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그의 영광

이창무 2023. 8. 27.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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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여름특강 제 4 강 / 이창무

그의 영광

말씀 / 요한복음 1:1-5, 14
요절 /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영광이라는 단어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찬란하게 빛날 정도로 명예로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이 영광이라는 단어를 가장 자주 접하게 될 수 있는 때는 언제일까요? “이 상을 받게 되어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모든 영광을 감독과 스탭들에게 돌립니다.” 같은 말들을 듣게 되는 연말 시상식 때가 아닐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연말 시상식에서 수상을 해 본 적이 없으십니다. 턱시도를 입고 사람들의 박수 갈채를 받으며 레드 카펫을 밟아 보신 적이 없으십니다. 도리어 맨발로 골고다의 언덕길을 올라가 수치와 모욕 가운데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은 예수님에게서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보았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그분의 찬란한 영광을 주제로 말씀을 전하게 되어 저에게 큰 영광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이 예수님에게서 발견한 그분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 안에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

1절에서 말씀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사도 요한은 굳이 왜 우리에게 친숙한 예수님이라는 이름 대신에 말씀이라고 표현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그분의 영광이 “예수”라는 이름만으로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예수님을 왜 우리에게 익숙한 그리스도라는 호칭 대신 말씀이라고 표현했을까요? 여기서 말씀은 헬라어 원어로 ‘로고스’입니다. 헬라 인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이성적 원리가 있다고 믿었으며 그것을 바로 ‘로고스’라고 불렀습니다. 반면 유대인은 어떻습니까? 구약에는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유대인들은 말씀을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를 전달하는 인격적인 실체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이라는 의미를 종합하면 어떻게 됩니까? 헬라인에게는 ‘당신들이 로고스, 로고스 하는데 예수님이 바로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그 신적인 존재입니다.’하는 메시지가 됩니다. 또 유대인에게는 “당신들이 성경에서 계속 만나게 되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예수님입니다.”하는 말이 됩니다. 이처럼 말씀은 단어 하나로 당대 헬라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예수님이 단지 한 인간을 넘어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전달해 줄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절묘한 단어를 찾아냈는지 정말 기가 막힙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여기서 말씀은 성자이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성부이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함께’라는 단어의 원어는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을 표현할 때 쓰는 전치사입니다. 보통 현실 속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마주 볼 일이 별로 없습니다. 대화도 별로 없고 서로 어떻게 사는 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굳이 마주 본다면 서로 으르렁거리는 눈빛으로 마주 볼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전혀 다릅니다. 마치 결혼식장의 신랑 신부처럼 친밀하고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늘 서로를 마주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두 분 사이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다 아시고 아들은 아버지를 모두 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생각하다 보면 자칫 빠지기 쉬운 오해가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시고 성자 예수님은 그에 좀 못 미치는 부족한 하나님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1절은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십니다. 성부와 마찬가지로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번 국제 수양회의 전체 타이틀은 ‘그의 영광(His Glory)”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영광을 묵상하다 보면 그분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래서인지 이번 수양회는 특별히 찬양과 경배가 풍성했습니다. 열심히 준비한 흔적이 역력해 보이는 찬양팀의 인도로 2,000명이 넘는 참석자들이 함께 찬양 가운데 벅찬 감동이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시는 성자 예수님께 한 없는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큰 영광받으소서  홀로 찬양받으소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그이름  온땅과 하늘이 다 찬양해  
겸손하게 우리 무릎 꿇고  주 이름앞에 영광돌리세  
모두 절하세 독생자 예수  주님께 찬양드리리  
모든 영광과 존귀와 능력  받으소서 받으소서 
영광과 존귀와 능력 받으소서 받으소서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

둘째, 예수님 안에는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의 영광이 있습니다.

신랑 신부가 결혼하여 사랑으로 하나되었을 때 어떤 결실을 맺게 됩니까? 바로 자녀라는 새 생명이 탄생합니다. 이처럼 영원 전부터 계셨던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친밀한 교제와 사랑 가운데 생겨난 것이 무엇일까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3)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통해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천지 창조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위대한 합작품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을 읽어보니 어디에도 예수님이 안 나오는데요? 창조는 하나님이 혼자 다 하신 것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무엇을 창조하실 때마다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이르시되”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 만물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볼 때마다 말씀이신 예수님의 능력과 지혜를 접하게 됩니다. 이번 북미 수양회 안암 1부 저니팀은 수양회 후 시카고에서 고층 빌딩을, 뉴욕에서 자유의 여신상과 화려한 야경을 보았습니다. 또 필라델피아와 워싱턴에서 역사적인 유적지를 둘러보았습니다. 이런 것들도 볼만 했지만 역시 최고는 나이아가라 폭포와 폭포로 가는 길에 잠시 들렸던 왓킨스 글렌 주립 공원의 자연 경관이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하나님이 친히 지으신 것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광활한 저 인터스텔라의 우주도, 너무나 작은 전자와 양성자와 중성자가 움직이는 원자들의 신비한 세계도, 이 모든 것이 말씀이신 예수님이 함께 창조하신 것입니다. 자연 만물 가운데 새겨 놓으신 창조주 예수님의 영광을 발견할 때 우리는 그분께 찬양을 올려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셋째, 예수님 안에는 우리들의 생명과 빛이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4)

생명과 빛이 없는 우주를 상상해 보십시오. 살아 있는 것이 하나 없고 모든 것이 다 죽은 것 뿐이라면, 온 우주가 칠흑 같은 어둠 뿐이라면 얼마나 삭막할까요? 따지고 보면 피조된 세상이 얼마든지 그런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우주에는 생명이 있고 빛이 있습니다. 생명과 빛은 과학자들이 아직도 그 실체를 다 파악하지 못한 신비의 영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 선포합니다. 사람에게는 육체의 생명과 물리적인 빛을 넘어서는 영적인 생명과 빛이 필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물 가운데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유일한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죄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시고 그에게 새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절망과 허무,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어둠에 사로 잡힌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십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면 풍성한 생명을 누리고 빛으로 충만한 밝은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번 국제 수양회 말씀 강사들은 한곁 같이 자신에 임한 예수님의 생명과 빛에 대해 증언을 했습니다. 캐나다 에드몬턴 데이빗 장 선교사님은 과거 소심한 성격에 대한 열등감에 빠져 어두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만나고 새 사람이 되었음을 눈물과 함께 고백을 했습니다. 독일에서 온 에버하르트 그로스 목자님은 수영을 하다 빠져 죽을 뻔했던 아내를 구조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었던 자신의 경험담을 말하며 예수님이 죽음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던 우리를 사랑하사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은혜를 증언했습니다. 아프리카 존 파토인보 목자님은 미신과 정욕에 찌들어 살았던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고 씻어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베네수엘라 호수에 구띠에레즈 목자님은 어린 시절 자기를 버린 아버지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치유의 능력을 증거했습니다. 홍콩에서 태어난 마크 휴이 목자님은 과학을 우상으로 삼았던 인생을 살다가 박사 학위 취득에 실패한 후 큰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일대일 성경 공부를 통해 예수님 안에서 빛을 발견하고 지금은 대만에서 평신도 선교사로 귀하게 쓰임 받고 있습니다. 워싱톤 필립 브라운 목자님은 심각한 말더듬의 문제가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어두운 인생을 살다가 십자가 예수님을 통해 내가 저주 받은 사람이 아니라 축복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매주 워싱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로 쓰임 받고 있습니다. 이번 메시지도 단 한 번도 말을 더듬지 않고 또박또박 유창하게 전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분을 아는 분들이 끝나고 나서 이것은 기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씀을 전한 LA 윌리엄 라슨 목자님은 작년에 장기 내부의 출혈로 혈액의 60% 잃고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습니다. 그러나 40일만에 완치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의사조차 어떻게 낫게 되었는지 모르겠고 저절로 나은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주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현재 윌리엄 목자님은 오랫 동안 다니던 구글을 사직하고 LA UBF의 책임 목자로 섬기고 있습니다.

말씀 강사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과 빛이 우리 선교사님들 가운데 함께 하시고 있음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겉 보기에는 잘 몰랐는데 분반 공부와 소감 발표를 통해 선교사님들 중에 큰 아픔과 상처가 없는 분이 한 분도 없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집을 나간 자녀 문제로, 어떤 분은 아내와의 갈등 문제로, 어떤 분은 다른 선교사님과 동역 문제로 힘들어 하셨고 소감을 발표하다 눈물을 많이 흘리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예수님의 생명과 빛으로 치유함 받고 회복되고 있음을 고백하시고 앞으로 오직 그분의 영광을 구하는 삶을 살고자 결단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5절 말씀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5)

여기서 ‘깨닫지 못하더라’는 이기지 못하더라 라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세상의 어둠은 예수님의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을 어둡게 하는 힘들고 각박한 현실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결코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밝은 빛이 되십니다. 그 빛이 우리에게서 슬픔을 거두고 자유와 기쁨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 우리들의 밝은 빛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주 
의의 길을 따라가는  주의 자녀들에게 항상 밝은 빛을 비추시네  
그는 구원의 주 하나님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네 
주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부어 주시는  놀라운 주님의 영광  
하늘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주의 영광  이 땅에 오셨네 
어둠을 밝히고 새 생명 주시네 영원히 빛나는 나의 예수님 
높이 영광과 찬양 받으실 그 이름 경배합니다 
슬픔을 거두고 내게 자유 주시네 기쁨의 노래를  
영원한 나의 빛 예수께

이제까지 살펴 본 말씀이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태초부터 계시던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분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그분은 어둠을 밝히는 강력한 빛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그분에 대해 도무지 믿기 어렵고 상상조차 하기 힘든 놀라운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말씀이신 그분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어떻게 창조주가 피조물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실 수 있을까요? 굳이 비유를 하자면 어떤 사람이 자발적으로 오늘부터 사람으로 살지 않고 바퀴벌레로 살겠다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우리에게 그분의 영광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눈이 가려져서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없었습니다. 아예 그분이 계신 지조차 몰랐고 그분의 영광을 알고자 하는 소원조차 없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주님께서 그냥 내버려 두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죽을 때까지 그분의 영광을 전혀 모른 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이나 권력이나 명예와 같이 눈에 보이는 영광만이 영광의 전부인 줄만 알고 헛된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값싼 영광을 얻기 위해 아등바등 치열하게 경쟁하는 한계적인 인생을 사는 길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들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은혜도 모르고 진리도 모르고 아무 것도 없는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저 높고 높은 하늘에서 이 낮고 낮은 땅 위로 내려 오셨습니다. 이 땅 가운데 오시되 비천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시고 일생 죄인들을 섬기시다가 마침내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 하나 하나는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이 풍성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지를 친히 보여주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 불리기 시작했다고 하는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육신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셨던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는 사람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으셨던 예수님의 실체는 창조주시요 영원하신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이심을 보는 사람입니다. 비참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그분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 완전한 구세주요 영원한 왕이심을 보는 사람입니다.

이번 국제 수양회 마지막 순서는 “제단으로의 부름(Altar Call)”이라는 시간이었습니다. 두 번의 부름이 있었습니다. 먼저는 이번 수양회를 통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분들을 단상 앞으로 초청했습니다. 다음으로는 선교에 자신을 헌신하고자 하는 분들을 초청했습니다. 저는 두 번 다 아무도 안 나가서 분위기가 썰렁해질까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기우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앞으로 나가 결단을 드러내고 안수 기도를 받았습니다. 앞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자기 자리에 앉아 눈물로 기도하는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어렵다 할지라도 이렇게 수양회 말씀을 통해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내가 경험한 그분의 영광을 증언하는 일에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신앙 생활이란 이렇게 그분의 영광을 보고 그분의 영광을 증언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영광에서 더 깊은 영광으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예배를 통해서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분의 영광을 본 감격으로 가슴 뛰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능력과 모든 권세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주님 
세상이 측량 할 수 없는 지혜로 모든 만물 창조하셨네 
모든 나라와 모든 보좌 이 세상 모든 경이로움 보다 
이 세상 모든 값진 보물 보다 더욱 귀하신 나의 주님  
십자가 고통 당하사 버림 받고 외면 당하셨네 
짓밟힌 장미꽃처럼 나를 위해 죽으셨네 나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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