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탄식하며 우는 자'
본문: 에스겔 9: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간 우리를 주님의 말씀 앞으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자 함께 모이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영적 어둠 속에서도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이 시간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시옵소서. 오늘 우리가 묵상할 말씀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세상의 죄악을 슬퍼하며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자로 서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이 캠퍼스에 남겨두신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고, 우리의 기도와 눈물을 통해 이곳에 부흥의 역사를 이루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마음을 주님께 온전히 맡겨드리며, 이 시간 함께 하실 주님을 기대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존경하는 고기모 여러분,
저는 지난 주일 마가복음 9:14-29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신 사건을 다룹니다. 이 이야기는 믿음과 기도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강조하는 본문입니다. 특히 부모의 마음과 믿음, 그리고 그들의 자녀를 향한 간절한 기도가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이 설교를 전하고 나서 오늘 고려대학교를 위해 기도하는 학부모 모임에서 말씀을 전하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믿음이 있는 부모님들이고 기도하는 부모님들입니다. 여러분들의 믿음과 기도를 주님이 기뻐하시고 우리의 다음 세대 새롭게 하시는 것을 통해 주님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실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말씀은 에스겔서 9장 4절입니다. 에스겔 9장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이미 죄로 가득 차 있었고, 우상 숭배와 도덕적 타락이 만연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모든 백성을 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죄악을 보고 슬퍼하며 탄식하는 자들을 주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이마에 표를 하게 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는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며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결국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속한다는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별히 오늘은 이 말씀을 우리 고려대학교 캠퍼스라는 현실 속에서 적용해 보려 합니다. 영적 메마른 이 시대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남은 자로 설 수 있을지 고민하며, 함께 그 해답을 찾아보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1. 하나님은 세상의 죄악 속에서도 남은 자들을 찾으십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천사에게 예루살렘 성을 돌며 "탄식하며 우는 자들"의 이마에 표를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탄식하며 우는 자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그들은 바로 예루살렘의 죄악과 우상 숭배로 인해 마음 아파하며 하나님의 정의를 간구하는 자들입니다. 남유다가 멸망하기 직전 예루살렘은 완전히 타락했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죄악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죄악을 보고 탄식하며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숫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귀히 여기셨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우리 고려대학교 캠퍼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고려대 대나무숲이라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팔로우하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익명으로 자신의 고민을 올리고 다른 학생들의 조언을 듣는 곳입니다. 저는 이곳의 글을 읽다가 여러모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상당수 고민이 동거, 임신, 낙태 등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또한 주식 투자, 코인 투자 등에 관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각자의 꿈과 비전을 가지고 이곳 고려대학교에 모여 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그 가운데서 영적인 가치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많은 학생들은 지식과 기술을 쌓으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청년들을 잘 보이지 않습니다. 물질주의와 성공 지상주의, 세속적인 가치관이 우세한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세상의 흐름에 맞서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려고 노력하다 보면 외로움과 고립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세상의 죄악 속에서도 탄식하며 우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캠퍼스에서 여전히 그분을 찾는 이들을 주목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뜻을 간구하며, 세상의 죄악을 보며 슬퍼하고 기도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 죄악을 보며 슬퍼하고,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사람을 가리켜 “남은 자”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캠퍼스에 남겨두신 "남은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과 기도는 이 캠퍼스의 영적 메마름을 돌이킬 수 있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남은 자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들의 이마에 표시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표시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을 보호하시겠다는 의지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마에 둔 이 특별한 표지는 하나님의 소유임을 나타내며,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안에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고려대학교는 학문적으로 뛰어난 캠퍼스입니다. QS 세계 대학 랭킹에서 경영, 경제, 법학, 공학 등은 글로벌 대학 순위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국내 대기업, 금융기관, 공공기관 및 학계 등에서 고려대학교 출신 인재들이 활약하고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연구와 교육을 선도하는 대학이 되겠다고 자처하고 있습니다.
이런 뛰어난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남은 자들은 소수입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시대의 죄악 속에서 믿음 지켰다고 해서 신문이나 방송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아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이마에 표를 두어 언제나 주목해서 바라보고 있겠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캠퍼스 가운데 남아 있는 신실한 자들을 보호하십니다. 남은 자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남은 자들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의 눈길이 머물고 계십니다.
캠퍼스의 "남은 자"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영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도구로 쓰임받습니다.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끌려 갔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좋은 예입니다. 또한 남은 자는 세상적인 인기나 인정보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서 오는 평안과 기쁨을 경험합니다. 남은 자는 시련을 통해 더욱 성숙해지고 강건해집니다. 궁극적으로 남은 자는 세상의 인정이나 성공에 얽매이지 않고 영원한 상급을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남은 자로서의 삶은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과 은혜를 풍성하게 경험하는 삶입니다. 캠퍼스에서 남은 자로서 살아가는 학생들이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경험하며 캠퍼스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분들을 통해 크신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3. 하나님은 탄식하며 우는 자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남은 자들은 단지 의롭기만 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탄식하며 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왜 탄식하며 우는 것일까요? 세상의 죄악과 불의를 보고 마음 아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곳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구하기 때문입니다. 남은 자들의 탄식과 기도는 그저 자신의 구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땅을 회복하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저는 지난 2021년 부활절 예배 설교를 하다가 저도 모르게 탄식하며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다. 당시 우리 나라는 코로나가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이런 시국에도 온라인 줌으로 고려대 채플을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채플에 꾸준히 참석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채플에 참석할수록 제 마음 한쪽 구석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참석자들 중에 교수님도 보이고 선교 단체 간사님도 보였는데 정작 학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는 사정이 있어서 그랬고 이번 주는 다를거야 라고 기대를 했지만 계속해서 학생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다 내 책임인 것 같아서 괴로웠습니다.
부활절 말씀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현재의 캠퍼스 모습이 마치 죽어서 무덤에 묻힌 지 사흘이나 지난 나사로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눈물이 났습니다. 캠퍼스를 뒤덮고 있는 어둠의 세력에 대한 분노 때문에 눈물이 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역시 나사로의 무덤 앞에 연민과 분노로 울고 계셨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과 제 마음이 무언가 통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은 저의 마음만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도 고려대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고 계시는 선교 단체 간사들, 리더들, 고기모 회원님들, 기독 교수님들 모두의 마음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곳 가운데 고려대 캠퍼스를 위해 탄식하며 우는 자들, 간절히 기도하는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에스겔서 9장의 이야기는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계획하고 계십니다. 남은 자들은 단순히 보호받는 존재로 끝나지 않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키고, 세상의 죄악을 슬퍼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고려대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남은 자로서 이 캠퍼스의 영적 현실을 보며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땅에 새로운 부흥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이 캠퍼스의 변화는 많은 사람들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소수, 남은 자들을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부흥의 도구로 쓰임 받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난 2023년 미국 애즈베리 대학교의 부흥 운동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이 부흥은 2023년 2월 8일 평범한 채플 시간이 끝난 후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기도를 이어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집회는 16일 동안 멈추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전국에서 수천 명이 애즈베리 대학교로 모여들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이후 부흥은 샘퍼드 대학교, 시더빌 대학교 등 다른 대학들로 확산이 되었고 많은 학생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며 그들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저는 작년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애즈베리 대학교의 총장인 티모시 테넌트 박사의 강연을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흥이라고 하면 뜨겁고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연상합니다. 그러나 테넌트 박사는 애즈베리 대학의 부흥 운동의 특징이 소박함과 겸손함이었다고 전했습니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차분히 간증하는 것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찬양 역시 전문 예배팀이 이끈 것이 아니었고 가사를 띄울 스크린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Z 세대 부흥이 이전 세대 부흥과 또 다른 점이라고 했습니다.
고려대학교가 제 2의 애즈베리 대학교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곳곳에서 소박하고 겸손하고 성경 읽고 기도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곳이 부흥의 진원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 캠퍼스에서 남은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세상 속에서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적 어두움 속에서도 깨어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회복을 간구하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그 남은 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하는 자들이 됩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땅에서 새로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 남은 자로 서서, 하나님의 뜻이 고려대학교에 이루어지기를 함께 간구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오늘도 이 캠퍼스에서 우리를 남은 자로 불러주심에 감사합니다. 영적으로 척박한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하는 자들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이곳에 하나님의 빛이 비추게 하옵소서. 우리의 눈물을 통해 하나님의 회복과 부흥이 이곳에서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설교 > 에스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되살아나리라 (0) | 2018.02.25 |
---|---|
마른 뼈들을 큰 군대로 (0) | 2018.02.09 |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리라 (0) | 2015.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