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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선한 목자라
    설교/요한복음 2015.06.15 13:56

    나는 선한 목자라


    말씀 / 요한복음 10:1-18

    요절 /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한복음 10장은 9장 말씀과 관련이 있습니다. 9장에서 예수님이 맹인거지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이 일을 했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맹렬히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맹인이 눈을 떠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자기들 말을 듣지 않는다고 맹인을 출교 시켜 버렸습니다. 이들을 보신 예수님은 마음이 너무 아프셨습니다. 그래서 목자와 양의 비유를 통해서 참된 목자는 누구인가? 선한 목자는 어떤 자인가? 예수님이 왜 선한 목자가 되시는가? 가르쳐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을 목자와 양의 비유가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중에 사람 양 말고 진짜 양을 키워 본 경험이 있는 분이 계십니까? 아마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와 양의 비유를 이해하려면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양 치는 일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가를 먼저 알아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1절부터 6절까지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시 근교의 목장을 배경으로 합니다. 당시 목자들은 낮에는 자기 양 떼를 데리고 목초지를 찾아다니며 물과 꼴을 먹였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을 기울 즈음이 되면 목자들은 공동 우리가 있는 곳으로 양 떼를 몰고 왔습니다. 여기에 자기 양 떼를 넣어 두고 목자는 집으로 퇴근을 했습니다. 그러면 밤사이에 문지기가 여러 목자들이 맡겨 놓고 간 양 떼들을 지켰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으면 목자들이 출근을 했습니다. 문지기는 목자를 일일이 확인한 후에 우리 안으로 들여보내주었습니다. 수많은 양 떼들이 섞여 있는 공동 우리를 향해 목자는 “얘들아! 내가 왔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목자의 음성을 알고 있는 양들이 자기 목자에게로 우르르 몰려 들었습니다. 그러면 목자는 혹시 밤사이 메르스 증세가 보이는 양은 없는지 어디 다친 양은 없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에구, 우리 막둥이 요즘 많이 컸네.” “아이구, 우리 예쁜이는 자고 나니 더 예뻐졌네” 이렇게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양 떼들 앞에 서서 외쳤습니다. “얘들아! 밥 먹으러 가자.” 양떼들은 ‘너무 좋아요’라고 말하듯이 일제히 ‘매에’ 소리를 내며 목자의 뒤를 종종 걸음으로 따라갔습니다. 파란 하늘 아래 드넓게 펼쳐 진 푸른 풀밭 위로 하얀 양떼들이 뛰어 놀고 이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목자의 모습, 마음속으로 상상만 해 보아도 이 얼마나 아름답고 정겨운 풍경입니까?


    하지만 당시 현실 속의 모든 목자가 다 위와 같은 목자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게으른 목자, 비겁한 목자, 양들을 학대하는 나쁜 목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이 선한 목자라는 말 앞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유일하신 그 선한 목자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에스겔서 34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이스라엘의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겔34:2,3)” ‘양을 먹여야 할 목자들이 어떻게 자기 배를 채우겠다고 양들을 잡아먹을 수 있느냐?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버젓이 행할 수 있느냐?’ 하나님은 이렇게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겔34:23)”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친히 참된 목자, 선한 목자를 보내셔서 자기 백성을 먹이시겠다고 언약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그 언약을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한 목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16절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 뿐 아니라 온 세상의 목자가 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참된 목자,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우리나라도 백성들의 목자가 되어야 할 지도자들이 타락하여 백성들을 괴롭혀 온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예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7일 만에 선조는 수도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난을 떠나버렸습니다. 깜깜한 새벽, 몰래 도망치듯 장대비 속에서 서쪽 돈의문으로 빠져갔습니다. 임금이 아무 말도 없이 백성을 버렸다는 사실에 분개한 도성 주민들이 불을 질러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세 궁궐이 불타 없어졌습니다. 


    이 외에도 이런 사례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작년에 세월호 사건 때 선장이 어떻게 했습니까? 승객들을 버리고 제일 먼저 탈출해서 병원에서 젖은 돈을 말렸습니다. 타이타닉호 침몰 사건 때는 구명보트가 부족하자 선장을 비롯한 모든 선원들이 갑판에 모여 마지막 경례를 붙인 후 배와 운명을 함께 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악사들이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을’을 끝까지 연주하는 장면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왜 이런 모습의 지도자를 만나기가 어려울까요? 지도자 문제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응어리진 이 민족의 슬픔과 한을 어떻게 치유 받을 수 있을까요? 길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양이 되는 길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와 민족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로 선한 목자 예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1912년 간호 선교사로 조선에 발을 내디딘 엘리자베스 쉐핑 선교사입니다. 당시 쉐핑 선교사에게 주어진 하루 식비는 3원이었는데 이중에 10전으로 허기를 채우고 나머지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썼습니다. 나환자가 버린 아이를 거두어 수양아들이 14명, 아이 낳지 못해 쫓겨나거나 오갈 데 없는 여인 38명도 거두어 보살폈습니다. 조선에서 이렇게 헌신하다 휴가를 받아 잠시 미국에 가 어머니를 만났을 때 어머니는 고된 생활에 찌든 딸을 보고 "몰골이 부끄러우니 돌아가라!" 하며 차갑게 외면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강냉이 가루 2홉, 현금 7전, 반쪽짜리 담요가 쉐핑 선교사가 22년간의 조선 생활을 마치고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전부였습니다. 광주시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진 쉐핑의 장례 행렬을 뒤따르던 천여 명은 통곡하며 한목소리로 "어머니.. 어머니!“를 외쳤다고 합니다. 임금도 버리고 갔던 이 나라 백성을 파란 눈의 선교사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이 바로 선한 목자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UBF를 일으키셔서 분노와 슬픔에 가득 차 있던 캠퍼스 지성인들이 참 목자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 모임의 설립자이신 사라 배리 선교사님은 제 2의 쉐핑 선교사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미시시피 대부호의 딸로 태어나 공주처럼 자란 분이 한국에 와서는 단칸방에서 연탄불을 갈고 김치와 된장찌개를 먹으며 대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셨습니다. 과거 길 잃은 양이었던 우리도 이런 목자들을 통해서 선한 목자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닮고 배우고 나누고 싶어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만난 참된 목자 예수님, 우리가 닮고 배워야 할 선한 목자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선한 목자 예수님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다함께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저는 여기서 양들에게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참 신기합니다. 한두 마리도 아닌 그 많은 양들에게 어떻게 이름을 다 붙이고 불러주었을까요? 요즘 목장에서는 태어난 순서에 따라 양들에게 일련번호를 부여하여 관리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불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군대에 가서 훈련소에 입대하면 훈련병 번호가 부여됩니다. 훈련소 조교는 퇴소할 때까지 이름을 부르지 않고 이 번호를 부릅니다. 이런 비슷한 경우가 교도소입니다. 교도관들은 수감자들을 죄수 번호로 부른다고 합니다.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면 자베르 경감은 죽을 때까지 장발장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끝까지 ‘24601’이라는 죄수번호로 부릅니다. 이런 것들이 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나는 너를 하나의 인격으로 전혀 대우하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학교에서 또는 직장에서 이런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아 본 경험이 있습니다. 요즘 교수님들은 출석도 자기가 안 부르고 조교를 시키기 때문에 학생들의 이름을 잘 모릅니다. 어쩌다가 교수님이 내 이름을 불러 주시기라도 하면 성은이 망극할 따름입니다. 저는 대기업을 다닐 때 내가 이 큰 회사에서 어느 한 구석의 조그만 톱니바퀴 같은 존재라고 느낀 적이 많았습니다. 톱니가 부러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버리고 새 것으로 갈아 끼우면 그만입니다. 회사도 단물을 다 빼 먹고 이제 쓸모없다 싶으면 퇴직을 강요하고 새로운 사람을 그 자리에 앉히면 그만입니다. ‘나’와 ‘너’의 인격적 관계는 점점 실종되고 ‘나’와 ‘그것’의 비인격적 기계적 실리적 관계성이 대세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십니다. 양의 이름을 짓기 위해서는 먼저 그 양의 특징을 잘 알아야 합니다. 또한 지속적으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양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을 아시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강점은 무엇이고 약점은 무엇인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에게 우리는 결코 ‘그것’이 아닙니다. 다른 그 무엇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온 세상에서 유일하고도 특별한 바로 ‘너’입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결코 ‘그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무조건 신뢰하고 따를 수 있는 유일한 분, 나의 선한 목자이신 나의 ‘당신’이십니다. 이처럼 목자는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압니다.


    우리가 자주 부르는 ‘내 이름 아시죠 (He Knows My Name)’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토미 워커가 작사 작곡한 이 노래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그가 필리핀에 있는 어떤 고아원에 갔을 때 한 아이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 아이는 토미를 볼 때마다 자신의 이름을 아는지 물었다고 합니다. 그는 아이가 왜 계속 똑같은 질문을 하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고아로 자란 그 아이는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기를 원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토미는 자신의 방황하던 과거를 떠올렸습니다. 한때 그는 오랜 무명 가수의 시기를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도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크게 좌절하고 낙담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는 하나님께서 너의 이름을 손바닥에 새겨 놓으셨다는 이사야서 49장 16절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아신다는 사실, 그것도 결코 잊을 수 없도록 손바닥에 그 이름을 새겨 놓으셨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이 말씀이 그가 다시 일어날 힘을 주었습니다. 이후 이 고백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는데 그것이 바로‘내 이름 아시죠’입니다. 이런 사연이 있어서일까요? 지금도 그는 이름 있는 큰 교회에서 청빙을 모두 거절하고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작은 교회만을 다니며 찬양 사역을 섬기고 있다고 합니다. 


    내 이름을 불러주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이 시를 목자 버전으로 한 번 바꾸어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나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예수님이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예수님은 나에게로 와서/ 목자가 되어주셨다./ 예수님이 나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너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 /너에게로 가서 나도 너의 목자가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우리도 그분을 닮아 양들을 알고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는 일대일 목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로 선한 목자 예수님은 앞서 가시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4절과 5절을 보십시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목자는 뒤에서 몰아가는 몰이꾼이 아니라 앞서 가는 인도자입니다. 돼지치기는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돼지 뒤에서 따라갑니다. 막대기로 오른쪽으로 가야 할 때는 왼쪽 엉덩이를 때리고 왼쪽으로 가야할 때는 오른쪽 엉덩이를 때립니다. 그러나 양은 이런 방식으로는 절대 앞으로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때리면 때릴수록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양은 목자가 앞서 가야 따라갑니다. 


    목자는 푸른 풀밭과 맑은 시냇물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항상 평탄하지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험한 길을 걷기도 하고 사나운 짐승들이 많은 골짜기를 지날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목자는 맨 앞에서 서서 장애물을 치우기도 하고 안전한 길로 돌아서 가기도 하고 짐승들과 맞서 싸우기도 합니다. 양들은 앞에 가는 목자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이 그 길을 끝까지 따라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면에서 우리에게 좋은 본을 보여주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을 가라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십자가의 길을 가셨고 그 길 끝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안심하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가 앞서 갈 테니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길이 평탄한 길일 때도 있지만 힘들고 고달픈 길, 앞이 안 보이는 캄캄한 길일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는 이 길이 진리의 길, 생명의 길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목자가 양을 이끄는 또 다른 수단이 목자의 음성이라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양의 시력은 상당히 나쁘지만 청각은 매우 발달해 있다고 합니다. 양은 음성을 듣고서 이 사람이 목자인지 아닌지를 분별해 낼 수 있고 따라가야 할지 말지를 판단합니다. 9장에 나오는 맹인 거지는 본래 앞을 못 보던 사람이라 청각이 더 예민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이 자기의 목자인 것을 곧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의 음성을 듣고 보니 그들이 절도요 강도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협박하고 회유를 해도 맹인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은 그들의 음성이 목자의 음성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의 음성에는 양들을 향한 애정과 관심과 사랑이 듬뿍 담겨져 있습니다. 찬송가 528장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의 원래 영어 제목은 ‘soft and tenderly’입니다. 이 찬송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는 그 음성이 얼마나 부드럽고 상냥한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부드러운 예수님의 음성을 듣다 보면 의심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물러가고 신뢰와 사랑의 관계성이 깊게 형성됩니다. 우리도 양들에게 또는 동역자나 자녀들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다가가는 목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남편이 큰 선물을 주지 못해도 부드러운 음성으로 따뜻한 한 마디를 해주면 아내는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야기를 해야 자녀도 부드럽게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부드러운 음성에서 ‘부’자를 떼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드러운’ 음성이 되고 맙니다. 짜증과 무시와 분노가 가득 찬 거친 말을 함부로 뱉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말들이 이미 있던 관계성마저도 다 파괴시켜 버릴 수 있습니다. 거친 말은 또 다른 거친 말을 낳고 남는 것은 상처와 후회 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드러운 예수님의 음성을 계속 듣고 따르다 보면 우리의 음성도 부드러워집니다. 우리가 선한 목자 예수님을 잘 배워서 양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사랑과 애정이 담긴 말을 하는 목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선한 목자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분이십니다. 7절부터 10절까지 말씀은 시골의 목장을 배경으로 합니다. 시골에는 공동 우리가 없었습니다. 밤새워 우리를 지켜 줄 문지기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밤에 양들을 우리에 넣은 후에 아예 문에 누워서 잠을 잤습니다. 만약 한밤중에 우리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양이 있었다면 목자의 배를 밟고 지나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때 목자는 잠에서 깨어나 탈출하는 양의 뒷다리를 꽉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요 녀석! 어딜 도망가려고. 얼른 우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여길 나가면 밖에는 너를 잡아먹으려고 기다리는 사나운 이리떼들이 진을 치고 있단 말이야.” 그러면 양은 ‘큰 일 날 뻔 했구나’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다시 우리 안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경우는 목자가 양의 문까지 겸하게 된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자가 이렇게 밤새 양떼들 곁에서 문이 되어 주었기 때문에 양들은 절도나 강도, 이리떼를 걱정하지 않고 평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또 11절부터 18절까지는 당시 양을 치는 일을 하던 두 종류의 사람들을 배경으로 합니다. 하나는 목자이고 다른 하나는 삯군입니다. 목자는 자기 양떼를 소유한 목자라면 삯군은 고용된 목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양 치는 모습을 보면 누가 목자이고 누가 삯군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똑같이 양들에게 먹이를 주고 돌보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자와 삯군이 확연하게 구별할 수 있는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리떼가 나타났을 때였습니다. 이때 삯군은 양떼를 버려두고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양떼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삯군은 말 그대로 삯이 목적입니다. 목숨까지 걸고 양떼를 지켜 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다릅니다. 목자는 양떼가 자기 양떼이기 때문에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선한 목자는 끝까지 목숨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이리떼와 맞서 양들을 지켜내었습니다. 이처럼 선한 목자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양들을 위해 삽니다. 양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됩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아끼고 사랑하고 양들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생활합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 목숨보다 양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양들을 위해 살고 양들을 위해 죽습니다. 


    지난해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 현장에 삯군 같은 선장만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 박지영 승무원은 4층에서 구명조끼를 구해 3층으로 내려가 학생들에게 건네며 가슴에 물이 차오를 때까지 학생들을 구했습니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너희들 다 구하고 난 나중에 나갈게. 선원이 마지막이야” 선원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매점에서 물건을 파는 비정규직일 뿐이었습니다. 고 전수영 선생님은 고대 국어교육과 08학번입니다. 임용 고시에 합격하고 부임한 첫 학교가 안산 단원고였습니다. 사고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전화를 했을 때 전 선생님은 안 보이는 학생들에게 연락하려면 배터리를 아껴야 한다며 전화를 끊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통화였습니다. 아래층에서 끝까지 학생들을 밀어 올리다가 결국 자기 자신은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선한 목자란 누굴까요? 바로 이렇게 양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선한 목자입니다. 예수님은 진정으로 우리 인생들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섬기시기 위해 자신을 온통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릴 수 없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죽음 가운데 내려놓으셨습니다. 


    양은 멀리서 보면 예쁘고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그러나 제가 대관령 양떼 목장에 가서 실제 양을 가까이서 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단 지독한 냄새가 나서 가까이 가기가 싫었습니다. 털이 얼마나 지저분한지 꼬질꼬질해서 볼 품이 없었습니다. 우리도 양을 잘 모를 때는 무조건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그러나 양은 알면 알수록 정이 떨어질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이기적인가? 어쩌면 이렇게 무책임할까? 이렇게 탄식하며 말은 못하고 속이 썩어 들어갈 때도 있습니다. 왜 하필 내가 이런 양을 섬기게 되었을까 하는 이상한 운명주의가 생기기도 합니다. 너무 힘들고 상처를 받게 되면 앞으로 다시는 결단코 양을 치지 않으리라고 굳은 결심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 양이 바로 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자타공인 목자라 해도 예수님 앞에서는 그저 양일뿐입니다. 나도 똑 같이 말 안 듣고 반항하고 고집 부리고 형편없는 양이었습니다. 우리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구석이 전혀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살고자 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던 길 잃은 양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자기 양으로 영접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나를 사랑하셔서 결국 자기 목숨을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상하고 훌륭한 양들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죄로 병든 양들, 반발하고 불순종하는 양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한 번 자기 양으로 삼으신 이상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토록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이 선한 목자 예수님을 생각할 때 잘라버리고 싶었던 양들을 다시 또 찾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우리의 시간, 우리의 젊음, 우리의 물질, 우리의 삶을 양들을 위해 내어주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교회사에는 이 예수님을 본받아 훌륭한 목자의 삶을 살며 양무리들을 섬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도바울, 성 프란체스코, 엘리자베스 쉐핑 선교사, 손양원 목사님 사라 베리 선교사님 등이 그런 분들입니다. 이분들을 보면 나는 참된 목자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습니다. 목자인 듯 목자 같은 목자 아닌 목자, 썸타는 목자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음성을 잘 듣고 그 뒤를 따르다 보면 언젠가는 이분들과 같은 좋은 목자로 성장할 것을 믿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선한 목자 예수님을 잘 배워서 양들의 이름을 알고 그들에게 본을 보이며 생명을 바쳐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이 시대의 선한 목자가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1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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