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성탄절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느니라

이창무 2018. 12. 24.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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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성탄 2강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느니라


말씀 / 누가복음 2:1-20

요절 / 누가복음 2:10,11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이미 고인이 되신 최 춘선 할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한 '팔복(八福)'이란 다큐멘터리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만약 우리가 지하철에서 맨발로 “예수 천당”이라고 외치고 다니는 최 춘선 할아버지를 만난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두말할 것도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 나간 광신자로 여겼을 것입니다. 신자들도 “꼭 저렇게 전도해야하나?”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카메라에 하나씩 드러나는 할아버지에 대한 진실들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이분은 김포 일대의 모든 땅과 자가용 5대를 소유한 재력가였습니다. 또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하고 5개 국어에 능통한 엘리트였습니다. 김구 선생님과 함께 항일운동을 했던 독립 운동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자신이 가진 땅을 다 팔아버렸습니다. 이 돈을 피난민과 수백 명의 전쟁고아를 구제하는 일에 다 써버렸습니다. 그 후 30년 동안 가진 것 없는 맨발의 전도자로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최 춘선 할아버지를 이렇게 살게 한 것일까요? PD와의 대화 중 최 춘선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22세에 부름 받고 주님 따르는 가운데 있지만, 너무 너무 불충성 불순종에 진짜 죄인 중의 괴수인데 하나님의 자비가 한량이 없어서 붙들어주시니까 날마다 감사와 기도로 승리합니다.” 최 춘선 할아버지가 이렇게 산 이유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남이 알지 못한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흔히 하는 말 중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가가 전하는 성탄 메시지는 보이는 것 아래에 숨겨진 놀라운 진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탄생 사건 속에 숨겨진 진실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당시는 가이사 아구스도(Caesar Augustus)가 로마를 다스리던 때였습니다. 기원전 1세기 로마는 잦은 내란으로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가이사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Octavianus)는 이 혼란을 종식시키면서 로마 제국의 최초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로마 원로원은 그에게 존엄자라는 뜻을 가진 아구스도란 호칭을 헌정했습니다. 시민들은 황제가 로마를 내란으로부터 건져냈다 하여 그를 구주라고 불렀습니다. 전에도 강력했지만 이제 더 강력해진 로마 제국에 더 이상 위협이 될 세력이 없었습니다. 모든 내란과 외침이 사라진 아구스도의 시대를 가리켜 ‘팍스 로마나(로마에 의한 평화 시대)’라고 불렀습니다. 팍스 로마나를 지탱하는 힘은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막강한 로마의 정예 군단병들로부터 나왔습니다. 이 군대를 유지하려면 막대한 돈이 필요했습니다. 아구스도 황제는 더 많은 세금을 확실히 거두어들이기 위해 제국 전역에 인구 조사를 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인 갈릴리 나사렛에 살던 요셉과 만삭인 마리아에게도 아구스도의 명령은 예외가 될 수 없었습니다. 요셉은 다윗 가문 사람이었기 때문에 본적지인 유대 베들레헴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나사렛부터 베들레헴까지는 약 150 Km 거리로 닷새에서 열흘 정도 여행길이었습니다. 몸이 무거운 마리아의 형편을 생각해 볼 때 이번 여행길은 훨씬 더 오래 걸렸을 것입니다. 성탄 연극에서 요셉이 마리아를 나귀에 태우고 아름다운 대화를 나누는 낭만적인 모습이 나옵니다. 하지만 험한 산길 여행은 자칫하면 산모와 태아를 큰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습니다. "쳇, 지가 존엄자라구? 워낙 존엄하셔서 나 같은 서민의 형편 따윈 안중에도 없겠지." 요셉은 이렇게 불평 밖에 할 것이 없는 자신의 처지가 슬펐습니다. '아내에게 호강은 못해 줘도 고생 시키고 싶지는 않았는데...' 마리아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호적 등록하러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은 식민지 백성의 한이 서린 슬픈 여행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는 숨겨진 진실이 있었습니다. 그 놀라운 진실이 무엇입니까? 진실의 문을 여는 열쇠는 미가서 5장 2절에 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메시야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예고한 말씀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 나사렛이란 북쪽 동네에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구스도의 호적 명령이 아니었다면 베들레헴에 올 이유가 없었습니다. 물론 아구스도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호적 명령을 내린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더 강하게 하려고 그렇게 했습니다. 아구스도의 인구조사는 수많은 을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갑질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예언의 성취에 이바지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행한 일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 일입니까? 


얼마 전 '국가 부도의 날'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1997년 IMF 사태가 일어나게 된 과정을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주는 영화였습니다. 보면서 관료와 정치인들의 무능과 부패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 지금까지 계속되는 있는 힘없는 서민들의 아픔과 좌절에 서글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현실은 우리를 화나게 하고 슬프게 합니다. 역사학자는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기록합니다. 그들은 저마다 야심을 품고 치열한 암투를 벌이는 인간 군상들이 주인공인 세상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역사에는 숨겨진 진실이 있습니다. 숨겨진 진실은 어떤 권력자보다 위에 계시면서 자기 뜻대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의 권세자들이 이렇게 저렇게 행한 모든 일들은, 그것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요 과정으로 쓰임 받게 됩니다. 때로는 역사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라도 모든 일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전진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장은 어떤 하나님의 숨은 뜻이 무엇인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믿음으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믿습니다. 설령 우리를 화나고 슬프게 하는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이것마저도 쓰셔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나가실 것을 믿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6,7절을 보십시오.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라.”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마침 해산할 기한이 다 찼습니다. 요셉은 산통이 시작된 마리아를 부축하며 여기 저기 여관 문을 두드렸습니다. “빈 방 있습니까? 빈 방 있어요?” 그러나 돌아 온 말은 ‘없어요.’라는 짧고 퉁명스러운 대답뿐이었습니다. 곧 아기가 나오려고 한다고 통사정을 해 보았습니다. 그래 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기 방을 양보해 주려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추운 시절을 겪느라 당시 민심도 꽁꽁 얼어붙었던 모양입니다. 만약 여관 주인에게 크게 웃돈을 얹어 준다면 어떻게 방을 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의 얄팍한 호주머니에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마리아의 진통 주기는 조금씩 빨라져 갔습니다. 신음 소리는 점점 커져 갔습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요셉에게 마침내 한 여관 주인이 다가왔습니다. 주인이 안내한 곳은 낡고 허름한 마구간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요셉과 마리아는 첫아들을 낳았습니다. 아기를 누인 곳은 구유였습니다. 구유라고 하면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실은 짐승들이 먹이를 먹는 밥그릇입니다. 예수님이 만약 지금 태어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는 지하 주차장에서 승합차 뒷좌석에 태어나시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우리 중에 주차장에서 태어나신 분계십니까? 대부분 산부인과의 분만실에서 태어나셨을 것입니다. 적어도 조산원이나 못해도 따뜻한 방안에서 태어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냄새 나는 마구간에서 짐승들의 밥그릇 위에서 이 세상과 처음 마주하셨습니다. 요즘 부유층 사람들은 자녀가 미국 시민권을 얻게 하려고 미국으로 원정 출산을 하러 갑니다. 마리아도 원정출산을 했는데 마구간에서 첫아들을 낳았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사람들에게 밀리고 밀려서 결국 마구간까지 밀려나셨습니다. 이 얼마나 슬프고도 운명적인 이야기입니까?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는 두 번째 숨겨진 진실이 있었습니다. 그 놀라운 진실이 무엇입니까? 진실의 열쇠는 천사들이 쥐고 있었습니다. 천사는 당시 베들레헴 주변의 들판에서 밤늦도록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구유에 나신 분이 누구이신지 알려주었습니다. 요절 말씀인 10절과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천사가 전해 준 소식은 너무 놀라웠습니다. 오물 냄새가 코를 찌르는 불결한 곳에서 태어나신 이가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구주셨습니다. 사람들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 태어나신 분이 사실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경배 받으셔야할 주님이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장 6-8절) 창조주 하나님께서 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세상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 가장 운명적인 인간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셨습니다. 더 이상 낮아질 곳이 없는 곳, 말구유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오셨습니다.


누가는 오늘 말씀에서 두 인물, 예수님과 아구스도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둘 다 구주요 왕으로 칭함을 받았습니다. 누가 우리의 진정한 구주이고 왕입니까? 구유에 누인 예수님입니까? 보좌에 앉은 아구스도입니까? 아구스도는 말 한 마디로 온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권세를 누렸습니다. 그는 로마 명문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무리 애써 봐도 을들의 서러움과 고통을 깊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식민지 백성은 착취를 당했습니다. 반면 아구스도는 온 세상의 부를 다 자신이 있는 곳으로 빨아들였습니다. 그는 사람들 머리 위에서 지배하고 군림하는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의 길을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리 저리 떠밀릴 수밖에 없는 약자 중에 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장 45절) 예수님이 낮아지신 이유는 더럽고 냄새나는 죄인들을 섬기고 살리는 구주가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운명의 사슬에 매인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살게 하기 위해서 가장 운명적인 불행한 인간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아무도 정죄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세리 레위를 품어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를 품어주셨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품어주셨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사람을 크신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사랑의 왕이십니다. 이 예수님께 가면 누구든지 환영을 받았습니다. 누구든지 사랑을 받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를 받습니다. 예수님께 사랑받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십니다. 돈 없는 가난한 사람도 대 환영입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도 대 환영입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대 환영입니다. 어린아이도 대 환영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 가면 위로받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만민의 위로자시요, 사랑의 왕이십니다. 아무리 추하고 죄 많은 사람도 예수님께 가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상처가 많은 사람도 예수님께 가면 나음을 받습니다. 아무리 운명적인 사람도 예수님께 가면 하나님의 놀라운 뜻과 섭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사람도 예수님께 가면 희망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는 자의 위로자요, 눈 먼 자의 빛이 되십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의 생명이 되십니다. 버림받은 자들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없는 자의 풍성이 되십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은 만민의 위로자시요, 사랑의 왕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장래 희망이 화가였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서화회'라는 그림 그리는 동아리에 가입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학기 내내 저는 단 한 번도 붓을 잡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동아리 방에 가면 선배들이 동아리 방 청소를 시켰습니다. 다음으로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커피를 타오도록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기들이 그림 그리고 나간 후 화구를 정리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다가 5월 초 처음으로 안암 UBF에 와보았습니다. 먼저는 까마득한 선배님들이 하나 같이 저에게 꼬박꼬박 존댓말로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놀라웠습니다. 게다가 제가 하는 말을 중간에 끊지 않고 끝까지 다 들어준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별로 재미있는 말도 아닌데 숨넘어가듯 웃어주는 것도 희한했습니다. 이때 저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이들의 과도한 친절에는 무언가 꿍꿍이속이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들의 배후에 이 모든 것을 지시하고 조종하는 누군가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테스트를 해 보려고 목자님을 여러모로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목자님은 제가 어떻게 나오든 관계없이 한결같이 섬겨주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이분들의 배후가 누구인지를 드디어 알아내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목자님들이 어떻게 그렇게 겸손할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구유에 나신 겸손의 왕이셨기 때문입니다. 목자님들이 어떻게 섬길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스스로 종이 되어 섬기신 섬김의 왕이셨기 때문입니다. 목자님들이 어떻게 그렇게 사랑할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사랑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한 테레사 선교사님께서 주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입관 예배 때 말씀을 전하신 박 엘리야 선교사님은 한 테레사 선교사님을 양들을 사랑하고 양들만 생각한 목자로 기억하셨습니다. 테레사 선교사님은 자신이 살아서 브라질로 돌아가지 못해도 양들에게 줄 선물을 대신 챙겨달라고 부탁을 하셨다고 합니다. 늘 양들만 생각하시느라고 자기 몸은 돌보지 못하신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한 테레사 선교사님이 그렇게 양들을 사랑하신 이유는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한없이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양들 생각보다 자기 생각을 더 많이 하는 것 같아 부끄러워집니다. 저도 최 춘선 할아버지처럼 22살에 목자로 부르심을 받아 지금까지 따르고 있습니다. 최 춘선 할아버지 같은 분이 불충성 불순종한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시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말이 있어 힘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한량이 없어서 붙들어주시니까 날마다 감사와 기도로 승리합니다." 한량이 없는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를 붙들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감사와 기도로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의 구주요 왕이 태어났습니다. 천사는 밤에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남들이 다 자는 시간에 일해야 하는 사람들은 삶이 팍팍하기 마련입니다. 오늘날의 목자는 편의점 야간 알바생인지 모릅니다. 아파트 야간 경비일 수도 있고 대리 운전 기사일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악명 높은 택배 상하차 직원이나 3교대 간호사일 수도 있습니다. 이분들은 좀처럼 좋은 소식을 들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대신 들리는 소식은 이런 소식들이었습니다. "내일부터 여기 나오지 마." "다음 달부터 월세 올릴 테니 못 내겠으면 방 빼세요."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시네요." 들판의 목자들은 온 백성 중에서 좋은 소식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천사는 바로 당신들에게도 임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러 왔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소식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구주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런 빅뉴스는 당시 예루살렘에 살던 왕족과 귀족들, 제사장들에게 먼저 전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하필 목자들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구주의 표적이 구유에 누인 아기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소식을 예루살렘에 사는 귀족들이 들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천사가 참 농담도 심하셔.'하면서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낮은 자리에 있던 목자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고도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숨겨진 진실을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유를 보며 구세주께서 사랑의 왕, 섬김의 왕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천사들의 합창처럼 이 분이야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시고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실 위대한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목자들은 기뻐하며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후로 목자들의 삶이 갑자기 달라지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밤도 고달픈 몸을 지팡이 하나에 지탱하며 밤새 양떼들을 돌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기쁨의 미소가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빛은 희망으로 초롱초롱했습니다. 왜냐하면 가슴 속에 세상이 모르는 거대한 비밀 하나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주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결정적으로 큰일을 행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또 주께서 자신들처럼 낮고 천한 자들을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이 비밀을 알았던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장 10절)


저는 요즘 날마다 은혜를 누리는 원천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 원천은 바로 원천 센터 김 승원 목자님께서 네이버 UBF 공식 카페에 올리시는 일용할 양식입니다. 김 승원 목자님은 부동산업을 하시던 아버지 덕분에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나셨습니다. 연세대를 졸업한 엘리트이시고 바이올린도 수준급으로 연주하시는 예술가입니다. 그런데 두 자녀가 모두 중증의 ADHD입니다. 두 자녀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조차 포기하신지 오래입니다. 입버릇처럼 두 자녀가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게다가 병든 양들을 감당하느라 많은 수고를 하였지만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었습니다. 물질 자립이 어렵게 되면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공부방을 열 수밖에 없게 되셨습니다. 일생을 풀타임으로 캠퍼스 사역에 헌신했는데 늦은 나이에 공부방을 해야 하는 현실에 슬픈 마음이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낮아짐을 받아들이니 그 안에서 새로운 주님의 은혜를 더 경험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계십니다. 공부만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고민도 들어주고 인생 상담도 해주십니다. 책상에 ‘선생님 바보 멍청이 똥개’라고 낙서를 해 놓고 간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에 그 낙서를 스스로 지웠다고 합니다. 대신 ‘김승원 쌤’이라 쓰고 그 옆에 큰 하트를 그려 놓고 갔다고 합니다. 김 승원 목자님이 올리신 12월 6일자 양식의 일부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제가 예수님의 겸손과 낮아짐이 인생 모든 문제의 답임을 몰랐다면 낮아질 때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절망했을 텐데 예수님을 아니 낮아짐 속에 얼마나 아름다운 은혜와 영광이 있는지 알게 되고 낮아짐 통해 예수님 배우고 닮아가는 행복을 노래하는 목자의 길을 갑니다. 낮아짐 감당하지 못해 죽고 죽이는 어두운 세상에서 낮아짐 속에 있는 천국 비밀을 전하는 아름다운 길 갑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구유에 나신 분을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한걸음 더 나가 구유의 방식으로 이 땅을 살아가라고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구유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세상에 평화를 전파하는 사람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하나님은 때로는 어리석고 약해 보이는 방식으로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바로 십자가가 이 같은 하나님의 역사를 대표합니다. 지극히 어리석고 연약해 보이는 십자가의 방식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구원이 십자가의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방식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부터 구유의 방식으로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구유의 방식은 약할 때 강해지며 낮아질 때 높아지고 섬길 때 위대하게 된다는 원리입니다. 여기에는 신비한 역설의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 구유의 방식으로 아구스도가 세운 로마 제국을, 약함으로 강함을 정복하셨습니다. 교회가 구유에 오신 예수님처럼 낮은 자리에서 세상을 섬길 때 그 교회는 살아 있었고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이후 교회가 아구스도의 보좌 근처를 기웃거렸던 시대에는 오히려 타락하고 부패했습니다. 우리가 복음 역사를 이루는 방식도 구유의 방식입니다. 겸손하게 양들에게 다가가서 섬기고 인내하고 희생함으로 이루어 온 역사입니다. 원천 센터의 경훈 형제는 몸무게 120 킬로그램에 인성 문제가 있어서 모두에게 비호감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목자의 섬김과 사랑을 받고 살아났습니다. 전국 학생 수양회에서 일생 목자로 살겠다고 결단하는 소감을 발표했습니다. 최근에는 대형 교회에 다니던 학사 가정이 자발적으로 원천 센터에서 동역하겠다며 찾아왔다고 합니다. 비록 작은 교회이지만 말씀 안에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라고 합니다. 이분들은 모임 때마다 '말씀의 원천, 생명의 원천, 원천 센터'라고 말씀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겸손과 섬김과 낮아짐의 구유 정신이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구유가 능력의 원천입니다. 구유는 생명의 원천입니다. 우리가 아구스도의 방식이 아니라 구유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세상에 평화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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