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호세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이창무 2015. 4. 30.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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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바이블 캠프 저녁 은혜 3 강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말씀 : 호세아 6:1-3

요절 : 호세아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프랑스의 시인 랭보의 시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옆 사람을 한 번 쳐다 보십시오. 어떻게 보이십니까? 멀쩡해 보이죠. 그러나 그렇게 겉으로 보기에 멀쩡해 보여도 속에는 말 못할 사연이 있고 상처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상처가 있는지 없는지 물어 보세요. 상처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듯 합니다. 그러므로 상처가 있는 것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상처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인생을 망칠 수도 있고 인생을 한 차원 더 높은 경지로 승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삶에 상처가 있는 이유와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이제 방황을 그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 우리의 상처가 치유 받고 회복되는 은혜를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호세아는 BC 8세기경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이 시기의 북이스라엘을 두고 후세의 역사가들은 그 시기는 최선의 시기이자 최악의 시기였다고 평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외적으로 보면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에 깊숙이 빠져 있던 최악의 시기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초대왕인 여로보암까지 거슬러 올라 갑니다. 그는 솔로몬왕이 죽은 후 북쪽 지역 지파를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킨 뒤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예배를 드릴 성전이 남쪽 유다 왕국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속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남유다를 계속해서 들락날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로보암이 보기에 이렇게 내버려 두었다가는 자기 백성들이 남유다가 편에 붙어 버리지 않을까 겁이 났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남유다로 내려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러가는 것을 막으려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우고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이다 하면서 그 앞에 절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라고 하였습니다. 지도자가 나서서 우상숭배를 부추기는데 그 나라에 어떻게 우상숭배가 성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백성들 역시 한 번 잘먹고 잘 살아보겠다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풍요의 신 바알이나 아세라 등 각종 우상 앞에 ‘비나이다 비나이다 대박 한 번 내려 주소서’ 하면서 머리숙여 절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참되신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헛된 우상을 섬기는 백성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분노하셨습니다. 동시에 그들을 보시며 너무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속히 헛된 우상숭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그들에게 경고하겠습니까? 누가 그들을 안타깝게 여겨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겠습니까? 이에 하나님은 유다의 청년 호세아를 선지자를 부르셔서 그를 훈련하시고 그가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말씀을 전하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훈련이 무엇입니까? 


1장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을 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하였음이니라”  호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받은 훈련은 다름 아닌 결혼 훈련이었습니다. 아니 결혼도 훈련입니까? 그렇다면 이런 훈련은 얼마든지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결혼은 보통의 결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신부로 맞이하여 결혼하라는 여자는 음란한 여자였습니다. 3절을 보면 이 여자는 디블라임의 딸 고멜이었는데 거의 창녀나 다름 없는 여자였습니다. 음탕하여 이 남자 저 남자 아무하고나 잠을 자는 문란한 여자였습니다. 멀쩡한 청년에게 창녀와 결혼하라고 한다면 과연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경건한 유다 청년인 호세아에게는 죽을 맛이었습니다. “주여! 아니 세상에 여자가 없습니까? 왜 하필이면 저 음탕한 고멜입니까?” 그게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이런 여인과 결혼해서 또 자식을 낳아도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리라 하십니다. 세상에 귀엽고 착한 자식 낳고 싶지 누가 음란한 자식을 낳고 싶습니까? 엄마의 음란도 감당하기 힘든데 아들의 음란, 딸의 음란까지 어떻게 감당하라는 말입니까 그러나 호세아의 자녀들은 이상하게도 아무도 아빠를 닮지 않고  다 엄마를 닮아 음란한  자식이 된다 합니다. 첫아들을 낳게 되면 호세아는 아들의 이름을 거룩한 백성이란 뜻으로 성민이라고 짓고 싶었습니다. “호성민” 그런데 하나님은 아들의 이름을 이스르엘, 곧 이스라엘은 망한다는 의미로 짓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축복의 이름이 아니라 저주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들이 둘째로 딸을 낳는데 이번에 하나님은 그 딸이름은 ‘로루하마’ 곧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 라고  지으라 하셨습니다. 자녀의 이름을 전부 이런 식이었습니다. 호세아의 자식들에게서 도무지 비전이라고는 발가락 사이에 끼인 때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결혼 과연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이 명령의 말씀에 호세아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1장 3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호세아는 순종하여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셨습니다. 호세아는 기왕 결혼했으니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살림엔 젬병인 고멜을 대신하여 빨래도 하고 설거지도 도맡아 했습니다. 이름은 좀 이상하지만 그래도 둘 사이에 자녀가 생겼습니다.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고멜이 사라졌습니다. 자식들도 내팽개치고 돈 될만한 것을 싹 챙겨서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수소문 끝에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고멜은 웬 건달 같은 놈과 어울려 딴살림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미 거액의 빚까지 져서 사실상 그 집의 노예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멜의 얼굴을 본 호세아는 분노로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듯 했습니다. 그 동안 베풀어 준 은혜도 모르고 배신을 한 이 여인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인은 돌로 쳐 죽여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고멜을 다시 데려와 살라고 하셨습니다. 호세아는 자기 귀를 의심했습니다. “내 인생에 씻을 수 없는 큰 상처를 준 저 고멜을 어떻게 다시 맞아들인다는 말입니까?” “주님! 왜 저를 두 번씩이나 죽이시려는 것입니까?” 


이때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호 3:1)” 그제서야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왜 음탕한 고멜을 다시 아내로 맞이 하라고 하셨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고멜은 이스라엘이었고 이스라엘은 곧 고멜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 백성 삼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자기 백성들과의 관계를 결혼의 관계로 묘사하는 곳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부같이 맞아주시고 사랑하시는 신랑과도 같으십니다. 이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부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순결입니다. 이사야서 6장을 보면 거룩하고 순결한 천사들도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부끄러워 자기 두날개로 얼굴을 가리고 또 다른 두날개 로 자기 발을 가렸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개의 날개로 겨우날고 있었습니다. 천사들은 이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6:3) 하나님이 이렇게 거룩하신데 신부도 당연히 거룩해야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거룩하지 않았습니다. 고멜이 남편을 버리고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되었듯이,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여 영적 간음의 죄를 범하였습니다. 화장으로 떡칠을 하여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더러운 음란이 가득한 고멜처럼, 이스라엘 역시 겉으로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가증스러운 죄악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룩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의 신부 삼으시고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이 우상숭배를 여러 번하고 하나님을 슬프시게 했어도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셨습니다. 호세아의 가슴으로 이 하나님의 마음이 전달되어 왔습니다. “고멜이 딴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을 본 내 마음이 갈갈이 찢기고 상하였듯이, 우상 앞에 엎드려 절하는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찢기고 상하셨을까?” “나는 고멜을 도저히 사랑할 자신이 없는데,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이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크고도 놀라운가?” 이 사랑을 깨달은 호세아는 자기의 전 재산을 다 털어서 고멜의 몸값을 대신 갚아 주고 그녀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전혀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자의 죄값을 대신 치루어 줌으로써 구원하는 사랑, 조건 없는 영원한 사랑, 이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 겉으로 보기에 호세아의 결혼은 완전히 실패한 결혼이었고, 그의 인생은 비극의 한 장면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호세아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생들의 죄로 인해 아파하시고 상처를 입으신 그 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다시 영접하시고 변함없이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을 알게 된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향해 목 놓아 이렇게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함께 6장 1절을 읽겠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오라” 혹은 “돌아 가자”는 표현은 이 말씀의 청취자들이 가야 할 길을 가지 않고 그릇된 길에 들어서 있음을 말해 줍니다. 운전을 하다 보면 길을 잘못 들어설 때가 있습니다. 잘못 들어선 길을 계속 간다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얼른 유턴 표시를 찾아서 오던 길을 되돌아 가야 합니다. 이처럼 호세아 선지자는 가던 길을 그만 멈추고 하나님께 유턴하라고 간곡하게 호소합니다. 


오늘날 시대를 가리켜서 포스트 모던 시대라고 부릅니다. 포스트 모던 시대는 가야 할 바른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가는 길이 잘 가는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얼핏 들으면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매력적인 말로 들립니다. 그러나 아무 길이나 가고 싶은 대로 막 돌아 다니는 것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한 마디로 헤맨다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방황이라고 합니다. 방황해 보셨습니까? 황야의 방랑자, 남 보기에는 멋있어 보이지만 정작 방랑하는 본인은 죽을 고생을 합니다. 방황은 고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헤매지 않으려고 비싼 돈을 들여 네이게이션을 구입해서 바른 길을 가려고 애를 씁니다. 하물며 소중한 우리 인생길을 아무 길에나 들어서서 막 살면서 헤매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 말이 되겠습니까? 모든 인생들이 가야 할 바른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누가 정했을까요? 바로 우리의 창조자시요 인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입니다. 그 길은 생명의 길, 진리의 길입니다. 물고기는 물 속에서 살아야 하고 새는 하늘을 날아야 하듯이 사람은 그 길을 따를 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길을 따르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그릇된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인간은 마음 속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며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께 감사치도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롬 1:21)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을 등지고 자기 나름대로의 길을 간 결과가 무엇입니까? 과연 행복의 나라에서 살게 되었습니까? 지구촌 구석구석 세상 곳곳마다 찢겨진 상처와 매 맞아 멍든 곳 투성이입니다. 뉴스를 보면 날마다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지진과 기근, 태풍과 자연 재해와 참혹한 전쟁과 무자비한 테러와 범죄로 사람들이 죽어 나갑니다. 우리 각 사람의 삶에도 언제 갑자기 큰 사건과 사고로 만나게 될지 모릅니다. 치명적인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 후 장애를 겪게 될 수도 있습니다. 파산하기도 하며 실직하여 빈곤에 처하기도 합니다. 이런 일을 겪게 되면 막막하고 두렵기도 하고 불안해 집니다. 우리 캠퍼스는 어떻습니까? 캠퍼스도 예외가 아닙니다. ‘대학생활의 낭만’라는 말은 7080 세대에게나 어울릴 만한 말이 되었습니다. 요즘은 신입생 때부터 스펙을 쌓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위너(Winner)가 되기 위해, 아니 살아 남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그 이유 때문에만 바쁜 것은 아닙니다. 삶의 목적과 의미를 모른 채 쾌락에 자신의 몸을 맡기느라 바쁘기도 합니다. 정욕에 사로 잡혀 밤거리를 배회하기도 하고 게임에 미친 듯이 빠져 인생을 허비하기도 합니다. 달콤했던 연애는 곧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는 악몽으로 바뀌고 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도, 누구나 마음 속에는 죄로 인한 상처와 인생의 무게와 아픔이 있습니다.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우리를 찢으시고 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에서 찢어졌다는 말은 하나님의 징계로 흩어졌다는 말입니다. 실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계로 강대국 앗시리아에, 바벨론 곳곳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나라가 찢어지고 가족이 찢어지고 죽음으로 이별하고 포로가 되어 이별하는 아픔을 겪어야했습니다. 이 하나님은 너무 잔인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실까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하나뿐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어 주신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찢으시고 치시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께서 징계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보내시고자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통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시그널을 보내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릇된 길, 죄의 길, 파멸과 멸망의 길을 가고 있다는 걸 깨닫고 돌아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에베레스트 산에서 조난 당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최후에 남은 두 명의 생존자들이 서로의 뺨을 사정 없이 때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잠들어 버리면 곧 얼어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파멸의 길을 향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자고 있는 사람은 이렇게 때려서라도 깨워야 합니다. 안 그러면 죽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집 나간 둘째 아들이 잘 먹고 잘 살 때는 아버지 집 생각을 전혀 안 했습니다. 그러다가 돈을 다 쓰고 기근이 들어 돼지들의 먹이인 쥐엄나무 열매마저 얻어먹지 못할 신세가 되자 그때서야 아버지 집 생각이 났습니다. 아버지 집이 얼마나 좋은 것이었는지를 뒤늦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때 둘째 아들이 만난 파산과 기근은 재앙이 아니라 그를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도록 만든 감추어진 축복이었습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지은 작가 C. S .루이스는 ‘고난은 하나님의 확성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 귀에 대고 나에게 돌아오라고 큰 소리로 외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만 미워하신다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에스겔 33:11은 분명히 말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하나님의 목적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시려는 것이며 죄악의 길에서 떠나 돌이키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 당할 때 하나님의 마음도 아프십니다. 어쩌면 매 맞는 우리보다 더 아프시지 않겠습니까?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히브리서 12:6,7)” 하나님의 마음은 엄마 마음, 아빠 마음입니다.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자식에게 회초리를 대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고 완고하고 비뚤어졌으면 이렇게까지 하시겠습니까? 이 시간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삶에 개입하셔서 시련과 아픔을 통해서라도 주께 돌이키도록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돌아오는 자를 싸매어 주시고 치료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상처 난 곳을 어루만져 주시고 패인 곳을 메우고 병든 곳을 고쳐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분은 우리를 진정 위로해 주시는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물건을 잘 만드는 사람은 위대합니다. 그러나 망가질 대로 망가진 것을 새것처럼 고쳐낼 수 있는 사람은 더욱 위대하지 않겠습니까? 종로 3가에 제가 아는 중고 카메라 수리점이 있습니다. 여기에 두꺼운 돋보기를 쓰신 한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겉보기엔 평범해 보이는데 알고 보면 참 놀라우신 분이십니다. 고장 나 장롱 속에 처 박혀 있던 수십 년이 된 카메라라 할지라도 이 분 손에 들어가면 말끔한 새 카메라로 다시 태어납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수선장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상하고 아무리 많이 망가졌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고치시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박효진 장로님이 지은 같은 이름의 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은 없다” 그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다 흉악 범죄를 저지르고 중형을 선고 받아 복역 중인 사람들입니다. 그 중 지존파 두목 김현양이 있습니다. 인육을 먹기도 했고 체포 후 ‘더 죽이지 못해 안타깝다’고 했다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러나 감옥 안에서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그를 고치셨습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마지막 사형 집행 순간에 그는 “큰죄인이 분에 넘치는 사랑만 받다가 먼저 갑니다”라는 아름다운 신앙고백을 남기고 갔습니다. 이렇게 인생의 막장까지 갈 데까지 간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들어가면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라도 다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찢으신 것은 하나님만 고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만 거두어 가실 수 있습니다. 요즘 힐링, 내적 치유라는 말이 유행합니다. 사람이 가진 내면의 상처에 주로 심리학적 정신의학적인 접근을 많이 시도합니다. 이 중에 일부는 효과도 있고 그 필요성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서는 그 어떤 치유도 완전한 치유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아갔기 때문에 생긴 문제를 다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치유해 보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임한 하나님의 징계는 회개와 하나님께 돌아옴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와 치유가 아니고서는 회복될 수 없습니다. 고쳐 주시고 싸매 주시고 회복시키시고 다시 살리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하나님을 등지고 마음대로 살아가시겠습니까? 구원 받는 길은 단 하나 오직 여호와께 돌아가는 길뿐입니다.  "내가 길이다!"라고 생각할 때 죽는 길로 들어서게 되고, "하나님이 길이십니다!"라고 생각할 때 사는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완악한 마음을 가지면 돌아 갈 수 없습니다. 먼저 자기 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내 스스로 힘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과연 나를 받아 주실까 의심스러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망설이지 마십시오. 주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소망을 두시고 고치시기 원하십니다.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떠난 우리를 징계하시고 죄의 고통 가운데 두시지만 우리가 돌아가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우리를 낫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싸매어 주실 준비가 다 되어 있으십니다. 이 하나님은 운명의 고통, 미움으로 인한 상처, 원망의 상처, 정욕으로 찢어진 내면, 실패와 좌절로 무너진 자아를 부둥켜 안고 있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당신께 돌아올 수 있도록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더러운 죄악을 모두 다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마치 호세아가 고멜을 대신하여 빚을 다 갚아 주고 아내로 다시 맞이 하였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죽음으로 다 치르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의 죄악과 허물이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누구든지 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긍휼의 표지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예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돌아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여기서 이틀 후, 셋째 날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고치시되 아주 빠른 시일 내에 고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조금만 다쳐도 보통 전치 4주 혹은 8주 같은 판정을 받습니다. 회복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 그 시간은 더욱 오래 걸립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찢기고 매맞아 왔습니다. 그 동안 상처는 더욱 깊이 패이고 고름이 터졌습니다. 힘도 빠져 주저 앉아 버렸습니다. 살아있었지만 생기가 없고 활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고치시는 기간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속히 이루어 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깊은 상처라도 이틀 삼일 즉 전치 2일, 3일로 다 고쳐 주실 수 있는 위대한 의사이십니다. 여기서 ‘셋째 날’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님을 무덤에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일으켜 세우셔서 힘차고 박력이 있는 인생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고 호소합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만 미워한다고 원망합니다. 하나님을 몰라 교만해져서 자기 고집대로 살다 망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공의와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입니다. '아는 것'은  '생명'과 직결될 수 있습니다. 필립 얀시의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하나님’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는 스페인 선원들이 대서양을 건너 남미 대륙에 도착했을 때 일어났던 유명한 실화가 나옵니다. 스페인 선원들이 탄 배가 아마존 강 상류에 도착했습니다. 강폭이 너무 컸기 때문에 선원들은 아직 대서양에 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때 선원들 중 여러 사람이 죽었습니다. 죽음의 원인은 갈증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짠 바닷물 위에 떠 있는 줄로 알았기 때문에 물을 떠 마실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지식이 없으니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풍부한 생수의 한 복판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갈증으로 죽는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세상에 지식은 홍수처럼 넘쳐 납니다. 그러나 막상 꼭 알아야 할 지식,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지식은 오히려 희귀해져 갑니다. 그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힘써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서는 적당히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있어서 만큼은 전심전력을 다해 알기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여호와를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힘써 공부하고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일대일로 그룹으로 일용할 양식으로 예배와 바이블 까페와 기도회를 통해서 성경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과도한 성경 공부, 무리한 말씀 공부라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 힘이 닿는 대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여야 하겠습니다.


이때 이 하나님은 새벽빛 같이 어김 없이 임하십니다. 저는 군 복무 중에 아주 추운 겨울날 밤새도록 경계 근무를 선 적이 있습니다. 두껍게 끼어 입은 방한복 사이로 침투해 들어오는 추위와 사투를 벌이며 시계를 들여 다 보았습니다. 시간은 왜 이렇게 안 가는지 새벽이 오기 전에 꼭 여기서 얼어 죽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그날도 새벽은 어김없이 찾아왔습니다. 떠오른 태양빛은 제 온 몸을 녹여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나오심은 이 새벽 빛같이 어김없으십니다. `어김없다`는 것은 신실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우리의 삶, 어두움 속에서도 반드시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언제까지 어두움이 지속되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언제까지 고난과 실패와 좌절 속에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두움의 끝은 새벽에 맞닿아 있듯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은 새벽 미명의 어두움을 뚫고 반드시 찾아오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앞의 비는 10월초에서 2월말에 내리는 이른 비를 말합니다. 이때의 비는 한번 오면 왕창 쏟아지는 장마비입니다. 이른 비와 봄에 내리는 늦은 비는 농사에서 절대적입니다. 팔레스타인은 이 두 번 오는 비로 인하여 한 해의 농사를 짓습니다. 그런데 가물어도 너무 가물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비 구경한지가 하도 오래 되어서 도무지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이른 비, 늦은 비는 반드시 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게 옵니다. 오랫동안 영혼에 가뭄이 들면 도저히 회복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는 한 번 쏟아지면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그렇게 쏟아져 내립니다. 그래서 단번에 영혼의 해갈을  가져다 주십니다.


하나님은 어둡고 메말랐던 제 인생에도 새벽 빛처럼, 이른 비와 늦은 비처럼 찾아 오셨습니다. 저는 나면서부터 몸이 허약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밖에서 놀다 보면 술래는 늘 제 차지였습니다. 특별히 깍두기를 시켜 주겠다는 동생들의 말에 더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또한 유난히 피부가 까무잡잡했던 제게 친구들은 제 이름을 잘 부르지 않았습니다. 대신 당시 히트했던 ‘뿌리’라는 미니시리즈에 나오는 흑인 노예의 이름이었던 ‘쿤타킨테’ 혹은 ‘무’는 무는 무인데 썩어서 검게 된 무라는 뜻으로 ‘썩은 무’라고 불렀습니다. 하루는 발바닥 각질 제거용 돌로 살을 문질러 보았지만, 피만 날 뿐 전혀 희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조물주가 있다면 나를 이런 육체로 태어나게 한 조물주를 찾아가 따지고 싶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서울 변두리 고등학교에는 거친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그중에는 조폭 말단 행동대원쯤 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가방 안에 사시미칼을 넣어 가지고 다녔습니다. 저는 그 아이들에게 학교 안에서는 도시락과 체육복을 빼앗기고 밖에서는 용돈을 빼았겼습니다. 거친 아이들을 다루는 선생님도 거칠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날 교실이 너무 어두우니 불 좀 켜고 수업하자고 선생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저를 나오라고 하더니 자기 혁대를 풀어 그것으로 사정없이 저를 내리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알았습니다, 혁대는 소리만 클 뿐이지 별로 아프지 않다는 사실을. 저는 사람들이 무섭고 세상이 무서웠습니다. 저는 계속 안으로만 웅크려 들었습니다. 가시를 곧추세운 고슴도치처럼 목을 넣은 거북이처럼 누구도 믿지 않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고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하나님은 목자님을 보내셔서 이런 저의 등껍질에 노크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껍질 속에서 좀처럼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목자님의 과도한 친절에는 분명히 어떤 꿍꿍이 속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성경 공부를 통해 내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동시에 내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제게 하나님은 마치 혁대를 풀어 내리친 선생님 같이 인정사정 없이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이 제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저는 사랑을 믿지 않았지만 사랑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심판은 있지만 심판을 넉넉히 이기는 은혜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나를 위해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신 그 사랑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이 임했을 때 제 마음 속에 깊숙하게 패인 상처들이 아물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랑 앞에 더 이상 가시도 껍질도 필요 없었습니다. 저는 기쁨으로 무장해제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그 너른 품에 마음껏 안길 수 있었습니다. 저는 웃는 것은 적에게 약점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절대 웃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나니 이유 없이 자꾸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한 친구가 심각하게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보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 친구의 말을 듣고 또 한바탕 웃는 사람을 친구를 아주 무안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과거 저처럼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여 어두운 삶, 메마른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외치는 목자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돌아가자.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상처를 부여 잡고 평생 자기 세계 속에 갇혀 살 수 밖에 없던 저를 부르셔서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며 다시 일으켜 세우사 이제는 호세아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자로 삼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상처 입은 우리를 치유하시려고 두 개의 약을 준비하셨습니다. 바로 구약과 신약입니다. 구약과 신약은 모두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두 손에 못이 박히시고 옆구리에 창에 찔리신 그분만이 우리를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바이블 캠프에 온 우리 모두가 이 예수님 앞에 나아가 상처가 치유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죽으신 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주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여 일어나 새 힘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 가운데 충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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