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서평

서평 - 역사의 거울 앞에서

이창무 2015. 5. 1.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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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거울 앞에서

저자
임원택 지음
출판사
UCN | 2012-03-10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중세 교회의 역사를 주제별로 묶어서 다루는 『역사의 거울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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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를 배우는 이유


- ‘역사의 거울 앞에서’를 읽고

올해도 어김 없이 여름이 지나자 각 교단별로 총회가 열렸다. 그 중에 장자 교단임을 자임하는 한 교단 총회에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했다. 교단 총무가 총회 도중 가스총을 꺼내 들고 대의원들을 위협한 일이었다.  또한 이번에 선출된 총회장은 룸살롱을 드나들며 접대부와 술을 마신 의혹을 받고 있다.  명예와 권력에 집착하는 목회자들의 문제는 이제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다. 우리가 중세 교회를 가리켜 교권주의에 물들어 부패한 성직자들이 지배했던 시기라고 알고 있다. 개신교는 이를 개혁하려는 열망 속에서 탄생했다. 그런데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현재의 개신교가 과연 중세 교회와는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어노인팅(Anointing)이라고 불리는 워십팀이 있다. 지금까지 한국의 워십팀 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팀이다. 이 팀의 8집 앨범 중에 ‘구주를 생각만 해도’라는 곡이 있다. 새찬송가 85장의 곡을 편곡해 부른 곡이다. 장중한 베이스 솔로로 시작하는 이 곡을 들으며 벅찬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이렇게 아름다운 가사를 지은 사람이 누구인가 조사해 보니 성 버나드 혹은 클레이보의 버나드(Bernaed of Clairvaux, 1090-1153)라고 알려진 11세기 사람이었다. 이런 깊이와 영성이 있는 찬송 가사를 지었던 버나드가 살았던 중세 교회를 과연 암흑의 시대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최근 교회 세습 문제로 교계가 시끌시끌하다. 이미 세습을 했던 한 감리교 목사님은 신문에 세습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광고를 내기도 하고  한기총 회장을 두 번씩이나 했던 목사님이 담임하는 한 대형교회에서 세습을 결의했다는 소식이다.  이 때문에 로마 카톨릭에서 시행하고 있는 성직자의 독신 의무에 대해 관심이 생겨나고 있다. 그 뿌리를 살펴 보면 중세 교회에서 성직자가 교회를 자녀에게 세습해 주려는 의도를 사전에 철저히 막기 위해 방편 중 하나로 독신 제도를 세웠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루터가 결혼을 해서 종교개혁의 의지를 외적으로 천명한 사건을 떠올리며 중세 교회의 독신 제도를 부정적으로 보아왔던 것 같다. 그러나 세습 문제가 이슈화되는 정황 속에서 독신 제도를 도입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 교회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과연 우리 개신교인들은 중세 교회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역사의 거울 앞에서’는 임원택 교수님이 중세교회사 이야기이다. 역사의 거울은 여러 시대가 다 해당될 수 있는데 왜 하필이면 중세 교회사일까? 개신교인들은 초대교회사, 종교개혁사, 근대 부흥운동의 역사 등에는 비교적 친숙하다. 그러나 중세 교회사는 잘 모르고 관심도 별로 없다. 왜냐하면 중세 교회사는 곧 로마 카톨릭의 역사이며 개신교와 무관한 역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이런 상식적인 생각이 얼마나 무지한 생각인지 발견했다.

첫째로, 오늘 한국의 개신교는 중세 교회사의 모습이 재현되고 있다. 이 책은 각 장 별로 앞 부분에는 중세 교회사에 대한 서술로 뒷부분은 한국 교회의 현실에 대한 분석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구성을 통해 극명히 드러나는 것이 중세 교회가 이미 우리 가운데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교권주의, 교회의 분열, 정치와 결탁하는 종교, 성직자의 부패와 타락 등등 과연 중세의 이야기인지 교계 신문을 읽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두 시대는 겹쳐서 보인다. 막연히 개신교는 중세 교회와는 다르다는 생각만을 고집한다면 우리가 처해 있는 이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 중세 교회가 비판 받고 개혁되어야 마땅했다면 지금 우리 한국 교회도 역시 비판을 받고 개혁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둘째로 중세는 교회사적으로 볼 때 암흑의 시대만은 아니었다. 거의 천 년이나 되는 중세 시대 내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그저 내버려 두고만 계셨을까? 그 시대 속에는 물론 인간의 죄와 부패로 말미암은 어두움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시고 새롭게 하시는 빛이 비추이기도 한다. 이 일에 대해서는 대속 교리의 심화,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개혁 운동, 교회의 구제 기능 확대, 정교한 신학 체계의 수립, 데보치오 모데르나(devotio moderna) 운동과 선구적 종교 개혁 운동 등등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중세 교회는 오늘 개신교에 수많은 영적 유산을 남겨 주었다. 목욕물을 버리려고 하다가 아기까지 버리지 말라는 유명한 속담이 있다. 이처럼 중세 교회의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린다면 그 소중한 유산마저도 버리게 될 것이다. 아름답고 훌륭한 중세 교회의 유산을 잘 발굴하고 계승한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해 질 수 있다.

셋째로 중세는 개신교인들에게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중세 교회가 타락하고 부패했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심지어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반동 종교 개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중세 교회가 왜 부패하고 타락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과 이해가 있느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 중 하나는 중세 교회의 지도자들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약점과 허물과 죄성(罪性)을 가지고 있었고, 동시에 바르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열망도 있었다. 당시 상황에서 나름대로 선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결정한 일들이 후에 예기치 않은 부패와 타락으로 이끌어 간 경우가 많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개신교에서 거부하는 성화(聖畵)나 성상(聖像)은 당시 높은 문맹 상태를 고려해 복음을 쉽게 전달하고 이해시키고자 하는 숭고한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를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가 좋고 선한 의도를 가지고 행하고자 하는 일들이 후에 보면 그릇된 신앙의 길로 이끌게 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중세 교회라고 해서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볼 것이 아니라 당시 교회가 어떤 배경과 상황 속에서 그런 모습으로 흘러가게 되었는가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해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세 교회사를 비롯한 교회의 역사를 왜 배워야만 하는가?

첫째, 교회사는 오늘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 는 전도서의 말씀처럼 오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 현실은 과거 어디에선가에서 이미 유사한 상황들이 있었던 적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럴 때 단순히 현재를 바라보기보다는 과거를 들여다 볼 때 현재의 모습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현재는 우리들의 욕망이 투사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과거에 대해서는 일종의 거리 두기를 통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가 더 수월해 진다. 이제 과거의 역사는 다시 현재를 비추어 주는 거울이 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렇게 역사의 거울에 현재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이 될 수 있다. 역사의 거울은 가감 없이 현재의 추함과 역겨움을 그대로 비추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을 비추는 용기를 가진 자만이 역사로부터 지혜를 배워 과거의 동일한 오류를 다시 반복하지 않고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교회사는 오늘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역사를 통해 단지 오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으로 그치지는 않다. 교회사를 통해 과거 교회들이 현재와 비슷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을 때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했던 다양한 시도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중에서는 그 문제에 대한 적절하고 바른 해답으로 입증된 것이 있을 것이고 오히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어렵게 만든 부적절한 시도들도 있을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교회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역사라는 섭리의 장을 통해 무엇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 것인지 아닌지를 드러내셨다고 믿는다. 개인적으로 대학생 선교단체에 몸 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제 7 장 중세 수도원 운동과 수도원 쇄신 운동에서 큰 유익을 얻었다. 모달리티(Modality)와 소달리티(Sodality)의 상호 보완적 관계 속에서 결국 모달리티를 세우고 돕는 소달리티의 역할에 대해 깊이 공감하게 되었으며, 현재 사역의 방향성을 재정립할 수 있었다.

셋째, 교회사는 오늘 우리가 가진 것들의 뿌리와 정신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신앙의 자산들을 물려 받아 풍요를 누리고 있다. 예배 의식에서, 신학에서, 교회의 체계에서, 전례와 규범 등에서 과거의 유산이 아닌 것이 거의 없다. 그런데 그 유산이 가지고 있는 본래적인 의미를 확실하게 알 때 더욱 풍성히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본래적인 의미 즉 뿌리와 정신을 알기 위해서는 교회사를 상고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예를 들자면 지금 우리가 매주 예배에서 고백하는 사도 신경은 어떻게 왜 만들어졌는지를 알고 고백한다면 모르고 고백할 때보다 더 풍성한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는 학도들로서 개혁주의가 어떤 역사적 배경 가운데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를 이해한다면 현재 배우고 있는 내용들이 왜 중요하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즉 교회사를 배움으로 우리는 형식주의 신앙으로 빠져들지 않고 형식 속에 담긴 풍성한 의미와 정신을 되살릴 수 있는 것이다.

‘역사의 거울 앞에서’를 읽으며 다른 교회사 관련 서적을 읽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매 장마다 현재 한국 교회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 함께 제시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역사는 현재와 무관하지 않으며 현재를 비추어 주는 거울이라는 점을 배우게 되었다. 교회사에 대한 무지로부터 깨어난 목회자와 성도들이 많아져서 한국 교회가 처한 이 험한 상황들을 헤쳐나갈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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