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실천신학

빌립보서 4:10-20 본문 석의 및 설교문 작성의 예

이창무 2016. 12. 18.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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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본문 : 빌립보서 4:10-20

I. 석의

1. 핵심 / 열쇠 단어 찾기와 용례 분석

본문에서 핵심 단어는 11절의 ‘자족’이라는 단어이다. 이 자족이란 단어는 성경에 빌립보서 4장 11절과 고린도후서 9장 8절, 디모데전서 6장에 걸쳐 단 3회만 등장하는 단어이다. 이들은 모두 바울 서신에만 나타나는 바울의 용어라고 할 수 있다. 한글성경에서는 각각 ‘자족’, ‘넉넉하여’, ‘자족’으로 번역하였다.

먼저 고린도후서 9장 8절은 6절부터 15절까지 헌금에 관해 단락 중에서 등장한다. 사도 바울은 자유 가운데 기꺼이 드리는 헌금이 참된 연보라고 말하고 있다. 고린도 성도들이 이렇게 즐겨 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들을 넘치게 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은 자족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고린도 성도들이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다고 언급한다. 여기서 넉넉하다라는 말이 자족이란 단어와 같은 뿌리를 가진 단어이다. 이 단락에서 자족이란 단어는 풍족함에서 오는 모자람이 없는 충분함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15절까지 내용 역시 하나님께서 모든 면에서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을 풍족하게 하실 것을 말하고 있다. 이 내용을 통해 볼 때 자족이란 없는 상태를 극기심으로 무작정 견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을 누리는 상태임을 알 수 있다.

디모데전서 6장 6절에서는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라고 하였다. 이는 앞선 5절에서 경고하고 있는 바 자족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 그리하여 이익을 추구하다가 다툼을 일으키는 사람들과 대비되어 나타난다. 여기서 자족하는 마음은 경건함과 깊은 관련을 맺으며 서술되고 있다. 자족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자족하는 마음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을 증진시킨다.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고 세상으로부터 독립한 사람이 자족하는 사람이다. 그 결과가 경건이라는 열매로 맺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성경에서 나타난 자족이란 단어의 의미를 살펴 보았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자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분명히 당시 헬레니즘 세계의 스토아 학파 사람들의 철학 사상에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는 자족의 개념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스토아 학파의 인간관에 따르면 인간은 격정이나 충동에 의해 자극을 받아 온갖 형태의 고통과 공포와 욕정을 낳는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행복하고 올바른 삶이란 바로 이런 격정을 다스리는 삶을 말하게 된다. 스토아 학파는 격정이 다스려진 고요한 삶을 자족한 상태로 가장 이상적인 상태로 보았다. 그들은 세상과 격리되어 명성이나 부나 건강,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초탈한 상태에 이르고자 했었다.

그러나 성경에서 나타난 자족의 개념은 스토아 학파의 자족 개념과는 다르다. 물론 외부의 조건이나 환경에 관계 없이 만족한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스토아 학파의 자족 개념과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위에서 고린도후서에서 언급한 대로 성경에서 자족은 결핍을 견디거나 초월하는 것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의 자족은 풍족함에 거하는 것인데 그 풍족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다. 또한 디모데전서 6장에서 말하는 자족의 개념을 살펴 보면 분리된 상태의 자족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즉 경건에 뿌리를 분 자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빌립보서 4장에 나오는 자족이라는 핵심 단어를 이해함에 있어서 스토아 학파 혹은 스토아 학파 이전의 견유철학자들의 자족 개념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바울 서신에 나타난 은혜 중심, 관계 중심의 자족 개념으로 이해해야 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2. 문장 구조 파악하기와 문장 구조 속에서 읽기

10. 

내가 크게 기뻐함은 

/주 안에서

[이유]

너희가 싹이 남이니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너희가 생각은 하였으나 

(너희가) 기회가 없었느니라

/또한 이를 위하여

11.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궁핍하므로

[위와 같이 말할 수 있는 이유] 

나는 배웠노니

/자족하기를

(내가) 어떠한 형편에든지

12. 

나는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나는) 알아 

/풍부에 처할 줄도

 (나는) 배웠노라

/일체의 비결을 

처할 줄 아는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13. 

내가 할 수 있느니라

/모든 것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14. 

그러나 

너희가 잘하였도다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너희도 알거니와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16. 

너희가 보내었도다

/나의 쓸 것을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17. 

내가 구함이 아니요 

/선물을

(내가) 구함이라

/풍성한 열매를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18. 

(그러나)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내게는) 풍부한지라 

내가 풍족하니 

/(내가) 받으므로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이는 제물이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 

나의 하나님이 채우시리라

/너희 모든 쓸 것을

/그 풍성한 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20.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아멘


(1) 11절과 12절에서 나는 배웠다는 말을 반복함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강조점을 통해 바울은 자족이 저절로 되어지지 않고 배워서 익힘으로 얻어지는 결과임을 드러내고 있다.

(2) 12절에서는 비천과 풍부, 배부름과 배고픔, 풍부와 궁핍이 서로 대조적으로 나열되어 극적 효과를 낸다.

(3) 12절에서 내가 안다에서 13절 내가 할 수 있다로 발전 혹은 확대되어 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4) 14절에서 ‘그러나’는 앞 부분의 자족에 관련된 개인적 고백 부분과 뒷 부분의 빌립보 교회에 대한 인정과 감사를 표현한 부분을 전환시킨다.

(5) 15절에서 ‘빌립보 사람들아’라고 부르는 장면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은 아니었지만 빌립보 교우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뜨거운 감사의 심정을 표현하기 위한 호격이라고 볼 수 있다.

(6) 17절에서 선물과 풍성한 열매를 대조시켜 자신의 의도를 확실하게 나타낸다.

(7) 18절 모든 것이 있고, 풍부하다는 표현으로 동어 대구법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3. 문맥 속에서 읽기

(1) 직접적 문맥 확인

본문의 앞 문맥을 먼저 보면 4장 1절부터 9절까지 빌립보 교회에 대한 당부를 주제로 하고 있다. 당부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빌립보 교회 내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두 여인에게 서로 용납하고 품으로라고 권면한다. 둘째는 염려 대신 기도할 것을 권면한다. 셋째는 바울의 교훈을 잊지 말고 행하라고 권한다. 바울의 표현은 부드럽지만 내면적으로는 당시 빌립보 교회 내부에서 벌어졌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일종의 해결책이자 질책을 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권면과 당부의 말을 하고 나니 바울의 마음 속에 자신을 돌보고 섬겨 준 빌립보 교회에 대한 감사를 표명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었던 듯 하다. 앞 문맥에서 나온 권면과 당부가 사랑에서부터 나온 것임을 분명히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빌립보 교인들 중에 바울의 의도를 오해하고 섭섭히 여길 사람들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본문의 바로 뒷 문맥을 보면 21절부터 23절까지 문안과 인사말이 있다. 본문이 실질적으로는 빌립보서의 마지막 내용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본문이 뒤 문맥과의 관련성은 없어 보인다. 본문의 마지막 절인 4장 20절이 송영으로 끝나면서 맺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편지 마지막 내용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빌립보서의 에필로그 성격이 있다고는 볼 수 있을 것 같다.

(2) 병행 본문 확인

본문과 관련되어 있는 빌립보서 부분을 찾아 보면 1장 3절부터 7절까지를 볼 수 있다. 이 부분은 편지 서두의 인사말 부분에 해당한다. 본래 편지의 서두와 결말이 서로 수미상관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경우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인사말 부분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한 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항상 간구한다고 말한다. 빌립보 교회가 복음을 위한 일에 어떤 일로 참여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하지만 본문을 볼 때 이 부분에서 말하는 복음을 위한 일이라는 것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위해 지원한 물질적인 후원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3) 성경 전체 병행 본문 확인

구약에서 자족과 유사한 의미를 찾아 보면 먼저 신명기 3장 26절에서 만날 수 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모세의 요청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너(모세)에게 족하다 고 말씀하신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모세에게 있어서 평생의 소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느냐 마느냐가 모세에게 있어서 삶의 만족과 무관함을 가르쳐 주신다. 모세에게는 구약의 모든 인물들 중에서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친밀하게 교제한 복으로 이미 충분한 만족을 누렸기 때문이다.

또한 잠언 30장 8절과 9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이 잠언은 아굴의 기도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지혜자는 자기 몫의 떡 즉 일용할 양식으로 먹고 살기에 충분한 삶을, 일종의 중도의 삶, 균형 있는 삶, 풍부하신 하나님 안에서 욕심 없는 자족의 삶을 간구하고 있다. 그에게 부유함이나 가난함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부유함이나 가난함이 죄를 잉태하는 조건으로 작용하여 범죄에 빠지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될 뿐이다.

또한 하박국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선지자는 외적으로 만족할 만한 조건들을 철저히 박탈 당한 상황 가운데 처한다 할지라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만족의 반응을 보이리라고 다짐한다. 그 이유는 나의 하나님이 계시며 그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이와 같은 고백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4. 나의 설교 본문 재구성

10. 

여러분이 나를 생각하던 것이(개정) 지금 다시 일어난 것을 보고(새번역)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합니다. 사실(사역) 여러분이 항상 나를 생각하고 있었으나(새번역) 기회가 없었습니다(개정)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개정)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압니다.(개정)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어떤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새번역)

13. 

내게 능력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공동번역)

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내 고난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습니다(사역)

15. 

빌립보 교우 여러분(새번역) 아시다시피 내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던 무렵 내가 마게도냐 지방을 떠날 때에 나와 주고받는 관계를 맺은 교회는 여러분밖에 없었습니다.(공동번역)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여러분이 한 번 이상 나의 쓸 것을 보내주었습니다.(사역)

17. 

나는 선물을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장부에 유익한 열매가 늘어나기를 바랍니다.(새번역)

18. 

그러나(사역)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합니다.(개정) 나는 여러분이 보내 준 것을 에바브로디도로부터 받아서 풍족합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향기이며,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입니다.(새번역)

19. 

그리고 나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광 안에서 그분의 풍요를 따라 여러분의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사역)

20.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립니다. 아멘(개정)


5. 본문의 역사적, 문화적 관련 사항 연구

본문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참고하기 위해서 먼저 바울에게 물질적 지원을 보낸 빌립보 교회의 지역적 특성과 감옥에 갇힌 바울의 형편에 당시 문화적 정황을 연구하기로 한다.

(1) 빌립보 지역

빌립보는 주전 365년에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필립 2세에 의해서 세워졌다. 빌립보라는 이름도 그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사도행전 16장 12절은 빌립보를 ‘마케도니아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고 소개하고 있다. 당시 마케도니아의 수도는 데살로니가였다. 누가가 빌립보를 첫 성이라고 부른 까닭은 빌립보라는 도시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특수성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 황제는 전쟁에 공헌한 장수들을 빌립보에 거주시켰었다. 그러한 이유로 황제는 빌립보에 사는 사람들에게 로마법 ’유스 이탈리쿰(ius italicum)‘을 적용받게 함으로써 빌립보사람들도 로마인들과 똑같은 법적인 지위를 누리게 하였다. 로마인과 같은 법적 지위란 당시 모든 로마의 식민지에 부과되던 인두세와 토지세의 감면과 사유재산과 자치권의 인정을 말한다. 그러한 이유로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 가운데 상당히 부유한 편에 속하였다. 어떤 성경해석학자들이 빌립보 교회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 사역 초기부터 바울의 재정적인 후원자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것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경제적으로 부유한 위치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경제적으로 자립이 가능한 교회였음을 보여준다.

(2) 사도 바울 시대의 감옥

과거에는 지금처럼 범죄자를 일정한 곳에 가두어 활동의 자유를 빼앗는 자유형이 원칙적으로 없었다. 주로 사형, 수족 절단 같은 신체형, 벌금형 등으로 범죄자들을 다스렸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의 옥은 지금의 교도소가 아니었다. 곧 감옥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집단으로 수용한 다음, 나중에 사회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일정 기간 교도하는 교정기관이 아니었다. 범죄자를 처벌하는 장소가 아니라, 사건이 밝혀지거나 재판관 또는 결정권자가 판결을 내릴 때까지 피의자 또는 죄인을 임시로 구금해 두는 곳일 따름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구치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감옥 제도나 건물이나 시설 등이 매우 간단하였다.

사도 바울 당시에는 공공질서를 해치거나 국익을 훼손시킨다고 간주된 이들이 감옥에 갇혔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투옥된 경우가 대개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사실 사도들의 복음 선포는 많은 경우에 즉시 투옥으로 연결되었다(행 4:3; 5:18; 12:4; 16:24; 24:27; 28:16). 그래서 특별히 사도 바울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다가 감옥에 갇혔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다(빌 1:13; 엡 3:1; 골 4:3 등).

신약성서 시대에는 이전 시대와 달리 제대로 꼴을 갖춘 시설물이 감옥으로 이용되었다. 감방도 여러 개가 구비되고 본격적 의미의 경비병 또는 간수들도 있었다(행 12:6; 16:24). 수인들은 대부분 사슬로 묶이고 발에는 차꼬가 채워졌다(행 16:24; 22:30). 그러나 감옥생활이 항상 엄격한 것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서 재판을 기다리며 일종의 가택 연금 상태로 지내면서 복음을 선포하였다(행 28:16).

감옥 음식은 물론 형편이 없었다. 잘해야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였다. 많은 수인들이 질병과 영양 부족으로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감옥과 관련해 성경에는 감옥에 갇힌 이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목소리가 비록 크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이어져 왔다.  마태복음 25장에서는, 감옥에 있는 이들을 찾아보는 일이 최후의 심판 때에 주님께서 사람을 판단하시는 기준 가운데 하나로 제시된다(36절). 그리고 누가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묶인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일이 메시야의 중요한 사명이라고 말씀하셨다(4:19).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은 히브리서는, 감옥에 갇힌 이들에 대한 배려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하는 형제애의 한 구체적 모습이라고 강조하였다(13:1-2).

6. 참고 문헌 조사

(1) 본문 11절의 ‘배웠다’는 말은 고대 신비 종교의 입문 의식과 관련된 용어이다. 다른 말로 치환하자면 가입하다 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이 이 용어를 선택한 이유는 자신의 자족함이 신비종교의 어려운 입문과정과 같이 철저하게 경험과 훈련을 통해 깨달은 것임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2) 본문 15절이 일어났던 시점은 바울의 제 2 차 전도여행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때가 마게도냐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한 시초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처음에는 아시아 지역으로 가고자 했으나 이리로 와서 도우라는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배를 타고 건너와 빌립보 지역에서부터 선교를 시작하였다. 마게도냐 지역에는 빌립보 교회 외에도 베뢰아와 데살로니가라는 중요한 교회들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이 남쪽 지역인 아가야 지방을 향해 선교 여행을 출발할 때 바울을 후원한 교회는 오직 빌립보 교회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3) 본문 17절의 ‘너희에게 유익이 되도록’이라는 말은 본래 상업 용어이다. 따라서 4단계 나의 설교 본문 재구성에서는 “여러분의 장부에 유익한 열매가 늘어나기를” 이라는 새번역을 따라 번역하였다. 18절에 빌립보 성도들이 보낸 지원금을 받아 풍족하게 되었다고 말할 때 풍족하다는 말도 상업 용어로서 자주 사용되는 말로 완불되었음을 나타낸다. 이 부분에서 바울이 의도적으로 상업 용어를 차용한 것은 바로 다음에 나오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라는 종교적 표현과 대비시키고자 함으로 보인다. 이는 바울을 도운 그들의 마음에 깊이 감사를 표현하면서도 더 이상 지원을 해 줄 필요는 없다는 의미를 완곡하게 전달한 것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다.

(4) 18절의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란 구약 배경에서 볼 때 속죄제의 제물이 아니라 감사 제물과 찬미의 제사를 의미한다.

7. 성서 신학적 검토

신약 성경 시대 도시민들은 물질이 가져다 주는 사치를 탐닉했다. 이런 배경 하에서 헬라 철학과 스토아 철학에서는 유물론적 자족 개념을 만들어 내었다. 스토아 학파의 자족은 어떤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견디는 것, 자기 의지를 따라 만족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성경적인 자족 개념은 이와 다르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바울의 자족 개념은 유물론적이 아니라 유신론적인 자족 개념이다. 또한 주변과 분리된 자기 의지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부터 나오는 자족 개념이다. 고린도후서 9장에서 자족 개념이 경건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도 자족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스토아 학파에서 자족 개념은 숙명 또는 일종의 체념과 같은 개념이었다. 그들은 인간으로서 주어진 한계와 환경을 받아 들이고 초조해 하거나 불안해 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자족은 이런 체념 혹은 숙명으로 인한 자족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바울은 본문에서 풍성함이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빌립보 성도들이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굳게 확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의 자족은 지금 당장 부족과 궁핍이 있을지라도 미래에 풍성하게 채우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종말론적인 자족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인간 스스로의 힘에 의해 자족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당시 신비종교의 입문의식에 사용하는 배우다라는 단어를 반복 사용하면서 자족이 자연스럽게 터득한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 형성된 덕목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 훈련은 ‘바울에게 능력 주시는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 속에 어떤 성격의 훈련인지 나타나 있다. 바울이 로마서를 비롯한 다른 서신서에서 지속적으로 강조해 온 그리스도 안에서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교리가 자족의 바탕이 되고 있다. 바울이 비천과 풍부에 모두 처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능력이 바울과 함께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에서 바울은 만유를 소유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풍부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자족할 수 있었다.

II. 설교 개요 작성

1. 본문의 메인 아이디어

성도는 풍부한 능력의 공급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상황에 있든지 자족하는 삶을 살 수 있다.

2. 본문의 석의적 개요

(1)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형편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10-13)

(2) 자발적으로 성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은 칭찬 받을 일이다.(14-17)

(3) 하나님은 성도의 필요를 풍성히 채우시는 분이시다.(18-20)

3. 설교 개요

(1) 주 안에서 마음을 받음으로 만족하십시오.

(2) 주 안에서 기꺼이 드림으로 만족하십시오.

(3) 주 안에서 어떤 형편에서든 만족하십시오.


III. 설교문

설교 제목 “당신은 현재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계십니까?”

1. 도입부

우리 교회 성도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다양한 상황과 조건 가운데 계십니다. 변호사분도 계시고 의사도 몇 분 있습니다. 재벌은 아니지만 작아도 견실한 회사를 직접 세워 운영하고 있는 분도 계십니다. 이런 분들은 생활에 여유가 있는 분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반면에 아주 어려운 생활을 하고 계신 분들도 있습니다. 가장이 쓰러져서 엄마가 힘든 일을 해 가면서 가계를 책임지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전세금을 빼서 빚 갚는데 쓰고 자기는 일하는 가게에서 먹고 자는 분도 있습니다. 똑 같은 월급쟁이라도 어느 회사에 다니느냐 어떤 직급이냐 따라 또 천차만별입니다. 사람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이 자기 삶에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대략은 알 수 있습니다. 얼굴빛에서 이를 감추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심방을 하거나 교제를 하면서 발견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삶에 여유가 있다고 해서 다 자기 삶에 만족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좀 많이 부족하게 사는 분이라고 해서 만족이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형편이 참 어려운 분들 중에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여러분들도 제가 누구를 말씀하고 있는지 여러분들 머리에도 떠오르실 수도 있겠습니다. 도대체 만족의 비결이 무엇일까요? 저는 사람들을 알아 가면 갈수록 더욱 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빌립보서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만족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과연 사도 바울이 말하는 만족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2. 전개

우리가 살면서 언제 만족을 느끼는가 가만히 살펴보면 선물을 받았을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선물이 아주 크고 가격이 비싼 것이라면 더 크게 만족할 수 있을까요? 작은 선물로는 작은 만족 밖에는 얻을 수 없는 것입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에게 무엇인가 흡족한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중에 필요한 물질을 보내 주었던 일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공공의 질서와 안녕을 해친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지금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당시 감옥 음식은 질이 형편 없었습니다. 겨우 죽지 않을 정도로만 죄수를 먹였습니다. 먹는 것 뿐이겠습니까? 잠자리나 의복이나 모든 것이 불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외부에서 사식을 넣어 주거나 필요한 물품이나 옷가지를 넣어 준다면 감옥 생활이 훨씬 더 편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수감 중인 바울에게 어느날 빌립보 교회에서 보내 온 돈과 물품들이 바울의 제자인 에바브로디도 편으로 도착했습니다. 덕분에 감옥 살림이 좀 펴졌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오랜만에 고깃국도 먹어 보고 따뜻한 외투도 걸쳐 보지 않았을까요?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도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15절에 보면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떠나 그리스 남쪽 아가야 지방이란 곳으로 선교를 떠날 때에도 바울에게 선교 지원금을 전달한 적이 있었습니다. 또한 16절에 보면 데살로니가 지방에 바울이 머무를 때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씩이나 쓸 것을 보낸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번 물질적으로 도움을 보내 온 빌립보 교인들에게 바울이 감사를 표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4장 전반부에서 권면과 책망의 말을 했기 때문에 순서상으로 봐도 감사를 표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무엇에 감사를 표시하는지 보십시오. 돈을 보내 주어서 감사하고 말합니까? 고기와 옷에 감사하다고 말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17절에 보면 바울은 선물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18절에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가 물질을 보내 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지금 크게 기뻐하는 것은 필요를 채워 줄 선물을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기뻐하는 이유는 10절에서 보듯이 빌립보 성도들이 오랫동안 바울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울을 생각했다는 말은 물론 바울을 연구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에 대해 깊이 관심과 애정을 두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감사한 것은 물질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의 따뜻한 마음을 보고 먹지 않아도 배부른 것처럼 만족했습니다. 무척 기뻤습니다. 그런데 기뻐하되 주 안에서 기쁘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빌립도 성도들에게 이런 따뜻한 마음을 주신 분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말고 어디에 있겠습니까? 만약 빌립보 성도들의 바울을 향한 애정과 관심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지원금을 거절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는 일체의 물질적인 지원을 거절했었습니다. 지원 받는 일이 지극히 정당한 일이라 할지라도 혹시라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 전파의 순수성에 오해를 살까 하여 마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도 성도들의 순수한 사랑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마음을 받기 위해 거절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마도 여러분은 받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받아서 만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받아 놓고 불만족을 느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생일이라고 선물을 받았는데 실망해 본 적 없으십니까? 용돈을 받았는데 액수가 적다고 불평해 본 적 없으십니까? 아니면 나중에 되 갚아 줘야 할 것이 부담스러워서 그만 받지도 주지도 말자는 생각에 받는 것을 거절해 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사실 우리가 준다고 다 받아서는 안 됩니다. 받아서 탈이 날만한 것들은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받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 안에서 진실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애정과 관심입니다. 그 마음은 꼭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성도 상호 간에 진정한 코이노니아, 영적 교제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참된 교제로부터 우러나는 만족이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 담긴 선물은 가격이나 액수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숫자로는 결코 표현될 수 없는 엄청난 가치가 그 안에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것을 하나 생각해 봅시다. 도움을 받은 바울만 만족을 느끼고 도움을 준 빌립보 성도들은 전혀 만족이 없었을까요? 빌립보 성도들은 남 좋은 일만 한 것일까요?

18절에 보십시오. 여기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 온 것을 어떻게 부릅니까?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곧 바울에게 빌립보 성도들이 보낸 물질을 하나님께서 산 제물로 기쁘게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제물이라고 한 것은 구약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속죄의 제물이 아니라 감사와 찬양의 제물을 지칭합니다. 빌립도 성도들이 보낸 헌금은 자연인 바울을 불쌍하게 여겨서 구제를 베푼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 최전선에 서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 바울의 선교 사역을 지원하는 선교 헌금이었던 것입니다.

성도의 만족과 기쁨이 어디 있습니까? 성도의 만족과 기쁨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오는 것입니다. 성도가 감사와 찬양의 심정이 차고 넘쳐 자신을 드렸을 때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를 기뻐하시며 받아 주실 때 성도의 만족은 완성됩니다. 은혜를 받는 것도 만족스럽지만 헌신에는 더 큰 만족과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연애를 할 때 사랑하는 그 사람이 내가 정성껏 마련한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뻐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경험이 없는 분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는 기쁨이 선물을 받는 기쁨보다 더 큽니다. 성도가 물질을 나누고 베풀면 그 물질로 인해 혜택을 보는 그 사람만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이를 향기로운 제물로 여기시며 기뻐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기쁨은 두 배가 되어 더욱 크게 기쁘고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여기서 한 단계가 더 진전을 이룹니다. 19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말합니다. 나누고 베푸는 사람은 쓸 것을 채워주시는 풍성하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복음서에서 물고기 다섯 마리와 떡 두 개를 주님께 드려졌을 때 주고 또 주어도 다시 채워져 오천명을 먹인 기적이 일어났던 것과 같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물질을 드릴 때마다 궁극적으로 이를 다시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만약 이 땅에서 충분한 보상을 누리지 못했다 할지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광 중에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우리가 드린 것은 채우고도 남음이 있도록 풍성히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주 안에서 기꺼이 주는 기쁨을 알고 계십니까? 만약 이것을 모른다면 인생에서 매우 큰 만족 가운데 하나를 전혀 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기꺼이 줄 때 기쁨으로 받아 주는 형제 자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얼마나 기쁨이 됩니까? 기꺼이 줄 때 그 물질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드리는 예물로 보시고 기쁘게 받으십니다. 예배 시간에 헌금 봉투에 넣어서 드리는 헌금만이 헌금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주변에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나눔과 베품의 손길을 뻗친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께는 향기로운 제물이고 헌물인 것입니다. 그렇게 드리고 나면 또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주님께서 기꺼이 드리는 자의 삶을 더욱 풍성하고 만족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는 재정의 십퍼센트를 해외에 있는 선교사들을 지원하는 일에 쓰고 있습니다. 한 달 이렇게 따지면 그리 큰 금액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일년 십년 이렇게 모아 보면 꽤 큰 금액이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드린 것 때문에 힘든 적이 있었습니까? 전혀 없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모두 가지는 못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걸고 땅끝까지 나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이런 모양으로 동참하고 있는 것에 대해 여러분 모두가 만족하게 여기고 계신 줄로 압니다. 얼마 전 선교지에서 온 편지 한 장을 읽어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 내용과 매우 닮아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편지를 읽고 우리 모두가 흐뭇해 하고 감사가 충만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 안에서 기꺼이 줌으로 만족을 누리는 복된 성도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주고 받음에서 오는 만족 외에 또 다른 만족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고 받음이 없다 할지라도 이미 충분하게 만족하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빌립보 성도들과 주고 받는 교제에서 얻은 만족감은 보너스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미 그는 두둑하게 본봉을 받아 손에 쉬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요?

11절과 12절을 보십시오. 우리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사도 바울은 없으면 없는대로 만족하고 있으면 있는대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없으면 불만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배고프고 궁핍한 중에도 만족하다고 말합니다. 있으면 자연히 만족스럽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새삼스럽게 풍부와 배부름에 만족한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사실은 풍부와 배부름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만족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잠언 30장 8절과 9절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소위 아굴의 기도라는 것인데 여기서 지혜자는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말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너무 가난하면 도둑질이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범죄를 저지르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가난하면 곤란합니다. 그러나 부유한 것도 문제입니다. 부유하면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하게 되기 쉽습니다. 이것도 범죄이긴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외면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영혼이 곤고해 집니다. 어거스틴은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빈 공간이 있다고 했습니다. 풍족하면 몸은 만족을 하겠지만 텅빈 영혼이 되어 만족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가 한밤중에 왜 예수님을 찾아 왔겠습니까? 그는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만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부유한 사람이 있다면 한 번 물어 보십시오. 나는 만족한 인생을 살고 있어 라고 말할 수 있는지를요. 아마 자신 있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내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늘 스스로 만족함을 유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조그마한 일에도 하루에 몇 번씩 뒤집어 지는 우리들 자신을 보면 사도 바울의 이 경지가 참으로 부럽기만 합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 헬라 지역에는 스토아 철학이라는 것이 유행했었습니다. 이 스토아 철학에서 이상적인 상태로 여겼던 것도 자족이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신을 잘 수련해서 풍부하게 되든 가난하게 되든 세상 일에 관심을 끊어 버리고 감정에 요동함을 받지 않는 상태에 이르라고 가르쳤습니다. 반면 우리 동양에서도 이와 비슷한 개념이 있는데 거칠게 말하면 모든 것을 다 팔자 소관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잘 되면 운이 좋은 것이고 안 되면 팔자가 사납다는 것입니다. 체념하고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이런 면이 있지만 불교 문화권인 동남 아시아에서 사시다 오신 분들에 의하면 거기 사람들에게 이런 생각들이 아주 팽배해 있다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말한 자족이 이런 스토아 철학의 자족이나 동양적인 숙명론과 같은 것일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런 것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구절은 이 구절 한 절만 문맥에서 혼자 떼어내서 오해하는 대표적인 몇몇 구절들 중에 하나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여러분이 확인하시는 바와 같이 내가 불가능을 극복하고 무슨 일에든지 도전하여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이런 사상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이 성경 말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은 자신에게 능력을 주시는 그 분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풍부한 중에서도 만족하고 궁핍한 중에서도 만족하면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스토아 철학자들의 견해처럼 자족의 능력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보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자족의 능력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본문에서 배웠다는 말을 두번이나 쓴 것을 보면 바울이 스스로 깨우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원래 바울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해 그 비결을 배운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주어진 여건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능력으로 역경을 이겨내는 것이 것이 체념이나 포기로 견뎌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마음이란 것이 항상 만족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만족을 상황이나 조건에서 찾으려고만 합니다. 자연히 만족하려면 상황이나 조건을 바꾸어 놓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상황이나 조건이 어디 내 마음대로 변합니까? 안 되니까 늘 불만 속에 살아갑니다. 왜 사람들이 나를 안 도와 주냐면서 불평과 원망이 늘어 놓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도 불평을 합니다. 상황이나 조건을 내 입맛에 맞게 바꾸어 보려고 무리수를 두다가 시험에 듭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배웠던 이 자족의 비결을 여러분도 배우시기 바랍니다. 만족함이란 것이 상황이나 조건의 변화에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이미 많이 경험해 보셨을 줄 압니다. 내가 바라던 그 어떤 것만 얻으면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그것을 얻으면 어떻습니까?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곧이어 불만족이 찾아 옵니다. 더 크고 좋은 것이 눈에 들어 오기 때문입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는 대학교에만 들어가면 만족을 누리며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합격의 만족감은 길어야 두 달이었습니다. 하지만 대학교 2학년 때 예수님 만나고 예수님 안에 있으니까 모든 일이 기쁘고 만족스러웠습니다. 특별히 좋은 일이 없는데도 마냥 기뻐서 웃고 다녔습니다. 그때 저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나던 친구가 너 요즘 사람이 이상해졌다고 그랬습니다. 이 만족함은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 보지 못한 사람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은 만족함의 근원이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집사고 승진하고 땅하고 하는 것에서 만족을 얻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은 그들이 모르는 만족의 비결이 있습니다. 아직 나에겐 없습니까? 그러면 배우시면 됩니다.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을 본받아 배우시면 됩니다. 그러면 가난하나 부유하나 일이 잘 되든 꼬여 가든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자족하시는 가운데 참 자유와 기쁨을 누리실 줄로 믿습니다.

3. 마무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비결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 분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상황과 조건을 바꾸는 능력이 아닙니다. 그 능력은 나를 바꾸는 능력입니다. 그리스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할 수 있는 능력을 내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한 내 입을 감사와 찬양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그분은 남과 비교하면 우쭐하거나 절망하던 내 눈을 들어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하십니다. 그분은 내 손을 펴서 기꺼이 나누고 베풀게 하시며 빈 손을 다시 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미국의 CCM 가수인 크리스 탐린이 부른 ‘주님의 그 모든 것이’(Enough)라는 곡의 가사를 음미하면서 오늘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공급자 또 내 생명 놀라우신 하나님

주 나의 상급 삶의 이유 놀라우신 하나님

주님의 그 모든 것이 내 삶을 가득 채우네

내 모든 갈증과 필요 주 사랑으로 만족시키니

부족함 없네

내가 원하는 모든 것보다 부족함 없는 나의 주님

내가 말하고 아는 것보다 더욱 더 놀라우신 

주님의 그 모든 것이 내 삶을 가득 채우네

내 모든 갈증과 필요 주 사랑으로 만족시키니

부족함 없네


참고 문헌 및 자료


1. 신약의 초석 II, 랄프 마틴 저, 정충하 역 (크리스챤 다이제스트사, 1997)

2. WBC 성경 주석 ‘잠언’, 롤란드 머피 저 (솔로몬, 2001)

3. 호크마 성서 주석 ‘호세아-말라기’, 강병도 편, (기독지혜사, 1992)

4. WBC 성경 주석 ‘빌립보서’, 제럴드 호썸 저, 채천석 역 (솔로몬, 1999)

5. 스페셜 성경, 편집부 (아가페 출판사, 2009)

6. 홀리원 바이블, 편집부 (예장출판사, 2008)

7. 바이블웍스 버전 8 (바이블웍스 사)

8. 다국어성경 사이트 http://www.holybible.or.kr

9.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귀납적 강해 설교, 김덕수 저 (대서,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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