼈을지 모릅니다. 내 스스로 선택한 적도 없는데 결국 여호야다가 시키는 대로 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분노와 슬픔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내가 힘이 생기면 이 틀을 부수고 여호야다의 그림자로서 인생이 아니라 요아스의 자신의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여호야다에 대한 반항심이 들자 여호야다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한 반항심도 함께 자라났습니다. 여호야다는 조카를 사랑해서 온 힘을 다해 바른 길을 가도록 돕는다고 도왔건만 막상 조카인 요아스 왕은 이 모든 것이 자기에 대한 간섭이라고 여겼습니다. 생명을 구해 주고 왕으로 세워주신 것에 감사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도 이제 어엿한 왕인데 왜 마음대로 살지 못하고 고모부의 눈치를 봐야 하느냐고 항변하고 싶었습니다. 결국 여호야다가 죽고나자 요아스는 여호야다가 일생 구축해 놓은 것들을 하나 하나 허물어 버림으로 무언의 복수를 하고야 말았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요아스가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잘 섬겼다면 유다 역사에서 히스기야나 요시야 같은 훌륭한 왕으로 기억될 수 있었을텐데 말년에 그때까지 쌓았던 모든 것을 다 망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더 잘 할 수 없었을까요? 혹시 여호야다에게 부족한 점이 있지 않았을까요?"


여호야다는 다 꺼져가던 다윗의 등불을 되살린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자기 뿐 아니라 온 가족의 목숨 걸고 한 일이었습니다. 여호야다가 나서지 않았다면 다윗의 씨가 끊어져 구속 역사가 중단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또한 여호야다는 평생 왕과 백생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정직하게 행하도록 감독하는 일을 잘 수행했습니다. 이또한 칭찬 받아 마땅한 일이고 아낌없이 칭송을 부어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여호야다가 요아스의 마음을 좀 더 세밀하게 살폈더라면 ... 그래서 요아스 왕의 마음에 반항심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더 크게 키워 놓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입니다. 여호야다는 강직한 대신 좀 엄한 성격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말씀대로 살도록 푸쉬하는 일은 잘 했지만 상대적으로 마음을 헤아리고 다독이는 일에는 서툴렀던 것 같습니다. 원래 그런 성격일 수도 있지만 잔혹한 아달랴의 통치 기간을 겪으면서 그와 같은 성향이 더 심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자유를 누리며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섬기는 일이라는 사실을 요아스도 함께 깨닫고 그 복을 누리도록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이후 역사가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여호야다가 죽었다고 해서 곧바로 요아스가 우상 숭배자로 전락하는 일은 아마 없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물론 한 사람에게 완벽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여호야다는 자기 시대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역사의 교훈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그 교훈은 한 사람을 도울 때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돕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점입니다.


지난 주일 히브리서 암송 대회와 성경 골든벨 행사가 있었습니다. 우리 2세들이 어른들도 외우기 힘든 본문을 척척 암송해 내는 모습을 보고 무척 기쁘고 대견했습니다. 또한 골든벨에서는 어려운 문제도 제법 잘 맞추는 모습을 보고 놀랐습니다. 특히 마지막에서 두 번째 문제 정답이 에베소 교회인 문제는 참 쉽지 않은 문제였음에도 잘 맞추어서 제가 더 분발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2세들이 이렇게 배우고 성장하는 모습에서 앞으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한 목자님이 우리 모임에는 앞으로 제 2의 부흥기가 올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 때는 현재 2세들이 성장하여 대학교에 대거 입학하게 되는 바로 그 때라고 하셨습니다. 그날이 오면 2세들이 자기 친구들을 데려오고 안암골 학생회가 과거의 영화를 회복하고 다시 많은 학생들로 붐비게 될 것이라고 낙관하셨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낙관만 할 수 있을까요? 자연스럽게 저절로 부흥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엊그제 암송 대회에 나온 2 세들의 모습만 보면 그 말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도 함께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2세는 자기가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임과도 결별하겠다고 공공연히 선언하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짜 맞추어 놓은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합니다. 내 자녀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목자님들은 여호야다 못지않게 경건하시고 자녀들을 지극히 사랑합니다.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어릴 때부터 가르치고 훈육합니다. 믿지 않는 가정의 또래 아이들처럼 자라지 말고 경건한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돕고자 하고 장차 유업을 함께 나눌 사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2세들은 이 모두를 굴레나 속박으로 여기기 쉽다는 점입니다. 왜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삶을 강요 받아야 하냐고 의문을 갖게 됩니다. 거기에 부모의 엄한 훈육이 더해지면 속으로 반항심을 키워가게 됩니다. 모든 것을 부모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나이에서는 그런 반항심을 속으로 삭일 뿐 겉으로 적극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부모에게서 독립을 선언하고 모임에서 튕겨져 나갈 수도 있습니다. 성장하면서 신앙의 본질에는 접근하지 못한 채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부모의 모습, 어른들의 모습, 공동체의 모습에 실망하여 신앙 자체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 모임 뿐 아니라 주변에서 소위 모태 신앙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제사장 여호야다의 보호 아래 있었던 요아스 왕도 바로 이런 루트를 가다가 배교의 길에 들어서지 않았을까요? 우리 2세들이 이런 불행한 루트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2세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고 그 반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율법으로 옥죄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죄에서부터 자유케 하시는 해방자이시며 구원자이심을 인격적으로 경험하는 일입니다. 이 같이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을 우리가 어디서 만날 수 있습니까? 모두가 아시다시피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십자가를 경험할 때 그 동안 하나님께 대해서 가졌던 모든 오해가 눈 녹듯이 다 풀리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그 사랑에 항복하고 마음을 열게 됩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김이 은혜이요 기쁨이 됩니다. 그전에는 부담이나 짐으로 여겨지던 모든 영적 훈련들이 내게 유익이 됨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의 체험 없이 지속되고 심화되는 영적 훈련은 오히려 거부감을 더욱 심화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해야 할 한 가지는 2세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영접하고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저는 그동안 모태신앙이지만 하나님께 헌신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여럿 만나 보았습니다. 저는 똑같이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우리 센터 2세들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가 하는 문제의식 가운데 이런 저런 대화를 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가지 공통점을 그들에게서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한 모태신앙인의 공통 단어는 중학교였습니다. 대다수가 공통적으로 한 말이 중학교 때 수련회에 가서 예수님을 만났다 였습니다. 왜 하필 중학교일까요? 초등학교 때는 그야말로 아무 생각없이 사느라 별 문제 의식이 없을 때입니다. 고등학교 때는 바쁘기도 하고 이미 틀이 굳어져 잘 변하지 않습니다. 중학교는 질풍 노도의 시기라 불리우는 사춘기입니다. 내적 위기를 겪고 정서적 불안정이 심화될 때입니다. 죄에 대한 자각이 생겨날 때도 바로 이때입니다. 이때 인생의 심각한 첫 위기를 만난 모태 신앙인들이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통해 죄로부터의 구원을 경험하고 그리고 그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사랑의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기에 이런 체험을 한 사람은 그 뒤에 크고 작은 신앙의 위기를 겪더라도 뿌리 채 흔들리지는 않고 결국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그러나 이 시기를 놓치면 그 후에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상당히 고생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돌아오더라도 험악한 세월을 보내고 돌아올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 목자님들은 여호야다만큼 훌륭한 분들이지만 여호야다의 실수를 역사의 반면 교사로 삼아 더 지혜로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2세에게 엄격한 감독과 훈육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은혜와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이 더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양 삼은 대학생들과는 또 다른 그들만의 고민과 인생 문제들을 깊이 이해하고 터치할 수 있도록 복음을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전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 2세들이 모두가 다 적어도 고등학교에 올라가기 전까지 십자가의 복음을 진하게 체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은 항상 우리에게 은혜가 먼저 이고 그 다음에 은혜 받은 자의 합당한 삶이 뒤따라 옵니다. 우리가 자칫하면 2세들이 우리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은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를 수도 있습니다. 공부도 중요하고 세상 아이들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우리 목자님들의 자녀들이 먼저 한량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흠뻑 젖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은혜가 각박한 현실 속에서 곧 마르게 될지라도 한 번 경험한 은혜의 소낙비는 결코 쉽게 잊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중에 제 2의 요아스가 나오는 슬픈 일이 없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2세들이 부모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고 히스기야나 요시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성장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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