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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곧 길이요
    설교/요한복음 2015.07.27 01:12

    2015년


    내가 곧 길이요


    말씀 / 요한복음 14:1-31

    요절 /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하나뿐인 나그네 몸으로 두 길을 다 가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그곳에 서서 한 쪽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쪽 길을 택했습니다. …… 먼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사람들은 인생을 사는 동안 수없이 많은 갈림길을 만나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후회하며 가지 않은 길을 아쉬워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지 않은 길이 더 좋은 길이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이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불안해하고 근심합니다. 이런 인생들에게 예수님은 가야될 가장 확실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인생의 길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 길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동안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배와 부친을 버렸고, 마태는 억대 연봉이 보장된 세리 직업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삶의 모든 것, 미래의 안전한 보장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세우실 새 정부 각료들로서 등용될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위장 전입을 한 적도 없고 부동산 투기를 한 적도 없기 때문에 인사 청문회에서 걸릴 일도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었습니다. 


    그런데 13장에서 예수님은 이런 제자에게 갑자기 자신들을 남겨두고 어디론가 가신다고 했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가시다니요? 게다가 너희들은 따라올 수 없다고 하시니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너희 중 한 사람이 날 팔 것이라”고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보다 충성스러운 수제자인 베드로가 무너진다면 나머지 제자들은 더 볼 것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얼굴은 굳어지고 마음은 근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 없이 우리끼리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 이제 나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제자들처럼 우리도 종종 장래 문제로 인해서 근심과 불안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대학생들은 졸업을 해도 취직할 자리가 별로 없어서 염려근심이 많습니다. 그러면 이미 취업한 직장인들은 어떻습니까? 앞으로 회사를 더 이상 다닐 수 없는 나이가 되면 그 이후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에 대한 걱정이 많습니다. 중년이 되면 암 발생률이 급격히 높아집니다.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 징후가 나타나면 “혹시 암에 걸린 것이 아닌가?” 불안해집니다. 사람들은 불확실한 장래로 인한 근심을 덜어 보고자 나름대로 대책을 세웁니다. 제 동생은 가족 모임 때 자기는 보험을 여섯 개나 들어 놓아서 노후 걱정이 없다고 자랑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매달 내야 하는 엄청난 보험금 때문에 항상 근심하고 있습니다. 만약 수십억대의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 어떨까요? 여름수양회 때 특강을 해 주신 김 승원 목자님의 아버님은 한때 100 억대의 부자셨는데 돌아가실 때 13억의 부채를 남기고 가셨다고 합니다. 많은 소유가 있다고 해서 근심과 불안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잃어버릴까봐 더욱 불안해하고 근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근심과 불안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부터 나타난 현상입니다. 창세기의 가인이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떠난 후부터 그는 쉼이 없는 방랑자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자기를 쳐 죽일 것 같은 두려움에 날마다 시달렸습니다. 이런 불안과 두려움은 무엇을 소유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품에 영혼의 닻을 내릴 때만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여기서 ‘믿으라’는 것은 ‘맡기라’, ‘신뢰하라’는 뜻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생명의 구주이신 예수님을 신뢰하고 장래를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책임지고 인도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장래를 하나님과 예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자신에게 주어진 종교개혁의 과제가 너무 무거웠습니다. 한없는 고민과 근심에 휩싸여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루터가 답답한 마음에 밤중에 기도하다가 문득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교회가 내 교회입니까? 하나님 교회입니까? 하나님 교회이지요. 이 종교개혁의 일이 내 일입니까? 하나님의 일입니까? 하나님의 일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저는 이만 잠자러 가겠습니다.” 루터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참으로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 1 문을 기억하십니까? “문: 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사나 죽으나 나는 내 것이 아니요, 내 몸과 영혼 모두 나의 미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내 모든 죗값을 온전히 치르시고 나를 마귀의 권세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면 머리카락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시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분명히 이루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성령으로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며, 이제부터는 온 마음을 다하여 기꺼이 그리고 언제라도 주를 위하여 살게 하십니다.” 이 지상 최대의 위로, 유일한 위로는 바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저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줄 믿습니다. 저는 이만 근심을 멈추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근심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어야만 할까요?


    첫째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2절과 3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버려두고 도망가려 하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제자들이 거처할 곳을 마련하기 위해서 가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 아버지 집’은 전통적으로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 부활한 성도들이 들어가게 될 천국을 가리킨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물론 신령한 몸을 입고 영원히 살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은 신자들의 가장 큰 소망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세상 것에 얽매이지 않고 주와 복음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것은 천국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아버지의 집’이나 ‘거처’는 장차 들어가게 될 ‘천국’이라는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집’은 성전을 가리켰습니다. 성전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요,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장 19-21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건물로서의 성전을 대체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이제 곧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만남을 가로막는 죄의 장벽을 허물어 버리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새로운 성전, 영원한 성전이 되시고자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새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하나님은 얼마나 좋으신 분인가? 하나님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신가? 하나님은 얼마나 신실하신 분이신가?’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내 인생과 장래를 기꺼이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근심과 두려움 대신 평화와 안식이 우리 영혼에 깃들이게 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도마는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봐야만 믿는 도마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처를 이 세상에 있는 물리적인 장소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6절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요,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진리요, 영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이란 뜻입니다.


    길을 한자로 ‘도(道)’라고 합니다. ‘도’하면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도를 아십니까?’라고 물었던 대순진리회가 떠오릅니다. 한 목자님이 과거 이 질문에 낚여서 끌려갔다가 수백만 원 짜리 제사를 드렸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동양 사람들은 대개 이 도라는 말에 끌립니다.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하늘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찾아왔습니다. 공자님은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 즉 ‘아침에 길을 찾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했습니다. 노자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즉 ‘도를 도라고 하면 더 이상 도가 아니다’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남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길을 찾아보았지만 실패했습니다. 서양에서는 ‘길’보다는 ‘진리’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했습니다. 소크라테스부터 시작해서 칸트나 헤겔과 같은 근대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절대 진리를 찾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철학자들이 아무리 절대 진리를 찾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아예 절대 진리를 찾기를 단념하고 ‘진리는 상대적이다. 진리는 다양하다’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왜 사람들은 이렇게 길과 진리를 찾고자 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사람이 본래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회귀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연어는 민물에서 태어나서 바다에서 살아가 죽을 때가 되면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옵니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바다에서부터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 자기가 알에서 부화한 곳으로 정확하게 돌아옵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에게는 저 높은 하늘을 생각하고 절대자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본능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참된 안식과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도 성경 공부를 시작하기 한참 전부터 진리를 알고 싶은 소원이 있었습니다. 절대자의 품을 그리워하고 동경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도하러 나오신 목자님이 ‘진리를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하는 한 마디 말에 홀린 듯 이끌려 처음 센터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이 여러 개가 있듯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도 여러 개가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종교를 믿어도 성실하게 믿으면 하나님께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기독교 신학자들 가운데도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 갈래 다양한 길로 산 정상에는 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성경이 말해주듯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늘에 못 올라갑니다. 하늘에서부터 내려 온 길을 따라 올라가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길을 가리켜 중보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보자는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인류 역사에 참 하나님이며 동시에 참 사람이셨던 분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말을 남긴 성인들은 여럿 있지만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2:5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또 사도행전 4:12절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세상에서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편협하다. 독선적이다.’라고 비난을 합니다. 그런데 ‘나를 낳아 준 어머니는 한 분 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하면 어떻습니까? 이것도 편협하고 독선적인 말일까요?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님 외에 하나님께로 이를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저는 지난 여름수양회에서 한 자매 목자님의 인생 소감에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과거 친구 관계를 넘어 자기를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동성 애인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죄로 여기지 않고 신선해 보이고 마냥 좋기만 했다고 했습니다. 세상이 이야기하듯이 그저 남들과 조금 다른 삶의 방식일 뿐이라고 합리화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죄의식과 수치심이 밀려오는 것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헤어지면 자살하겠다는 애인의 말에 겁이 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진리가 없는 세상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분을 말씀 공부로 인도하셨습니다. 마침내 멕시코 수양회에서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말씀을 통해 다시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진리와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였습니다. 지난 겨울 제가 인도한 목자 학교를 졸업했는데, 이분의 목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중남미의 태양처럼 뜨거운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열망은 바로 과거 자기처럼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길 되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요즘 운전할 때 우리는 곁에는 목적지까지 길을 안내해 주는 고마운 친구, 네비게이션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지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그리고 목자요 성경 선생은 그 길을 알려주는 네비게이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참된 친구, 인생의 네비게이션 역할을 감당하는 목자요 성경 선생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자는 예수님이 하신 일도 할 것이요, 그보다 큰 일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보다 큰 일’이란 질적인 면이 아니라 양이나 범위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을 제자들도 행하였습니다. 예수님처럼 제자들도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주로 유대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유대를 넘어서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예수님은 3년간의 공생애를 통해서 120명의 제자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짧은 기간에 수천 명을 회개시키는 큰 역사를 이루었습니다(행2:41; 4:4).


    그러면 어떻게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예수님이 안계시더라도 제자들이 자립적으로 큰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제자들의 기도가 예수님이 기도한 것과 똑같은 권위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기도가 곧 예수님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기도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능력 있는 인생을 살지 못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기도의 능력을 알지 못하고 기도하는 일에 헌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고 해서 모두가 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기도에 전념하는 사람만이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도에 전념한다고 해서 모두가 큰 일을 할 수 있는 것 역시 아닙니다. 기도에 전념하되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사람만이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에 전념해도 하나님의 뜻 보다는 자기 뜻과 욕심을 이루고자 기도하면 응답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에 전념하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통해서 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 속에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말로 보혜사라고 번역된 단어는 영어 성경에서는 돕는 자, 변호인, 위로자, 상담자, 중보자 등 다양한 뜻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보혜사는 이 중에 어느 한 가지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다 합친 분입니다. 예수님이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하신 것은, 현재 제자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이 보혜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을 세상에서 보호하시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끊임없이 믿음과 용기를 심어주셨습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도와주시고, 능력을 부어주시고,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혜사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예수님을 대신할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대신할 또 다른 보혜사는 영원히 제자들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또 다른 보혜사는 누구입니까? 17절을 보십시오. “그는 진리의 성령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또 다른 보혜사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십니다. 보혜사인 예수님은 제자들 ‘곁에서’ 도와주셨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은 제자들 ‘속에’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 내면에 임재 하셔서, 제자들을 깨닫게 하시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성령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들은 자신들 속에 임재 하시는 보혜사 성령을 알고 느끼며 교제합니다. 제자들 내면에 임재 하시는 성령은, 필요할 때마다 위로해주시고 힘과 용기를 공급해주십니다.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시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사도행전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두려움을 모릅니다. 담대합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오합지졸 같던 제자들이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 있었습니까? 바로 성령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들 내면에 영원히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 역시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안심하고 우리 인생을 성령께 맡기면 됩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때 우리는 길 되신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께로 나아가 아버지 집에서 자유롭게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할 수 있는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 내면에 영원히 거하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27절을 보십시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십니다. 이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가 한번은 대서양을 배를 타고 건너는데 큰 폭풍이 불었습니다. 웨슬레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 잡혀 얼굴이 사색이 되어 벌벌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배 밑바닥 쪽에서 찬송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웨슬레가 가서 보니 모라비안 선교회의 성도들이 평안한 얼굴로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웨슬레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는 목사이고 선교사인데 나는 왜 저들에게 있는 평안이 없는 것일까?’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습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지금 내 안에 오셔서 함께 하시는 주님을 새롭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웨슬레는 심령이 뜨거워져서 더 열정적으로 복음역사를 섬기는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어떤 풍랑 속에서도 가라앉지 않는 절대적인 평안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가 이 평안을 덧입을 때 걱정근심이 물러납니다. 어떤 상황을 만나도 두렵지 않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언제든지 하나님께 나아가서 함께 거할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하시기 위해서 제자들을 떠나셨습니다. 떠나가시면서 자립적으로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대신하여 제자들을 보호하고 인도해줄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동일한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믿어 근심을 벗고 마음에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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