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서평

서평 ‘죽음의 취소’를 읽고

이창무 2015. 5. 1.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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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취소

저자
플레밍 러틀리지 지음
출판사
대서 | 2011-03-26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그리스도의 고난·죽음·부활에 대한 성경-신학적 설교와 강해『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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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죽음의 취소’를 읽고



죽음의 취소는 흔치 않은 여성 설교자의 설교집이라는 점에서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책을 읽은 후 느낌은 설교자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생겨난 특별함은 별로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여성 설교자이기 때문에 보여줄 것이라고 내가 예상했던 그런 특징들 - 예를 들자면 가벼운 터치, 생활 주변의 예화들, 가족에 대한 강조 –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고, 묵직하고도 진지한 전개 방식이 깊은 감명을 주었다. 여성 설교자에 대한 내가 가졌던 생각들이 일종의 편견이나 선입견일 수 있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도 드물게 여성 설교자로서 자기 영역을 구축하고 계신 분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표적으로 우리 학교인 백석 신대원을 졸업하고 우리들 교회를 시무하고 계신 김양재 목사님이 계시다. 그분의 설교는 대략 위에서 내가 언급한 여성 설교자의 특징들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우리 나라의 여성 설교자들 중에서도 저자인 러틀리지처럼 묵직하고도 주제의식이 돋보이는 그런 설교를 하는 설교자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본다.


죽음의 취소는 종려주일부터 성령강림절에 이르는 교회력에 따라 행해진 설교를 모아 놓은 책이다. 교회력을 면밀하게 따라간 설교들이란 것 자체가 나에게는 생소하다. 내가 속했던 교회에서 교회력 상의 절기로 중요시하기고 그 절기에 해당하는 설교를 한 경우는 오직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세 가지 경우 밖에 없었다. 그러나 본서에는 종려주일, 고난주간의 매일의 설교, 부활절 설교, 부활절 후 오순절까지의 설교 등 철저히 교회력에 따라 설교하고 있다. 특히 고난주간과 부활절 주간에 매일 매일 행해진 설교가 인상이 깊다. 무엇보다 과연 저 설교를 누가 들으러 왔을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 책의 모든 설교가 다 제법 무거운 설교이기 때문이다. 기간에는 교회에 매일 와서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설교도 행하여졌을 것이다. 우리 나라 교회에서 자기 교회를 복음적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교회는 드물 것이고 복음적이라고 하면 무엇보다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가장 중요시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이 책의 저자처럼 고난 주간과 부활 주간에 매일 설교한다고 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설교를 듣기 위해 모일지 잘 모르겠다. 혹시 복음적 복음적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우리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본서의 설교는 여러 시간 여러 장소에서 전해졌던 설교들의 모음이다. 그래서인지 내용 상 중복되는 부분들도 꽤 많이 있었다. 아마도 한 장소에서 계속 시리즈로 이어졌던 설교라면 이런 내용 상 중복은 피하려고 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중복 때문에 이 책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중복된 내용들을 통해서 나는 저자가 가진 관점과 주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설교가 본문을 일일이 풀어 설명하는 그런 강해 설교는 아니었다. 이점은 내가 좀 의아하게 생각했던 부분이었다. 왜냐하면 이 책의 번역자이신 류호영 교수님께서 평소 강의 시간에 성경 자세히 읽기를 늘 강조해 오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교수님께서 선호하시는 설교 스타일이 성경 본문을 자세히 풀어 설명하는 설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이 책을 읽어 보니 저자의 설교 스타일은 본문을 자세히 푸는 경우는 없었다. 그 대신 저자는 본문 속에 담겨져 있는 성경신학적 관점을 자세히 풀어 설명하였다. 강해 설교는 주석이 아니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설교집을 읽으면 내가 강해 설교에 대해 오해한 측면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조건 본문을 자세히 풀어 설명한다고 다 좋은 설교가 될 수는 없다. 설교는 주석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서 그 의미를 있는 그대로 발견하되 그것을 성경신학적 하나님 중심적인 관점으로 읽어 이를 청중에게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것이 더 중요한 강해 설교의 본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한 학기 동안 석의 방법론을 수강하면서 석의의 방법에 주로 치중하여 고민하고 생각해 보았는데 이와 더불어 성경신학적인 관점, 하나님 중심적인 관점을 배우고 싶은 열망이 이 책을 통해 생겨난 것은 나에게 큰 소득이었다.


이 책의 어쩔 수 없는 한계라면 저자가 살고 있는 미국인들의 삶 속에서 소재를 취하는 것으로부터 오는 생경함일 것이다. 해당 설교를 들었던 청중들에게 그 때 그 때 시의 적절한 소재의 채택으로 말미암아 설득력 있는 설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그리고 장소적 배경이 한국인 나로서는 낯 설게 느껴지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례들이 이 책의 전체적인 가치를 떨어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이런 점들이 설교자로서 준비하고자 하는 나에게 주는 시사점이 있다. 즉 설교 행위란 것이 결국 그 설교를 듣고 있는 청중들의 현재 삶과의 소통이라는 점이다. 내가 성경 해석학 총론이라는 책을 읽으며 반복적으로 들었던 말 중 하나가 바로 성경 본문이 그 당시 독자들에게 이해되었던 그 의미가 바로 성경의 의미라는 말이었다. 즉 본문의 의미는 삶의 지평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설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설교가 선포되고 있는 그곳에서 이뤄지는 삶의 지평을 떠나서 설교 행위란 허무한 것이다. 저자인 러틀리지가 평소에 자기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기독교적인 즉 하나님 중심적인 관점에서 이를 이해하고 해석해 왔었기 때문에 설교문에 이런 이해의 결과물이 반영될 수 있었을 것이다. 2012년 대한민국 서울이라는 땅을 밟고 서서 이 땅 위에서 호흡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설교를 통해서 과연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그리고 그 설교는 그들의 삶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가? 이 고민을 안고 나는 성경을 다시 붙들고 씨름하게 될 것 같다.


이 책의 저자가 가진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관점 중에서 가장 신선하게 느껴졌던 부분은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개인적 구원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우주적 차원에서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전에 내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대부분의 관점은 내 죄가 용서 받은 사건으로서 십자가 그리고 내가 죽음 이후에도 다시 살게 될 확증으로서 부활로서 이해하여 왔다. 그러나 러틀리지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있어서 그런 나 중심적인 의미를 배제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설파하고 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 속에서 우주적인 대변혁이 일어났다는 것, 무엇인가 결정적인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며 그 결정적인 어떤 일의 의미를 계속해서 탐구해 들어가도 있다. 그녀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어 있는 수많은 일들 가운데 심지어 종교와는 아무 관련 없어 보이는 정치나 사회 영역에서도 십자가와 부활이 가져다 준 새로운 일들이 우리의 눈을 어떻게 뜨게 하는지를 말한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며 그런 눈이 떠지는 것 같았다. 십자가와 부활이 해답이란 말을 무수히 들어 왔다. 하지만 우리 삶의 총체적인 면에서 해답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배우게 된 것이 큰 소득이었다.


다음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죄와 악에 대항하여 승리한 무기로서 강조하고 있는 점에 특별히 눈에 띈다. 여러 차례에 이 점을 러틀리지는 강조하고 있다. 십자가와 부활을 나의 구원 사건 관점에서보다도 하나님께서 죄와 악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셨는가에 더욱 집중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악이 가진 그 파멸적인 힘을 자신의 몸에 다 흡수해 버리심으로 소멸시키는 방식 즉 십자가였다. 이 같은 이해는 자연스럽게 신자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윤리 문제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는 아직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이 죄의 세력들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로서 그분이 하셨던 그 방식을 따라 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지 않은가? 우리도 더 이상 보복의 악순환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가 그 죄을 흡수하는 방식을 선택해야 함을 말해준다. 물론 우리는 그렇게 내상을 입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처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치유될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연합한 삶이리라. 정말 이런 삶을 실천하고 산다면 사람들은 우리를 이상하게 볼 것이다. 동시에 우리에게 와서 당신이 가진 소망의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게 될 것 같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처럼 그 소망의 이유에 대해 답변할 준비를 미리 해 두어야 하지 않을까? 그 이유를 이 책 죽음의 취소는 나에게 말해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특별히 나에게 큰 감명을 준 설교 몇 가지를 언급하고 마치고자 한다. 먼저는 2부에 있는 왕의 대속물이라는 설교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대테러 부대원이시면서도 스스로 인질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비유하고 있다. 참으로 기가 막힌 비유라고 느껴졌다. 가끔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런 장면을 보는 경우가 있다. 인질 협상을 하러 온 경찰관이 지금 잡고 있는 인질을 내보내고 대신 나를 인질로 잡으라고 말한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구나 하는 무릎을 치며 읽었다. 또한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설교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의 효력은 결코 크리스천들의 행위를 통해서 증명될 수 없습니다.” 이 말이 행함이 없는 크리스천들의 변명이나 핑계 거리가 될 수는 없겠지만 참으로 중요한 말이라고 느껴졌다. 현재 교회의 모습이나 신자의 삶이 비록 엉망일지라도 그리스도 대속적 죽음의 효력은 결코 취소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찢어진 마음’이란 설교에서 그분의 친구들이 결국 그분의 원수가 되었다는 말이 나를 아프게 건드렸다. 실제로 내가 눈으로 목격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면서도 동시에 나의 모습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텔스 폭격기’라는 설교는 정말 대단한 설교라고 생각한다. 거의 모든 내용을 밑줄을 쳐 가면 읽은 설교이다. 십자가에 대해 가졌던 나의 피상적인 인식을 한 차원 더 깊은 본질로 이끌어 준 설교이다. 또한 이 책의 제목과 같은 죽음의 취소란 설교는 우리 삶이 결국 죽음 문제를 외면하고서는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현실에 직시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었다. 부활 주간 이후 설교들은 부활을 믿는 자의 삶에 천착해 들어가면서 부활 신앙과 현재 신자의 삶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잘 예증해 보여 주고 있다.


앞으로 좋은 설교자가 되길 꿈 꾸는 나에게 죽음의 취소는 충격이면서 도전이 되었다. 피상적이고 얄팍한 설교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 마치 최동원의 직구처럼 묵직한 설교를 접하며 앞으로 내가 설교할 자리에 서게 된다면 나도 그런 성경신학적 기초가 탄탄한 설교를 해 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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