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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성탄절

그의 이름, 임마누엘

by 목자 이창무 2025.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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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성탄 1 강 / 이창무

그의 이름, 임마누엘

말씀/ 이사야 7:1-25
요절/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서론 - 불안의 시대, 성탄이 주는 해답

요즘 뉴스 보기가 참 겁나지 않으십니까? 어디서 또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이 들려올까 조마조마합니다. 경제는 어렵고, 물가는 계속 치솟는다는 뉴스만 쏟아집니다.

이런 소식들을 접하다 보면 우리 안에 막연한 불안감이 찾아옵니다. 스스로에게 묻게 되죠. '내 미래는 정말 안전할까?', '내가 갑자기 아프면 누가 나를 돌봐주지?', '이 거친 인생의 파도를 내가 끝까지 헤쳐나갈 수 있을까?' 마치 거센 태풍 앞에 서 있는 나무처럼, 우리의 영혼이 속수무책으로 흔들릴 때가 참 많습니다. 과연 지금 우리 곁에는 누가 있을까요? 내가 무너질 때 나를 붙들어 줄 손은 어디에 있습니까?

성탄절은 바로 이 질문에 답을 주는 날입니다. 아무도 내 편이 없는 것 같은 고독한 밤, 세상 모두가 등 돌린 것 같은 절망의 시간. 바로 그때, 조용히 우리 곁에 다가와 주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임마누엘’ 예수님입니다. 오늘, 그 이름이 처음 불렸던 그 시간으로 함께 가보겠습니다.

첫째, 바람에 흔들리는 숲

2,700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봅니다.

그때는 기원전 734년, 남유다 왕국 아하스 왕이 통치하던 시대였습니다. 당시 유다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한마디로 국가의 존망이 걸린 벼랑 끝이었습니다.

북쪽의 형제 나라인 북이스라엘이 아람이라는 이방 민족과 손을 잡았습니다. 이 두 나라가 연합군이 되어 유다를 향해 칼을 겨누고 쳐들어왔습니다.

적들의 목표는 단순히 땅을 빼앗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다의 아하스 왕을 끌어내리고, 자기들의 말을 잘 듣는 꼭두각시 왕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밖에서는 적들의 함성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습니다.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성경은 당시의 공포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2b)

거대한 태풍이 몰아칠 때, 수많은 나무들이 사시나무 떨 듯 떠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저마다 뿌리째 뽑혀 나갈 것 같은 위태로운 숲의 모습. 이것이 바로 당시 아하스의 마음이었고, 유다 백성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아하스 왕은 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인간적인 모든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그는 공포에 완전히 잠식되어 이성을 잃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심지어 자신의 아들까지 산 채로 불태워 몰렉이라는 우상에게 바칠 만큼 절박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성이 포위되면 굶어 죽는 것은 시간 문제다!" 온갖 흉흉한 소문들만 돌았습니다. 하늘을 봐도 먹구름이요, 땅을 봐도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2,700년 전 예루살렘 성벽 위에서 벌벌 떨던 아하스와 유다 백성들의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지십니까? 사실 우리는 그들만큼 거창한 전쟁이나 국가의 존망이 걸린 위기 앞에 서 있지는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저마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연합하여 쳐들어오는 순간들이 있지 않을까요? 때로는 예기치 못한 질병이라는 적국이,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경제적인 위기가, 혹은 꼬여만 가는 관계의 갈등이 우리를 포위해 올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그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거센 바람에 앞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숲과 같을 때가 많습니다. 작은 소식 하나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밤잠을 설치며 ‘이러다 내 인생이 뿌리째 뽑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아하스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우상에게 매달렸던 것처럼 혹시 우리 또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세상의 온갖 처세술을 다 동원하면서 허둥대고 있지는 않습니까? 밤에 잠이 안 오면 기도를 해야 하는데, 대신 유튜브, 네이버, ChatGPT, 제미나이에서 검색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둘째, 연기 나는 부지깽이

그 절망의 시간에,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아하스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두려움에 질려서 하나님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하스는 지금 생존을 위해 수로를 점검하고 인간적인 대책을 세우느라고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곳,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로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셨습니다.

이 장소가 의미심장합니다. 아하스는 생존을 위해 물을 찾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러 오셨습니다. 불안감 때문에 이리저리 허둥대고 있는 아하스 왕의 어깨를 잡아주시듯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4b)

아하스의 눈에 두 왕 곧 르신과 베가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맹렬하게 타오르는 거대한 산불처럼 보였습니다. “저들이 곧 우리를 집어 삼킬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선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그들이 이미 다 타버리고 이제는 매캐한 연기만 조금 피우다 곧 꺼져버릴 부지깽이, 한낱 나무 막대기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하스야, 네 눈에는 저들이 너를 곧 집어삼킬 불길처럼 보이겠지만 전혀 아니다. 내 눈에는 곧 꺼질 연기일 뿐이다. 제발 눈에 보이는 현상에 속지 마라. 실체 없는 두려움에 너 자신을 내어주지 마라.”

그리고 아주 중요한 믿음의 원리를 덧붙이십니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9b)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경고의 음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여기에는 하나님의 간곡한 호소가 담겨져 있습니다. 마치 벼랑 끝에 매달린 자녀를 향해 손을 뻗는 아버지의 절박한 외침 같습니다. “나를 좀 믿어다오. 세상의 힘, 군사력, 돈이 너를 지탱해 주는 것이 아니다. 나를 붙들어야 네가 살 수 있다. 믿음 없다면 너의 삶 전체가 모래성처럼 곧 무너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네가 보고 있는 그 거대한 불길, 실상은 다 타버린 부지깽이에서 나는 연기일 뿐이다” 연기는 어떻습니까? 눈을 맵게 하고, 앞을 가려 답답하게 하고, 숨을 막히게 합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위기가 바로 그렇습니다. 눈물 나게 맵고, 앞이 보이지 않아 답답합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합니다. 연기는 결코 우리를 태울 수 없습니다. 연기는 실체가 없습니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바람에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라질 연기 때문에 영원한 것을 놓치지를 원치 않으십니다.

문제는 상황이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아하스처럼 상황이 좋아지면 안정을 찾을 것이라 믿습니다. ‘돈을 더 모으면’, ‘자녀가 대학에 합격하면’, ‘건강이 회복되면’ 내 삶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네가 부동산과 주식 위에 서려 한다면 무너질 것이다. 네가 힘 있는 사람과의 인맥 위에 서려 한다면 너는 비틀거릴 것이다. 오직 나 여호와를 믿는 믿음 위에 서지 않는다면, 너의 인생을 지탱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흔들리는 진짜 이유는 파도가 높아서가 아닙니다. 우리 영혼의 닻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조건들은 언젠가 다 변하기 마련입니다. 변하는 것들에 기대어 서 있으니 인생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시선을 뿌연 연기 너머에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께로 고정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요동치는 세상 속에서 굳게 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 두 얼굴의 아하스

하나님은 아하스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셨습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불신과 불안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자존심마저 내려놓고 파격적인 제안을 하십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11)

이 말씀을 쉽게 풀면 이런 뜻입니다. “네가 정 믿지 못하겠거든 증거를 보여달라고 해라. 네가 원하는 기적을 무엇이든 구하라. 내가 다 보여주겠다. 그러니 제발 믿기만 하라.” 이것은 아하스의 믿음을 위해 하나님께서 백지 수표를 내미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얼마나 그를 살리고 싶으셨으면 이렇게까지 하셨을까요?

아하스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12)

얼핏 들으면 참 경건해 보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신앙인의 모범 답안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간곡한 호소에 대한 차가운 거절입니다.

왜 거절한 것일까요? 아하스의 주머니 속에는 이미 다른 계획, 플랜 비가 들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시 떠오르는 신흥 강대국, 잔혹함으로 유명한 나라, 앗수르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치고 도움을 청하기로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아하스의 속마음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징조요? 됐거든요. 기도 응답 기다리다가 나라 망하거든요. 제게는 앗수르 형님이 있거든요. 그 형님이 최고에요!” 이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아하스의 불신앙은 비수가 되어 하나님의 가슴을 찔렀습니다.

우리가 이런 아하스를 비난할 수 있을까요? 슬프게도 때로 우리의 모습이 아하스와 닮은 꼴이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예배를 드리러 와서 찬양하고 아멘으로 말씀에 화답합니다. “주는 나의 힘이요”라고 노래를 부르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라고 기도로 고백합니다. 그러나 막상 위기가 닥치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다는 내가 가진 경험과 능력과 인맥이라는 앗수르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지 있지 않습니까? 말씀을 붙들다고 하지만 이미 뒤로는 플랜 비를 준비해 놓고 있지 않습니까?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돈과 힘을 더 의지하며 딴주머니를 차고 있다면 이것이 바로 내 안에 있는 아하스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예수님의 피값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분의 말씀을 외면한 채 이 세상의 힘만에 기대고 있는 자녀의 모습! 이런 모습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완벽한 행위를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 그 마음의 중심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넷째, 친히 주신 징조 ‘임마누엘’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슬픔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아하스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친히 주님의 구원 계획을 선포하셨습니다. 인간의 차가운 거절도, 배신도, 완악함도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을 끌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14)

하나님은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는 아하스에게 일방적인 선물을 안겨주십니다.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친히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 선물이 무엇입니까? 바로 한 아기의 탄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기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고 하셨습니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살려고 발버둥치는 아하스와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은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네가 나를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리겠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네가 나를 싫다고 외면해도 나는 너를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 네가 나를 거부해도, 나는 너를 떠나지 않는다. 네가 다른 곳을 바라봐도, 내 눈은 너를 향해 있다. 네가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어도, 내가 그곳까지 내려가서 기어이 너와 함께하겠다.”

이 끈질긴 사랑,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지독한 사랑의 이름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이 약속은 아하스 한 사람을 넘어,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모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선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아하스가 하나님 대신 그토록 의지했던 앗수르 형님, 그 강대국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잠시 유다를 돕는 척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유다를 괴롭히고 짓밥는 더 무서운 압제가가 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그날에는 주께서 하수 저쪽에서 새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으로 네 백성의 머리 털과 발 털을 미실 것이요 수염도 깎으시리라”(20)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앗수르가 와서 유다 백성들에게 전신 제모 서비스라도 해준다는 말일까요? 우리가 가진 것을 모두 다 빼앗길 때 흔히 ‘탈탈 털린다’는 표현을 쓰죠? 딱 그것입니다. 앗수르는 남유다 왕국을 탈탈 털어갔습니다. 어느 정도로 털어갔느냐 하면 몸에 난 털이란 털은 다 면도를 해서 싹 가져가 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 결과는 농토가 황폐해졌고, 백성들은 겨우 야생꿀이나 따 먹으며 목숨을 부지해야 했습니다.

바다에서 표류할 때 가장 치명적인 유혹은 바닷물입니다. 당장 목이 마르니 마시면 살 것 같지만, 결국 몸속 수분까지 빼앗아가 더 빨리 죽게 만듭니다. 아하스가 붙잡은 앗수르가 바로 이 '바닷물'이었습니다. 당장의 위기는 모면하는 듯했으나, 결국 유다의 생명력까지 다 앗아갔습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의 방법들은 마실수록 우리 영혼을 더 타들어가게 하는 바닷물일 뿐입니다.하나님 대신 의지하던 돈, 명예, 사람… 그 모든 것은 결국 우리를 배신하고 우리 영혼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세상의 힘센 자들은 우리를 탈탈 털어가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채워주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다섯째, 함께 하기 위해 이곳에 오신 예수님

이 오래된 예언은 700년이 지난 후,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베들레헴의 어느 허름한 마구간에서 궁극적인 성취가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기 왜 오셨습니까?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19세기 하와이의 몰로카이 섬은 나병 환자들을 격리하던 죽음의 섬이었습니다. 그곳에 벨기에 출신의 다미안 신부가 자원해서 들어갑니다. 그는 그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했습니다. 집을 지어주고 상처를 싸매주었습니다.

하지만 환자들은 그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건강하잖아. 당신은 우리 고통을 몰라.' 늘 벽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끓는 물을 쏟았는데 발등에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도 나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날 아침, 그는 예배에서 이렇게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동료 나병 환자 여러분(We lepers)...' 그제야 사람들은 펑펑 울며 그를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우리'와 똑같은 모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저 높은 하늘에서 '사랑한다' 말만 하지 않으시고, 직접 우리의 육신을 입고, 우리의 아픔과 죽음까지 똑같이 겪으시며 '나의 동료 인간들이여'라고 부르시기 위해, '임마누엘' 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외로운 사람, 병든 사람,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죄인들 곁에 계셨습니다.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나병 환자의 썩어가는 살을 만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모두가 피하던 세리 마태의 집에 들어가 함께 밥을 먹으며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간음하다 잡혀 죽음의 공포 앞에서 벌벌 떨던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말씀하시며 새 삶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절규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과의 단절, 그 지옥 같은 절대 고독과 죽음의 공포를 친히 겪으셨습니다. 왜입니까? 우리가 버림받지 않게 하시려고, 우리가 겪을 고통의 밑바닥에 예수님께서 먼저 가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을 교과서로 배우신 분이 아닙니다. 몸소 다 겪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신음 소리 하나, 눈물 한 방울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우리의 아픔 속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함께 해 주신 그분의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기 직전 제자들에게 마지막 약속을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오늘 불안 속에 흔들리고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강력한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b)

결론 - 두 가지 선택의 갈림길, 임마누엘의 손을 잡으라

오늘 우리는 두 가지 선택지 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는 아하스의 길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의 두려움에 쫓기는 길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세상의 힘인 앗수르를 의지하는 길입니다. 그 길의 끝은 어떨까요? 잠시의 안정을 줄지 모릅니다. 하지만 마침내 우리 영혼까지 삭도로 밀어버리는 황폐함 뿐입니다.

다른 하나는 임마누엘의 징조를 붙드는 길입니다. 비록 당장은 자욱한 안개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아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며 묵묵히 걸어가는 길입니다.

이제 곧 연말이 지나고 새해가 다가옵니다. 하지만 위기는 계속될 것입니다. 국제 정세는 한 치 앞을 예단하기 쉽지 않습니다. 물가는 매일 오릅니다. 신규 취업의 벽은 점점 더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또한 풀리지 않는 인생의 문제들이 숲을 흔드는 바람처럼 우리를 위협할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이미 확실한 징조가 주어져 있습니다. 2,700년 전 아하스는 징조를 거절했지만 오늘 우리는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의 증거인 예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누우셨던 그 초라한 구유를 기억하십시오. 그 구유는 하나님이 우리 삶의 가장 낮고 어두운 자리까지 내려오셨다는 ‘임마누엘’의 확증입니다. 그분이 세상 끝날까지, 아니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내가 아파할 때 그분이 함께 아파하십니다. 내가 길을 잃었을 때 그분이 나의 길이 되십니다. 내가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 때 그분이 나의 지팡이가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 사실 하나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세상 모든 것이 우리를 등져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숲이 흔들려도 뿌리 깊은 나무는 뽑히지 않고 결국 열매를 맺는다고 세종대왕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임마누엘 예수님께 뿌리 내린 인생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번 성탄절을 맞이하며, 우리 모두 불안과 두려움의 짐을 다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곁에 이미 와계신 예수님의 손을 꽉 잡읍시다. 그럴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 세상이 알 수도 없는 기쁨이 우리의 심령을 채우게 될 것을 믿습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우리가 임마누엘 예수님과 동행하며,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굳건하게 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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