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요한복음 제 27 강 / 이창무
내가 주를 보았다
말씀 / 요한복음 20:1-18
요절 / 요한복음 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기독교를 상징하는 것 하면 단연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상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매달려 계신 십자가 상이 있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달려 있지 않은 십자가 상이 있습니다. 앞의 것은 로마 카톨릭에서 사용합니다. 반면 우리 개신교에서는 십자가 상을 사용할 때 그리스도가 없는 십자가를 사용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구원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어 있는 십자가를 통해 지금은 거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빈 무덤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현재 무덤에 계시지 않고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 이름을 부르시는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1,2)”
안식일이 끝나기를 손꼽아 기다린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다시 보기 위하여 아직 동 트기 전 어두울 때 무덤에 도착하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을 막고 있는 큰 돌을 어떻게 치워야 하나 고민하면서 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돌문이 이미 옮겨져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열린 무덤을 보고 즉시 베드로와 요한에게 이 소식을 알려 주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달려가는 내내 예수님의 시신이 훼손이라도 되었을까 그녀 마음에는 걱정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누가 가져 갔을까? 도굴꾼일까? 로마 군인일까? 종교 지도자들일까? 머리 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오고 갔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가능성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3-5)”
베드로와 요한 두 제자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더니 무덤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먼저 도착한 사람은 요한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요한이 나이가 더 어려서 달리기가 빨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열린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않았습니다. 생각이 많고 신중한 요한의 성격이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요한은 다만 입구에서 몸을 구부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없고 다만 그것을 쌌던 세마포만이 보였습니다. 이것은 누군가 시신을 탈취하거나 옮겨 간 것은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였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시체를 훔쳐가면서 굳이 수의를 벗겨 놓고 가져가겠습니까?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6,7)”
조금 뒤에 도착한 베드로는 곧장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모습에서 요한과는 상반된 베드로의 성격이 잘 드러납니다. 그는 거침이 없이 저돌적이고 직선적인 성격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무덤 안에서 요한이 못 보았던 한 가지를 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머리를 싸고 있던 수건이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수건은 세수할 때 수건이 아니라, 시신의 입이 벌어지지 않도록 턱받침을 해 정수리까지 나선형으로 둘둘 감싸는 천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머리를 쌌던 모양 그대로 돌돌 말린 채로 놓여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예수님의 머리가 수건을 풀지 않고 쏙 빠져나왔다는 말이 됩니다. 무덤 안에 남겨진 세마포 역시 예수님의 몸만 쏙 빠져나간 모습이었습니다. 존 스토트는 이 장면을 묘사하면서 그들이 본 것은 나비가 벗어버리고 나온 번데기 같았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실 때 온 몸을 감쌌던 세마포와 수건을 일일이 푼 것이 아니라 증발하듯이 그 수의를 벗고 나오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정말 신비한 일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이 현재 우리가 지닌 몸과 얼마나 다른 것인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활 이전 예수님의 몸은 현재 우리 몸과 같은 몸이었습니다. 금세 피곤해지고 쉬지 않으면 안 되는 몸, 삶을 여러 면에서 제약하는 한계적인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닌 몸은 그런 몸이 아니었습니다. 그 몸은 영화롭고 신령한 몸, 제약 받지 않는 자유로운 몸, 업그레이드된 몸이었습니다. 부활 후 새로운 몸을 입는 것은 예수님에게만 해당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부활의 첫 열매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도 장차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어떤 몸을 입게 될까요?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15:42-44)”
우리 기도 제목표의 상당 부분이 아픈 분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다른 지부 가운데는 코로나에 걸려 아직 정상적인 의식이 돌아오지 못한 목자님도 계시고 췌장암 판정을 받아 투병 중인 목자님도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아직 최고의 날은 오지 않았습니다. 최고의 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 날은 우리가 부활하는 날입니다. 이 날은 죽음의 지배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날입니다. 그 날이 오면 더 이상 질병에 시달릴 일도 없어 늙거나 약해지지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우리 과거와 현재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우리의 미래가 아닙니다. 우리의 미래는 신령한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8)”
베드로를 따라 요한도 함께 무덤에 들어가 감싼 모양 그대로 놓여 있는 수건을 보았습니다. 이때 요한이 보고 믿었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믿었다는 말일까요? 마리아의 말을 믿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빈무덤에서 요한이 본 증거는 시신 도난설을 기각합니다. 그러면 남은 것은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밖에 없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대단합니다. 하지만 그 믿음은 한계가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어떤 한계일까요?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다 하는 믿음을 가졌으나 이 사실의 의미를 설명해 줄 말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죽음의 지배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를 알리는 사건이며 우리가 누릴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만약 이것을 알았다면 그 다음에 어떻게 했을까요? 당장 사도행전의 사도들처럼 두려움 없이 사람들에게 달려가 복음을 선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실제로 어떻게 했습니까?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10)”
두 제자는 그냥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이 모습은 그들의 부활 신앙을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 줍니다. 빈 무덤과 세마포와 수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온전한 부활 신앙에 이를 수 없습니다. 제대로 된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씀과 성령님의 조명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구원과 관련하여 무엇을 성취했는가를 깨달어야 합니다.
저는 대학교 2학년 때 예수님을 만나고 그 때부터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한참동안 왜 그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중요한 지는 잘 몰랐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가까이 다가왔지만 부활은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이런 저에게 부활의 의미가 실제적으로 다가온 것은 그로부터 삼 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해 수양회 전체 타이틀이 “광명의 십자가”였습니다. 수양회 기간 내내 참혹한 십자가가 어떻게 광명의 십자가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안고 씨름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부활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의미를 넘어 부활은 모든 악과 어두움과 죽음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 선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실제적으로 부활의 빛 가운데 새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믿습니다” 라는 고백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무덤 밖에서 안을 살짝 들여다보는 것으로 부활 신앙을 가졌다고 말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부활의 믿음은 성경 말씀을 통하여 확증하게 될 때 확실하고 견고한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이 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남은 요한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가 온전한 부활의 믿음에 이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11-13)”
제자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 마리아는 여전히 무덤 가에 남아서 울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왜 울고 있었을까요? 예수님이 허망하게 돌아가신 것도 너무 슬픈데 그분의 시신마저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향한 미련 때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무덤 안에는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천사가 먼저 말을 건넸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몰라서 물은 것은 아닙니다. 울 이유가 없는데 왜 울고 있느냐 하는 부드러운 책망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울고 있다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알았다면 덩실덩실 춤을 추었을 텐데 부활을 모르기 때문에 울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리아를 돕기 위해 누가 나타납니까?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14-16)”
인기척을 느낀 마리아가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거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서 계셨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왜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번에도 마리아는 번지수를 잘못 찾습니다. 죽어 시체가 된 예수님을 찾는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안타까운 심정으로 “마리아야” 부르셨습니다. 이 음성은 마리아가 전에 수도 없이 들었던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결코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사랑하는 구주의 음성이었습니다. 이 음성을 듣고 나서야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랍오니여(나의 선생님)”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 역시 평소 예수님께 늘 하던 대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평소와 달리 벅찬 감격으로 인해 그 음성이 떨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이 하셨던 이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요10:3,4)”
바로 이 일이 일어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기 양인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들은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녀는 과거 일곱 귀신이 들린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그녀가 새 사람 되게 하셨습니다. 이 일 후에 마리아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 자신이 가진 재물로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또 그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최후까지 십자가 곁에 남아 있었던 여인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부활의 새벽에도 날이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에 올만큼 예수님을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목놓아 울만큼 예수님을 소중하게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남달리 예수님을 사랑했던 여인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때문에 염려와 걱정에서 휩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활을 모르기 때문에 믿음도 죽고 소망도 죽고 무덤에서 우는 것 외에 어떤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 삶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처럼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를 알고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만약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마리아처럼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염려하고 슬퍼하지 않아도 될 일을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 신앙의 부재가 원인인 줄 모르고 다른 엉뚱한 곳에서 해답을 찾으려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하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아직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우리를 향해 우리의 선한 목자는 우리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음성을 듣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믿음이 살아나고, 소망이 생기고, 열정이 다시 활활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요즘 주식 대박, 부동산 대박으로 인생 역전을 꿈꾸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인생의 대반전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 그 만남이 우리 인생에 진정한 대반전을 이루게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17a)”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나를 붙들지 말라고 다소 냉정하게 말씀하십니다. 왜 예수님은 나를 붙들지 말라 하셨을까요? 표면적으로는 당장 승천하려고 하니까 내 다리를 붙잡지 마라 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40일 후에나 승천할 계획이기 때문에 이것이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붙들지 말라는 말씀을 뒤집어 보면 지금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들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너무나 소중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영영 잃어버린 줄 알았습니다. 방금 전까지 그분의 시신마저 잃어버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살아 눈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다시는 이 예수님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리아의 꿈은 십자가 사건에 일어나기 전 아름다운 그 시절의 과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은 소생이지 부활이 아닙니다. 이제는 미래로 나아가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앞으로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만유를 통치하셔야 합니다. 마리아에게도 마리아가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17b)”
마리아가 해야 할 일은 부활의 소식을 가서 전하는 일입니다. 마리아는 부활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 중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제자들을 가리켜 내 형제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가리켜 내 아버지이자 동시에 너희 아버지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등지고 뿔뿔이 흩어져 버렸던 낙오자들,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했던 실패자였던 베드로,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라 부르기에도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제 그들을 내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관계입니다. 엄청난 은혜요 놀라운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실패와 좌절에 쌓여 있는 제자들에게 가서 이 복된 소식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습니다. 이 메시지는 주님께서 단순히 부활하셨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실패자인 그들을 주님께서 형제라 부르시며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다는 메시지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께서 승천하셔서 그들의 처소를 예비하신 뒤 다시 오실 것을 바라보게 하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이 메시지는 오늘 우리가 전해야 하는 복음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18)”
오늘 말씀에서 마리아는 두 번 제자들에게 달려 갑니다. 첫번째 달려갔을 때는 근심과 걱정에 가득 차 있었고 불길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두번째 달려갔을 때는 기쁨과 감격이 충만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가장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달려 갔습니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내가 주를 보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 이것이 그녀의 모든 것을 변하게 했습니다.
앞날에 대한 근심과 걱정이 많으십니까? 해결책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지만 어디에도 답이 보이질 않아 답답하십니까? 큰 상실로 인해 절망과 슬픔 가운데 있으십니까? 그 아픔이 너무 컸기 때문에 무엇을 새롭게 시작해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게 너무나 소중한 것을 잃지 않기 위해 그것에 집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딱히 우리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속 막달라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근심하고 방황하고 슬퍼하고 집착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마리아는 울음을 그치고 기쁨이 넘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죽었던 믿음이 살아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염려 대신 소망이 생겼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과거에 대한 집착을 끊고 예수님의 명을 받들어 세상 속으로 들어가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만날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기뻐하고 살아나고 산 소망을 붙들어야 할 차례입니다. 마리아와 사도들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아 이제 우리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 부활의 증인 될 차례입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자 증언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이 증언에 합당한 삶을 삶으로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우리를 통해 나타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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