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
말씀 : 호세아 14:5-7
요절 : 호세아 14:5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제 주변에 인터넷 게시판 아이디로 '사랑나무', '뿌리깊은나무' 등등 무슨 무슨 나무라고 쓰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이를 볼때 사람들은 나무와 같은 인생 살기를 사모하는 것 같습니다. 나무는 어떻습니까? 자라서 탐스러운 열매를 제공합니다. 가을에 먹는 맛있는 사과와 배, 그리고 겨울에 많이 먹는 귤이 모두 다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들입니다. 봄철에는 아름다운 꽃이 피어서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합니다.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와 철쭉을 보면 마음이 설렙니다. 또한 그 꽃에서는 사람을 매료시키는 향기가 납니다. 라일락 향기, 복사꽃 향기를 맡으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집니다. 한 여름철에는 시원한 나무 그늘을 제공해 줍니다. 깊이 내린 뿌리 덕분에 홍수나 산사태를 예방하는 역할을 합니다. 겨울에는 나무가 있어야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트리 없는 크리스마스 섭섭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나무는 우리가 숨쉴 수 있는 산소를 내뿜는 지구의 허파 같은 존재입니다. 심지어 베임을 당한 후에도 가구와 악기들을 만들 수 있는 질 좋은 목재를 제공합니다. 사람이 이런 나무 같은 인생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복 받은 인생입니까? 어디를 가나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무처럼 열매를 많이 맺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인격에서 은은한 향기가 나는 사람, 힘든 사람들이 와서 위로 받을 수 있는 나무 그늘 같은 사람이 그런 나무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을 나무에 비유할 때가 많습니다. 시편 1편에 보면 의로운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야곱이 열두 아들들을 축복할 때 요셉을 향해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에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호세아 선지자는 13장까지 이스라엘의 죄악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그에 따르는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14장 1절부터 4절까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올 때 어떤 복을 받게 될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부분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도 이스라엘을 나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어느 한 나무만을 지칭하지 않고 부분별로 여러 나무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꽃은 백합화 같을 것이라 하십니다. 뿌리와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을 것이라 하시고 가지는 감람나무처럼 아름다울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부위별로 각각 다른 나무들을 언급했을까요? 이는 각 부분별로 가장 좋은 나무들을 가지고 왔기 때문입니다.당시에 향기하면 백향목이 최고이고 가지하면 감람나무, 꽃하면 백합화가 최고였습니다. 이 셋을 한 나무가 다 가지고 있다면 최고의 나무, 나무의 끝판왕이라 칭할 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이런 최고의 나무 같은 베스트의 인생, 최고로 복 받은 인생을 살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이런 복 있는 인생이 될 수 있을까요?
5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하나님은 내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슬과 같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슬과 같으리라는 말씀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너무 약하다고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최고의 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소나기 같은 은혜가 임해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무언가 위로부터 쏟아 부어지는 은혜, 특별한 은혜가 임해야만 아름다운 나무가 될 것 같은데 이슬로는 너무 약해 보입니다. 그까짓 티도 나지 않는 이슬만 먹어가지고 언제 큰 나무가 될 수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내가 너희에게 소나기 같으리라 폭포수 같으리니 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슬과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슬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크고 아름다운 나무로 만들어 준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슬 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은혜입니다.
첫째로 지속적으로 임하는 은혜입니다. 팔레스틴 지역은 연간 강수량이 600미리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강도 없고 물이 잘 스며드는 토양의 특성상 저수지를 만드는 일도 매우 어렵습니다. 이런 이유로 팔레스틴은 물이 아주 귀합니다. 그래서 이런 지역에서는 이슬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밤과 낮의 일교차가 심해서 이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많은 이슬이 내립니다. 그 덕분에 이슬을 통해 채소나 곡식에 필요한 수분과 작은 짐승들이 섭취할 수분을 얻습니다. 우리들에게 때로는 불같은 은혜, 소나기 같은 은혜가 필요합니다. 가슴이 터지고 온 몸이 타오르는 듯한 은혜의 순간을 경험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불같은 뜨거운 마음을 유지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날마다 활활 불에 타고 있으면 기본 생활조차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자칫하다가 학생들은 학점이 펑크나고 학사들은 직장 생활에서 일을 못하고 아내들은 살림을 엉망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또 불이 식고 나면 급속도로 우울해지면서 깊은 영적 침체기에 들어가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매일 매일의 삶 가운데서 이슬과 같이 지속적으로 내리는 적절한 은혜가 필요합니다. 끊임 없이 유지되는 은혜가 있을 때 이런 지속적인 은혜를 통해 느린 듯 보이지만 조금씩 조금씩 성장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조용히 내리는 은혜입니다. 이슬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조용히 내린다는 것입니다. 집중호우는 요란하게 내립니다. 그래서 호우가 내리면 자다가도 깨어서 밖을 확인할 수 밖에 없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런 집중호우는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홍수가 나서 모든 것을 다 쓸어가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슬은 다릅니다. 온 세상을 소란하게 하는 큰 소리도, 차고 넘치는 충만함도 없습니다. 그러나 새벽이슬은 소리 없이 내려 온 세상의 생명을 유지시키며 소생케 하는 너무도 유용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슬은 생명, 부활, 젊음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자주 사용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양 중에서도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라는 가사가 여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강한 성령의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 누가봐도 은혜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표시나는 은혜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일상의 매순간을 살아가면서 조용히 이슬같이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런 은혜는 겉으로 보면 은혜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냥 덤덤해 보이고 크게 변화된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은혜가 쌓이고 쌓이면 어느 순간 소나기로 내렸던 은혜보다 더 큰 은혜가 임했음을 발견하는 때가 옵니다. 초목이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을 머금고 성장하는 것처럼, 우리도 소리 없이 임하는 이슬 같은 은혜를 받아 나날이 그 믿음이 성장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밤중에 내리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가지는 오해 가운데 하나가 밝은 낮과 같은 좋은 환경, 건강, 형통만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환란과 시험이 끝없이 밀려오는 인생의 깊은 밤, 연단의 고통과 두려움이 엄습하는 인생의 밤에도 우리에게 임합니다. 김민기씨가 작사작곡하고 양희은씨가 불렀던 '아침이슬'이라는 곡을 아실 것입니다. 그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몸에 설움이 알알히 박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밤새 맺힌 이슬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진주 같이 곱고 깨끗한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는 긴 밤을 지새우며 설움을 겪어 본 사람에게 임하는 은혜입니다. 오히려 한 낮에 내리쬐는 태양 속에서는 생기지 않는 은혜입니다. 우리에게는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보낼 때에만 형성되는 은혜가 있습니다. 겸손과 거룩, 인내와 소망의 열매는 밤 중에 내리는 이슬 같은 은혜를 먹고 자랍니다. 한 낮에 일할 수 있는 힘은 밤중에 내린 이슬 같은 은혜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지금은 연말입니다. 우리는 항상 연말에 요절 심포지움을 쓰면서 한 해를 정리합니다. 막상 요절 심포지움을 쓰려고 한 해를 돌이켜 보면 별로 쓸 말이 없다고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올해는 별로 특별한 일도 없었고 대단한 일을 성취한 적도 없고 작년이랑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순간, 불 같이 폭포수 같이 임한 은혜의 순간이 잘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있어도 몇 번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나는 올해 큰 은혜는 별로 없었구나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크게 성장한 것도 없고 달라진 것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게 꼭 불처럼 폭포수처럼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하고 대부분의 경우는 이슬처럼 임합니다. 그렇게 이슬처럼 임하는 은혜로도 충분히 크고 아름답고 열매 많은 나무처럼 복 받은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나무는 원래 천천히 자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여름철 소낙비를 맞고 하루만에 쑥쑥 자라는 식물이 있는데 우리가 잡초라고 부릅니다. 어떤 사람은 가슴이 뛰고 온 몸에 전율이 일어야 은혜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말씀 공부에는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해봐야 별 것 있겠어 하면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고까지 생각합니다. 그 대신 어디서 짜릿하고 뜨거운 은혜를 받을 곳이 없나 해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일상의 은혜를 소홀히 여기는 사람이 성장을 잘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오히려 업 앤 다운을 반복하면서 결국은 항상 제자리로 돌아오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별 감동 없이 몇 마디 적은 것 같은 일용할 양식을 통해서도 은혜를 주셨습니다. 매주 일대일 하고 소감 쓰면서 예배에 참석하면서 우리는 이슬처럼 임하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어쩌다 한 번 자극적인 외식을 즐길 수 있지만 삼시세끼 외식만 하면 건강을 해칠 수 있습니다. 52주 동안 들은 예배 말씀들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담백하고 건강한 집밥처럼 우리 영혼을 살찌게 하였습니다. 그런 일상의 은혜, 날마다 조용하게 내리신 은혜를 통해 우리는 지난 한 해 영적으로 자라고 더 깊어지고 풍성해 졌습니다. 또한 지난 한 해를 돌아볼 때 우리 삶에는 밝은 낮도 있었지만 캄캄한 밤도 있었습니다. 즐거운 일도 있었지만 슬프로 괴로운 일도 있었습니다. 얼핏 보면 낮은 은혜의 때요 밤은 은혜가 메마른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밤중에 이슬 같은 은혜가 진주처럼 알알히 맺히는 기간이었음을 생각할 때 또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일년 365일 은혜의 때가 아닌 적은 없었습니다. 불 같고 소나기 같은 은혜만 생각 하면 요절 심포지움을 쓰기가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슬 같이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쓸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조용하게 내린 그 은혜만으로도 자격 없는 우리에게 분에 넘치는 은혜를 누렸기 때문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이슬 같은 은혜를 날마다 우리에게 공급해 주심으로 성장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가 연말에 이슬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면서 감사와 기쁨이 흐르는 요절 심포지움을 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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