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실천신학

목회자를 위한 교회론 정립을 위한 세부 요소들

이창무 2016. 12. 19.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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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김덕수 교수님이 쓰신 '목회자를 위한 목회적 교회론 정립의 필요성'라는 글에서 일부 발췌한 내용입니다.

조직 신학에서 교회론을 다루기는 하지만 목회 현장과 다소 동떨어진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김덕수 교수님의 문제제기가 앞으로 더욱 발전해서 꽃을 피웠으면 합니다.



목회자를 위한 교회론 정립을 위한 세부 요소들

  

하나님은 세상을 향한 자신의 목적과 비밀의 경륜이 무엇인지를 모두에게 밝히기 원하신다. 그런데 에베소서 3:9-10을 보면 심지어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를 알게 하시고 싶어 하는데, 무엇을 통해서 그 일을 하시고자 하는가? 바로 교회를 통해서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론이 중요한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목적과 경륜을 알리는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전통적인 교회론에서는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성전중심으로 살아라” 혹은 교회당으로 ‘오라’고 외쳤다. 그러나 세상과 공중 권세 잡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목적과 비밀의 경륜을 알리려면, 교인들이 교회 안에만 모여 머물고 있게 하면 안되고, 교회인 우리가 현장으로 가는 ‘가라’ 개념으로 목회가 바뀌어야한다. 그 때 사명과 파송이 의미를 찾게 되고 교회는 건강해 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 교회들처럼 높은 성벽을 쌓는 성전형 교회론을 극복하고 초기 교회의 사도들이 그러했듯이 모두가 복음을 들고 장터로 나갈 수 있는 교회론으로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

이제 목회자를 위한 교회론 형성을 위해 갖춰야할 구체적인 요소들을 한 가지씩 알아보도록 하겠다. 먼저

  

1. 분리적 교회론에서 세상 속의 교회론으로

이런 변화를 위해서는 교회를 정의할 때 지금까지 습관적으로 해왔듯이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로만 한정해서 설명하면 안된다. 교회는 에클레시아인데 그것은 헬라어 ek와 kaleo의 합성어라며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진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개념으로만 설명하기에, 교회는 산성처럼 세상과 유리된 것으로 교인들이 생각하게 되며 결국은 세상 속에서 교회는 고립화되어 버린다.

게다가 이런 분리적 교회론 개념으로는 우리 주님께서 주신 세계복음화의 대사명을 이루기 힘들다. 뉴비긴의 지적처럼 성령은 교회가 모든 민족을 복음에 순종하도록 데려와 현 시대를 그 절정에 도달하게 만드시는 원동력인데, 우리는 성령님을 우리 자신의 위한 초자연적 능력으로만 불러내고 세상을 향한 부르심에는 둔감하다. 그리고 교회가 할 일은 각 사람을 이 악한 세대에서 구출하고 다가올 세상을 위해 안전하게 보존하는 것 뿐인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

더 온전한 교회론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세상에서 불러내고 거룩케 한 에클레시아의 소명 개념과 함께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는 사도적이며 왕같은 제사장 사명과 파송 개념이 불러냄 개념에 합해져야 한다.

그래야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수도원적 관점, 속세를 떠난 산속의 절과 같은 고립문화, 탈 세상 개념을 극복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성도들을 세울 수 있는 하나님 나라 관점의 교회를 이루어갈 수 있다.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성벽과도 같은 성전 개념에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 개념으로의 폭넓은 교회관을 성도들이 갖게 하는 것이다.

이런 교회론에 이어지는 후속 관점(corollary)은 아마도 전도와 선교에 대한 새로운 사역방식일 것이다. 교회는 세상과 고립된 성벽이 아니고, 건물이 교회가 아니요 거듭난 사람들의 회집인 공동체가 교회임을 이해하게 될 때에 전도를 한다는 것도 사람들을 우리들이 앉아 있는 교회당으로 불러들이는 방식에서, 교회인 성도들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새롭게 되도록 돕는 것으로 제대로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목회자가 이런 교회론을 갖게 된다면, 더 이상 유명 연예인들을 초청하여 집회를 열고 선물을 준다며 추첨권을 돌리며 사람들을 성전으로 데려오도록 유혹하지 않고, 물 한 병을 들고 빵 한 덩어리를 사들고 그들이 사는 세상 속으로 성도들을 가게 만들 것이다. 세상을 교회로 오라고 외치며 오지 않는 사람들을 인해 불평하며 좌절하지 않고, 교회가 세상으로 가게 될 것이다(행8장). 즉 수동적인 ‘오라’ 목회에서 역동적인 ‘가라!’ 목회로 전환될 것이다.

  

성도들에게 성전 중심으로 살 것을 요구하는 분리 고립적 성전방식의 교회론에 기초한 목회를 하는 사람들은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거룩이 무엇인가? 그 거룩은 분리와 고립을 통해서 지켜지는 것인가? 애초에 우리가 지켜야 할 거룩을 갖고 있단 말인가? 어쨌든 그들은 성도들이 오염될 것을 두려워하기에 그토록 세상과 분리된 고립형 성곽형 교회론에 근거한 목회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유대교적 거룩 개념이다. 구약을 보면 부정한 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애썼다. 그렇지만 그것은 만방의 빛이 되기 위한 작은 불씨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지, 시간이 지나고 다 자라 열방의 등불이 되어야 할 때에도 계속 그래서는 안되는 한시적인 요구였다. 애초에 우리는 지켜야 할 거룩을 가지고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만남과 접촉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거룩을 유지하기 위한 수동적이고 고립적 교회론은 애초에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2. 내향적 교회론에서 외향성이 강조되고 내향성과 균형을 이루는 교회론

예수님은 새로운 차원의 거룩을 보여주셨다. 신약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거룩은 부정한 것을 접촉하면 내게 오염된다는 구약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개념이 아니라, 주님의 거룩이 부정한 것을 변화시켜 그것을 거룩하게 만드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직 말씀만으로도 능히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죽은 자를 살릴 수 있었지만, 병자와 더러운 귀신 들린 자에게 손을 얹고(막1:31,41 마8:15), 논쟁거리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지라도 죽은 자의 손을 잡아(마9:25) 살리시는 방식으로 자신의 거룩과 생명이 흘러넘쳐 부정한 것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방식으로 사역을 하셨다. 따라서 믿는 자의 공동체인 신약적 교회론은 내부 지향적인 것에 안주할 수 없고, 세상과 불신자들을 향해 열려있고, 밖을 향해 세상을 향해 나가는 외향성을 띌 수밖에 없다.

  

이런 외향성을 잃고 내부 지향적인 교회상을 갖게 된 출발점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교회를 에클레시아의 어근분석 방식으로만 설명해서 세상으로부터 불러낸 구별된 존재로 강조하는 것에 기인한다. 훌륭한 교회론에 대한 책 중 하나인 에드먼드 클라우니의 ‘교회’란 책조차 선교에 대해 말을 한다고 해도 흩어진 백성을 모으는(겔34;12) 자(다윗의 후손 왕이신 예수)로서의 교회를 잠시 언급하며 그것은 성부의 목적임을 지적하고, 그 분의 역사하심의 결과 완성된 모인 자로서의 교회만 강조하다가 마무리된다. 이것은 선교를 위해 필요한 교회의 초월적 정체성 때문이라고는 하나 어떻게 교회가 나가서 복음전파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지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어 실제로 그 일을 수행할 목회자들에게 도무지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분리되고 모인 자들의 교회에 대한 관념적 신학에만 사로잡히게 되면 선교조차 현실성을 잃게 되고, 그 결과로 교회는 믿는 자들끼리의 협동조합과 같이 기존 신자들과 제직들을 위한 쉼터요 낙원으로 흐르는 내향성에 머무르게 된다. 예배도 오로지 기존 신자들의 안락함과 틀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태도로 디자인하게 된다. 불신자들이 들어와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느끼고 그 앞에 무릎 꿇을 수 있는 역동적 예배, 초신자들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고 더 깊은 주님의 존전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열망을 심어주는 예배에는 관심이 없고, 기존 신자들과 오래된 제직들은 원하는 안정을 느낄 수 있는 틀에 박힌 예전에 머물기를 추구한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교회 자신을 설교의 중심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한스 큉의 조언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예배는 당연히 하나님 백성이 주님께 드리는 것이지만, 동시에 구도자도 불신자도 하나님을 만나고 찾을 수 있는 예배와 설교가 필요하다. 불신자와 구도자는 예배를 드릴 수 없으며, 예배는 믿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왜 구약에서도 이방인의 뜰을 두었으며, 어떻게 이디오피아 내시가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를 드릴(행8:27) 수 있었겠는가? 유대교조차 이방인과 구도자들에 대한 배려가 있었건만, 신자 중심의 내향적 개신교회들은 그것은 예배가 아니고 거룩성을 상실하는 것이라고 비난하며 자신들만을 위한 향연을 추구한다. 그 결과 그런 내향성만 있는 예배는 목회와 신앙생활에서도 계속 신자들만을 위한 프로그램 운영, 교회 주변의 어려운 이웃보다도 당회원실의 리모델링, 그리고 성도들끼리 먹고 마시고 야유회 다니는 것으로 이어지지, 하나님의 마음이 가있는 고아와 과부와 외국인 노동자들과 교회 주변의 굶주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향한 대외사역에는 무심하다. 그들은 멀쩡한 교회건물을 허물고 더 크게 짓고, 교인들을 위한 묘지 짓는 것에 몰두하지 선교는 요원하다. 이 모든 일은 우리 믿는 기존 신자들만을 위한 내향성 교회론 때문이며, 외향성 부족에 기인한다. 블러쉬도 지역교회의 삶이 너무 내향적으로 돌아서서 세계적 필요의 구조를 향해 외향적으로 흐르도록 그 방향을 거의 전환할 수 없게 되어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교회가 오직 우리 식구들끼리 잘먹고 잘 사는 곳으로 전락하면 안된다. 그래서 우리끼리 똘똘 뭉치고 우리끼리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막9:5)”라고 말하게 하는 것이 교회를 잘 세워간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것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일 뿐이다(막9:6, 눅9:33).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의 터요 위로의 장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아직도 이 우리에 들지 못한 양떼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알고 그들을 인도하기 위해 변화산상에 머물지 말고 주님과 함께 세상으로 내려가야 한다(막9:9). 그렇다면 예배학도 교회론도 달라지게 된다. 교회와 예배는 오직 신자만을 위한 것이란 그런 내향적 신학의 오류를 성경을 읽으며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때에야 교회는 세상을 향한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 있는 영향력있는 능력의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산성 쌓기 방식의 고립적이고 수도원적이고 믿는 자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내향적 교회관이 오늘의 교회를 무력하게 만든 것이다. 세상과 접촉하기를 두려워하며 교인들을 주7일 교회에서만 살게 하는 것이 거룩을 확보하는 것인 양 가르치는 교회론은, 성경도 신학도 하나님의 능력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대다수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내향성은 거의 유대교적 관념인데, 이런 성전 중심적 내향적 종교성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문제가 시작된 것이다. 사6:8;41:6-7;49:6등이 반복해서 보여준 것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모든 민족들의 구원을 위한 도구가 되게하기 위함이었는데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 지적이었다. 그들을 골라 뽑고 구별한 것도 그 작은 부족이 커져서 민족을 이루어 모든 민족을 위한 구원의 도구가 되기를 바랐던 것인데, 그들은 자신들만을 위한 성장으로 치달았던 것이다. 일단 큰 민족을 이루게 되면 누구나 그렇듯이 자신들의 우월성과 자부심만 한껏 고양되고 자기 보호적이 되고 그 다음에는 자기 덩치 키우기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혈통과 가문에 지배받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형성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새로운 가족(막3:31-35;엡2:11-19)이기에 본질적으로 내향적이지 않고 믿음을 전파하여 누구든지(막3:35) 새로운 가족을 이끌어 들이려고 하는 외향성을 띠게 되어 있다. 거기에서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 혹은 신약의 하나님의 가족 모두 등경 위의 등불이 되며 사명적 공동체가 되고, 그 때야 자연스럽게 사명적 교회(missional church) 개념도 귀에 들어올 것이다.

  

물론 성도들끼리의 교제와 공동체성 함양은 뒤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당연히 중요하다.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내향적 교회론과 외향적 교회론의 균형을 말하는 것이다. 다만 내향성 교회론에만 머물고 있기에 이 시점에서는 외향적 특성을 조금 더 강하게 강조한 것이다.

  

3. 단순히 정통교리의 수호자로 보는 수동적 교회론에서, 세상이 복음을 경험하는 장으로 내놓을 수 있는 능동적 교회론으로

  

교회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신학수업을 잘 받은 사람들은 또한 말씀의 참된 전파와 성례들의 올바른 시행과 권징의 수행이라고 대답하는데, 이것은 바른 교회의 표식일 뿐 그것이 교회의 본질과 가져야 할 특성의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설교와 성례와 권징만 있으면 교회가 할 일을 다 완수하고 있고 건강한 교회라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교회론은 잘 배웠지만 교회는 잘 세워가지 못하는 목회자일지도 모른다. 교회론을 이런 식으로 전개하는 것은 정통교회를 수호하고 보호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그것 역시 교회를 보호하는 데서 그치는 수동적 교회론일 뿐이다.

  

교회는 각종 이단과 험란한 세상의 위협 앞에서 내 새끼들을 잘 보호할 어항으로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없으면 세상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중요하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교회는 우리의 구주를 나타내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들어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이 시대 가장 탁월한 신학자 중의 하나인 하우어워스 역시 교회가 ‘윤리’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사람들을 이끌어 기독교적인 삶을 탁월하게 보여주는 인물과 만나게 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의 차별적 삶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경험시켜 주고,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보다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고 보람있게 사는지를,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교리로가 아니라 그 삶의 향기로 증명해줄 수 있는가? 그것이 교회이다. 이런 교회론을 가져야 교회가 세상을 바꿀 수 있고, 교회가 생명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4. 교리에서 멈추지 않고 실행이 있는 만인제사장적(모든 성도의) 사역을 하는 교회론

  

오늘날 개신교에서 교리적으로는 동의하나, 실제 목회적으로는 거절하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만인 제사장 교리(벧전4:10-11; 벧전2:5,9는 출19:6과 비교해 이해하라)이다. 그런데 모든 성도가 복음의 사역을 하지 않고, 사례비를 받는 안수받은 목사 한 두명만 사역하는 구조로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세계 복음화의 사명 성취가 어려울 뿐 아니라, 개 교회의 목회 구조나 사역에서도 문제가 발생하게 되어 있다.

  

행8:1-8을 보면 누가 사역을 할 때 사마리아성에 큰 기쁨이 도래했는가? 사도 한 두 사람이? 아니다. 행8:4을 보면 ‘그 흩어진 사람들’의 사역때문인데, 그들은 1절이 말하는 ‘사도 외의 다’에 해당한다. 즉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나가 말씀을 전하고 사역할 때 세상이 전복되는 것이다. 목사는 백성들을 훈련시켜 그들이 나가 사역할 수 있도록 구비시켜주는 것(엡4:11-12)이 사명이지, 교인들이 교회에 사람들을 데려왔으니까 목사 당신이 전도해 보라고 하고 앉아서 구경하는 방식이 아니다. 목사 혼자 전도하고 목회하고 북치고 장구치는 것이 성경적 목회 방식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가 커지면, 즉 구경꾼이 많아지면 기존 목회방식에서는 목사가 다 감당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혔다고 보기에 그 대안으로 부교역자 즉 또 다른 안수 받은 전문가를 써서 일을 시키는 방식으로 목회를 해 왔다. 그러나 교인이 늘어난다고 계속 부교역자를 충원해보라. 당회와 제직들과 교인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헌금을 인건비로만 다 쓰면 어떻게 하냐는 성도들의 항의를 받게 될 것이고, 담임목사는 재정부족으로 인해서 교역자를 계속 더 충원하지 못하고 멈추게 된다. 그러면 교인들을 돌보지 못하고 그저 주일 예배 참석시키는 것이 다인 목회를 하게 된다. 언제까지 이렇게 부교역자와 목사가 많이 있어야만 사역을 할 수 있는 교회, 그런 목회 방식에 매달릴 것인가?

종교개혁 때에 로마가톨릭으로부터 그렇게 반발을 받으며 외쳤던 만인제사장 교리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교인들이 사역을 할 수 있다고 믿지 못해서인데, 그것은 예배 중심 목회를 통해 성도들을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게 한 목회자 자신의 잘못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담임이 모든 것 다 손아귀에 넣고 참견하고 결정하고, 혼자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자기중심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우어워스와 윌리몬은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함께 이루도록 ‘안수 받은’ 사람임을 지적하며, 성직자가 행하는 치유와 상담, 증언, 말, 해석, 삶과 죽음 가운데서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기지 못할 일은 없다고 했는데 개신교 목사로서 그렇게 시행하지 않는 것은 교회론을 잘못 배운 것인가 아니면 잘못된 교회론을 배웠기 때문인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건강한 교회들의 특징은 안수 받은 목사 한 두 사람만이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만인이 아니라) 은사 받은 대로 보내심 받은 자리에서 함께 사역하는 특성을 보인다. 셀사역을 추구하는 교회들은 모든 성도들이 영적 아비와 어미 혹은 목자로서 돌봄을 제공하는 사역자로 일하는 교회론에서 출발한다. 이처럼 제자훈련 사역과 셀교회의 차이 중의 하나도 성도들을 목회자의 조수로 보느냐, 사역자와 목자로 세우느냐에 관계되어 있다. 전통적교회와 제자훈련사역을 강조하는 목회자들도 상당수가 성도들이 사역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평신도를 깨우고 만인제사장 사역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이 이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적 교회론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만인제사장 교리를 실제로 실현하여 모든 성도들이 함께 사역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전성도가 사역하고, 모든 성도가 교회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며, 사역의 주체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전임사역을 하는 목회자의 중요성과 질서를 무시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전통적 교회에서는 목회자나 교인들 양쪽 모두 이런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이 꿈꾸고 건강한 교회가 되는 핵심 사항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5. 교회는 전통적 의식과 행사 중심에서 돌봄과 사역으로! (돌봄과 사역 중심의 교회론)

비록 종교개혁의 기치중 하나가 만인 제사장교리이지만,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더 이상 구약 유대교의 제사장이 아니라 영적 아비요, 양들을 돌보는 목자임을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목회자들이 양들을 돌보기보다는 거대한 종교 조직인 교회를 운영하고 있다. 왜 그런 일이 발생했을까? 목회자 개개인의 문제가 많지만,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방치한 것은 그들이 신학교 시절 배운 교회론의 한계 때문은 아닐까?

전통적 교회론에서는 조직신학책에서 교회론에 대한 그리 많지 않은 페이지에서 상당부분을 성례에 할애해 다룬다. 예를 들어 루이스 벌콥의 『조직신학(개역판)』의 경우 상권과 하권 모두 합하여 1,115쪽의 분량인데, 그 중 교회론은 122쪽으로 조직신학을 기술한 것의 10.94%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조직신학 교과서들이 신대원에서 실제로 교회 사역을 준비하는 목회자를 세우기 위한 신학적 골격을 세우는 데에 효과적인 구성이라고 볼 수 있는지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당연히 모든 것을 수량으로 측정할 수 없지만 마음이 가는 것에 시간과 물질을 쓰는 것이 인간임을 성경은 지적한다.

그리고 성례에 대한 것이 64쪽으로 교회론의 52.45%에 해당한다. 조직신학 책이 목회학 책은 아니지만, 교회론을 다루며 목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사역의 핵심인 양들을 돌보는 목양에 대한 것은 거의 다뤄지지 않고 성례 교리 언급이 교회론 전체의 반이 넘는다는 점 역시, 목회 전반을 볼 때 균형 있게 기술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고통받는 하나님의 양떼들을 방치하고, 갈수록 목양보다는 건축과 자기 명예, 그리고 외부 집회와 교단 정치에 바쁜 목회자들을 보면서, 양들에게 꼴을 먹이고 양육하고 일꾼으로 준비시키고 무장시키는 사역에 대한 것은 물론, 지치고 상처받고 좌절한 성도들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에 대한 목자의 직무(목자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본을 따르는)에 대한 것도 균형 있게 서술된 교회론의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더 강하게 느껴진다.

목회자 양성에서 신학적 기초를 형성하는 조직신학에서 목양적 교회론이 제대로 다뤄지지 않으면, 교회가 커지면 부교역자 뽑아서 하면 된다는 세속적 경영사고와 양들을 볼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관리 행정하는 사고가 그 자리를 대치하기 마련이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성장의 주요 요인으로 여러 가지를 언급할 수 있겠지만, 표적과 기사와 같은 초자연적인 요소를 제외하고 목회적으로 볼 때는 그 교회 초기의 구역예배가 감당했던 목양적 요소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당시의 구역예배는 오늘날의 대부분 교회의 구역조직과 달리, 단순히 구역예배를 드리는 조직이 아니라 전도와 돌봄으로 특징지어진 목양적 심방사역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최근에는 전도와 돌봄이 약화된 타 교회의 행정관리 조직과 별로 다를바가 없어졌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목양적 요소의 중요성을 교회론에서 지적하고 부각시켜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학자가 아닌 교인들과 목회자들은 대개 교회를 전통적으로 다음 3가지 모델로 생각하는 경향을 많이 보인다.

첫째는 병원 모델인데, 교회는 상처받고 다친 영혼을 치유해주는 곳이란 생각이다.

분명히 일리가 있는 관점인 것은, 주님께서 마9:12에서 자신의 사역을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를 위한 의사의 기능으로 설명하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13절에서 부언했듯이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함임을 설명한 것이지, 그렇다고 구원받은 죄인이 계속 죄인으로 혹은 병자로 남아있는 교회상을 주님이 꿈꾼 것은 아니다. 교회를 이런 병원 모델로만 생각하게 되면 교회는 무력한 환자만 가득한 것을 당연시 여기게 된다. 그래서 모든 교인들은 항상 끙끙 앓고 자신들은 병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역동적인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기 힘들다. 이런 교회모델에서 목회자는 의사여야 하는데, 오늘날 목회자들은 그러면 의사처럼 고되고 길며 철저한 훈련을 받고 환자들을 돌 볼 준비가 잘 되어 있는가 자문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교회론은 학교 모델인데, 르네상스 계몽시대를 지나며 현재에 이르러 목회자들 사이에 가장 많이 받아들여진 모델이다. 이 관점에서 교회는 가르치면 되는 곳, 학교가 된다. 그 결과 교회는 교인들의 삶과 인격 문제에 있어서 취약하게 되었다. 목회자는 교수 혹은 학자란 자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과연 지식으로 사람이 변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삶의 변화에 무력한 교회를 낳게 만든 주범이 바로 이 교회모델이다.

세 번째 교회론은 조직 모델이다. 중세와 현대 사회에 이르러 특히 교회가 대형화를 추구하며 강화된 모델이다. 아무도 교회는 조직이라고 하지 않지만, 실제는 슬프게도 거의 대부분이 조직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이 현실임을 인정해야 한다. 교회는 잘 조직되고 교인들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돌리는 것이 목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교회 모델에서 목회자는 교황이나 기업의 CEO 역할로 자신을 파악한다. 이런 교회 모델에서 부교역자는 행정관리를 하지 사실은 진정한 목양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어떤 현대 중대형 교회들도 우리교회는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겠지만, 연중 교회 사역이 집회와 이벤트 중심으로 짜여진 것이 바로 교회를 이런 조직모델로 여기는 것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 대형 집회와 행사에 조직과 사람과 예산과 시설을 집중적으로 투입하는 것은 조직모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직으로 사람이 변하고, 교회가 진정한 기독공동체가 되는가? 그 결과 교회가 거대한 조직은 되었지만, 하나님의 가족 특성 즉 공동체성은 상실하게 되었다.

이런 전통적 교회 모델보다는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 다음 두 가지 모델이 추가되고 더 강조되어야 한다.

우선 사관학교 모델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론에서 전투하는 교회에 대해 언급해 왔다. 그런데 현실은 그것은 단순히 신학적 진술일 뿐, 전투하는 교회로 어떻게 준비시키고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선교학에서 영적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잘못된 길로 갈까봐 두려워하고 못하게 막을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대안을 제시할 때이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확장시켜가야 하는 사명을 갖고 있기에, 성도들을 영적 전쟁에서 싸워 이길 수 있는 군사로 훈련시켜(빌2:25; 딤후2:3-4, 몬1:2) 내보내야 한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은사대로 각자의 병과에서 세계복음화의 임무를 감당하도록 교회는 훈련소가 되고 목회자는 훈련에서는 조교의 역할을, 제직들을 장교로 훈련시키기 원한다면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목회자는 사관학교 교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항상 전투적이고 나가 싸우는 것만이 사명의 다가 아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가족이면서 서로를 통해 힘을 얻고 위로를 얻는 돌봄을 입을 수 있는 가정 모델도 있어야 한다. 전투하는 교회의 모델과 함께 이 시대에 전정으로 요구되는 것은 힘든 세상에서 지치고 상처받은 성도들에게 쉼을 제공할 뿐 아니라 돌봄이 있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교회론을 가정 모델로 보게 되면 더 이상 상하질서를 중시하는 계급적 리더십 혹은 제왕적 리더십은 설 자리를 잃고(막10:42)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셨듯이 섬김의 리더십(막10:45)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목회자는 이제 왕이고 제사장이 아니라, 아비와 어미이며 목자란 정체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목회할 때 교인들도 자신들이 직분자라고 다른 사람 위에서서 군림하지 않고 갈5:13말씀처럼 서로 종노릇하고 짐을 서로 지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것이다. 그것은 또한 교회의 치리 방식과 정치 방식도 달라지게 만들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개혁이다.

지난 Christendom 시대의 교회론은 말로는 부인했으나 실제로는 교회를 조직으로 보는 시각이었지만, 그 문제점을 절실히 깨달은 선한 목자들은 이런 돌봄의 목양이 있는 가족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20세기말에 가정교회와 셀교회 방식으로 그것을 실현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선상에서 이머징 교회들이 부상했고, 같은 맥락에서 그 다음으로 미셔널 교회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 모든 운동의 공통점은 교회의 본질인 돌봄을 제공하는 가정 모델을 회복하고자 함이다. 돌봐주고 세워주고 힘을 주는 가정모델은 험한 세상에 나가 싸울 수 있는 사관학교 모델과 병행되어야 할 일이고, 그런 균형이 잘 나타난 형태가 가정교회와 셀교회 혹은 사명중심의 교회(미셔널 교회의 본 의미이다)인 것이다.

  

  

6. 성경적 공동체 형성을 위한 교회론

  

이런 사관학교 모델로서 복음전도와 양육에 효과적이며 동시에 돌봄의 목양을 위한 가정모델로서의 교회론은 궁극적으로 교회의 조직이란 측면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의 본질인 공동체을 다시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공동체성을 구약과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사용한 용어는 하나님의 백성됨이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아들 딸 개개인이라는 의식 속에 있던 교인들에게 ‘백성’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될 때에 우리는 교회가 사회적 공동체 특성을 지닌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우리 목회자들이 주목하게 되는 것은 한 백성이 되는 데 어떤 희생이 따르는지를 알고 기꺼이 그것을 지불하려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가시적인 몸을 세우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누구나 교회는 조직이 아니요 유기체다, 혹은 교회는 공동체라고 말은 하는데, 공동체가 무엇인지 혹은 공동체 특성이 무엇인가를 물으면 답하지 못한다.

그 결과 대부분의 교회들은 덩치가 커진 것을 성공으로 여기고, 교인들끼리 서로에 대한 상호 책임성도 없고, 서로서로에 대한 돌봄(엡4:2,32; 골3;13;살전4:9)은커녕 목회자들마저 양들에 대한 돌봄은 없이 교회를 어떤 사업체처럼 운영을 한다(겔34:2). 이런 교회가 어떻게 언약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사회적 공동체성에서 유래된 성경적 공동체를 못 만드니까 그에 굶주린 사람들은 사이비 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성경적 공동체에 대한 연구는 로핑크(‘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분도출판사), 로버트 뱅크스 (‘교회 또 하나의 가족’, IVP; ‘바울의 그리스도인 공동체 사상’, 여수룬)같은 학자들은 물론 랄프 네이버 (‘그리스도의 몸’, 도서출판NCD)을 통해 수많은 저술들이 쏟아져 나왔을 정도로 중요한 주제로 부각되었지만, 교회론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그러다보니 자발적 공동체인 교회인데도, 기독교인 경영자들은 자신의 회사 직원이라는 이유로 억지로 끌어다 앉혀 놓고 그것을 전도라 혹은 교회를 세웠다는 착각 속에 빠지게 되었고, 목회자들은 억압과 통제로 교회를 끌고 가며 그것을 목양이라고 착각하고, 성도들을 획일화시켜 놓고는 하나가 되었다는 환상에 빠지게 되었다. 성경적 공동체는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Unity in Diversity)이지 획일화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기질, 은사, 특성 다른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잘 발휘해서 다양하고 창조적인 사역이 일어나게 하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해야지, 똑 같이 입고 똑같이 생각하고 똑 같이 말한다고 하나가 되고 가족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며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을 만들기 위해서는 교회론에서 공동체 측면을 성례 못지않게 충분히 제대로 그리고 목회 현장에 적용될 수 있도록 실제적으로 다루어줄 필요가 있다.

성경적이고 균형 잡힌 공동체론을 교회론에서 제대로 제시해주지 못할 때에, 교회의 목양적 특성과 돌봄이 있는 가정 모델을 취한 가정교회 운동이나 셀교회 운동은 이상한 공동체성을 갖게 된다. 그들의 교회론은 공동체성만을 강조하는데 앞에서 언급한 외향성 보다는 내향성이 강해져서 자신들끼리 똘똘 뭉치고 깊은 교제를 나누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이토록 강하고 끈끈하다는 점에만 자부심을 갖게 되는 폐쇄적 소그룹을 지향하게 되는데, 거기서 유사공동체의 문제점을 보이게 된다.

그 결과 가정교회 주의자들은 중국 지하교회 같은 성격만 연상하거나, 퀘이커교도나 워치만 니처럼 더 깊은 이해만을 추구하는 그룹이 생기고, 자신들을 둘러싼 세상과 구별되고 분리되기를 원하며 홈스쿨링을 강조하는 분리론자가 생기기도 하고, 기존의 건물, 조직, 서열 제도적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반제도적 성향자도 생기게 되었다.

이런 것을 보며 가정교회를 비난하고 셀교회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선에만 서있는 것 역시 잘못되었다. 그들이 그렇게 극단성을 띄게 되기까지는 전통적 교회론에 문제가 있고, 성장 지상주의로 조직화된 대형교회만을 추구하는 기성교회에 문제가 있는 것이며, 그들이 추구했던 교회의 공동체성은 옳은 것이므로 성경적이며 동시에 목회적인 교회론을 제대로 발전시켜주어야 할 것이다.

  

사실 신대원생들이 졸업하고 나가서 교회를 개척하려면, 우선 전도를 할 수 있어야 하고 (개인전도라도 대면전도 방식이 아니여야 하고, 기본적으로 관계전도와 라이프스타일 전도 방향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모인 한 두 사람에서 소그룹을 시작하여 가정교회를 형성하고, 그런 소그룹 혹은 가정교회모임이 여러 개가 생기면, 그들이 예배 처소의 필요를 절감해서 자발성과 헌신을 보일 때에 예배당 건물을 마련하는 순서로 가야 한다. 즉 처음부터 다짜고짜 없는 돈에 비싼 건물만 덩그러니 구해놓고 많은 비용을 들여 인테리어까지 해놓고, 그저 기도하며 하염없이 사람오기만을 기다리는 방식으로 하면 안된다. 이런 교회 개척 방식에도 교회를 성전개념이 아닌 공동체개념,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가장 근본적 기초공동체로서의 소그룹사역 혹은 가정교회 세우기 등을 해야함을 제대로 이해시켜주지 못하는 교회론은 목회적으로 현실성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불완전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런 공동체 신학이 없는 교회론으로 채워진 목회자들은 설교를 해도, 사람들을 많이 끌어모으기 위한 대중적 연설가가 되고 많다. 설교의 목표 역시 삶을 변화시켜 공동체를 세우기인데도 말이다. 하우어워스도 “그러므로 설교의 성패는 전적으로 기독교 공동체의 본래성을 회복하는데 달려 있다. 이 공동체는 우리 각 사람을 자기 자신의 독재자로 만들어 버리는 미국 개인주의의 숨막히는 폭정을 깨뜨리고 일어선 공동체다. 이 공동체는 우리 각자가 자신의 마음을 가꿈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름받음으로써, 즉 자신의 삶을 성도들(교회)의 권위에 종속시키도록 부름받으로써 세워지는 대안 백성”이라고 강조한 것도 같은 관점이다.

  

  

7. 생명체답게 자생적 배가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

그리스도의 생명이 넘쳐서 시작된 생명공동체인 교회라면, 시간이 지나면 자라고 자신과 같은 생명력을 가진 교회를 재생산하게 되어 있다. 크리스텐덤 시대의 대형조직체로서의 교회관을 가진 CEO 스타일의 목사는 자기 덩치를 키우고 자기 조직을 키우고 자기 건물을 짓는데 관심을 가지겠지만, 생명이 넘치는 성경적 공동체는 일정 규모로 커지면 끊임없는 자기 증식이 아닌, 자신과 같은 DNA를 가진 교회를 교회가 없는 곳에 분립 혹은 개척하게 된다.

이런 일은 목사의 명령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전도하고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 매력을 발휘해 불신자들이 달라붙는 영적 자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런 교회 재생산과 배가의 사역이 가능하려면 목회리더십 방식이 성경적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그것은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양육하고 세우고 교회를 만들어가는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교인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기는커녕 그건 불가능하다는 확신으로 뭉쳐있다. 그런 목회자의 교회에서는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없다.

  

즉 목사는 교회를 자기 왕국으로 키우는 것이 성공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사람들을 도와 그들이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에 따라 사역하여 교회를 세워갈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의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 이것을 목회리더십 혹은 건강한 교회 분야에서는 Empowering Leadership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12제자를 통해 그 일을 맡기셨고, 불완전해 보이는 그들을 두고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며 대담하게 맡기고 떠나셨다. 그리고 그 12제자들을 통해 주님은 그 일을 이루셨다.

사도 바울도 곳곳에 다니며 교회를 세우고, 또 다시 교회 없는 곳을 향해 떠나가 그곳에 교회를 세웠다. 언뜻보면 매우 무책임해 보이지만, 그 배후에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나 고린도 교회의 목자들이 결국은 교회를 세울 것이고 그 자생적 교회를 통해 복음화가 이루어질 것을 믿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엡3:10은 놀라운 교회론의 비밀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데, 그것은 심지어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이 바로 ‘교회’이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도(NIV는 10절을 His intent라고 시작한다)라는 점이다. 한 명의 위대한 목사가 아니라, 교회 곧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바로 그런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는 주체가 된다는 사실을, 이런 교회론을 목회자가 갖고 있지 못하다면 목사는 교회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게 만들지 못할 것이다.

이런 목회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세운 자생성과 생명력이 있는 교회의 모습과 본질이, 전통적 신학적 교회론이 보여주지 못하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성경이 보여주는 실제적 교회론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신학교가 그것을 보여주지 못하거나, 전통적 교회 속에서 교황적 목회 속에서 자라온 사람들은 그것을 답습할 뿐, 그 고리를 깨지 못해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가면 계속 그 짓을 하게 된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로 누군가 그 고리를 깨고 바른 교회론의 관점을 심어주고 그런 목회 리더십을 세워줘야만 해결된다.

  

  

8. 생명체인 교회의 라이프싸이클 이해 필요

  

교회가 무기체나 조직체가 아니라 유기체라면, 즉 교회가 생명체라면 모든 생명체가 겪는 라이프싸이클을 교회도 겪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현실적으로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하는 정도가 아니라 부인하고 싶어한다. 내가 세운 이 교회가, 이렇게 큰 교회가 사멸하고 죽다니 말도 안된다고 펄쩍 뛸 것이다. 그들은 “음부의 권세도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마16:18)”는 말씀을 들이대며 우리 교회는 영원할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면서 모든 목회자들은 불로장생을 꿈꾸던 진시황처럼 자기 교회만은 영생불사해야한다고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것은 선한 마음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말을 하겠지만, 혹시 욕심은 아닌지 자신의 마음 속을 깊이 통찰해 볼 필요도 있다.

이때 혼돈하면 안되는 것은 교회가 문닫거나 소멸할 수도 있다는 것은 하나 하나의 지역교회를 말하지, 그리스도의 몸 혹은 하나님의 교회가 망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그 교회 소위 우주적 교회, 불가견적 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까지는 영원할 것이다. 그 후에 하나님의 나라로 통합되는 것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차가 있을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 땅의 지역교회들은 유한하다. 개교회들은 개척에 의해 출생을 하고 자라고 갈등을 겪고 어느 정도 커지고 나면 정체하고, 그 고원지대를 지난 후에는 화석화되며 소멸하는 라이프 싸이클을 겪는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갖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것도 그러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때 교회를 세우는데 한 평생을 바친 우리 목회자들이 갖는 영생의 소망은 재생산을 통해 자녀 교회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우리 교회의 비전 DNA를 넘겨주는 것뿐이다. 교회를 개척해 잘 키우고 하나님의 다스림에 올려드려야지, 은퇴 후에도 자신의 통치가 영원하도록 만들려고 하수인 역할을 자처할 목사를 찾아 세운다거나, 아까워서 남 못주고 내 핏줄에게 주고야 말겠다는 것도 모두 욕심이요 죄이다. 한스 큉은 “이 마지막 시대에 자신이 일시적 잠정적 과도기적인 존재임을 망각하는 교회는 스스로 지나친 요구를 하는 교회”라며 지나가는 교회로서의 특성을 지적한 바 있다. 어떤 유명 목사의 유명 교회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거나, 이름을 걸고 있어도 명목만 유지하고 있는 소멸기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교회사 속에서 본다. 그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힘이 있을 때, 이런 목회 비전을 가진 자식교회를 많이 개척 배가시키는 것이 주님께서 만든 생명의 길이며, 그것이 바로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지만 많은 열매를 맺는 성경의 원리(요12:24)를 따르는 것이다.

  

9. 종말론적 목회와 사역을 위한 교회론

성경은 종말론적이고 따라서 기독교 역시 종말론적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도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일 뿐 아니라, 또한 새로운 성전과 제사장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모든 성도들이 새로운 하나님의 집을 이루는 것이다(벧전2:5, 4:17). 그렇다면 목회자들의 사명은 어떻게 새로운 하나님의 집을 이루고, 교회는 어떤 종말론적 대조사회의 성격을 세상 속에 증거할 것인지를 위한 목회를 해야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종말로부터 오시는 성령(행2:17-18)의 이끄심에 따른 사역을 해야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닮아 창조적 목회를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목회자들은 2천년 전의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많은 사람들은 500년전 종교 개혁 당시에 루터가 이렇게 예배를 드렸고, 칼빈이 저렇게 했다며 그 당시의 역사 자료를 연구하여 그 모습을 본받아야한다고 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성경신학적으로 우리는 종말론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목회를 하는 것이지, 과거를 복원해 역사 속의 것을 끄집어내서 잘 치장한 후 유리함 속에 넣어 전시하는 박물관을 만들라는 학예사의 사명을 받은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미국 풀러신학교의 조직신학교수였던 고 레이 앤더슨 교수는 목회의 기준점은 초대교회도 종교개혁 당시도 아니고 미래의 완성될 교회상인지를 잘 지적한 바 있다. 초기 교회와 종교개혁 당시의 교회를 연구하는 것은 선례(precedence)로서 가치는 있지만, 우리 마음의 우선순위(preference)는 분명히 종말의 완성된 교회상(엡1:13-14)임을 분명히 하는 종말론적 교회론이어야 한다.

그런 교회론이 제대로 형성되면, 목회후보생인 신학생들은 30년전에 개척하여 성공했던 선배 목사의 성공담에 매료되어 나도 저런 교회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3년 후 신대원을 졸업하고 전도사, 강도사, 부목사 시절을 지낸 후 담임목사로 사역하게 될 10여년 후의 사람들을 위한 교회를 대비하고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10년 후 우리가 목회할 사회는 과거의 연장으로서의 현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미래가 들어 온 것기에, 미래를 들여올 교회관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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