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요한복음 제 29 강 / 이창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말씀 / 요한복음 21:1-17
요절 / 요한복음 21: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흔히들 인간을 욕망하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제가 경영학을 배울 때 교수님들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해서 직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소비자들이 물건을 구매하도록 만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인간은 윤리적 존재라고 말합니다. 대표적인 인물인 칸트는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옳습니다. 사람은 분명 때로는 욕망에 이끌려 때로는 의무감 때문에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욕망보다 더 강하고 의무보다 더 강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요한복음에는 유독 생명, 진리, 빛, 믿음, 앎과 같은 용어들이 핵심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마무리는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당신은 사랑의 사람입니까?”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1)”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한번 제자들을 만난 장소는 디베랴 바다입니다. 더 널리 알려진 이름은 갈릴리 바다입니다. 이 곳은 길 가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 제자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곳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웬 지 모를 낯섦이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삼 년 반 동안 한 시도 떨어져 본 적이 없던 예수님이 그들 곁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2,3)”
갈릴리에 온 제자들 명단 가운데 시몬 베드로가 가장 먼저 나옵니다. 그리고 도마,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있습니다. 또 다른 제자 둘은 안드레와 빌립일 것입니다. 이들 일곱 명의 제자들은 “먼저 갈릴리에 가 있으면 내가 너희를 찾아 가겠다” 하신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막연한 기다림 속에 모두가 지쳐갈 무렵, 베드로가 침묵을 깨고 말합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배가 고프니 일단 뭐라고 먹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이에 긍정으로 화답했습니다.
삼 년 만에 제자들은 그물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고기잡이 성적표는 참담했습니다.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배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왕년에 한가락하던 뱃사람들인데 해도 너무한 결과였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은 어떤 특정한 것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날 밤 제자들의 텅 빈 그물은 그들이 앞으로 예수님 없이, 자기들이 주도권을 쥐고 살아가려고 한다면, 그 삶의 열매가 무엇이 될 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4-6)”
해가 밝아 오고 그물을 정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바닷가에 서 있었습니다. 갈릴리에서 보자 하셨던 예수님입니다. 하지만 아직 너무 어두워서인지 너무 멀어서인지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분이 멀리서 외치십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원문은 “얘들아 고기를 하나도 못 잡았구나, 그렇지?” 라는 뜻의 부정 의문문입니다. 고기를 못 잡은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또 도대체 누구이기에 “얘들아”라고 부를까요? 여러모로 이상한 질문입니다. 제자들에게 혹시 예수님이 아닐까 하는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을 지 모릅니다.
이때 제자들은 “없나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다시 한번 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소리칩니다. 그러면 잡으리라 약속하십니다. 이때 제자들은 시키는 대로 다 합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물을 들어올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기적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 누구나 누가복음 5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도 베드로는 밤새 수고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셨을 때 그 말씀 대로 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어렴풋하게 깨달은 베드로는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고 그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 처음 부르심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르실 때 두 가지 방향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앞으로 오로지 예수님만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앞으로 물고기 낚는 대신 죄와 죽음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인생들을 구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후 베드로는 이 두 가지 모두 붙잡지 못했습니다. 자신만만하여 자기의 의지와 능력을 더 의지했습니다. 양들을 먹이기보다는 이스라엘의 독립과 자신의 출세와 성공에 더 목을 맸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베드로는 제자로서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며 영적인 파산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사회는 한 번 파산한 사람에게 좀처럼 재기의 기회를 주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처음으로 돌아가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보자고 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처음 주셨던 교훈과 방향을 이제라도 다시 붙들게 된다면 얼마든지 회복될 수 있다는 것, 회복을 넘어 넘치도록 열매 맺는 인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경험하게 해 주십니다.
동화작가 정채봉 선생님의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맨날 싸우기만 하는 부부 까치가 산도사 까치에게 가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냐고 묻습니다. 산도사 까치의 답은 단순합니다. “처음 둥지를 틀었던 곳에 다시 가 보고 그때의 마음을 돌아가시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가 보십시오. 그때 우리는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충만하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고 이유 없이 기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느새 초심을 잃어버린 채 욕심이 생기고 사람들의 인정에 연연하고 자기 의에 사로 잡혀 누군가를 비난하고 정죄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리저리 좌충우돌하며 동역자로서, 부모로서, 목자로서 다 실패했다는 좌절감에 빠져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직 포기할 때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직 늦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비록 단 한 마리도 잡아 올리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제부터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한 수확을 얼마든지 거둘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기 위해 내미시는 주님의 손을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처음 주셨던 그 약속과 비전을 회복하게 하시고 온전히 이루게 하실 줄 믿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7,8)”
요한이 예수님을 먼저 알아보고 이를 베드로에게 알려줍니다. 베드로는 역시 베드로 답게 즉시 바다로 뛰어듭니다. 뛰어들기 전에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헤엄을 치려 하는데 굳이 벗고 있던 겉옷을 다시 두릅니다. 예수님 앞에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 입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마음 속 깊이 여전히 예수님을 사랑하며 존경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9)”
뭍에 올라왔을 때 제자들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장면을 보고 놀랐습니다. 숯불과 생선과 떡, 영락없는 아침 식사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코끝을 자극하는 생선 구이 냄새, 떡 굽는 냄새에 제자들은 침을 꿀떡 삼켰습니다. 하지만 이 광경을 보고 다른 제자들과 달리 마음이 착잡한 제자가 있었으니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숯불을 보고 할 말이 잃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을 때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마주했던 것이 숯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처절한 실패의 기억은 쉽게 풀리지 않는 응어리로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이 응어리를 계속 그대로 두면 지속적으로 베드로의 영혼을 손상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픔이 치유되려면 반드시 그 응어리를 정면으로 마주보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트라우마를 치유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연탄불도 가스불도 아니고 숯불을 그 자리에 준비해 놓으신 것이 아닐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10-13)”
예수님은 지금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는 두번째 명령을 하셨습니다. 역대 급 어획량을 기록에 남기기 위해 그 수를 세어보았습니다. 모두 백 쉰 세 마리였습니다. 예수님이 밤새 노동으로 지친 제자들에게 이 물고기로 친히 아침 식사를 차려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직접 서빙까지 해 주셨습니다. 알맞게 구운 떡을 제자들 앞에 갖다 주시고, 생선의 가시까지 일일이 발라 주셨습니다.
이때 당신이 누구냐 묻는 제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이 명백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왜 제자들은 하나같이 하필 밥을 먹을 때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일까요? 그만큼 예수님과 식사가 제자들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주님과 식사는 단순히 주린 배를 채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 시간은 예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아침 식사는 예수님의 사랑이 지금도 여전히 자신들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제자들이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기억을 간직한 사도들은 이후로 성도들이 교회에 모일 때마다 ‘애찬’이라고 불리는 공동 식사를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작년부터 코로나가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져간 것 중에 공동체의 식사 교제가 있습니다. 다른 것은 이런저런 모양으로 대신하기도 하고 했다가 못했다가 하기도 했지만 식사 교제는 아직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주일 예배 후에 요회 별로 옹기종기 모여 밥을 먹으며 대화하고 교제하는 모습이 실종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모습이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잡게 될 지도 모르겠다는 염려가 듭니다. 그러나 교회는 초대 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성도의 식사 교제를 교회의 본질적인 활동의 일부로 여겨 왔습니다. 과거에도 전염병이 돌아 함께 식사하는 것이 중단된 사례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상황이 다시 좋아지면 어김없이 식사 교제로 돌아왔습니다. 왜냐하면 공동 식사 가운데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이 전달되고 장차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우리가 자유롭게 식사 교제할 수 있는 때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때가 곧 오기는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함께 밥을 먹고 사랑의 교제를 나눌 것이 기다려 집니다. 코로나 시대를 맞아 세상은 개인주의의 급성장과 공동체의 붕괴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 된 교회인 우리는 서로 연결된 유기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하나된 공동체를 함께 이루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14)”
부활 후 예수님은 두 차례에 걸쳐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부활의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세번째 나타나심은 목적이 다릅니다. 제자들의 무너진 마음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중에서도 특별히 치명적인 내상을 입은 한 제자를 주목하십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15)”
식사 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를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 부르십니다. 베드로는 반석처럼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라고 예수님이 주신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베드로는 예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반석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흔들바위라는 것이 다 드러났습니다. 과연 시몬은 다시 베드로가 될 수 있을까요? 흔들바위에서 든든한 반석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그 어떤 제자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 했던 애썼던 사람이었습니다. 칼을 들어 대제사장의 귀를 베어버렸고, 빈 무덤을 향해 달려가도 요한보다 먼저 달려갔고, 그 누구보다 빨리 바다에 뛰어들었고, 누구보다 빨리 잡은 물고기를 가져왔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나다” 이것이 베드로의 자부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과연 지금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어떻게 대답합니까?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다른 제자들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만 고백합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을 했어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만만하던 베드로의 태도가 아주 달라졌습니다. 베드로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믿지 않습니다. 남들과 비교하지도 않습니다. 초점을 자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아신다는 것에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예수님의 양들을 향한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최고의 방법은 주님의 어린 양을 먹이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예수님의 양을 먹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만이 지속적으로 양들을 먹이고 돌보고 섬기는 일들을 헌신하게 만드는 연료입니다.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16,17)”
두 번째 질문에서 예수님은 아무 비교의 대상을 정해 주지 않으시고 그냥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이번에도 베드로는 같은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내 양을 치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세번째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근심합니다. 예수님이 믿지 않으신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 번 물으신 것은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을 세 번 고백으로 지우려 하신 것입니다. 근심 끝에 베드로는 같은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신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아신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베드로의 약함과 허물, 단점과 한계를 모두 다 아신다는 말입니다. 비참한 실패를 통해서 자기 힘과 의지로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된 베드로는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제 사랑은 쉽게 상처 받고 자존심 상해 하고 포기하기 잘하는 보잘 것 없는 사랑이지만 그래도 주님께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다 아십니다. 그것으로 저는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그에게 내 양을 치라고 하십니다. 바로 이 지점이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가 어떻게 사도행전에서도 계속 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을까” 하는 수수께끼가 풀리는 곳입니다. 세상에서 이것은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진작에 베드로는 탄핵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내 양을 먹이라” 당부하심으로 그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후로 베드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시는 흔들리지 않는 말 그대로 반석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고 자기가 했던 말 그대로 죽기까지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그분의 양무리들을 먹이고 돌보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처음 주님이 부르셨던 대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죽어가던 수많은 사람들을 건져 올려 그들의 생명을 살리는 위대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자기 의를 깨뜨리는 싸움을 해왔습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의 본질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 길은 절대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다 이루셨다는 소식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마음으로 깨닫는 것은 참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한다”는 신념 속에 살아가는 그 끈질기고 강한 자기 의, 자기 확신, 자기 신뢰가 다 무너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으로 시작하지만 하나님은 번번이 “네가 할 수 없고 네가 하는 일이 아니다” 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실패와 넘어짐을 겪었는지,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가 중요한 것이 압니다. “주님이 다 아십니다. 주님이 다 이루십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고백을 하게 된 사람이 준비된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은 그래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사건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이런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하나님이 쓰실 만한 사람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사랑만큼 강한 것이 없고 사랑만이 남는 것이라면 우리는 더 깨어지고 부서져야 합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깨어지고 부서진 만큼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때문입니다. 끈질기고 고집스러운 자아가 산산조각이 나야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 어리고 연약한 양을 품에 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이런 과정을 통하여 우리가 자기 의가 깨어지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은혜의 역사의 경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금까지 생명의 복음, 자유의 복음, 진리의 복음인 요한복음을 우리에게 주시고 묵상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