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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희는 서로 영접하라
    설교/로마서 2015.04.30 11:00

    2011년  로마서 제 6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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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씀  / 로마서 14:1-15:13

    ▣ 요절 / 로마서 15:7




    너희는 서로 영접하라


    한 신혼부부가 있었는데 날마다 잠들기 전에 티격태격 다투었습니다. 다툰 이유를 알고 보니 남편은 치약을 짤 때 아래 부분부터 짜고 아내는 그냥 중간부터 짜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남편은 아래부터 밀어 올려야 치약도 아끼고 나중에 편하다며 평생 이렇게 해 왔는데 이제 와서 바꿀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중간부터 짜야 빨리 나오고 편하다며 나도 평생 이렇게 해 왔는데 이제 와서 바꿀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 부부는 치약 때문에 결혼 생활의 파경을 맞아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만 모여도 지금까지 살아온 습관과 문화적 배경의 차이로 인해 갈등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배경 가운데 성장한 사람들이 모인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문화적 차이로 인한 갈등은 필연적입니다. 이런 갈등을 영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그 모임은 지옥이 되어 버리고 사람들은 고통과 번민에 시달리다가 실족하게 됩니다. 반면에 이런 갈등을 영적으로 잘 해결하게 되면 그 모임은 천국이 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닮은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 속에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 해결의 길잡이가 되는 사도 바울이 권면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이 바울의 가르침을 잘 배우고 실천하여 한 마음과 한 뜻을 이루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서로 다른 문화 배경 속에서 살아 온 사람들이 만나면 문화적 충격(Cultural Shock)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선교사님들이 이방 땅에 나가면 제일 먼저 겪는 것이 문화적 충격입니다. 전 여호수아 선교사님은 남미에 가서 처음 캠퍼스 심방을 갔다가 공공장소에서 자유분방하게 애정표현을 하는 대학생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이것들이 인간인가? 짐승인가?’하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바울 당시 로마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 교회 안에는 한 지붕 안에서 신앙 생활하기는 하지만 서로 배경이 너무나 다른 두 개의 그룹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으로 평생 살다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들어온 신자가 있었습니다. 한편에는 유대교와는 아무 상관없이 살아온 이방인 출신 신자가 있었습니다. 유대인 출신으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엄한 율법주의를 고수하던 옛날 버릇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음식을 놓고 정하야 부정하냐를 가렸습니다.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았는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갑자기 바뀔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 신자들 중에 강경파는 ‘시장의 고기는 우상에 바쳐졌던 것일 수 있으므로 오직 채식만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인 신자들 앞에 아무 거리낌이 없이 삼겹살을 노릇노릇하게 구워서 상추에 싸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방 신자들은 유대인 신자들을 멸시했고, 유대인 신자는 이방 신자들을 비판했습니다. 


    바울은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을 믿음이 연약한 자, 믿음이 강한 자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지키던 음식과 절기에 대한 규례들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만 효력이 있는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규례와 제도에 묶여 종살이 하는 삶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자유롭게 하셨는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 일치가 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런 그림자를 벗어 던지고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하는데, 유대인 신자는 그렇지 못하니 바울은 그들을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반면 율법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믿음만을 중히 여기며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기는 이방인 신자들은 믿음이 강한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사도 바울은 어느 한 쪽을 두둔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 편을 들어줄 것도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 강하든 약하든 서로 헐뜯고 비판한다면 어느 쪽도 잘 하는 것이 없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싸우고 반목하는 문제를 ‘죄냐 아니냐?’ 혹은 ‘진리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강한가? 약한가?’의 문제로 봅니다. 이런 문제들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부수적인 문제입니다. 한 때 ‘디씨인사이드’라는 인터넷 게시판을 뜨겁게 달군 이슈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탕수육을 먹을 때 소스를 부어 먹어야 하느냐 소스를 찍어 먹어야 하느냐는 논쟁이었습니다. ‘붓는 것이 진리다. 아니다. 찍는 것이 진리다’하면서 엄청난 댓글이 달리고, 나중에는 각종 악플과 비방, 인신공격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 논쟁은 소녀시대가 소스를 부어 먹는 사진이 공개됨으로 종결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부어 먹든 찍어 먹든 그것이 진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논쟁이나 반목 거리를 보면 대부분 정확히 옳다 그르다 할 수 없는 회색 지대에 놓인 문제를 가지고 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몸에 배인 습관에 따라 혹은 자기 목자님이 누구냐에 따라 똑 같은 것을 보고도 의견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르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른 것을 놓고 ‘틀렸다’ 하면서 자기의 생각이나 선호를 마치 성경의 진리처럼 붙들고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것이 문제입니다.  


    의견이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바울은 어떻게 하라고 말합니까? 3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받으라고 합니다. 강요하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으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종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하나님의 종입니다. 우리를 최종적으로 판단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옆에 앉아 있는 형제의 주인이 내가 아닙니다. 만약 그 형제가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이 그의 주인이니까 판단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신 형제자매를 내가 감히 무슨 권한으로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군에 복무할 때 유난히 저를 심하게 갈구던 대구 출신 한 장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우리 센터에 김 병준이라 이름하는 형제가 나타났는데 알고보니 대구 출신에 장교로 전역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제 속에 있던 아픈 기억이 자꾸 떠올라서 이 분 근처에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름 수양회에서 저는 병준 목자님이 발표하신 Life-Testimony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받으신 형제를 왜 내가 멀리했는가? 회개했습니다. 이후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이 분이 참 진국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찬양팀, 사진, 방송국 등등 제게 없어서는 안 되는 너무 귀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병준 목자님을 제게 보내사 저의 트라우마를 치료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5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중히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이 다 같다 여겼습니다. 유대인 출신 신자들은 안식일에 뭔가를 하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유월절도 반드시 지키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반면 이방인 신자들은 ‘우리가 언제 이런 것 따지고 살았냐?’하면서 이런 날들을 다 무시했습니다. 이 때문에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 간에 반목이 생겼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원칙 하나를 제시합니다.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이 말은 ‘소신대로 결정하라. 각자 자기의 신앙 양심에 따라 대처하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바는 양심 상 걸려서 못하는 사람은 안 하도록 그대로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또 양심 상 거리끼지 않고 별 구애를 받지 않는 사람은 자유롭게 신앙생활 하도록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 가지고 형제끼리 서로 반목하거나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찬양 인도자로서 선곡할 때마다 고민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모임에 1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세대가 함께 있다 보니 음악에 대한 취향이 제각각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요즘 노래는 음표가 너무 많아서 따라 부르기 힘들다고 하시며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같은 곡을 좋아 하시는 김모세 목자님 같은 세대도 계시고, 싱코페이션이 잔뜩 들어가고 비트가 강한 모던 락 스타일의 찬양을 좋아하는 세대도 있습니다. 젊은 세대는 찬송가는 고리타분하다고 하고 기성 세대는 CCM이 너무 유행가 같아서 어색하다고 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주일에 축구하는 것을 금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Anam Football Club AFC가 있습니다. AFC이 별명이 가오나이오나 축구단입니다. 왜냐하면 AFC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주일마다 축구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런 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와 의견과 견해가 다르다고 함부로 다른 사람을 재단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명확한 해답이 없어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있는 것은 각자 소신껏 양심에 따라 결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 소신대로 행하면 되고, 나와 다른 소신을 가지고 행하더라도 그 사람의 양심과 소신을 인정해 주면 됩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이런 자유를 남용하거나 악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에 아침 7시쯤 일찍 예배드리고 하루 종일 골프치고 등산하면서 소신껏 놀러 다닌다면 이를 두고 주일을 지켰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소신대로 내린 결정이라고 해도 아무 기준도 원칙도 없이 맘대로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이에 대해 바울은 소신대로 자유롭게 하되 다음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첫째로 동기와 목적이 “주를 위하여”이어야 합니다. 6절부터 8절을 보십시오. 여기에는 5번이나 반복되는 어구가 나옵니다. 바로 “주를 위하여” 입니다. “주를 위하여”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의 동기요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찬송가를 불러도 주를 위하여, CCM를 불러도 주를 위하여, 주일에 축구를 해도 주를 위하여, 축구를 하지 않아도 주를 위하여. 내가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모두가 ‘주를 위하여’ 하는 행동이어야 합니다. 나뿐 아니라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도 마음속에 ‘주를 위하여’라는 동기와 목적을 품고 있다는 것을 일단 믿어 주고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를 위하여 살고 주의 위하여 죽어야 하는 주의 것입니다. 이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든 믿음이 약한 사람이든 모든 믿는 자에게 예외 없이 다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까? 고린도후서 5장 15절은 말합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나를 위해 사는 인생에서 주님을 위해 사는 인생을 살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하든 주를 위하여 하는지 여부를 양심적으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함부로 이것은 죄고 저것은 죄가 아니다 이렇게 선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주를 위하여 하는 것이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반드시 물어야 합니다.


    두 번째 조건은 내가 주를 위하여 한 것인지 아닌지 여부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내가 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했는지 안 했는지 사람들은 구분 못하지만 장래에 하나님 앞에서 다 술술 불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결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책임 질 것을 의식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이 심판대는 남의 일을 가지고 나가는 자리가 아닙니다. 나의 일을 가지고 나가는 자리입니다.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 감 놔라 배 놔라 하기에 앞서 내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책망 듣지 않고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 받을 수 있을까 자신을 먼저 물어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주를 위하여”라는 아름다운 원칙을 가지고 있지만, 그 ‘주를 위하여’라는 원칙마저 오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고민하지 않고 ‘주를 위하여 하는데 뭐 어때?’ 하면서 독선에 빠질 위험성입니다.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닙니다. 우리는 나 혼자가 아니고 주님을 머리로 하는 한 몸의 지체들이며 공동 운명체입니다. 모임 안에서 나는 다른 형제를 세울 수도 있고 다른 형제를 무너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내 생각이 옳다 여겨져도 형제에게 상처를 주거나 죄를 짓게 만들 수 있는 일이라면 스스로를 속박해야 합니다. 첫 번째 원칙이 ‘주를 위하여’라면 두 번째 원칙은 ‘형제를 위하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마르틴 루터의 유명한 논문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 루터는 신자는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완전한 자유인이며 동시에 누구에게나 예속되는 완전한 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모순되는 말처럼 들리지만, 모든 신자는 신앙의 진리 안에서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이지만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여기서 부딪칠 것, 거칠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형제의 신앙생활에 방해가 될 만한 시험 거리를 던져 놓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어떤 형제가 자기 생각과 양심에 걸리는데 다른 형제가 하는 것을 따라 하다가 믿음 없이 행하면 그 자체가 죄가 됩니다. 거치게 하는 것은 형제를 근심하게 하고 망하게 하고 죄짓게 만드는 악한 일입니다.


    14절에는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20절에는 “만물이 다 깨끗하되”라고 합니다. 세상에 있는 것 가운데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술, 담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술, 담배 자체가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술 마시는 것을 죄라고 하는 곳은 한 곳도 없습니다. 단 하나의 예외라면 나실인이 술을 마시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유럽의 교회에서는 목회자들도 자유롭게 술을 마시고 담배도 피웁니다. 그러니 우리도 마음 놓고 술을 마셔도 됩니까?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공동체 안에 있는 다른 형제들 때문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실 자유는 있지만 마시지 않는 자유를 선택할 상황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교회사적인 상황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음주는 곧 죄라는 시각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선교사가 처음 선교할 때는 술 담배를 허용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선교사들은 술 담배를 허용해서는 신앙생활을 건전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조선의 많은 이들이 술독에 빠지고 담배 피우고 도박을 해서 사회가 깊이 병들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선교사들이 이 병을 치료하려면 교회부터 모범을 보여 술 담배를 금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901년 장로교 지침서를 만들어 7대 강령을 제정했는데 그중에 일곱째가 ‘신자는 금주 금연할 것이니라.’입니다. 금주 금연은 이후로 백여 년간 지속되어 온 한국 교회의 전통입니다. 이런 풍토 속에서 술 담배 괜찮아 하면서 마음대로 마시고 피운다면 신앙생활을 거의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눈에 매우 좋지 않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목자가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운다면 이것이 덕이 되고 은혜가 되겠습니까? 마시고 피울 수 있는 자유가 있더라도 이로 인해 실족해 넘어질 사람, 죄를 범할 수 있는 사람이 너무 많기에 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학사 목자님들은 직장에서 온갖 핍박과 조롱을 받더라도 술을 안 마시려고 고군분투하고 계십니다. 이때 사람들이 ‘너 때문에 분위기 깨진다’고 한 소리 하지만 속으로는 ‘너는 진짜 크리스챤이구나.’ 인정을 해 줍니다. 또 한 형제는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내가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결단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술을 중심으로 교제가 이뤄지는 학과 분위기 속에서 왕따가 되는 것 같아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그 덕분에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으니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훨씬 더 크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이 뭐가 이렇게 걸리는 게 많고 복잡하냐! 불평을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의는 바른 관계성이요 이는 평화로 표현됩니다. 기쁨은 의로운 관계를 통해 체험되는 열매입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가 되고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가책 받을 일을 하면, 불의에 빠지고 마음에 평화가 사라지고 기쁨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로 인해 형제를 시험에 들게 하면 그 사람과 관계성이 깨어지고 평화가 사라지고 형제와 만나도 기쁨이 없습니다. 내 안에 임할 천국의 행복을 먹고 마시는 문제로 포기할 수 있습니까? 사소한 문제로 다투다가 하나님 나라를 잃어버려야 하겠습니까? 내가 형제로 인해 내 자유를 제한하고 속박당하는 것도 사실은 내게는 큰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 임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 신앙 경력이 오래된 사람, 기도를 열렬히 하는 사람이 믿음이 강한 사람일까요? 15장 1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믿음이 약해서 실수를 많이 하고 넘어지는 형제를 어떻게 대하느냐가 내 믿음의 강도를 측정하는 척도가 됩니다. 믿음이 강하다는 것은 형제의 약함을 자기의 약함으로 알고 짊어지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형제를 포용합니까? 형제에게 걸림이 되지 않으려고 늘 조심합니까? 형제의 약점을 내가 짊어집니까? 그렇다면 믿음이 강합니다. 그러나 형제를 비판합니까? 거부합니까? 깔봅니까? 그 사람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믿음이 약한 사람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우리는 단순히 형제의 약점을 감당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려는 목적을 가져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2절 33절에서 바울은 이를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이 말씀은 그 자체로 얼마나 아름답고 멋있는 말입니까? 그러나 실제로 실천하기는 참 어려운 말입니다. 본성적으로 절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도 가끔 형제의 유익을 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의 유익을 위해 나의 유익을 희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내 마음을 밑바닥부터 흔드는 강한 동기가 일어나지 않으면 이것은 도무지 실천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렇게 해야 할 분명한 동기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무엇이 우리를 형제를 위해 희생하도록 만듭니까? 바로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일생 동안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다’는 말은 하나님을 비방하는 죄를 예수님이 다 담당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 만드시려 죄인들의 저주를 다 짊어지셨습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은 큰 감동과 함께 변화를 받습니다. ‘나 자신의 기쁨만을 위해 살아 온 삶은 얼마나 헛된 것인가? 나도 예수님처럼 살아야지’ 결심을 하고 예수님을 배우고 닮고자 하는 강한 동기가 일어납니다. 


    지난 번 제 1 회 안암 영화제에서 ‘울지마 톤즈’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이태석 신부라는 분인데 그는 의대를 졸업하고 다양한 재능도 많아서 출세와 성공의 길이 보장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라는 곳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는 전쟁과 가난과 질병에 찌든 그곳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해 주고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고 브라스 밴드를 만들어 꿈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아프리카 형제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다 바치고 48세의 젊은 나이에 대장암으로 소천했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희생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만들었을까요? 바로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이태석 신부가 평소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말씀이 있었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예수님께 드리기 위해 수단의 지극히 작은 형제들에게 자신의 삶을 내어 준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을 닮고자 하게 되고 그런 사람은 그 시대의 작은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 예수님을 닮은 마음은 안 나타나고 내 이기적인 본성만 드러나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해결책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우리를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성경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먹어야 합니다. 성경을 먹어야 예수님의 마음이 계속 자라고 나의 못된 성품이 죽습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을 녹이고 악한 성품을 깨뜨립니다. 말씀으로 내 마음이 다듬어 지고 가꾸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내 마음대로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또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소망을 알게 됩니다. 5절부터 7절을 보면 예수님의 소망은 교회가 하나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은 예수님이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약한 형제들을 함부로 비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소망이 하나 더 있습니다. 8절부터 13절은 온 세상 열방이 하나 되어 주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이 예수님의 소망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만방 백성이 이새의 뿌리이신 예수님 앞에 복종케 될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 주님의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하나 되고 전 세계가 하나 되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소망, 이 소망을 계속해서 우리 마음속에 부어주고 계십니다. 이 소망을 품은 사람이 어떻게 자기만을 위해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제 나를 기쁘게 하는 삶에서 주와 형제를 기쁘게 하는 삶으로 터닝하여 하나 되기 원하시는 예수님의 망을 이루어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로 나를 주의 소유 삼으시고 나의 약함을 대신 짊어지신 예수님을 닮고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충만히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11년 2월 20일, 이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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