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서평

서평 ‘첫째는 유대인에게’

이창무 2015. 5. 1.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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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첫째는 유대인에게’


서론

‘첫째는 유대인에게’는 2000년 미국 뉴욕과 플로리다에서 “새 천년, 첫째는 유대인에게”라는 주제로 열렸던 학술대회의 결과물들을 취합하여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다양한 주제들을 포괄하고 있으나 이 책의 주제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전통적인 ‘대체 신학’을 비판하면서 ‘통일 신학’이라는 새로운 이해로 나아가자는 방향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대체 신학이라는 것은 신약 시대의 이방인 교회가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지위를 전적으로 대체했다는 사상이다. 이에 반해 통일 신학이란 이방인과 유대인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통일된 관점으로 바라보자는 관점으로서 유대인은 유대인만의 고유한 지위를 여전히 누리고 있다는 사상이다. 이와 같은 주제를 중심으로 성경, 신학, 선교 세 가지 영역에 걸쳐 유대인 선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모두 영미권의 신학자들로서 그들의 문화적 관점에서 유대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변에 실제로 유대인 공동체를 이루고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목격하기도 하고 이러저러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나고 있는 사람들이다. 또한 그들의 조상들의 역사 즉 서구 역사에서 유대인 문제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있으며 특히 2차 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의 문제는 서로에게 쉽게 씻을 수 없는 큰 상처와 흔적을 남겼다.

반면 한국인인 나로서는 유대인에 대한 접근이 그들과 동일할 수 없다. 성장 과정에서 주변에 유대인을 직접적으로 만나 본 경험은 전무하다. 학교 교육이나 책, 뉴스 등으로 간접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체험을 해 왔다. 특히 기독교인으로서 유대인에 대한 대부분의 인상은 신구약 성경으로부터 기원했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 한국인으로 유대인에 대한 감정은 양극단적인 감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듯하다. 긍정적인 감정으로는 각 분야에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대한 부러움과 함께 그들의 성공 비결에 대한 관심 특히 유대인 교육 부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또한 유대인의 역사와 한국의 역사 간의 크고 작은 유사점들 즉 약소국민으로서 강대국 사이에서 수많은 외침에 시달리면서 독립 국가를 이뤘던 점들이나 세계 각 곳에 흩어져 나름대로 자리를 잡는 억척스러움 등에서 유사점을 느끼면서 동질감을 갖게 되는 것 같다. 반면에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국제 뉴스를 통해 전해지는 아랍 국가들과의 끊임 없는 반목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력 행위와 이로 인해 정치적 불안정, 그리고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에게 대한 탄압과 인권 유린 등으로 인해 생겨나고 있다. 또한 성경을 통해서 인류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핍박하고 탄핵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원죄를 지닌 민족으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런 긍정과 부정의 이미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에 대해 본서를 읽고 나선 느낀 본서의 장점, 문제점, 질문 사항, 그리고 건의점을 다음과 같이 기술해 보고자 한다.

논지의 장점

첫째로 유대인 선교의 필요성에 대한 근거와 공감대를 이루어내었다. 약 일년 전에 이스라엘에 거주하면서 예수를 메시야로 믿고 있는 메시아닉 쥬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인 ‘회복’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이 영화 속에서 메시아닉 쥬들은 정통파 유대인들의 끊임 없는 모진 핍박 속에서도 예수께 대한 신앙의 절개를 굳게 지키고 그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도 마치 군사작전을 방불한 듯한 전도 활동을 펼치는 모습에 큰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 이 영화가 유대인 선교에 대한 정서적 감성적 반응을 일으켰다면 본서는 유대인 선교에 대한 이론적 학문적 기반을 마련해 주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 측면들은 특히 이 책의 1부에 해당하는 성경편에서 잘 펼쳐지고 있다. 성경 편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본문은 바로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의 내용이었다. 전 인류의 구원에 있어서 유대인 구원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성경적 근거가 잘 설명되어 있다. 저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의 완성 즉 종말론적인 구원의 완성은 유대인의 구원 없이는 이뤄질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이 장에서 대체 신학이 가진 성경적 근거가 얼마나 희박하고 유기적 통일 신학이 가진 굳건한 성경적 뿌리를 재발견한 점이 유익하였다.

둘째로 개혁주의적인 신학 전통에서 유대인 선교의 중요성을 재발견하였다. 이 책을 읽고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개혁주의 신학의 틀은 사실 상 대체주의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그 대체주의가 세대주의와 대척점에 놓여 있는 개혁신학적 관점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개혁주의 칼빈주의 노선에 서 있는 신학자들 중에서 이런 대체주의 관점을 가진 신학자들이 많이 있었던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대체주의가 개혁주의 전통에서 볼 때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게 되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제 2 부 신학편에서 전반적으로 다뤄지고 있으며 특히 9장 ‘첫째는 유대인에게 : 개혁주의 관점’에서 잘 소개되어 있다. 아마도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세대주의와의 대결에서 개혁주의의 정당성을 변호하려고 하다 보니 대체주의 관점으로 기울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본래 개혁주의는 신약과 구약, 율법과 복음, 은혜 언약과 행위 언약 간의 유기적 통일성을 강조하는 사상이며, 이런 배경 하에서 유대인 선교와 이방인 선교라는 큰 두 축도 하나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통합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셋째로 유대인의 관점에서 유대인 선교의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유대인 선교에 관한 실천적인 문제들은 주로 제 3 장 선교 편에 나타나 있고 제 2 부 신학편의 전반부에서도 힌트가 될만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선교라는 것이 결국 선교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 성육신적인 헌신의 바탕이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면 유대인 선교에 있어서 유대인 자체에 대한 이해 없이 유대인 선교를 논하는 것은 빈말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유대인 편에서 유대인 선교에 대한 이슈들을 제기하고 검토했다는 것이다. 유대인이 기독교의 복음 전파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어떤 점들이 장애 요인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던 신선한 주제였다. 아마도 이런 주제에 대해 깊은 사고를 해 볼 엄두를 내지 않았던 것은 신약 성경을 통해 기독교에 대해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적대감의 원인을 이미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세기의 유대인이 21세기의 유대인과 동일할 수는 없다. 물론 1세기의 유대인과 현재의 유대인 사이에서는 문화적 사상적 연속성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 불연속성도 존재할 것이다. 불연속성이 생겨나게 만든 가장 큰 요인으로 본서는 히틀러 시대의 유대인 박해 및 학살 사건을 꼽고 있는 것 같다. 이 사건이 있기 전만 해도 유대인에 대한 기독교 전파가 어느 정도는 진척과 열매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 이후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에 실제적으로 건너기 힘든 감정적 골이 깊이 패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유대인 선교에 있어서 가장 큰 난제는 바로 전세계 유대인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긴 이 홀로코스트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오히려 이를 선교를 위한 다리를 삼을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서에서 이 문제에 대한 속시원한 대답을 들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적어도 그 문제에 대하는 유대인들의 생각과 감정을 읽을 수 있게 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문제점

첫째로 각 장과 유기적 연결 관계가 부족하다. 다양한 저자들이 본 서에 참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겨난 현상으로도 볼 수 있지만 각 장들 간 자연스러운 연결이나 흐름이 일어나지 못하고 어색한 경우가 종종 있다는 문제가 있다. 예를 들면 성경편에 6장의 예언자들의 메시지와 유대인 전도 부분과 선교편 13장 새 천년 유대인 전도를 위한 메시야 예언의 지속적인 중요성이란 부분은 서로 연관되는 내용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각 1부와 3부에 따로 편집되어 있어서 연결점을 찾아 읽어 나가기가 어렵다. 또한 내용 상 중복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 부분에 대한 해석 부분은 여려 장에서 빈번히 중복되어 언급되고 있다. 물론 이 본문이 유대인 전도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본문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반복해서 같은 작업이 이뤄지는 것을 볼 때 본문들이 사전에 짜임새 있게 조직화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반면 신학편에서 9장에서 개혁주의 관점을 10장에서 세대주의 관점을 언급한 것은 짜임새 있는 구성의 좋은 예를 보여준다.

둘째로 개혁주의와 세대주의 외의 관점들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유대인 선교 문제에 있어서 개혁주의와 세대주의 관점을 통해 접근한 신학적 작업은 매우 유익했다. 그러나 오늘 기독교계의 또 하나의 거대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오순절 운동 혹은 은사주의 신학에 기초한 관점은 전혀 언급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다. 선교에 있어서 오순절 계통의 선교사들이 기여하고 있는 바가 매우 크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남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선교에 있어서 오순절 선교의 기여는 주목할 만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오순절 운동이 유대인 선교를 바라보는 관점 그리고 유대인 선교에 기여할 수 있는 오순절 운동만의 특성에 대한 분석이나 이해 등도 필요하지 않은가 싶다. 아마도 이 책에서 이런 부분이 언급되지 못한 것은 개혁주의권과 오순절 은사운동 간에 뿌리 깊은 상호간의 불신과 암묵적인 반목이 빚어낸 결과라고 추측해 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 앞에 교파적 신학적 자기 이해를 앞세우기 보다는 하나되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셋째로 대체 신학에 대한 반작용으로 통합 신학을 강조하지만 실제적으로 이방인 교회와 유대인 교회가 어떻게 통합될 수 있는가에 대한 플랜이 없다. 본 서의 의도는 대체 신학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통해 유대인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라 본다. 그런 본 서의 의도에 충실하다 보니 빚어진 현상으로 유대인의 정체성 문제와 유대인 전도에 방점이 찍히게 되었고,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하나된 교회의 모습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이 결여되지 않았나 하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즉 선교로 인해 탄생할 유대인 교회는 이방인 교회와 무관한 독립적인 교회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는 하나의 교회 안에 있는 서로 다른 두 종류 구성원으로 자리 매김을 해야 할지 여부 등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전혀 없지는 않으나 빈약하다는 느낌을 전체적으로 받게 된다. 대략 본 서의 의도는 유대인 교회의 독립성을 더 지향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초기에 선교 사역을 수행할 사람들이 결국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중심 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이 주축이 될 수 밖에 없으리라는 점에서 이 부분은 좀 더 명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질문

첫째로 유대인들이 실제로 예수를 그리스도 즉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하다. 유대인 전도에 있어서 이 질문은 매우 실제적이고도 긴요한 질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구약 성경에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들이 가득하고 신약 성서는 이 예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우리의 구약 성경과 유대인들의 성경이 다르지 않을진대 어찌해서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의 성취로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가에 대해서 쉽게 납득이 가질 않는다. 메시야에 대한 예언들을 해석하는 기준이나 범위가 다른 것인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메시야에 대한 정의과 기준은 무엇인지, 유대인에게 복음이 전파될 때 나타나는 유대인들의 공통적인 반응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가장 적절하고도 효과적인 대응과 대답은 무엇인지에 대한 사항을 알고 싶다.

둘째로 유대인들과 아랍권 사이의 반목과 분쟁에 대해 기독교인의 바른 성경적인 입장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하다. 유대인들의 아랍권에 대한 적대적인 정책을 가리켜 성전 즉 거룩한 전쟁으로 보는 기독교인들도 있다. 반면 유대인들의 이런 정책이 항구적인 지구 평화의 강력한 위협 요소로 보며 호전적이고 적대적인 행위를 일삼는 비기독교적 행위의 전형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시각이 엇갈리고 있는 사한에 대해서 자신의 정치적 호불호나 이해타산적인 관점을 벗어나 성경적인 관점, 기독교적인 세계관에 기초한 관점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셋째로 구약의 제도들과 의식적인 율법들을 유대 문화의 일부로 취급하게 수용하게 될 경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 신자가 누리게 될 자유의 본질이 훼손될 가능성이 없는지와 하나된 교회로서 정체성을 유대 그리스도인과 비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할 수 있는지 여부가 궁금하다. 앞선 문제점의 세번째 사항과 연관된 질문이다. 본 서의 저자들은 대개 유대 문화의 특수성을 존중하면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관습들을 대부분 수용하는 방향으로 논지를 이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될 경우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는 신약 성경에서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과 예언을 성취하시면서 이제는 효력이 다해 버린 각종 의식법들이나 율법들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유대인 교회가 안식일 즉 토요일에 모여 그리스도께 경배하는 예배를 드린다고 할 때 전통적으로 주일에 예배를 드려 온 교회가 이 교회를 교회의 일원으로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런 유사한 사례들은 수 없이 많이 쏟아져 나올 수 있다. 이 때 하나의 교회됨을 위해 수용할 수 없는 부분과 수용 가능한 부분은 어디까지인지 그 경계와 범위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건의점

첫째로 각 저자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있었으면 좋겠다. 저자들에 대한 소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소개라는 것이 겨우 현재 공식 직함을 간략히 소개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이 중에는 월터 카이저 교수처럼 저명한 인물도 있어서 그 이름만으로도 그 사람이 누군인지 파악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상당수 많은 저자들이 이름과 단순한 직함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저자의 글을 읽을 때 그 저자가 어떤 신학적 입장에 있으며 어떤 사역을 펼쳐 왔는지를 알고 읽는 것이 이해에 큰 도움이 된다. 그런 점에서 각 장의 저자들에 대한 좀 더 상세한 이력과 소개가 있으면 좋겠다.

둘째로 최근에 신약 신학계의 주된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바울 신학의 새 관점 측면에서 유대인 문제를 다루는 관점이 보충되었으면 한다. 바울 신학의 새 관점에 따르면 신약 성경이 형성될 무렵의 유대교 신학이라는 것이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복음과 대척점에 놓여 있지 않고 상당히 유사점을 보이는 언약적 율법주의로 이해하고 있다. 만약 이것이 정당하고 바른 관점이라면 유대교 신학과 복음이 서로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 폭이 매우 확장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울 신학의 새 관점을 주장하는 신약 신학자들이 유대인 선교에 대해 어떤 관점과 이해를 갖고 있는지 소개하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셋째로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로부터 불건전한 운동으로 비판 받고 있는 신사도운동과 관련된 유대인 선교와의 입장을 분명히 해 주었으면 한다. 온누리 교회의 장로이신 송만석 장로님의 한이성경연구원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선교 운동에 대해 긍정과 부정, 격려와 비판이 모두 존재하고 있다. 본 서의 추천서를 써 준 김우현 감독이 이 운동과 연관이 있다는 말도 들린다. 또한 이 운동은 신사도 운동과 연관을 맺고 있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여기에 비판적인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주로 개혁주의 신학을 모토로 삼고 있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다. 이들의 유대인 선교 운동에 대해 어떤 입장과 자세를 취하는 것이 바른 입장인지 분명한 언급을 하지 않게 되면 신사도 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로부터 의혹의 눈초리를 사게 될 잠재적인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분명하게 입장을 표명할 필요가 있다.

결론

성경은 곳곳에서 한 집에 사는 삼대가 누리게 되는 축복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이 축복을 자기들의 삶의 중심에 놓은 민족이 바로 유대인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대가족 제도를 중히 여기며 삼대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하는 삶을 실천하려고 애쓰고 있다. 이런 삶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은 유대인이라는 혈통을 통해 전달된다는 생각이다. 이런 사상의 흐름은 개혁주의 교회에서 유아 세례라는 것을 통해서도 계승되었다. 유대인이라는 혈통은 그러므로 무의미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은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 구속 역사의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현 시점에서 특수한 지위를 갖고 있는 민족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한 바대로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결코 약속을 임의로 폐기처분하시는 분이 아니시며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들에게 주시고자 약속하셨던 축복을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그러나 그 축복은 반드시 또한 약속의 성취자이요 축복의 수여자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뤄지게 될 것이다. 모든 민족, 모든 방언, 모든 백성 열방이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이방인 교회 유대인 교회가 모두 하나되어 찬양하고 경배하는 그 날을 소망하며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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