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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이창무 2025. 2. 25.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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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사도행전 제 6 강 / 이창무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말씀 / 사도행전 4:1-31
요절 /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바람이 거세게 불 때, 씨앗은 어떻게 될까요? 어떤 씨앗은 날아가 버리지만, 어떤 씨앗은 그 바람 속에서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립니다. 오히려 바람이 없으면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고 약한 존재로 남아버리죠.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4장은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초대교회는 편안하고 순탄한 길을 걸었던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파하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이를 달갑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체포하고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결코 가로막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말씀을 들은 무려 5천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사탄이 복음 전파를 막으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복음이 더 강하게 퍼져나갔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반전 드라마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어떤 바람을 맞고 있습니까? 그 바람 속에서 우리의 믿음은 더욱 깊이 뿌리 내리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할 때 이 거친 바람 속에서 더욱 강한 믿음으로 서 있을 수 있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우리는 '오직 예수'라고 선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순간에는 모든 것이 압도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마치 거대한 벽 앞에 선 듯한 기분이 듭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공회의 한가운데 서 있을 때도 그랬을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서기관들, 그리고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사도들에게 던진 질문은 간단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b)

이에 베드로는 단호하게 선언했습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10)

그 순간 공회 안의 공기는 얼어붙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단순히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예수를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셨다." 이는 곧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자들이다"라는 의미였습니다. 죽기로 작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말을 있습니까?

더 놀라운 것은, 이 말을 하는 사람이 바로 베드로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동안 베드로를 알던 사람들(특히 사도 요한)이라면 깜짝 놀랐을 겁니다. ‘이 사람이 전에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 베드로가 맞아?’ 그런데 지금 그는 거대한 권력 앞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복음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는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단 한 가지 이유를 말해 줍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8a)

그가 달라진 이유는 성령 충만함 때문이었습니다. 성령께서 그의 입술을 통해 말씀하시고, 성령께서 그의 마음에 담대함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어서 베드로는 다음과 결론을 맺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12)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사두개인들과,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종교 지도자들은 당황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학문 없는 범인이라고 생각했었고 가방끈이 짧다고 무시했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도는 논리적으로 강하고, 확신에 차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두려움 없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이 나은 사람이 바로 그들 곁에 서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있었기에, 어떤 말로도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

‘리 스트로벨’이라는 작가를 들어보셨나요? 과거에 그는 미국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지 법조팀에서 탐사 보도를 맡았던 기자였습니다. 논리적이고 철저한 분석을 통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전문가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였습니다. 기독교를 비과학적이고 감정적인 신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지적인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아내 레슬리 스트로벨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적인 나의 아내가 어떻게 이렇게 비합리적인 결정을 할 수 있지?” 리 스트로벨은 아내를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자 본능을 발휘해 예수님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최고의 법학자, 역사학자, 의학자, 고고학자를 인터뷰하며 예수님이 실존 인물이었는지, 그분이 정말 십자가에서 죽으셨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부활이 역사적 사실인지를 철저히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땠을까요? 2년 동안의 탐사 끝에, 리 스트로벨은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증거를 논리적으로 반박하려 했지만, 오히려 더 강력한 증거들 앞에서 굴복하게 되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그동안 부정했던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후 그는 기독교 변증가가 되어 《예수는 역사다(The Case for Christ)》라는 책을 쓰고, 신앙을 변호하는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이 책은 2017년에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의 유일성을 불편해합니다. 왜 꼭 예수여야 하는지, 다른 길은 없는지 묻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마치 산소 없이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를 붙잡고 싶어 하고, 착한 일을 하면, 도덕적으로 살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명확하게 말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 2:8)

구원은 인간이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시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이 던져주신 유일한 구원의 띠를 외면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물에 빠졌을 때, ‘이 구명튜브 색깔이 마음에 안 드는데… 다른 색 없어요?’라고 묻고 있을까요? 아니죠! 그냥 잡아야 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담대하게 전해야 합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다른 종교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다른 길을 제시하지만, 우리는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붙잡고, 그 이름을 선포하며, 그 이름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과 입술에서 예수님의 이름이 빛나도록, 구원의 유일한 길이신 예수님을 전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논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반박할 수 없게 되자 다른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사도들을 잠시 공회 밖으로 내보낸 후, 그들끼리 의논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더 이상 말하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경고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경고에 대해 베드로와 요한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당연하죠! 앞으로는 찍소리도 안 내겠습니다.’라고 했을까요?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19-20)

그들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뚜껑이 열렸습니다. 하지만 다시 위협만 하고 놓아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백성들이 사도들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치유된 기적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니 종교 지도자들도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진리를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을 때, 물리적인 억압이나 강제적인 침묵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결코 침묵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진리를 지킨 사람 중에 이란의 목사 유세프 나다르카니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19세 때 예수님을 만나고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그러나 이란에서 이슬람을 떠나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된 일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개인적으로 신앙을 가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결국 그는 배교죄로 체포되었고, 사형 선고까지 받았습니다. 법정에서 그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이슬람으로 돌아가면 목숨을 살려주겠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예수님 외에는 다른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그는 사형이 집행될 날을 기다리며 감옥에서도 기도하고, 동료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의 아내와 두 아이도 함께 박해를 받으며, 가족이 모두 신앙을 포기하도록 압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그의 석방을 위해 기도하고, 국제 사회가 이 사건에 주목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강한 외교적 압력 끝에 2012년, 그는 사형을 면하고 석방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체포되어 장기간 수감되었고, 지금도 자유를 제한받은 채 신앙을 지키고 있습니다.

왜 베드로와 요한이, 유세프 나다르카니가, 그리고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까?

먼저는 구원의 감격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압니다. "내 죄가 눈처럼 희어졌고, 나는 더 이상 정죄받지 않는다!" 이 감격이 있는데 어떻게 침묵할 수 있겠습니까? 깊은 절벽에서 떨어지려는 사람을 누군가 붙잡아 구해줬다면, 그는 결코 그 사람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말할 것입니다. "저 사람 덕분에 내가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죽음과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침묵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 안에는 성령이 거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도 그 이름을 말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마치 불이 붙었는데도 뜨겁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2020년 1월 16일 선교신문 기사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하루 평균 8명 이상의 그리스도인이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었으며, 매일 26개의 교회가 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계산해 보면, 세 시간에 한 명이 순교하고, 한 시간에 한 개 이상의 교회가 공격을 당한 셈입니다. 이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우리는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 마음껏 예배드리고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이렇게 자유로운 환경에서 우리는 과연 복음을 얼마나 담대하게 전하고 있을까요? 혹시라도 작은 불편이나 거절, 비방이나 조롱이 두려워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기를 주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 이름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름이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구원했으며, 내 삶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병든 자가 약을 얻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 약을 전하듯, 굶주린 자가 양식을 얻으면 나누어 주듯,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받은 이 구원의 기쁨을, 이 놀라운 사랑을 그저 혼자 간직할 것입니까? 아니면 세상에 선포할 것입니까? 우리 모두 예수님의 이름을 담대히 선포합시다. 그 이름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오늘, 나는 누구에게 그 이름을 말할 것입니까?

3. 우리는 한마음으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들이 석방되어 돌아오자, 초대교회 성도들은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했습니다. 박해를 당했으니 두려움에 빠졌을 법도 한데, 그들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함께 모여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시편 2편을 인용하며, 열방과 권력자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이미 예언된 일이었음을 고백했습니다. 즉,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복음의 전파를 막을 수는 없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박해가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과정임을 깨달았기에, 그들은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더욱 기도에 힘썼습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29-30)

그들의 기도 제목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들의 형편을 돌아보시고 보호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둘째, 박해 속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 복음이 더욱 강력하게 전파되기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기대하는 기도 제목 하나가 빠져 있었습니다. 바로, 박해가 사라지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박해마저도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결국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듯, 교회가 당하는 박해 역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31)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놀랍게 응답하셨습니다. 기도가 끝나자마자 모인 곳이 흔들리며, 그들은 모두 성령이 충만해졌습니다. 그리고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박해를 없애시는 대신, 그들에게 더욱 강한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셨습니다. 결국, 박해가 교회를 약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하고 담대한 공동체로 성장하게 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박해보다는 신앙에 대한 차가운 무관심과 냉대를 경험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때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핍박했던 ‘불같은 박해’의 시대가 있었다면, 지금은 신앙을 서서히 식게 만드는 ‘얼음 같은 시대’입니다. 세상은 신앙을 직접적으로 공격하기보다는, 조용히 무시하고 외면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문제는, 이게 더 무서울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성령의 불이 붙어 세상의 냉대를 녹이는 불씨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불이 붙어야 합니다. 우리마저 얼음이 되면 어떻게 세상을 녹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불씨는 바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무릎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우리의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바뀌며, 복음은 막힘없이 선포됩니다. 기도할 때 닫힌 문이 열리고, 기도할 때 낙심했던 마음이 다시 일어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교회가 기도의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기도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기도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합시다. 기도하는 교회가 승리하는 교회입니다!

이번 학생 수양회에서도 그런 역사가 있었습니다. 셋째 날 밤 찬양과 기도 시간이 너무나 뜨거웠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불같은 은혜를 체험하며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한 형제가 원래 신앙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수양회에서 은혜를 받은 후 친구 두 명을 전도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형제의 아버지께서 "우리 아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게 낯설다"고 하실 정도였습니다. 얼음장 같은 시대 복음으로 불타는 청년 대학생 세대가 설 수 있도록 우리가 한 마음으로 뜨겁게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오직 예수님의 이름 안에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굳이 예수여야 하느냐?"고 묻지만, 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진리를 어떻게 할 것입니까? 침묵할 것입니까, 아니면 담대히 전할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누구의 말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을까요? 이제 우리가 결단할 차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고백하고 결단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다!”
“내 입술에서 예수님의 이름이 선포되게 하겠습니다!”
“말씀 전파를 위해 한마음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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