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로마서

이방인을 제물로

이창무 2015. 4. 30.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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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수양회 제 1 강


이방인을 제물로


말씀; 로마서 15:14-33

요절; 로마서 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2009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좋은 일이 생기리라는 희망과 기대감으로 들뜨곤 합니다. 그러나 올해에는 그렇지가 못한 것 같습니다. 주위를 둘러 보면 희망과 기대감 대신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올해 최악의 경제 위기를 만나 수많은 기업들이 쓰러지고 거리에는 실업자가 넘쳐 가지 않을까 근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경제 한파가 몰아친다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감당해야 할 직무와 개척해야 할 사명의 땅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명을 붙들고 도전할 때 새해 어떤 어려움도 능히 극복할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로마서를 기록한 동기와 목적과 미래의 계획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사도 바울의 복음의 제사장으로서 직무와 개척정신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2009년 신년을 준비하는 저희들에게 영적 방향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Ⅰ. 복음의 제사장 직무(14-19a)


14 절을 보십시오. ‘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바울이 로마 성도들의 신앙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로마 성도들이 지금까지 증거한 복음을 영접하고 변화를 받아 그들 가운데 선한 열매들이 가득함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지식도 구비하여 서로 가르치고 권할 만큼 성숙한 자들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이 글을 쓰고 있습니까? 1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바울은 그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가르쳐 줄 목적으로 로마서를 쓰지 않았습니다. 로마 성도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나게 하려고 썼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이미 알고 있는 복음을 더욱 굳게 붙잡도록 돕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썼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은혜는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맡겨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 자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얻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제사장의 직분을 맡았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제사장 직무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구원 역사를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 직무는 아무나 함부로 범할 수 없는 거룩하고 신성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오직 레위 지파만을 택하여 제사장 직무를 감당토록 하셨습니다. 이 제사장 직무를 감당할 때 입는 대제사장의 의복은 매우 특별했습니다. 이 옷은 12지파를 상징하는 12종류의 보석을 가슴에 달았습니다.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수놓은 영화롭고 아름다운 옷으로 지어졌습니다. 이것은 제사장 직분이 얼마나 영화롭고 아름다운 직분인지를 잘 말해 줍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신약 시대에 이르러 제사장 직분의 의미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말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믿는 우리 모두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사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르틴 루터가 부르짖었던 ‘만인 제사장’입니다. 우리에게 거룩하며 신성하고도 영광스러운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은혜로 맡겨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바울은 지난 날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서 무지했고, 도리어 원수 노릇하던 자였습니다. 그는 이 복음을 믿는 성도들을 잡아 옥에 가두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성도들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많은 성도들이 고향과 가족을 등지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심지어 극심한 고난 가운데 죽음을 맞이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그를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주시고,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사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제사장 직분까지 맡겨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하나님의 은혜를 일생 잊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은 그가 이 은혜에 붙들려 이방인들 가운데 복음의 제사장의 직분을 얼마나 헌신적으로 감당하며 살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가 지금 고린도에 머물며 로마서를 기록하는 이유도 바로 이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복음의 제사장의 직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의 제사장의 직무는 이방인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거룩한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이 했던 주된 일은 성전에서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희생제물로 바친 소와 양은 살아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것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제물을 죽여서 그 살과 피를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제사장들은 희생제물에 대해서 먼저 정결예식을 행했습니다. 다음으로 제물을 죽인 후 그 고기는 각을 떠 불태워 드리고 그 피는 제단이 뿌려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복음의 제사장 직무는 이처럼 이방인을 하나님께 받으실 만한 거룩한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방인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거룩한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이는 이방인들에게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까지 돕는 것입니다. 복음을 영접함으로 의롭다는 선언을 받는 것에 멈추어 서서는 안 됩니다. 구원받은 모든 자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5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모든 이방인들이 믿고 순종토록 하는 것이 사도요 제사장 된 우리의 임무입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질 때 그들의 내면까지 다 변화되도록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 헌신되어 예수님께서 언제든지, 마음대로 쓰실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온전히 변화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는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리는 극도로 가치관이 혼란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절대성을 상실한 상대주의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제가 학창시절 때만 하더라도 캠퍼스의 분위기는 무엇인가 참되고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고 이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고 희생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사회가 점점 안정되고 물질적으로 풍요하게 되자 이제는 인생에 대한 아무 문제의식도 없이 즐기는 분위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서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감당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꾸준히 1대1 말씀 공부도 힘든데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이 되도록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시대에 역행하여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보면 자신도 모르게 목표를 하향 조정하고 상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양들을 돕기 쉽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어떠하든 우리의 목표는 명확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입니다. 이 기준은 절대로 흔들려서는 안 되고 흔들릴 수도 없습니다. 


고구마를 삶아보셨습니까? 삶을 때 충분한 시간을 두고 열을 가하지 않으면 겉만 익고 속은 썰컹썰컹하게 남아있는 설익은 고구마가 됩니다. 이런 고구마는 아무리 달고 맛있는 품종의 고구마라 할지라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양들을 도울 때도 끝까지 철저히 돕지 않으면 겉만 익은 설익은 고구마로 만들어 놓기 쉽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나이를 먹어서도 망령된 소리나 하고 불순종으로 공동체를 온통 힘들게 만듭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자신은 조금도 헌신하지 않으면서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불평불만만 늘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안팎으로 변화되어서 주님께 전폭적으로 헌신된 제자로 세워졌을 때만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실 수 있습니다.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적인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언제 어디서나 “Yes. Lord!”할 수 있는 순종의 사람 한 사람을 키워내야 합니다. 이처럼 복음을 거슬리고 대적하는 한 영혼을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된 사람으로 변화시키기까지는 많은 해산의 수고와 인내와 믿음의 선한 싸움이 요구됩니다. 한 명의 양을 얻기 위해 캠퍼스에 나아가 눈물로 씨를 뿌립니다. 바쁜 중에 시간을 쪼개어 전화를 하고 밥을 사주고 심방을 갑니다. 일대일로 말씀을 먹이고 합심하여 기도합니다. 반발해도 받아 주고 도망가면 잡아 오고 또 도망가도 다시 찾으러 갑니다. 때로는 미움 받을 각오를 하고 죄를 회개하도록 책망합니다. 리더가 되고 결혼을 한 뒤에도 지속적으로 도와주고 섬겨 주어야 합니다. 정말 우리의 눈물과 피와 땀이 없이는 단 한 사람도 하나님께 받으실 만한 제물로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통해 한 영혼이 변화되어 하나님께 헌신된 그리스도의 사람들, 새벽이슬 같은 거룩한 주의 청년들, 어두움을 비추이는 빛의 사자들, 복의 근원들로 세워지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가슴 벅차도록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일은 그 자체로도 이 세상에서 가장 보람된 일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우리에게 캠퍼스의 영혼들을 제자 삼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만한 산 제물로 바치는 영광스러운 제사장 직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그런데 16절 하반절에 보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변화를 받아야만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는 제물이 됩니다. 제사장들이 제물을 제사절차에 따라 준비한 후 마지막에 무엇을 합니까? 불로 제물을 태웁니다. 불로 태워서 남김없이 하나님께 드립니다. 제물을 불로 태우듯이 우리가 섬기고 있는 양들과 제자들이 성령의 불로 변화되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중보 기도입니다. 기도는 이방인을 제물로 온전히 드리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반드시 감당해야 할 노동입니다. 사도 바울은 온 힘을 다해서 양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훈계하며 또 눈물과 겸손으로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나 양들 섬기기를 마치고 혼자 있을 때는 다시 하나님께 향하여 눈물과 간구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중보 기도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진실되고 헌신적으로 기도했으면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신다고 했겠습니까?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롬1:9) 사도 바울의 열매가 풍성한 역사 이면에는 그의 헌신적인 중보 기도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제사장 직분을 감당할 때 기도의 노동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이 아니라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 곧 사단과 악한 영들과의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새해 양들과 제자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동역자들을 위해 힘써 중보 기도의 노동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 가운데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는 변화의 역사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이 직무를 감당하며 바울이 자랑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17절부터 19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바울 자신을 통해서 역사하신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바울 자신을 쓰셔서 드러내신 일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입술을 통해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씀이 힘을 얻도록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바울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하여 이방인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믿음의 사람이요 순종의 사람이요 성결의 사람이 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도 바울을 쓰실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울 자신이 믿음의 사람이요 순종의 사람이요 성결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이 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순종의 사람이 순종의 사람을 낳을 수 있지, 불순종의 사람이 순종의 사람을 낳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캠퍼스 지성인들을 믿어 순종하게 하는 역사에 우리를 써 주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피싱하고 일대일로 말씀을 전하고 같이 밥 먹고 기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를 기뻐 받으시고 역사하셨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위에 여러 가지 표적과 기사를 더하셔서 변화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오래 동안 자녀가 없던 가정에 기적처럼 2세를 허락하셨습니다. 또한 최근 3 ~ 4년 동안 우리 센터 가운데 40여명의 선교사를 세계 곳곳에 파송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웬만한 규모의 UBF 센터 하나를 통째로 드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사람들을 보내 주셔서 이 빈 자리를 다 채워 주셨습니다. 모든 선교단체들이 이구동성으로 캠퍼스 선교가 어렵다고 하는 와중에도 샛별 같은 학생 제자들을 세워 주셨습니다. 우리의 진심을 받으시고 우리를 통해 역사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계속해서 캠퍼스 지성인들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이 되지 못하는데 누구를 제물로 드릴 수 있겠습니까? 지금 현재는 온전한 제물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온전한 제물이 되고자 하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끊임없이 자기를 훈련하고 성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온전한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점에서 성장해야 할까요? 


첫째, 말씀이 준비된 성경 선생으로 성장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의 역사입니다. 말씀역사를 섬기기 위해 탁월한 성경 선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말씀이 준비된 성경 선생이 될 수 있을까요? 비결은 단순합니다. 매주 한 편의 소감을 절대적으로 감당하는 거룩한 습관을 몸에 익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소감을 쓰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소감을 쓸 때 대충 적당히 얼버무려서 쓰는 소위 라면식 소감을 쓰지 않고, 깊이 묵상하면서 곰탕 같은 소감을 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매주 소감을 깊이 쓰다 보면 어느새 말씀이 충만한 성경 선생으로 성장해 하나님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양들은 말씀이 풍성하고 깊이 있는 목자에게서 말씀을 받아 영적으로 무럭무럭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약속 시간을 잘 지키는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만약 청와대 오찬 모임에 초대를 받았다고 하면 여기에 지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약속 시간을 잘 지키는 것은 얼마나 경외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임에 절대적으로 참석하고 시간을 잘 지키는 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모임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영화에서 조연은 도중에 죽어도 주인공은 끝까지 살아 남습니다. 모임의 주인공은 끝까지 남는 사람입니다. 새해 우리가 모임을 이룰 때 정시에 시작하고 끝까지 자리를 잘 지키다가 뒷정리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하도록 합시다. 그런 모임은 참석한 사람 모두가 서로에게 격려가 되고 힘이 되는 은혜가 넘치는 모임이 될 것입니다. 양들은 이런 모임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님 역사에 대한 경외심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될 것입니다.


셋째, 꾸준한 개인 기도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지만 우리와 함께 일하시길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통해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가 만 가지가 부족해도 기도 한 가지를 잘 하면 하나님께서 나머지 모두를 채워 주십니다. 기도는 공적 기도와 개인 기도가 있습니다. 식사 기도나 모임 끝나고 둘씩하는 기도는 공적 기도입니다. 이런 공적 기도도 중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기도를 배우려면 꾸준한 개인 기도가 필수적입니다. 하루의 일정 시간을 기도 시간으로 떼어 놓고 이 시간에 날마다 기도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요한 웨슬레, 조나단 에드워드, 조지 뮬러 등 역사 상 하나님께서 크게 쓰신 사람들 중에 개인 기도의 습관이 없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개인 기도 시간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시간입니다. 은밀한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소통하는 시간입니다. 하루의 첫 시간인 새벽 시간은 아무런 방해 없이 개인 기도를 드리기에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올해 우리 가운데 새벽 기도의 부흥이 일어나고 100명의 새벽 기도의 용사들이 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살과 피를 온 세상을 위한 대속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이처럼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하겠습니다. 양들을 가르치기에 앞서 내가 먼저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삶의 본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내가 먼저 죄악된 습관과 싸우고 자기를 부인해야 하겠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크게 역사하시고 어떤 완악한 사람들도 믿어 순종케 하실 줄 믿습니다.  2009년 우리 각 사람이 먼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제물이 되고 또 온전한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으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지난 2008년은 저에게 오랜 기도 제목이었던 선교사의 길이 구체적으로 열리기 시작한 뜻 깊은 한 해였습니다. 사실 저는 지난 해 비자 신청을 함께 한 신 이삭 선교사님과 비슷한 때에 미국에 선교사로 나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잘 진행되던 비자 수속 과정 중 변호사가 수수료로 750불을 송금해야 하는데 700불만 송금하는 실수를 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민국에 의해 저의 고용 비자가 거부되고 말았습니다. 50불 곧 단돈 6만원이 저의 앞 길을 가로 막았습니다. 그러나 올해 다시 한번 도전할 것입니다. 2010년 신년 수양회에서는 저를 보실 수 없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선교사로 가려고 하니 지난 해 뉴저지 박 요한 선교사님이 하신 한 말씀이 계속 목에 걸린 가시처럼 걸렸습니다. 선교사님은 저와 식사를 하시던 도중에 어디선가 걸려 온 전화를 한참 동안 받으신 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미국에서 양을 도우려면 정신병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미국에서는 정신병을 가진 양들이 흔한데 특히 한국에서는 드문 편집증 환자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방금 편집증에 걸린 한 자매양이 센터에서 목자 한 사람을 때렸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선교사로 갔다가 잘 하면 양한테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멀쩡한 사람도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로 변화시키기가 힘이 드는데 어떻게 정신병에 걸린 사람을 치유해서 순종과 헌신의 사람으로까지 변화시킬 수 있을지 앞날이 까마득했습니다. 그러나 담담하게 말씀하시는 선교사님의 모습 속에서 어렵지만 믿음으로 제자양성에 도전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이방인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로 드릴 수 있는 비결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제가 먼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이 되는 데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지난 해 저의 길을 막으신 이유도 제가 선교사로 쓰임 받기에 부족한 부분을 훈련하시기 위함이 아닌가 합니다. 제가 다른 것도 많이 부족하지만 특히 기도에 너무 게으른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아시고 제가 매주 금요 기도회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금요 기도회를 통해 기도의 세계를 조금 맛 보았습니다. 지난 해 ‘선교사로 가기 전에 정 인성 목자님의 회복, 김 혜영 목자님의 결혼, 김 부영 목자님의 약혼을 보게 하소서’ 이렇게 세 가지 기도 제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 제목들에 모두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가 선교사로 가는 것은 당연히 될 줄 알고 너무 기도를 게을리하지 않았나 합니다. 기도가 제 몸에 익을 때까지 아직도 갈 길이 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올해 저를 기도의 사람으로 빚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제가 장차 선교지에서 기도를 통해서 성령의 능력을 힘 입어 어떤 문제 많은 이방양이라도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로 드리는 복음의 제사장으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II. 바울의 개척 정신(19b-33)


19 절 후반 절을 보십시오.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사도 바울은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광범위한 지역에 전하였습니다. 일루리곤 지방은 마게도냐 북쪽 지방으로 오늘날 유고슬라비아 지방입니다. 그가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면서 한 가지 붙잡은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 원칙이 무엇입니까? 20,21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에게는 남이 전파한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고자 하는 선교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사야서 말씀에 기초해서 이 선교원칙을 붙들었습니다. 이 원칙은 그로 하여금 늘 개척정신을 가지고 새로운 복음의 미개척지를 향하여 나아가게 했습니다. 이것이 그로 1,2,3차에 걸쳐 선교여행을 하게 했고, 이를 통해서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선교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이 넘어섰고, 육신의 가시인 안질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죽이고자 하는 유대 열혈당원들의 암살 위협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쯤 되면 자신의 건강을 돌보며, 그 동안 개척했던 선교지를 돌아보는 일로 남은 여생을 얼마든지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에 대해 어떤 새로운 방향을 잡았습니까? 22-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바울은 여러해 전 에베소 개척을 통해 아시아 선교를 성공적으로 이루었습니다. 그때 그 지방에서 일할 곳이 없을 정도로 복음을 편만하게 전파하였습니다. 그 후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는 새로운 선교방향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선교 방향을 따라 로마로 가고자 여러 번 시도하였습니다. 하지만 번번히 길이 막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길이 막힌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찌하던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로마로 나아갈 좋은 길을 얻기 위해 항상 기도했습니다. 그가 그토록 로마를 방문하고자 하는 목적은 서바나 곧 지금의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서바나로 가는 길에 로마에 들려 로마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고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그들의 파송을 받아 서바나로 나아가길 원했습니다. 당시 서바나는 땅끝이라고 알려진 곳입니다. 미지의 땅이었습니다. 영적 황무지였습니다. 그곳에 가서 개척의 역사를 새롭게 시작하려면 다시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의 나이 어언 50을 넘어섰습니다. 그 나이에 새롭게 일대일로 양을 쳐야 합니다. 어린 양들과 씨름해야 합니다. 피땀 흘리는 개척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곳에 편하게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개척하고자 하는 바울의 개척정신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아무리 유능한 청년이라 할지라도 개척정신을 상실하게 되면 시들어가는 꽃처럼 그 활화산 같았던 정열이 식고 늙은이처럼 변합니다. 그러나 개척정신을 소유한 개척자에게는 도전정신이 있고 fighting spirit이 있습니다. 그의 내면에는 항상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역사를 창조하고 가슴 설레게 하는 비전이 있고 희망이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그의 젊음은 시들지 않고 계속해서 활화산처럼 타오르게 됩니다. 이 시대는 안일주의 시대요 쾌락주의 시대입니다. 정신과 사상과 신앙이 모두 안일에 젖어서 새로운 역사창조의 힘과 생명력을 잃어가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개척정신의 회복이야말로 새로운 역사 창조의 원동력입니다. 2009년도 우리가 이 시대 정신인 안일 정신을 거부하고, 맞서 싸우길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의 가슴 속에 있는 개척정신을 가지고, 캠퍼스에 나아가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힘써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각 캠퍼스 가운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심직한 제물을 산 제사로 드리는 힘찬 개척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맡겨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새롭게 함으로 사도 바울의 개척정신을 회복하여 대망의 2009년 캠퍼스 개척역사를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09.1.3 이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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