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예화

조선의 성녀 '쉐핑' 선교사 ( 한국명: 서서평 )

이창무 2015. 6. 16.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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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갠 후에야 무지개가 떠오른다'(조선의 성녀, 쉐핑 선교사)


조선의 성녀 '쉐핑' 선교사 ( 한국명: 서서평 )



독일인 출신의 미국인 간호사로 조선에 32세에 파송되어 병들고 버리진 

조선의 고아 14명을 거두고 한센병 환자들과 과부들을 먹이고 돌보다가 

영양 실조로 51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1934년 6월 서서평 선교사는 광주에서 만성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숨졌습니다. 그녀가 남긴 건 담요 반 장,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뿐이었습니다. 한 장 남았던 담요는 이미 반으로 찢어 다리 밑 거지들과 나눴습니다. 시신도 유언에 따라 의학연구용으로 기증됐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 조선에서 22년간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고무신을 끌고 다니며 ‘조선인의 친구’가 아니라 그저 ‘조선인’으로 살았던 사람. 가난하고 병든 이웃, 나환자들을 죽기까지 섬겼던 그 사람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살아왔습니다….”


서서평(본명 엘리제 셰핑·1880~1934) 선교사 기념사업 경과보고를 하던 양국주(63) 씨가 잠시 울먹였다. 17일 광주광역시 양림동 기독간호대학 안 오웬기념각. ‘서서평 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 예배 및 서서평 평전 출판 기념회’에 모인 1000여명의 사람이 여기저기서 함께 눈가를 훔쳤다.


독일 출신 미국인인 서서평 선교사는 1912년 32살의 나이에 처음 조선에 온 처녀 간호 선교사였다. 당시 조선은 나라를 잃은 슬픔 속에 제 백성 돌볼 엄두도 못 내던 나라였다. 그녀는 끊임없이 병고에 시달리는 몸으로 광주 제중원 등을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와 제주도를 끊임없이 순회하며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가난한 여인들을 가르쳤다.


14명의 양자·양녀, 38명의 과부 거둬


서서평이 바라본 조선 땅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 번 순회 진료와 전도 여행을 나서면 한 달 이상 말을 타고 270㎞ 이상 거리를 돌았다. 진흙탕에 말이 쓰러지면 머리에 이고 백릿길을 걸었다.


“이번 여행에서 500명 넘는 조선여성을 만났지만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열 명도 안 됐습니다. 조선 여성들은 ‘돼지 할머니’ ‘개똥 엄마’ ‘큰년’ ‘작은년’ 등으로 불립니다. 남편에게 노예처럼 복종하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아들을 못 낳는다고 소박맞고, 남편의 외도로 쫓겨나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팔려 다닙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주는 것이 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1921년 내쉬빌 선교부에 보낸 편지)


서서평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한국 최초의 여성신학교인 이일학교(현 한일장신대의 전신)를 세워 여성들을 가르쳤다. 조선간호부협회(현 간호협회의 전신)를 세우고 일본과 별도로 세계 간호사협회에 등록하려 애썼던 이도 서서평이다. 한글 말살정책이 진행 중인 일제 치하에서 간호부협회의 소식지와 서적들은 모두 한글 전용을 고집했다. 조선사람들에겐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독립의 확신을 심어주려 애썼다. 


출애굽 정신 가르치며 한글 사용 고집


1929년 조선간호부협회를 세계협회에 가입시키기 위해 갔던 미국에서, 서서평은 갓 1살 된 자신을 할머니에게 버려두고 떠났던 어머니를 다시 만난다. 하지만 어머니는 “니 몰골이 내 딸이라 하기에 부끄러우니 썩 꺼지라”고 서서평을 내쳤다.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서서평은 수양딸 13명과 나환자의 아들 1명 등 14명의 한국 아이를 입양해 기른 ‘조선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그냥 데려다 기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좋은 곳으로 시집가도록 돕고, 소박이라도 맞으면 자활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그의 역할이었다. 


1933년에는 서서평은 조선인 목회자 등 동역자들과 함께 50여명의 나환자를 이끌고 서울로 행진을 시작했다. 강제 거세 등으로 나환자들의 씨를 말리는 정책을 펴고 있던 일제 총독부에 나환자들의 삶터를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소식을 들은 전국 각지의 나환자들이 이 행진에 합류했다. 서울의 총독부 앞에 이르렀을 때 동참한 나환자들의 숫자는 530여명에 달했다. 결국 총독부도 두 손을 다 들었다. 소록도 한센병환자 요양시설과 병원은 이렇게 시작됐다.


장례행렬 나환자들 “어머니” 부르며 오열


최초의 광주시민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를 땐 수천의 광주 시민과 나환자들이 쫓아 나와 “어머니”를 부르며 오열했다. 당시 한 일간지는 사설에서 “백만장자의 귀한 위치에서 하인을 두고 차를 몰고 다니는 선교사들, 동족의 비참한 생활에 눈감고 오직 개인 향락주의로 매진하는 신여성들이 양심에 자극을 받길 바란다”고 썼다.


그가 한국땅을 밟은 지 100년을 맞은 올해에야 기념사업회가 세워졌다. 양창삼 한양대 명예교수의 ‘조선을 섬긴 행복’, 양국주 씨의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이상 Serving the People 펴냄) 등 평전 2권이 세상에 나왔다. 재미교포인 양국주 씨는 미 재무부 등록 전쟁·재난 구호 NGO ‘열방을 섬기는 사람들(Serving the Nations)’ 대표로 활동 중이다.


그는 “서서평 선교사는 남자가 아닌 독신여성, 목사가 아닌 평신도, 의사가 아닌 간호사라는 이유로 잊혀 있었다. 유산 놓고 다투는 부잣집 자식들처럼 가진 게 너무 많아 근심뿐인 한국교회가 다시 돌아봐야 할 분”이라고 했다. 


참석자들은 기념식 뒤 인근 호남신학대 캠퍼스 언덕 위의 선교사 묘역으로 갔다. 이끼 낀 서서평 선교사의 묘비에 화환이 놓였다. 설교를 맡은 서서평기념사업회 회장 홍정길 목사(남서울은혜교회 원로)의 목소리는 피를 토하듯 절실하게 느껴졌다.


“여수 애양원에서 나환자를 섬겼던 손양원 목사의 삶, 그리고 서서평 선교사의 삶.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게 원본입니다. 말기암 환자인 91세 박재훈 목사가 손양원 목사를, 뇌졸중으로 쓰러져 다리를 쩔뚝이는 양국주 대표가 서서평의 삶을 이 땅에 되살려냈습니다. 지금 기독교는 대응되는 실제가 없는 공허한 단어로만 말해지고 있습니다. 믿음은 논리가 아닙니다. 삶이며 생명 그 자체입니다. 믿음은 늘 구체적인 삶의 용솟음입니다. 손양원과 서서평이라는 믿음의 원본을 다시 갖게 된 것을 감사합시다. 한국교회는 이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출발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1912년 이 땅은 일제에게 국권을 모두 빼앗긴지 2년이 지났다.

그 때 이 고통의 땅을 치유하고자, 품고자 홀홀 단신으로 코리아 마루(S.S.Korea)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는 배를 타고 온 미국 남장로교의 여자 간호선교사가 있었으니 32살의 독일 태생, 미국인인 서서평(Elizabeth Johanna Shepping,1880.9.26~1934.6.26) 선교사이다. 

그녀는 1912년 3월 중순에 도착하여 목포선교부에 소속되었고, 전라도지역에서 사역을 한다. 1916년 군산선교부에 속했고, 1917년 광주선교부로 소속을 옮긴다. 다시 1918년 군산선교부,1919년부터 광주선교부로 소속된 이후 1934년 6월 26일 소천할때까지 광주의 딸로 소외된이들의 어머니로서의 삶을 이어간다.


그녀는 국권을 빼앗긴 식민지의 백성이었으며, 혈통은 독일인이지만 한국인으로서의 삶을 살다, 광주시민의 삶을 살다 쓰러졌다.


그녀의 그리스도인으로써의 헌신적인 삶을 여기에 다 적을 수 없다.

왜냐하면 백춘성 장로님의 <천국에서 만납시다> 이후 새로운 1차 자료들이 추가되어 그녀의 숨소리가 들릴 것 만 같은 책이 나왔기 때문이다. 

저자인 양창삼 교수는 1908년 세워진 수피아여고의 5,8,10대 교장을 역임한 유화례(Root, Florence E) 선교사의 養孫으로 양 교수님의 어머니는 서서평선교사가 세운 이일성경학교의 학생이었다.




조선을 섬긴 행복

저자
양창삼, 양참삼 지음
출판사
서빙더피플 | 2012-03-01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은 조선에서 22년을 살며 수많은 전도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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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평이 등에 업은 아이는 그가 입양한 14명의 자녀 중 한명이다. 

이 아이는 어머니가 죽자 한센병 환자인 아버지가 버리려 했었다.


고아 14명과 과부 38명 거두며 가난한 이들과 동고동락

영양실조로 죽기까지 가르치고 먹인 삶 보며 눈물 쏟아


“우리나라를 거쳐 간 많은 선교사들이 조선인의 친구로 살았다면, 서서평은 영혼과 육체 모두 조선인으로 살다 갔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오늘 그에게 주목하고 배워야 할 선교와 신앙 정신의 핵심입니다.”


1912년 조선이 일제치하에서 혹독한 시련을 거치던 때에 이 땅에 첫 발을 딛고 1934년 6월 26일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22년 간 조선을 사랑하고 섬겼던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1880∼1934, 한국명:서서평) 선교사의 내한 100주년을 기념해 그의 평전 두 권이 발간됐다. 책을 집필한 양국주 대표(사진/열방을섬기는사람들, 63)는 서서평에 대해 선교 대국을 자랑하지만 선교 정신을 잃어버린 한국교회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 서서평을 아십니까?


25년 전 미국으로 건너간 후 국제NGO 열방을섬기는사람들(Serving the nations) 국제대표로 세계 선교지를 돌며 섬기고 있는 양 대표는 2년 전부터 우리나라에 와서 목숨 걸고 복음의 씨앗을 뿌렸던 선교사들의 흔적을 찾던 중 서서평 선교사의 기록을 살피면서 눈물을 펑펑 쏟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양 대표의 어머니가 서서평 선교사가 세운 이일학교(한일장신대 전신)를 다닌 인연으로 이미 서평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기록을 통해 실체적으로 만난 그의 삶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석공을 데려와 3층 벽돌집 짓고 미국 등지에서 음식을 조달해 먹을 때 서서평은 초가집에서 보리밥에 된장국 먹고 고무신 끌며 마지막에 영양실조로 숨을 거두기까지 조선의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면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전라도 정읍 내장산 자락에서 자란 양 대표의 눈에 '선교사=사냥꾼'으로 비쳐졌었다. 1960년대 무렵, 여름이면 선교사들이 며칠씩 양 대표의 집에 머물며 내장산에서 사냥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서서평의 삶은 달랐다.


서서평은 간호사 신분으로 남장로회로부터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 받았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였던 셈이다. 서평은 간호사를 천직으로 여기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도구로 삼아 조선에 들어온 후 광주 제중원, 세브란스에서 간호학교를 운영하며 제자를 양성했다. 


또한 1929년과 1932년 조선간호부회를 대표해 캐나다와 동경으로 다니며 조선간호부회를 단독으로 정회원국가로 가입시키기 위해 힘썼다. 오늘날 여전도회전국연합회의 전신인 부인 조력회 사업을 이끌었고, '성미' 제도를 전라도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확대했으며, 나환자를 섬겼던 최흥종과 함께 나환자 수백 명을 이끌고 광주에서부터 조선총독부까지 걸어 총독으로부터 나병환자의 정관시술 금지와 소록도 갱생원 설치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 외에도 그가 조선 땅에 들어와 이뤄낸 업적은 열거하기도 버거울 만큼이다. 그러나 양 대표가 주목하는 부분은 그가 나환자들이나 가난한 이들 특히 이름 없이 '남편의 소유물'로 살아갔던 여성들을 보듬고 말씀으로 교육하며 '한 인간'으로 존재하게 했던 일은 서평이 그들과 같은 조선인으로 살아갔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서평이 자신의 거처에서 1922년 이일성경학교를 만들어 죽기 한 해 전에는 40여명의 재학생들이 27부락에 흩어져 44,482명의 어린 영혼을 돌보고 가르쳤으며, 13개 부락에서 26명의 학생들이 2,550명의 여성들을 계몽시키고 마을 기도회를 이끈 것은 그 시대로서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조선인들의 삶을 가까이서 살피기 위해 조랑말을 타고 자주 전국을 순회했는데, 화순에서 담양, 지리산 인근 순창까지 20일 간의 여정에서 신생아부터 노인들까지, 한센병 환자를 포함해 온갖 질병에 걸린 500여 명을 돌본 이야기, 자신의 이름을 갖지 못하고 '큰 년' '작은 년' 또는 자신이 태어난 지역명을 따 '지리산댁' 등으로 불리던 수백 명의 여성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던 일, 새로운 이름을 잊어버려 며칠 후 찾아와 '제 이름을 다시 좀 말해주세요' 하던 일, 1년에 100일 넘게 순회를 다닐 때면 온몸에 들러붙은 이를 잡느라 밥을 지새운 일 등 책에는 조선인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았던 서평의 기록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 인카네이션의 의미


서서평의 조선인으로의 삶에 대한 다짐은 그가 선교 사역 17년 만에 처음 맞이한 1년간의 안식년을 마치면서 쓴 편지에 잘 나와 있다. 서평은 조선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자신이 “선교사로서 부적합한 것”을 고민했다. 


편지에서 서평은 “서구문명을 나름대로 이상화 한 까닭에 과거에는 조선인들의 삶을 제 관점에서 바라보고 저평가한 게 사실이지만 사실 조선에는 서양인들이 지나치기 쉬운 아름다운 전통과 사랑, 문화적으로 탁월하거나 훌륭한 것들이 너무 많다”면서 “하나님께서 제게 부르신 방법대로 조선으로 돌아가 기꺼이 조선의 짐을 덜어줄 것”을 다짐하는 기록을 남겼다.


이후 서서평은 생전에 14명의 고아를 입양하여 친히 길러냈고, 38명 과부의 생활고와 살림을 살펴주며 함께 살았다. 1934년 53세로 죽은 후 재산을 정리해보니 덮은 이불 반장과 동전 7전, 강냉이가루 두 홉이 전부였다. 자기의 시신마저 연구용으로 기증했는데 부검 결과 영양실조로 죽은 것으로 판명 났다.”


서평의 선교보고 기록에 따르면 당시 호남평야가 조선 백성의 호구를 책임지는 비옥한 곳으로 여겨졌는데 전라남도 인구 223만 명 중 굶는 이들이 88만, 거지가 11만이었던 것을 볼 때 심각한 가난은 조선 땅 전체를 뒤덮고 있었던 터, 찾아오는 가난한 이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어 자신의 이불까지 잘라 주었을 서서평 선교사를 떠올리는 양 대표의 눈이 어느새 젖어들었다.


양 대표는 서서평의 삶을 통해 예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인카네이션'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고 있었다.


“예수님이 인카네이션 하신 의미는 우리 삶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스킨십 하며 살기 위한 것입니다. 조선인들과 같이 어울려 살며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사람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자존감을 심어주는 등 이분이 이 땅에서 가르치고 일한 것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양 대표는 이처럼 선교사들의 목숨을 다한 헌신과 수고 위에 세워진 한국교회가 오늘날 성장일변도로 내달리는 것을 우려했다.



양국주 대표와 형 양창삼 교수가 쓴 서서평 평전.


“전도폭발을 말하지만 숫자 늘리기 위한 전도는 해봐야 다른 한쪽에서 떨어져나가는 교인이 더 많습니다. 단순히 교회에 앉혀 놓는 것이 전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진한 감동이 전해져야 합니다. 신앙과 삶의 불일치는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만 확산시킬 뿐입니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양 대표는 오늘날 교회들이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이 땅을 찾았던 선교사들의 선교 정신을 배우고 오늘의 삶에 구현해야 한다”면서 “과거 선교사들의 열매만 따먹는 행태는 염치와 부끄러움을 모르는 소치”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서서평 내한 100주년을 기념해 그의 삶과 선교업적을 기리기 위한 '서서평 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가 구성됐고, 지난 17일 광주시 남구 기독간호대학교 내 오원기념각에서 기념식 및 서서평 평전 출판 기념회를 가졌다.


책은 양국주 대표와 형 양창삼 교수(전 한양대 경영대학원장)가 각각 〈바보야, 성경이 아니라 섬김이야-엘리제 쉐핑 이야기〉, 〈조선을 섬긴 행복-서서평의 사랑과 인생〉을 펴냈다.


양 대표는 1892∼1941년까지 우리나라를 찾았던 선교사들의 자료를 취합한 〈선교사의 삶〉이란 가이드북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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