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모퉁이의 머릿돌

이창무 2024. 11. 3.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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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24강 / 이창무

모퉁이의 머릿돌

말씀 / 마가복음 11:27-12:17
요절 / 마가복음 12:10,11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혹시 "권위"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요즘 세상에서 '권위'는 종종 부정적인 이미지와 연결되곤 합니다. 마치 우리를 억누르고 얽매이게 하는, 차갑고 거리를 두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특별한 권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 권위는 사람들을 억누르거나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평안을 주는 권위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권위입니다. 이 권위는 단순히 명령하는 힘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로 다가와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삶을 새롭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어떤 권위를 가지고 계셨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I. 예수님의 권위는 사람이 아닌 하늘로부터 온 권위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들어가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계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전날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시며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에 큰 충격을 받은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이 연합군을 형성해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따져 물었습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28)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질문에 즉시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들에게 반문하셨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11:30)

세례 요한은 제사장 가문 출신이지만 제도권을 벗어나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뒤에 오실 예수님이 자기보다 더 크고 위대하심을 증거했습니다. 이처럼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권위로 일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만일 요한의 세례를 인정하면 요한이 증거한 예수님도 인정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사람으로부터라고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참 선지자로 믿었기 때문에 거센 비난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고심 끝에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며 대답을 회피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진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의도적으로 회피했습니다. 권위를 누릴 줄만 알았지 그 권위에 대한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이 대답을 들으시고,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종류의 권위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의 권위입니다. 이 권위는 자신들이 만들고 자기의 소유로 삼은 권위입니다. 이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반면, 정작 그 권위를 가지고 해야 하는 일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이런 권위는 진정한 권위가 아닙니다.

다른 하나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권위입니다. 이 권위는 하나님이 위로부터 주신 영적인 권위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헤롯 왕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다 순교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시다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마침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모두 자신의 유불리를 떠나 진리를 증거하고 사람을 살리는 일에 자신의 권위를 사용했습니다. 이런 권위가 참된 권위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권위나 영향력을 사람을 살리는데 쓰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유익을 얻는 데 쓰고 있습니까? 우리는 비난과 어려움을 각오하고 진리를 증언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정작 말해야 할 때 침묵하고 숨고 있습니까? 우리는 나를 희생하는 리더가 되고자 합니까? 아니면 너를 희생시키는 리더가 되고자 합니까? 우리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본을 따라 어떤 불이익을 받을지라도 담대하게 진리의 복음을 전하고 사람을 살리는 일에 헌신하는 진정한 권위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II. 예수님의 권위는 구원과 심판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 아들의 권위입니다.

예수님은 대답을 회피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비유를 통해 예수님의 권위가 어떤 권위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12:1)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여우가 들어와서 포도나무를 짓밟지 않도록 산울타리를 둘렀습니다. 포도주를 쉽게 제조할 수 있도록 즙 짜는 틀도 만들었습니다. 포도 서리하러 오는 도둑들을 감시할 수 있도록 망대를 세웠습니다. 주인은 포도원에 필요한 일체의 시설을 완벽하게 구비했습니다.

다음으로 주인은 실직하여 손가락만 빨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포도원의 농부로 고용했습니다. 농부들은 소출의 10분의 1을 세로 내기로 주인과 굳게 약속했습니다. 주인은 농부들을 믿고 포도원 운영을 그들에게 다 맡기고 먼 타국으로 장기출장을 떠났습니다. 거의 무제한의 재량권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농부들은 풀옵션 최신식 포도원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크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열매 거둘 때가 가까워지자 포도원 주인은 농부들과 약속했던 세를 받기 위해 종들을 보냈습니다. 이 세는 포도원이 자기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임을 인정하는 표지였습니다. 주인은 농부들이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열매를 바치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농부들은 약속했던 세를 바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종을 잡아 심히 때렸습니다. 만약 제가 주인이었다면 당장 동대문 경찰서에 연락해 전경 한 부대를 끌고 가서 모조리 잡아 족쳤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너그러운 주인은 또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경력 30년 이상의 노련한 종들을 모아서 팀으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직업은 포도원 주인의 종이었습니다.

농부들은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요? 농부들이 처음부터 이런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인이 일할 수 있는 모든 환경과 기회를 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시간이 지나자 점점 자신들이 받은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은혜를 망각하니 감사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막상 탐스러운 포도열매가 맺히자 그들은 내가 다 차지하고 싶은 욕심이 났습니다. 10분의 1을 주인에게 돌려 주는 것마저 아깝게 여겨졌습니다. 땀 흘린 건 난데 주인이 무엇이길래 소출을 거두어 가느냐 하면서 반감이 생겼습니다. 결국 감사를 잊어버리고 욕심에 눈이 먼 농부들은 주인이 베푼 은혜를 주인에 대한 모욕과 멸시로 되갚고 말았습니다.

이 포도원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농부들은 종교 지도자들을, 종들은 선지자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그러나 이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다 잊어버렸습니다. 물질과 쾌락을 추구하는 탐욕스러운 자들로 변해갔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의 자비하신 손길을 뿌리치고 도리어 선지자들을 때리고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 모습은 비단 이스라엘의 모습만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어떻게 해서는 하나님을 밀어내고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성향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생명과 물질과 시간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습니다. 당신 머리 위에 당신의 참된 주인이 계시다는 진실을 일깨워 주는 사람을 미워합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류는 포도원 비유의 배은망덕한 농부들입니다.

그러면 이 심각한 사태를 포도원 주인은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습니까?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6)

포도원 주인은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내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종들이 갔기 때문에 농부들이 무시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아들만큼은 존대하리라 기대했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인이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주인이 너무 낙관적이고 순진해서 바보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주인은‘돌처럼 딱딱한 굳어진 농부들의 마음을 어떻게 다시 돌이킬 수 있을까?’ 오직 이 생각뿐이었습니다. 주인은 그들을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에 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에 눈 먼 주인은 마침내 자기 아들을 반역한 농부들에게 보내었습니다.

이에 대해 농부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농부들은 상속자인 아들을 죽이면 자기들이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무자비하게 주인의 아들을 죽여 포도원 밖에 던져버렸습니다. 주인은 분노하여 농부들을 진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포도원을 주었습니다. 농부들이 포도원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 했던 시도는 다 헛된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었던 그 은혜와 특권도 다 잃고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앞에서 종교지도자들이 제기한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오셨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보내신 분입니다. 최후로 꺼내신 비장의 카드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기회를 붙잡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동안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비유 속 농부들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존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싫어하고 미워했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을 가로 막는 방해물 정도로 여겼습니다. 마침내 성문 밖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한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기원후 70년 로마 장군 디도에 의해 예루살렘과 성전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스토리는 이렇게 처절한 비극으로 끝나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10-11)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건축자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버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버림받은 돌이 머릿돌이 되다니 참 기이한 일이고 놀라운 일입니다. 이 말씀은 실제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버림 받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지만 그 후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 만 왕의 왕, 만유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구원과 심판을 결정하는 기준점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단순히 선지자나 선생이 아닌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로서의 권위를 가진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인생의 머릿돌이 되려고 합니다. 나를 중심으로 내 생각, 내 계획, 내 뜻대로 멋있는 내 인생의 집을 짓기 원합니다. 이를 방해하는 것들은 다 장애물로 여기고 거부하고 배척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밀어내고 자기를 중심으로 살면 어떻게 됩니까?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눅20:18)

모퉁이의 머릿돌 되시는 예수님 위에 떨어져 인생이 산산조각 나고 가루가 되어 흩어지게 됩니다.

진정 지혜로운 인생은 예수님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 인생의 머릿돌로 삼고 예수님 위에 인생의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엄청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10분의 1의 작은 소출을 요구하십니다. 작은 정성과 시간과 진심을 바치기 원하십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주님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길 원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인정하고 작은 것을 드리면 주님은 더 많이 우리에게 주십니다. 더 넘치도록 축복해주십니다.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를 생각하며 나의 인생과 가정, 일터, 그리고 교회를 모퉁이의 머릿돌 되신 예수님 위에 세우는데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III. 예수님의 권위는 탁월한 진리의 교사로서의 권위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께 왔습니다. 평소 바리새인과 앙숙 관계인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오다니 별일입니다. 게다가 웬 일로 예수님을 장황하게 칭찬하기까지 했습니다.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14a)

평소 하지 않던 행동을 하니 그 동기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한 장치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머리를 맞대고 준비했던 함정이 무엇입니까?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14b)

만약 이 질문에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답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금 납부에 거부감이 큰 일반 백성들과 바리새인들을 모두 적으로 돌리게 됩니다. 반대로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답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납세 거부를 선동한 죄목으로 로마 당국에 체포될 빌미를 주게 됩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외통수로 내몰린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대답에 앞서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데나리온은 당시 로마의 은화로서 ‘신의 지존하신 아들 디베료’라는 글과 함께 황제의 흉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려 주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17)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은전은 가이사에게 돌려주라는 의미입니다. 로마가 세금을 거두어 황제가 호위호식하는 데에만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세금은 로마 제국 내에서 질서와 안녕을 유지하고 복지 정책을 펼치는 데 쓰였습니다. 유대인들도 그 혜택의 상당 부분을 누리는 만큼 세금을 납부하는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진짜 핵심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말 속에 담겨 있습니다. 가이사의 형상이 데나리온에 새겨져 있다면 하나님의 형상은 어디에 새겨져 있습니까? 창세기 1장이 말씀하는 바대로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너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예수님께 대하여 매우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너무나 탁월했기 때문입니다. 난처하고 어려운 질문을 어떻게 이렇게 한 마디로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어느 한 편만 편들지 않는 균형 감각과 효과적인 전달 방식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바리새인과 헤롯당 사람들의 모습과 대비가 됩니다. 그들은 상대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거나 곤란한 질문을 던지는 데는 도가 튼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을 회피하기 일쑤였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어떤 어려운 질문에도 척척 답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매번 핵심과 본질을 꿰뚫는 대답이었습니다. 누가 진정한 권위자입니까? 당연히 예수님입니다. 감히 그 누가 예수님의 지혜와 말씀을 뛰어넘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권위에 반감을 있는 듯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정한 권위를 가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한때 음식에 대한 궁금하면 백종원부터 찾고,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오은영 박사를 찾고, 개에 문제가 생기면 강형욱을 찾았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과 영원에 관한 문제는 누구에게 답을 찾아야 하겠습니까? 이 문제에 대한 속시원한 해답을 주실 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대학생 선교단체 CCC는 매년 여름 수련회 때마다 ‘백문일답’이라는 순서가 있습니다. 사회자가 백 개의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대답은 늘 하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지막 백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살아계셔서 이 곳 가운데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시고 세세토록 무궁하며, 끝이 없는 찬란한 영광 가운데 온 나라와 백성이 그의 오심을 기다리며, 그의 다스리심을 갈망하며, 그가 오셔서 성전의 마지막 돌을 쌓으실때 비로소 완성되게 하시는 우리의 왕이요, 온 땅의 왕이신 바로 그분, 그분은 누구십니까 ” 정답이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권위를 단순히 지식으로 아는 것에 그치지 말고, 우리의 삶 속에서 그 권위를 인정하고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단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삶 가운데 살아 계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한 순종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과 신뢰입니다. 예수님의 권위 아래서 살아갈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순간, 예수님의 권위를 다시 한번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나아가길 결단합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권위가 어떻게 역사하실지 기대하며, 그 권위에 의지하여 담대히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그 이름>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수 없네 
그 이름 속에있는 비밀을 
그 이름 속에 있는 사랑을

그 사랑을 말할수 없어서 
그 풍부함 표현못해서 
비밀이 되었네 그 이름 비밀이 되었네

사람들 그 이름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버렸지만 
내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아름다운 보석

내게있는 귀한 비밀이라
내 마음에 숨겨진 기쁨 

예수 오 그이름 나는 말할수 없네
그 이름의 비밀을 그 이름의 사랑을 
그이름의 비밀을 그이름의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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