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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전국학생수양회]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설교/호세아 2017.02.13 10:19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말씀 : 호세아 6:1-3

    요절 : 호세아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미국의 록그룹 이글스(Eagles)의 노래 중에 'Desperado'라는 불후의 명곡이 있습니다. 이 곡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젊은 날이 영원한 게 아니야. / 자네의 고통과, 배고픔, 그들이 너를 집으로 몰아가겠지. / 그리고 자유, 아 그 자유란 건, 그냥 어떤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것일 뿐이고. / 세상 모든 곳이 감옥이야. / 겨울이면 발이 시리지 않은가? / 하늘에선 눈이 안 내릴 거고 태양도 빛나지 않을 거라네. / 낮과 밤을 구별하기도 힘들어질 거야. / 자네는 인간성을 잃어가고 있어. / 그리고 그렇게 인간성이 사라져 가는 게 우습지 않나? / 자네 이젠 좀 제 정신으로 돌아오는 게 어떤가? / 울타리에서 내려와 문을 열어봐. / 비가 내리지만, 머리위엔 무지개가 있지. / 누군가 자네를 사랑하게 해 줘 봐. / 때가 너무 늦기 전에." 이 노래에서 이글스는 젊은이들을 향해 때가 늦기 전에 돌아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호세아도 역시 때가 늦기 전에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목청껏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뭐가 잘못된 것인가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야 합니까? 우리를 낫게 하실 것이요 싸매어 주실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가서 하나님을 알아가기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더 이상의 방황을 그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힘써 하나님을 알아감으로 주님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호세아는 누구입니까? 호세아는 BC 8세기 경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외적으로 보면 영토를 크게 확장하던 최고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깊숙이 빠져있던 최악의 시기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초대왕 여로보암 1세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그 앞에서 절하고 예배드리도록 했습니다. 지도자가 앞장서서 우상숭배를 부추기는데 나라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백성들 역시 점점 더 우상숭배에 깊숙이 빠져들어 갔습니다. 부자가 한번 되어보겠다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풍요의 신 바알이나 아세라 등 각종 우상들 앞에서 제물을 바쳤습니다. 이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배은망덕하고 타락한 백성들에게 심판은 불가피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마음은 찢어지듯이 아프셨습니다. 더 늦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빨리 헛된 우상숭배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을 바라셨습니다. 누가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백성들에게 나가 회개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 하나님께서는 유다 청년 호세아를 선지자로 부르셔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말씀의 종으로 쓰시기 전에 먼저 한 가지 훈련을 주셨습니다. 그 훈련이 무엇입니까?


    1장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호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받은 훈련은 다름 아니라 결혼 훈련이었습니다. 결혼이 어떻게 훈련이 될까요? 이런 훈련이라면 얼마든지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결혼은 보통의 결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부로 맞이하여 결혼하라는 여자는 음란한 여자였습니다. 3절에 보면 이 여자는 디블라임의 딸 고멜이었는데 거의 창녀나 다름없는 여자였습니다. 누가 이런 여자와 결혼하고 싶겠습니까? 하물며 경건한 유다 청년 호세아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결혼이었습니다. "주님! 세상에 여자가 고멜 밖에 없나요? 왜 하필이면 저 음탕한 고멜입니까?"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자식을 낳아도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리라고 하십니다. 엄마의 음란도 감당하기 힘든데 아들의 음란, 딸의 음란을 어떻게 감당하라는 말입니까? 호세아는 아들을 낳으면 성민(거룩한 백성), 딸을 낳으면 은혜라고 짓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첫아들의 이름은 ‘이스르엘’ 곧 하나님께서 흩으신다는 뜻으로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딸 '로루하마'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고 막내아들 ‘로암미’는 '너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자식들의 이름에서 비전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믿음의 형제들과 현숙한 자매들 밖에 없는 우리 모임 안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결혼입니다. 우리는 혹시 이런 결혼을 할까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호세아에게는 이 말도 안 되는 결혼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때 호세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1장 3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호세아는 당장 이해는 안 되지만 두 말없이 순종하여 고멜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기왕 결혼을 했으니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음식 못하는 아내를 대신하여 ‘집밥 백선생’을 보면서 날마다 다양한 요리도 만들어주었습니다. 밤마다 잠든 아내를 깨우지 않기 위해 숨죽여 가며 빨래를 했습니다. 이름들이 좀 이상하지만 그래도 사랑스러운 자녀들이 생겼습니다. 살다보니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고멜이 사라졌습니다. 돈이 될 만한 것들은 싹 챙겨서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수소문 끝에 겨우 찾고 보니 아니나 다를까 고멜은 어떤 날건달 같은 놈과 어울려 딴살림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미 거액의 빚을 지고 신용불량자가 되어 있습니다. 고멜의 얼굴을 본 호세아는 분노로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듯 했습니다. 어떻게 은혜를 이런 식으로 배신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인은 돌로 쳐 죽여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호세아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호3:1b)" 호세아는 자기 귀를 의심했습니다. "내 인생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저 고멜을 어떻게 다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까? 왜 저를 두 번이나 죽이려 하십니까?" 그런데 이 말씀의 앞에 바로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호3:1a)" 그제야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왜 음탕한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게 하셨는지 깨달았습니다. 고멜은 곧 이스라엘이었고 이스라엘은 곧 고멜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자기 백성과의 관계를 결혼의 관계로 묘사한 부분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신랑이시요 백성들은 신부입니다. 이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부된 백성들의 순결입니다. 그러나 고멜이 남편을 버리고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되었듯이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여 영적 간음을 저질렀습니다. 진한 화장으로 겉은 화려했지만 속으로는 음란이 가득했던 고멜처럼, 이스라엘은 겉으로 볼 때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가증스러운 죄악들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음녀가 된 이스라엘을 여전히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버젓이 우상숭배를 행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찢어놓은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신부로 삼으시고 변함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호세아의 가슴 속으로 파도처럼 밀려들어왔습니다. "딴 남자의 품에 안긴 고멜을 바라보던 내 마음이 갈가리 찢기고 상하였듯이 우상 앞에 절하는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며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찢기고 상하셨을까?" "그럼에도 자기 백성을 용서하시고 아직도 변함없이 사랑하시다니! 이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크고도 놀라운 사랑인가?" 이 사랑 앞에 호세아는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호세아는 자기의 전 재산을 다 털어서 고멜의 몸값을 대신 갚아 주었습니다. 그녀를 다시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전혀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자의 죗값을 대신 치러 줌으로써 구원하는 사랑, 조건 없는 영원한 사랑, 이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호세아의 결혼은 완전히 실패한 결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호세아는 인생들의 죄로 인해 아파하시고 상처 입으신 하나님의 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다시 영접하시고 변함이 없이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과 그 사랑을 알게 된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목 놓아 이렇게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 함께 6장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오라' 또는 '돌아가자'하는 말 속에는 현재 가야할 길을 가지 않고 그릇된 길에 들어서 있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운전을 하다가 잘못된 길에 들어설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내비게이션에서 난리가 납니다. 어서 빨리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유턴을 하라고 내비게이션 안에 계신 자매님이 쉴 새 없이 재촉을 합니다. 이처럼 호세아 선지자는 백성들을 향해 그릇된 길을 그만 가고 하나님께 유턴하라고 간곡하게 호소합니다. 모든 인생들에게는 가야할 바른 길이 있습니다. 우리의 창조자시요 인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생명의 길, 진리의 길입니다. 사람은 그 길을 따라 살 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길을 따르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그릇된 길로 갔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며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께 감사치도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았습니다(롬 1:21). 이렇게 사람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각자 자기 나름대로 간 결과가 어떻습니까? 행복의 나라에서 살게 되었습니까? 1절에는 '찢으셨다', '치셨다'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표현대로 당시 북이스라엘은 겉으로 전성기였지만 속으로는 곪을 대로 곪은 갖가지 상처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부익부 빈익빈 사회 양극화는 날로 금식해져 갔고 권력남용, 부정부패, 가진 자들의 착취와 횡포가 만연해 있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세계 10위 경제대국이고 전 세계에 한류를 수출하는 자랑스러운 나라입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상처투성이입니다. 사회 양극화 현상은 점점 더 심해지고 청년 실업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어느새 ‘갑질’이란 말이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갑에게 상처 받은 을은 다시 병에게 갑질을 하며 스트레스를 풉니다. 갑질을 당하지 않으려면 내가 갑중의 갑이 되는 수밖에 없다고 여기고 더욱 경쟁에 몰두합니다. 그 과정 속에서 상처를 주고 또 상처를 받습니다. 너무 삶이 힘들어서 ‘헬조선’이라는 자조 섞인 탄식이 나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떠나 돈과 권력과 쾌락을 우상 숭배한 죄악의 결과입니다. 사람들은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누구나 그 마음속에서는 죄로 인해 생긴 상처와 아픔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1절에 보면 이렇게 찢으시고 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은 너무 잔인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나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하나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는가?’이런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인생을 찢으시고 치시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보내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통과 상처를 통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시그널을 보내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릇된 길, 죄악의 길, 파멸과 멸망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오라고 호소하고 계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탕자의 비유에서 집 나간 둘째 아들이 잘 먹고 잘 살 때는 아버지 집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돈을 다 쓰고 기근이 들어 돼지들의 먹이인 쥐엄나무 열매마저 얻어먹지 못할 신세가 되자 그제야 아버지의 집이 생각났습니다. 이때 둘째 아들이 만난 파산과 기근은 재앙이 아니라 그를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도록 만든 감추어진 축복, 변장한 축복이었습니다. 작가 C.S.루이스는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처음엔 부드러운 음성으로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나 완고한 우리는 듣지 않고 한 쪽 귀로 흘려버립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고통이라는 확성기를 우리 귀에 대시고 돌아오라 큰 소리로 외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왜 나만 미워하시냐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에스겔 3장 11절은 분명히 말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하나님의 목적은 결코 죽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살리시려는 것입니다. 죄악의 길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히 12:6,7)" 하나님의 마음은 엄마 마음, 아빠 마음입니다.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사랑하는 자녀에게 회초리를 댈 수밖에 없는 부모의 심정으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고 완고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면 이렇게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시련과 아픔을 통해서라도 주께 돌이키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온 우리를 어떻게 하십니까?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는 자를 싸매어 주시고 치료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상처 난 곳을 어루만져 주시고 패인 곳을 메우고 병든 곳을 고쳐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진정 위로해 주실 수 있는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이틀 후, 셋째 날은 하나님께서 고치시되 아주 빠른 시일 내에 고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조금만 다쳐도 온전히 다 회복되는 데까지 전치 3,4주는 기본입니다.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 그 시간은 더욱 오래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빨리 고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틀 삼일 만에 다 고치실 수 있습니다. 종로3가에 제가 잘 아는 중고 카메라 수리점이 있습니다. 여기에 두꺼운 돋보기를 쓰신 한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겉보기엔 평범해 보이는데 알고 보면 보통 분이 아닙니다. 고장 나 장롱 안에 쳐 박혀 있던 수십 년 된 카메라라 할지라도 이 분 손에 들어가면 하루아침에 말끔한 새 카메라로 다시 태어납니다. 물건을 잘 만드는 사람은 위대합니다. 그러나 망가질 대로 망가진 것을 새것처럼 고쳐낼 수 있는 사람은 더욱 위대합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신 수선쟁이십니다. 하나님 손에 들어가면 아무리 상하고 망가졌다 하더라도 고치지시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찢으신 것은 하나님만이 고치실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생긴 문제를 다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치유할 수 없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임한 하나님의 징계는 회개와 하나님께 돌아옴을 통하지 않고서는 회복될 수 없습니다. 치유와 회복의 길은 오직 단 한 가지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길 뿐입니다. 요즘 시대 힐링(healing)이라는 말이 유행합니다. 어떤 사람은 여행을 통해서 힐링을 얻고자 합니다. 소문난 맛집에 찾아가서 맛난 음식으로 힐링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또는 달콤한 연애에서 힐링을 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힐링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돌아가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우리를 낫게 하십니다. 우리의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상처 난 마음을 부둥켜안고 신음하고 있는 인생들을 향해 간절히 부르십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가 살 길은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길 뿐입니다. "내가 길이다!"라고 생각할 때 멸망이고 죽음이요, "하나님이 길이시다" 생각할 때 구원과 생명입니다.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먼저 내가 하나님을 등지고 방황의 길을 고집했던 죄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나를 받아주실까 의심하여 망설이거나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소망을 두시고 고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싸매어 주실 준비가 다 되어 있으십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 우리가 돌아갈 길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마치 호세아가 고멜을 대신하여 빚을 다 갚아 주고 아내로 다시 영접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 죗값을  죽음으로 다 치르게 하셨습니다. 이로서 우리의 죄악과 허물이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누구든지 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긍휼의 표지입니다. 운명의 고통, 미움으로 인한 상처, 원망의 상처, 정욕으로 병든 내면, 실패와 좌절로 무너진 자아를 부둥켜안고 울던 어떤 죄인도 이 십자가를 의지하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예수님을 무덤에서 삼일 만에 일으켜 세우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도 일으켜 세우셔서 힘차고 박력 있는 인생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탈선과 방황의 길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 하나님께로 돌이켜 온전히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서 힘써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고 호소합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에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몰라서 자기 고집대로 살다가 망합니다. 만약 하나님께 돌아왔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여호와를 알기에 힘쓰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아는 것은 생명과 직결될 수 있습니다. 필립 얀시(Philip Yancey)의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하나님'이란 책에 이런 일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스페인의 선원들이 처음으로 대서양을 건너 남미 대륙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선원들이 탄 배는 아마존 강 상류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아마존의 강폭이 너무 컸기 때문에 선원들은 아직도 대서양에 떠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때 선원들 중 여럿이 죽었습니다. 죽음의 원인은 탈수였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짠 바닷물 위에 떠 있는 줄로 알았기 때문에 물을 떠 마실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지식이 없으니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풍부한 생수가 바로 곁에 있음에도 갈증으로 죽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세상에 지식은 홍수처럼 넘쳐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정말 많습니다. 전문 지식을 알아야 하고 국제 정세도 알아야 하고 뷰티 트렌드도 알아야 하고 연예계 소식도 좀 알아야 대화에 끼어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지식들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는 못합니다.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지식은 오히려 더 희귀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 지식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얼마만큼이나 알고 있을까요? 태평양에서 겨우 물 한 바가지를 퍼낸 것에 불과합니다. 광대하신 하나님의 신비에 대해 우리는 아직 너무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되 힘써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적당히 알 수 없습니다. 전심전력을 다해 하나님을 알기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여호와를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상처 입은 우리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기 위해 준비하신 두 개의 약이 있습니다. 바로 구약과 신약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공부하고 깊이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힘닿는 대로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힘써 알고자 할 때 우리에게 임하는 일 두 가지가 무엇입니까? 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첫째로 하나님은 새벽빛 같이 어김없이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한 가운데 있다 보면 이 밤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습니다. 새벽에 보초 근무를 서 본 경험이 있는 군인이나 밤샘 야근 알바를 해 본 분은 이 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벽이 되면 반드시 여명이 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힘써 알고자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어두운 삶 속에 반드시 찾아오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앞의 비는 10월 초에 내리는 이른 비를, 뒤의 비는 봄에 내리는 늦은 비를 가리킵니다. 팔레스타인은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건조한 기후대에 속해 있습니다. 이런 땅에서 한 해의 농사는 이른 비와 늦은 비 이 두 번의 비에 의해 결정이 납니다. 오랫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던 곳에 갑자기 억수같이 비가 쏟아집니다. 이 비 덕분에 뿌린 씨앗이 싹이 나옵니다. 또 한 번의 큰 비에 의해 식물은 열매가 자라고 영글게 됩니다. 힘써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자에게 은혜는 이렇게 임합니다. 오랫동안 영혼에 가뭄이 들어 도저히 회복될 것 같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는 가물어 메마른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쏟아져 내립니다. 단번에 영혼의 해갈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은 어둡고 메말랐던 제 인생에도 새벽빛처럼 봄비처럼 찾아 오셨습니다. 저는 날 때부터 몸이 많이 허약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밖에서 놀 때 술래는 항상 제 몫이었습니다. 특별히 깍두기를 시켜 주겠다는 동생들의 말에 더 크게 상처로 다가왔습니다. 게다가 유난히 피부가 까무잡잡했던 저에게는 별명이 하나 있었습니다. 당시 대히트했던 '뿌리'라는 미니 시리즈에 나오는 주인공 흑인 노예의 이름이었던 '쿤타킨테'였습니다. 중학교 때 하루는 발바닥 각질 제거용 돌로 살을 문질러 보았습니다. 그러나 피만 날 뿐 전혀 희게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다녔던 변두리 고등학교에는 유난히 거친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조폭의 행동대원인 아이들도 있었는데 가방에 사시미 칼을 넣어 갖고 다녔습니다. 저는 그 아이들에게 교실 안에서는 체육복과 도시락을 뺏기기도 하고 교실 밖에서는 돈을 강탈당하기도 했습니다. 거친 아이들을 다루는 선생님들도 거칠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날 교실이 너무 어두우니 불을 켜고 공부하자고 선생님께 건의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다짜고짜 앞으로 나오라고 하시더니 허리춤에서 혁대를 푸셨습니다. 그리고 그 혁대로 사정없이 저를 내리치셨습니다. 저는 그때 혁대는 소리만 클 뿐 별로 아프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무섭고 세상이 무서웠습니다.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목을 넣은 거북이처럼 누구도 믿지 않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고 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대학교 1학년 때 목자님을 보내셔서 저의 마음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좀처럼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목자님의 과도한 친절에는 무슨 꿍꿍이속이 틀림없이 감추어져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런 저에게 서서히 말씀이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2학년 봄에 요한복음을 공부하는데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니고데모에 대해 공부하면 니고데모가 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고 사마리아 여인을 공부해도 꼭 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살던 제가 얼마나 깊이 병든 자인지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내 마음대로 살고자 했던 교만과 죄악이 세상과 나를 이렇게 상처투성이로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갈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마치 혁대를 풀어 저를 내리치셨던 선생님처럼 인정사정없이 저를 심판하실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때 저에게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저는 사랑을 믿지 않았었지만 사랑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외아들을 주셨는데 더 이상 다른 증거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이 사랑이 저에게 임했을 때 제 마음 속에 깊숙이 팬 상처들이 아물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가시나 껍질이 필요 없었습니다. 저는 웃는 것은 적에게 약점을 보이는 것이라 생각하여 절대 웃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나니 이유도 없이 자꾸 웃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번에 말씀을 준비하며 힘든 점 중에 하나가 이제는 제가 은혜로 깨끗하게 치유가 된지 너무 오래 되어서 과거의 어둡고 메말랐던 삶이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제가 한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한 가지가 있다면 매주 한 편의 소감을 쓰면서 힘써 하나님을 알고자 한 것뿐이었습니다. 말씀이 저를 치유했고 변화시키고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삶을 살게 해 주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과거 저처럼 방황하고 어두운 인생을 사는 이들을 향해 호세아처럼 이렇게 외치는 목자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돌아가자.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상처를 부여잡고 평생 자기 세계 속에 갇혀 살 수 밖에 없던 저를 부르셔서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 찬송 드립니다. 제가 앞으로 호세아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 돌이키는 역사에 쓰임 받는 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결혼을 통해 인생에서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상처를 통해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두 손과 두 발에 못이 박히시고 옆구리에 창에 찔리신 그분만이 우리를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학생 수양회에 온 우리 모두가 이 예수님 앞에 나아가 상처가 치유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죽으신 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주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여 힘차게 일어날 새 힘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힘써 하나님을 알아감으로 세상 그 누구보다 은혜가 풍성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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