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스겔

되살아나리라

이창무 2018. 2. 25.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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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에스겔 제 3 강


되살아나리라


말씀 / 에스겔 47:1-12

요절 / 에스겔 47: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최근 몇 년 동안 낙동강 하구의 녹조 현상이 심각하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녹조 현상이란 식물성 플랑크톤의 일종인 녹조류가 크게 늘어나서 하천을 녹색으로 물들여버리는 현상을 일컫습니다. 마치 그 모습이 녹차 라떼와 비슷하다고 해서 녹조 라떼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녹조가 심해지면 물속의 산소가 부족해져서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합니다.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물고기 시체들을 보면 참혹하기 그지없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다른 길이 없습니다. 깨끗한 물을 많이 흘려보내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죄악이 넘쳐나면 녹조 현상처럼 그 속의 사람들이 살기가 참 힘들어집니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깨끗한 물을 세상 속으로 흘려 보내야 합니다. 이 세상을 되살릴 구원의 물, 생명의 물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 물은 어디에서부터 발원하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서 우리가 세상을 살리는 생명수의 통로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꺾여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오른쪽에서 스며 나오더라" 여기서 그는 40장부터 에스겔에게 성전 구석구석을 안내해 주던 천사입니다. 이때는 에스겔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온 지 적어도 이십년이 넘은 때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은 이미 불타고 파괴되어 다 무너져 내린 후였습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이 지금 보고 있는 성전은 실제 성전이 아니라 미래에 하나님께서 회복하실 성전을 미리 보여주시는 환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한 가지 이상하고도 놀라운 일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이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집 현관문으로 물이 스며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큰 일 아닙니까? 분명 하수도가 역류하고 있던지 집 안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성전에서도 무슨 문제가 생겨서 물이 흘러나오고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전은 본래 물이 흘러나와야 하는 곳입니다. 이 물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생명과 물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외계 생물체를 탐사할 때 항상 그 행성에 물이 존재할 가능성을 최우선의 잣대로 삼는다고 합니다. 특히 사람은 물이 없으면 도저히 살 수가 없습니다. 먹을 것이 전혀 없어도 40일 정도까지는 버티기도 하지만 물이 없으면 3일을 버티기가 힘듭니다. 현재 아프리카의 영유아 사망률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다섯 배 이상이 높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바로 물 때문입니다. 아프리카 여러 지역은 깨끗한 물이 부족합니다. 그러다보니 각종 병균과 바이러스에 오염된 물까지 마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 와중에 면역력이 약한 어린 아이들이 계속 죽고 있습니다. 물은 생명과 건강과 활력의 근원입니다. 이처럼 물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돗물을 그냥 마시지 않고 정수하거나 생수를 사서 마시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온다는 것은 사람들의 목마름을 해소해 주는 생명의 물, 이 세상의 어떤 생수보다 가장 깨끗하고 안전한 생수가 성전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이 성전과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구약 시대에는 두 번에 걸쳐 예루살렘에 성전이 지어졌었습니다. 처음 지어졌던 성전이 솔로몬 성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두 번째 성전은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후 지은 스룹바벨 성전이었습니다. 이 성전을 증개축한 것이 헤롯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복음 2장에서 헤롯 성전을 가리키며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어떻게 이 거대한 성전을 겨우 사흘 만에 다시 지을 수 있느냐며 어리둥절해 했습니다. 이때 곧이어 다음과 같이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곧 진정한 성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보았던 성전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물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7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정말로 성전 되신 예수님에게 물이 흘러나옵니다. 그 물은 생명의 영이신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영혼의 목마름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예수님만이 성전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여기서 너희는 당연히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볼 때 교회가 또한 성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건물이 성전이 아닙니다. 우리가 곧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서 물이 세상으로 흘러나가야 합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세상에 생수를 공급하는 상수원 지역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저의 큰 아버지 댁은 서울 시민이 다 마시는 수돗물의 상수원 지역인 양평에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명절에 큰 집에 갈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해마다 가전제품이 최신 제품으로 업그레이드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큰 아버지가 낭비벽이 심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니었습니다. 양평 주민들은 상수원 보호 구역에 살고 있기 때문에 크고 작은 규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집을 수리하려고 해도 엄격한 심사를 거쳐 허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런 부담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시에서 보상과 위로 차원에서 매년 최신 가전제품을 각 집에 나누어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상수원 보호 구역에 속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삶에는 크고 작은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교복 치마의 길이는 무릎 위로 올라갈 수 없고 거친 욕설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마구 술을 퍼 마셔도 안 되고 내키는 대로 이 사람 저 사람과 연애해서도 안 됩니다. 요구 수준이 상당히 높습니다. 이때 우리는 '다른 사람은 이렇게 살지 않는데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할까? 너무 힘들다.'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의 상수원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세상 속으로 오염되지 않은 순수하고 깨끗한 물을 흘려 보내야 합니다. 세상이 순도 50%의 물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순도 99.9%를 유지할 수 있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성전인 우리마저 타락하고 더럽혀지면 더 이상 세상에 소망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좀 힘들지만 그래도 거룩함과 성결함을 지켜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절부터 5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줄을 잡고 네 차례에 걸쳐 천 척씩 측량하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천 척은 약 500 미터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한 번 측량하니 물이 발목에 올랐습니다. 이 정도면 송사리나 가재를 잡을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두 번째 측량하니 물이 무릎에 올랐습니다. 이 정도면 투망을 쳐서 붕어를 잡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세 번째 측량하니 물이 허리에 올랐습니다. 이 정도면 물장구를 치며 놀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네 번째 측량하니 물이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습니다. 수영도 하고 잠수도 할 수 있는 수준의 깊은 강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는 한강이라는 큰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 강 덕분에 천만의 서울시민들이 이용하는 수돗물을 얻고 있습니다. 유람선을 띄울 수도 있고 수력발전소의 터빈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한강의 발원지는 강원도 태백에 있는 검룡소라는 곳이라고 합니다. 태백을 방문하는 관광객들 중에는 호기심에 이곳을 가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막상 가보고 대개는 실망을 합니다. 작은 연못 하나에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강물의 원리가 이와 같습니다. 윤석중씨가 작사한 ‘돌과 물’이라는 동요의 2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도랑물 모여서 개울물/ 개울물 모여서 시냇물/ 시냇물 모여서 큰 강물/ 큰 강물 모여서 바닷물" 에스겔이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처음 보았을 때는 스며 나오거나 졸졸졸 흐르는 수준이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이 정도로는 세상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 물이 모이고 모이니까 세상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큰 강물이 되었습니다. 그 비결은 성전의 물이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이 모습을 통해 에스겔에게 보여준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전에서부터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점점 더 성장하고 확장되어 간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겨자씨 비유를 통해서 동일한 내용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13:31,32)" 하나님 나라는 처음부터 '콸콸콸'하면서 요란하게 흘러나오지 않아도 됩니다. '졸졸졸' 스며들듯이 흘러나와도 괜찮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흘러나오냐는 것입니다. 작지만 꾸준히 모이고 모이면 큰 강물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자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삼년 반 동안의 공생애 기간을 통해 이 땅에 남기신 것이 무엇입니까? 겨우 열두 명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드넓은 세상에 비하면 한 방울의 물 같은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백년이 지나기도 전에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소아시아 전역을 물들이고 헬라와 이탈리아 반도를 비롯한 지중해 일대에 퍼져나갔습니다. 마침내 기원후 4세기에는 거대한 로마제국을 집어 삼키고 유럽을 거쳐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아시아까지 전 세계에 복음의 물결이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처음 그 어리바리한 열두 명의 제자들이 오늘 이렇게 거대한 역사적 흐름을 낳게 될 줄을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과 사라 베리 선교사님이 광주 대인 교회 대학부에서 만나 성경 공부를 시작했을 때 그 시작은 정말 미미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이 역사가 광주에서 서울과 전국으로, 한국에서 독일과 미국으로, 그리고 전 세계로 확장되어 갔습니다. 이제는 한국과 전 세계 캠퍼스에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수를 흐르게 하는 큰 강물이 되었습니다. 만약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과 사라 베리 선교사님께서 '한 팀의 일대일 성경공부가 무슨 힘이 있겠어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여기서 접읍시다.'하고 그만 두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오늘과 같은 복음 전파, 제자 양성의 역사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과 캠퍼스 속에서 우리의 영향력은 미미해 보입니다. 한 번의 전도, 한 팀의 일대일로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은 요원해 보입니다. 그러나 작다고 우습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앞에서 우리가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서 흘러나온 물이 모이고 또 이것이 쌓이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가 인내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복음의 생수를 세상에 흘려보낸다면 무슨 일이 생기겠습니까? 물이 얼마 후에는 발목까지, 얼마 후에는 무릎까지, 또 얼마 후에는 허리까지 차오르고 마침내는 세상을 정화시키고 변화시키는 큰 강물을 이루게 될 줄을 믿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노래했듯이 결국에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한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고 봄학기 한 번의 전도, 한 팀의 일대일을 통해 세상 속으로 복음의 생수를 꾸준히 흘려보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계속해서 강물은 동쪽으로 흘러 아라바로 내려갔습니다. 아라바는 유대 남북으로 이어진 저지대로서 요단 계곡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강물은 계곡을 따라 흘러 한 바다에 이르렀습니다. 이 바다는 사해를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사해는 사실은 바다가 아니라 호수입니다. 호수임에도 바다로 불리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길이가 80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호수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사해의 물이 바닷물처럼 짜기 때문입니다. 바닷물의 염도는 약 5 퍼센트 정도입니다. 그런데 사해의 염도는 25 퍼센트로 바닷물의 다섯 배나 됩니다. 사해는 지표면보다 400 미터나 아래에 있는 저지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이 들어오기만 할 뿐 밖으로 빠져나가질 못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수분이 계속 증발되면서 광물질이 쌓인 결과 엄청나게 짠 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때문에 사해는 생물이 살 수 없는 바다가 되었습니다. 사해에 물고기를 넣으면 즉시 온 몸이 쪼그라들면서 죽고 맙니다. 물고기뿐만 아니라 사해 근처에는 염분 때문에 풀 한 포기조차 나질 않습니다.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물고기가 없으니 어부도 없고 마을도 없고 사해 주변은 황량합니다. 그런데 이곳에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되살아난다는 말은 원어로 치료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성전에서 흘러내려 온 물이 죽음의 바다를 치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아졌습니다. 미꾸라지, 메기, 잉어, 송어, 산천어, 가물치, 가시고기, 붕어, 쏘가리, 쉬리 등등 각종 물고기가 헤엄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물고기가 이렇게 많아지니 자연스럽게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이 하나 둘 씩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부들이 많아지자 어촌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엔게디와 에네글라임 같은 곳이 사람들이 북적대는 큰 도시가 되었습니다. 도저히 살 수 없던 곳이 살만한 곳으로 변했습니다. 죽음의 바다가 생명의 바다로 변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이 모든 일은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이곳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변화는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6절에 보면 천사가 에스겔을 강 가로 나오게 했습니다. 강 가로 나와 보니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았습니다. 이곳은 본래 건조한 지대라서 나무가 자라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강물이 흐르자 나무가 심히 많은 곳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나무가 많더라도 만약 다 쓸모없는 나무라면 좀 곤란합니다. 그러면 강 좌우편의 나무들은 어떤 나무들이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그 나무들은 전부 각종 먹을 과실나무였습니다. 이 나무들은 다른 과실나무들과는 좀 달랐습니다. 그 잎이 도무지 시드는 법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었습니다. 보통 과실나무는 일 년에 한 번 열매가 맺힙니다. 그런데 이 나무들은 매달 한 번씩 미친 듯이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열매의 맛 또한 기가 막혔습니다. 한 입 물면 마치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것 같이 부드럽고 달콤했습니다. 그 잎사귀는 또 어떻습니까? 잎사귀는 치료의 효능이 있어서 약 재료가 되었습니다. 감기에 걸려도 이 나무 잎사귀를 뜯어서 먹으면 감기가 뚝 떨어졌습니다. 잎사귀를 상처에 붙이면 소독과 지혈이 되고 곧 새 살이 돋아났습니다. 정말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나무였습니다. 나무가 이렇게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나무로 흘러들어간 물이 특별한 물이었기 때문입니다. 12절에 보면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고 했습니다. 성소 곧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에는 죽은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빠짝 마른 땅에 새 순이 돋게 하고 자라서 열매 맺는 나무가 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환상이라고 말할 때는 주로 엉뚱하거나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본 이 환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때에 모두 현실이 되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되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음을 무수히 목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닿자 나병환자가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않던 여인에게서 혈루근원이 멈추었습니다. 나인성의 죽은 과부의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38년 동안이나 누워있던 병자가 일어났습니다. 맹인이 눈을 떴습니다. 귀머거리가 듣게 되었습니다. 야이로의 딸도 살아나고 죽은 나사로가 일어나 무덤 문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참 경배의 대상을 찾았고 마태는 이기적인 세리에서 성 마태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성령님의 역사가 있는 곳은 어디서나 이렇게 죽음의 바다가 되살아나 생명의 바다로 변화하는 역사, 말라비틀어졌던 나무가 되살아나 풍성한 열매를 맺는 역사가 있습니다. 


현재 이 세상의 모습은 마치 사해와 같습니다. 사해처럼 자기에게 다 빨아들이려고 할 뿐 아무 것도 내보내려고 하질 않습니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은 결코 양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려고만 할 뿐 나누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점점 더 사람 살만한 곳이 못 되어가고 있습니다. 적폐가 계속 쌓이면서 나무가 자랄 수 없는 죽음의 땅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요즘 미투 운동이 우리나라를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처음에 검찰에서부터 시작해서 문학계, 영화계, 연극계, 교육계, 종교계까지 각계각층에서 봇물 터지듯이 터지고 있습니다. 그 동안 사회적으로 존경과 추앙을 받던 인물들의 실체가 벗겨지면서 온 국민을 충격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번에 밝혀진 일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입니다. 아직도 수면 아래 밝혀지지 않은 일들이 더 많이 남겨져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온 구석구석 썩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한숨이 나옵니다. 그렇다고 탄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런 세상을 어떻게 정화시킬 수 있을까요? 어떻게 사람 살만한 곳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볼 때 방법이 있습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온 강물이 이 죽음의 바다, 죽음의 땅에 흐르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이 강물처럼 흐르게 하면 됩니다. 그럴 때 가는 곳마다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치유와 회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누가 봐도 20세기 전반부 한국 사회의 개혁과 발전을 주도한 것은 바로 기독교였습니다.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오래된 악습을 철폐하고 미신을 타파하는 일에 기독교인들이 앞장섰습니다. 기독교인의 숫자는 전 인구의 5 퍼센트 밖에 되지 않았지만 삼일 운동 당시 33인의 민족 대표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현재는 전 인구의 25퍼센트 정도가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과거에 못 미치는 것 같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만약 이 25퍼센트가 각자가 있는 위치에서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물을 세상으로 흘려보낸다면 이 나라와 민족은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갑질도 사라지고 부정부패도 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성폭력과 성추행이 발붙일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헬조선이 아니라 사람이 살만한 세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새 역사를 이루기 위한 말씀의 통로, 은혜의 통로, 치유의 통로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창세기 2:10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그리고 성경의 맨 끝 장인 계시록 22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어떻습니까? 성경의 시작과 끝 부분에, 창조와 종말에 모두 강이 나온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오늘 에스겔이 본 환상은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구원과 회복의 스토리에 맞닿아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이 엄청난 환상을 본 시점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지 이미 오래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아무런 열매도 없고 모든 것이 메말라 죽어가던 시기였습니다. 꿈을 꿀 수 없는 시대, 꿈을 잃어버린 시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시점에 에스겔에게 회복된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온 세상을 되살아나게 하는 비전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 에스겔이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오늘 한국의 청년들은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다고 자조 섞인 탄식을 합니다. 초등학생들의 장래 희망 1위가 건물주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목자들마저도 성서한국, 세계선교의 꿈을 잃어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꿈 꿀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다시 꿈꾸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이번 겨울 방학 동안 복음 학교, 전국학생수양회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수양회를 섬기며 학생들에게 스며들어 흐르고 있는 예수님의 생명수를 보았습니다. 이제 다음 주 금요일부터 봄 학기가 시작됩니다. 2018년도 봄 학기 마가복음 말씀과 함께 이 생명수가 캠퍼스로 흐르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죽은 영혼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이 우리를 통로로 하여 세상으로 흘러들어가 세상이 정화되고 새롭게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오늘 이 땅에 한 알의 씨앗을 심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오늘 눈물로 한 알의 씨앗을 심는다

꿈꿀 수 없어 무너진 가슴에 저들의 푸른 꿈 다시 돋아나도록

우리 함께 땀 흘려 소망의 길을 만든다

내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던 저들 노래하며 달려갈 그 길

그날에 우리 보리라 새벽이슬 같은 저들 일어나

뜨거운 가슴 사랑의 손으로 이 땅 치유하며 행진할 때

오래 황폐하였던 이 땅 어디서나 순결한 꽃들 피어나고

푸른 의의나무가 가득한 세상 우리 함께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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