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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성탄절

한 아기, 우리를 위해 나셨다

by 목자 이창무 2025.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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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성탄 2강 / 이창무

한 아기, 우리를 위해 나셨다

말씀/ 이사야 9:1-7
요절/ 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서론: 하나님의 반전 드라마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메리 크리스마스!

2025년의 끝자락,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무언가에 목말라 있습니다. '올해는 다르겠지.' '이번 년도에는 나도 한번 빛을 보겠지.' '인생 역전'을 꿈꾸며 오늘까지 견뎠습니다. 하지만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 여전히 마주하고 있는 것은 차가운 현실뿐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애를 써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 앞에서, 절망을 마주하곤 합니다.

오늘 우리가 펼친 이사야 9장의 말씀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하나님은 인류 역사를 뒤바꿀 위대한 반전을 선포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절망에 마침표를 찍고 희망의 시작을 알리는 거룩한 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장 깊은 어둠을 어떻게 빛으로 바꾸시는지, 그 위대한 반전의 서막 속으로 들어가 보고자 합니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백성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1)

성경은 먼저 두 땅의 이름을 부릅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갈릴리로 통칭되는 이곳은 비극의 땅이었습니다. 기원전 732년, 앗수르의 칼날 아래 가장 먼저 짓밟혔습니다. 이후 무려 6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방의 구두발 아래 신음했습니다. 동족들에게조차 버림받았습니다. 유대 주류 사회는 그들을 '이방의 갈릴리'라 부르며 선을 그었습니다.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이 말은 그들의 가슴에 박힌 서늘한 낙인이었습니다.

이사야는 그들의 상태를 두 단어로 정의합니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 흑암은 단순히 빛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방향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입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모른 채 벽만 더듬고 있는 절망입니다. 사망의 그늘은 어떻습니까? 숨은 쉬고 있지만 영혼은 메말라 버린 상태입니다. 기대도 흥분도 아무 설렘도 없는 무채색의 삶입니다.

그들이 왜 이토록 깊은 어둠에 갇히게 되었을까요? 운이 나빠서일까요? 환경이 나빠서일까요? 시편 107편은 그 근원을 날카롭게 꿰뚫습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시 107:10-11)

근원적인 빛이신 하나님을 밀어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 자리에 하나님 대신 나의 욕망과 우상을 앉혔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와의 연결이 끊어진 인간은 필연적으로 어둠 속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스스로 만든 쇠사슬에 묶여, 어두운 그늘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칠흑 같은 절망의 커튼을 찢고, 하나님은 찬란한 역전의 소식을 선포하십니다.

큰 빛을 보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2)

하나님은 가장 멸시받던 갈릴리에서 흑암을 걷어내십니다. 그 땅의 명예를 회복시키십니다. 짓눌렸던 영혼의 그림자를 단숨에 지워버리십니다.

도대체 이 거대한 반전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갈릴리에 대규모 신도시가 들어섰습니까? 천지개벽할 부동산 호재라도 터졌나요? 아닙니다. 이유는 단 하나, 그 땅에 ‘큰 빛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어둠을 몰아내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결단이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외부로부터 찾아오는 압도적인 빛이 임해야 합니다.

이 큰 빛은 누구입니까? 성경은 명확히 증언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이 큰 빛은 2,000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시고, 갈릴리 해변을 거니셨던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촛불이나 손전등 같은 가냘픈 빛이 아닙니다. 온 우주를 비추고도 남을 영원한 태양이십니다. 우리의 트라우마와 상처를 완전히 녹여내는 능력의 빛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진리의 빛입니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영혼에게 다시 살 이유를 주는 생명의 빛입니다.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 찬란한 빛이 세상의 중심지가 아닌, 가장 소외되고 상처 입은 갈릴리에 먼저 비쳤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화려한 궁전이 아니라, 비주류의 땅 갈릴리를 주 무대로 삼으셨습니다.

2025년 오늘, 주님은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세상은 '성공한 자리'에만 빛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고통받는 자리'에 가장 먼저 빛을 비추십니다. 가장 아픈 곳, 가장 가난한 마음, 가장 깊은 실패의 현장이 바로 예수님이 임하시는 VIP석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인생 역전'은 통장 잔고의 숫자가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내 영혼에 예수님이라는 큰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빛이 임할 때, 우리의 일상은 '영화로운 삶'으로 리모델링됩니다. 갈릴리가 오직 예수님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 되었듯, 우리의 상처 입은 삶 또한 예수님 때문에 가장 빛나는 영광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큰 빛이 가져오는 변화

큰 빛이 우리 삶의 문턱을 넘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단순히 기분이 좋아지는 정도가 아닙니다. 존재의 뿌리부터 바뀌는 세 가지 변화가 시작됩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3,4)

첫째, 삶의 지경이 넓어집니다. 빛을 받은 자는 창성하게 됩니다. 부동산 평수가 넓어지는 게 아닙니다. 내 영향력의 크기, 내 영혼의 그릇이 커지는 것입니다. 옹졸했던 마음이 넓어집니다. 나만 알던 시선이 세상을 향해 열립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될 수 있도록 키워 가십니다.

둘째, 흉내 낼 수 없는 '진짜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이사야는 이를 두 가지로 묘사합니다. '추수의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환희'입니다. 고된 노동 끝에 결실을 맛보는 농부의 땀방울, 치열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전리품을 나누는 전사의 벅찬 함성입니다.

2025년 오늘, 현대인들은 도파민이 주는 짧은 쾌락에 중독되어 삽니다. 하지만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결이 다릅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묵직하고도 맑은 즐거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얼굴에서 그늘이 걷히게 하시고, 억지로 지어내지 않아도 흘러 나오는 미소가 우리의 얼굴을 채우게 하십니다.

셋째, 나를 옥죄던 결박에서 해방됩니다. 우리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멍에, 우리를 채찍질하던 압제자의 막대기가 꺾입니다. 이사야는 이를 '미디안의 날'에 비유합니다. 기드온의 300 용사가 압도적인 적군을 무너뜨렸던 그 기적의 날 말입니다. 여기서 '꺾으신다'는 표현은 단순히 부러뜨리는 게 아닙니다. 원어로는 '산산조각 내어 완전히 박살 낸다'는 뜻입니다. 나를 가두었던 과거의 상처, 나를 조종하던 중독과 우울, 나를 가스라이팅하던 세상의 가치관들.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강력한 망치로 이 모든 쇠사슬을 박살 내시고,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선물하십니다.

사람들은 흔히 '돈'이 인생 역전의 열쇠라고 믿습니다. "이번 주식만 터지면", "이 아파트만 오르면" 내 인생의 봄날이 올 거라 착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기루입니다. 하나님은 갈릴리를 부동산 대박으로 영화롭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예수님'이라는 빛을 보내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을 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김느헤미야 목자님은 고교 시절, 신장병으로 학교를 떠나 1년간 병원 침대에 갇혀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분의 영혼은 허무주의라는 흑암에 잠식당했습니다. 세상의 끝을 고민하던 소년에게 요한복음 1장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씀이 화살처럼 박혔습니다.

그 순간 내면의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큰 빛이신 예수님이 중심에 들어오시자, 죽음의 냄새가 나던 병실은 세계를 품는 비전의 산실이 되었습니다. 1984년 고대 입학 후, 목자님은 무기력하던 소년에서 뜨거운 제자로 리모델링되었습니다. 광주 사역의 위기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황폐한 성벽을 재건한 느헤미야처럼, 기도로 공동체를 다시 세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만드시는 인생 반전입니다. 조건이 바뀌어서 행복한 게 아닙니다. 내 안에 빛이 들어와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가장 깊은 절망의 수렁에서도 영광의 찬가를 부를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큰 빛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특권입니다.

이 거대한 역전의 드라마는 어떻게 완성됩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승부수를 던지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한 아기’의 네 가지 이름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니라”(6)

사람들은 세상을 구원할 영웅을 기다렸습니다.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장군이나, 모든 문제를 단칼에 해결할 천재적인 정치가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해답은 ‘한 아기’였습니다. 가장 무력하고, 가장 돌봄이 필요한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만왕의 왕이 오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거룩한 역설입니다.

하지만 이 아기는 평범하지 않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어깨에 ‘정사(통치권)’를 메고 오셨습니다. 실망만 안겨주는 세상의 위정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우리의 진짜 왕이십니다. 그분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봅시다. 그 안에 우리가 갈망하는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첫째, 기묘한 모사(Wonderful Counselor)입니다. 2025년 우리는 인공지능(AI)에게 답을 묻습니다. 방대한 데이터를 가진 알고리즘은 꽤 유능해 보입니다. 하지만 거기엔 영혼이 없습니다. 나의 눈물을 닦아줄 손길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는 신적 지혜를 가진 상담자이십니다. 나를 지으신 분이기에,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십니다. 내 인생의 엉킨 실타래를 푸는 유일한 열쇠를 쥐고 계십니다. 방황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성령을 통해 가장 완벽한 길을 알려 주십니다.

둘째, 전능하신 하나님(Mighty God)입니다. 지혜만 있고 힘이 없다면 그 통치는 공허합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제압할 압도적인 권능을 가진 왕이십니다. “안심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선포는 빈말이 아닙니다. 어떤 어둠의 세력도, 우리를 짓누르는 운명의 무게도 전능하신 주님 앞에선 한 줌의 먼지일 뿐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등 뒤에 서 계십니다. 그러니 더 이상 떨지 마십시오.

셋째, 영존하시는 아버지(Everlasting Father)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불완전합니다. 때로는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아니면 아예 존재감이 거의 없는 아버지도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아버지도 늙고, 결국은 우리 곁을 떠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변치 않는 영원한 보호자이십니다. 가장 친밀한 사랑으로 우리를 안아주십니다. 세상 모두가 나를 포기할 때도 끝까지 내 편이 되어주시는 분, 결코 늙거나 쇠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의 근원이십니다.

넷째, 평강의 왕(Prince of Peace)입니다. 세상은 힘으로 평화를 유지하려 합니다. 더 강한 무기, 더 높은 벽을 쌓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짜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희생을 통해 평화를 만드셨습니다. 폭력이 아닌 사랑으로, 정복이 아닌 용서로 다스리십니다. 불안과 두려움으로 잠 못 이루는 우리의 마음에, 세상이 줄 수 없는 깊은 평강(Shalom)을 강물처럼 흘려보내 주십니다.

예수님은 왜 이토록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셨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모든 아픔과 결핍에 응답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영혼은 지금 어떤 이름을 간절히 부르고 있습니까?

선택지가 너무 많아 오히려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결정 장애'의 시대입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막막한 어둠 속에 있다면, 기묘한 모사, 놀라운 상담자이신 그분의 이름을 불러 봅시다. “예수님”

번아웃과 무력감에 젖어 "내 힘으론 도저히 안 돼"라며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죽음을 이기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등 뒤에 서 계십니다. 그분의 이름을 불러 봅시다. “예수님”

세상의 사랑은 조건부입니다. 내가 잘나야 사랑해주고, 쓸모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릅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넘어져도 결코 변치 않는 '영원한 내 편'이 되어주십니다. 세상의 아버지는 떠나도 끝까지 우리 곁을 지켜주실 영존하시는 아버지의 이름을 불러 봅시다. “예수님”

뉴스만 틀면 들려오는 전쟁의 소문, 경제적 위기, 내면을 갉아먹는 불안장애와 공황의 파도... 우리는 한순간도 마음 편히 쉴 곳이 없습니다. 이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로 우리 영혼을 덮어주실 평강의 왕의 이름을 불러 봅시다. “예수님”

이토록 찬란한 약속들이 정말 우리 삶에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우리가 또다시 넘어지고 실패해도, 이 구원의 시나리오는 여전히 유효할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이 모든 거대한 반전을 가능케 하는 최종적인 보증을 선포합니다.

구원의 확실한 보증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7)

이 구절은 절망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최종 보증수표’입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은 약속이 쉽게 깨지는 곳입니다. 계약은 파기되고, 신뢰는 무너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다릅니다. 그분의 정의와 공의는 영원합니다. 왜일까요? 바로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 때문입니다.

여기서 ‘열심’은 원어로 ‘질투에 가까운 맹렬한 사랑’을 뜻합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타오르는 격정적인 에너지입니다. 흑암 속에 갇힌 자녀를 차마 두고 볼 수 없어 가슴을 태우시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잃어버린 신부를 되찾기 위해 자기 목숨조차 아끼지 않는 신랑의 뜨거운 집념입니다.

우리의 열심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결단은 작심삼일입니다. 우리의 뜨거움은 금방 식어버리는 냄비 같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어보려 하지만, 현실의 벽 앞에서 금방 무너지고 마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이 구원의 역사는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 끌고 가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붙드는 손보다, 나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손이 훨씬 더 강합니다. 내가 기도를 쉬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열심은 쉬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단 한 번도 식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십자가라는 가장 뜨거운 방식으로 그 증거를 보여주셨고, 이제 우리의 삶 속에 그 찬란한 반전을 반드시 성취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뜨거운 ‘열심’이 바로 우리의 유일하고도 확실한 소망입니다.

결론: 성탄의 가장 큰 선물

어린 시절 성탄절, 아버지가 퇴근길에 들고 오셨던 '종합 선물 세트'를 기억하십니까? 상자를 여는 순간 펼쳐지던 그 달콤한 세상을 잊을 수 없습니다. 사탕, 초콜릿, 비스킷까지... 평소 꿈꾸던 모든 것이 그 안에 가득했습니다. 그 상자 하나면 온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혈당 스파이크를 일으키는 칼로리 폭탄이었고 충치 유발 음식들 뿐이었습니다.

2,000년 전 하늘 아버지는 우리에게 가장 완벽한 성탄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화려한 포장지에 싸인 물건이 아닙니다. 바로 '한 아기'라는 이름의 선물입니다. 이 '한 아기'라는 상자 안에는 우리가 평생 갈망해온 모든 보화가 담겨 있습니다. 방황을 끝낼 신적 지혜가 들어있습니다. 한계를 돌파할 하늘의 능력이 들어있습니다. 외로움을 녹일 영원한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불안을 잠재울 초자연적 평화가 들어있습니다. 이것은 며칠 만에 바닥나는 과자 상자가 아닙니다. 우리를 영원히 배부르게 하고, 영원히 행복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완전한 종합 선물 세트입니다.

이 한 아기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우리의 구원자로 모셔 들일 때 이사야가 예언했던 그 놀라운 반전이 시작됩니다. 어둠은 찬란한 빛으로 바뀔 것입니다. 멸시의 땅 갈릴리는 영화로운 영광의 땅이 될 것입니다. 절망의 한숨은 승리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덕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맹렬한 '열심'이 보증하는 확실한 현실입니다. 이제 그 뜨거운 열심에 우리의 작은 '순종'으로 화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여전히 흑암 속에 갇혀 떨고 있는 이웃들에게 이 빛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위해 나신 한 아기,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 모두의 삶에 가득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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