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디모데후서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하라

이창무 2020. 5. 31.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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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봄학기 특강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하라

말씀 / 디모데후서 2:20-22
요절 / 디모데후서 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가 잠시 주춤하는 듯싶더니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방역 당국의 긴장감도 함께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방역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비누로 30초 이상 손을 씻는 것입니다. 깨끗함을 유지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무조건 격리입니다. 일단 격리되면 그 어떤 일에도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 역시 ‘깨끗함’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소원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선한 일에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여기에서 말하는 큰 집은 어디를 말할까요? 보통 큰 집이라고 하면 큰 아버지 집을 생각하기도 하고 콩 밥 먹고 별 달고 나오는 큰 집 곧 교도소를 생각하기도 합니다. 아니면 수많은 방과 커다란 거실이 있는 외국의 대저택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 속에서 큰 집은 하나님의 교회를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각각의 교회를 보면 큰 교회도 있고 작은 교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큰 집인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신자들의 모임으로서 하나의 거룩한 교회를 뜻합니다. 그 집에 있는 다양한 그릇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서 그릇은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 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를 주인과 그릇의 관계로 종종 묘사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 질그릇에 보배를 가진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고후4:7). 또한 로마서에서 구원받은 자들을 가리켜 ‘자비의 그릇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롬9:23). 주님께서 사도 바울을 가리켜서 이방인들과 왕들과 또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내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내가 택한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9:15). 이것을 종합해서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질그릇과 같은 자들이었는데 보배와 같은 예수님을 담아서 나르기 위해 하나님의 집에 들어온 자비의 그릇들입니다.”

그런데 이 큰 집에는 두 종류의 그릇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금 그릇이나 은 그릇처럼 귀하게 쓰이는 그릇입니다. 다른 하나는 나무 그릇이나 질그릇처럼 천하게 쓰이는 그릇입니다. 여기서 ‘귀하다’ 또는 ‘천하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잘못 해석하면 엉뚱한 결론을 내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오덴이라는 신학자는 이 말씀을 설교하는 것은 지뢰 매설 지역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본문의 귀하다 또는 천하다는 말은 구원이나 심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말입니다. 일단 하나님의 큰 집에 들어온 그릇은 귀하게 쓰이든 천하게 쓰이든 누구나 다 구원을 받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 그릇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가, 이것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큰 집에 있는 그릇들 중에 소중하지 않은 그릇은 하나도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값을 치르고 사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을 쓰시는 데는 차이가 있습니다. 귀하게 쓰는 그릇도 있고 천하게 쓰는 그릇도 있습니다. 실제로 보면, 믿는 자들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그릇이 귀한 그릇이고 어떤 그릇이 천한 그릇일까요? 사람들은 보통 그릇의 재료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금이나 은인가? 아니면 나무나 흙인가?’를 따집니다. 세상에서는 이 원리가 사람에게도 그대로 투사되곤 합니다. 타고 난 재능이 뛰어난 사람 아니면 출신 성분이 좋은 사람이 귀하게 쓰임 받습니다. 반면 타고난 재능도 부족하고 출신 성분도 좋지 않으면 천하게 여김을 받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큰 집인 교회에서도 이것과 동일한 원리가 적용되는 것일까요? 귀하게 쓸 그릇과 천하게 쓸 그릇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일까요?

2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이 말씀에 하나님의 집에서 귀히 쓰는 그릇의 정의가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귀히 쓰는 그릇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입니다. 산신령이 나무꾼에게 ‘이 금 도끼가 네 도끼냐? ‘이 은 도끼가 네 도끼냐?’ 라고 물었을 때 나무꾼이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다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금 도끼나 은 도끼는 나무를 베기에 합당한 도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나무꾼에게 귀한 도끼는 단단하고 날 선 쇠도끼였습니다. 금 그릇이나 은 그릇이면 뭐합니까?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어떤 일에 우리를 쓰시고자 하십니까?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선한 일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봉사를 하는 것도 선한 일이고 불의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도 다 선한 일입니다. 그런데 디모데후서에서 사도 바울이 특별히 강조하는 선한 일이 있습니다. 바로 15절에 나온 대로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일’입니다. 이 세상은 거짓 진리가 판을 치는 세상, 헛된 사상이 사람들을 미혹하여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가르치고 전파하는 일은 선한 일 중에 선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일에 자신을 드리고자 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 안에 이 선한 일에 쓰기에 합당한 사람이 있는지, 준비된 그릇이 있는지 찾고 계십니다. 그릇은 엄청 많은데 정작 하나님이 쓰실 만한 그릇이 하나도 없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일에 준비된 일꾼들로 성장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은 어떤 그릇일까요? 일단 재능이 많은 사람이 아닐까요? 또는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요? 남 다른 특별한 은사를 부여 받은 사람이 아닐까요? 그런데 21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오늘 말씀은 귀한 그릇의 조건을 딱 한 가지만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쓰실 만한 그릇을 찾으실 때 다른 것은 보지 않으십니다. 그 그릇이 깨끗한 그릇인가 아닌가를 먼저 보십니다. 예전에 제가 비싼 텀블러 하나를 선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텀블러가 대중화되기 전이어서 들고 다니기만 해도 뉴요커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간지가 났습니다. 그런데 커피를 마신 후 제대로 씻지 않고 방치해 두었더니 곰팡이가 나버렸습니다. 곰팡이를 보니 정이 뚝 떨어졌습니다. 한 동안 그 안에 도저히 커피를 담아 마실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진 그릇이라고 다 쓰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설거지가 안 되어서 더러운 상태로 있으면 주인이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사람을 더럽게 합니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 25, 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이 말씀을 볼 때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마음 속에 있는 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는 마치 더러운 오물과 같습니다. 죄가 묻었는데 방치해 두면 텀블러에 곰팡이가 피듯 우리 마음에도 곰팡이가 필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외모가 멋있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자기를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쓰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깨끗해질 수 있습니까? 요한1서 1장 9절은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는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에게 나아가 내게 붙어있는 더러운 죄들을 자백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결코 ‘이 더러운 그릇’ 하시며 버리지 않으십니다. 신실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마치 설거지하듯 우리를 깨끗한 그릇으로 만드십니다. 재료가 나무나 흙이면 어떻습니까? 깨끗하게 닦아 둔 그릇은 얼마든지 금 그릇, 은 그릇처럼 귀하게 쓰일 수 있습니다. 좀 부족한 점이 있어도 예수님의 피로 정결하게 된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선한 일을 위해 준비된 귀한 그릇으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면 한 번 깨끗하게 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그 깨끗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다시 더러워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우리가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2절을 보십시오.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첫째로 청년의 정욕을 피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특별히 청년의 정욕을 언급한 것은 이 편지의 수신자인 디모데가 청년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던 n번방 사건의 주범들이 잡혔습니다. 대부분 이십 대이고 심지어는 십 대들도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정욕이 얼마나 청년들을 망가뜨리고 그 내면을 추하게 만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시대는 정욕을 아름다운 사랑으로 미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쉽게 유혹을 받고 정욕의 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죄의 유혹은 달콤하지만 그 열매는 너무나 씁니다. 삼손을 보십시오. 그는 나귀 턱뼈 하나로 천명을 죽일 정도로 장사였습니다. 하지만 미스 블레셋 출신 들릴라 자매의 유혹을 피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럴 때 머리카락이 잘리고 힘을 다 잃어 두 눈이 뽑히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해오자 그 자리를 즉시 피했습니다. 정욕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청년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얼마 전 부산 시장이 성추행 사실을 인정하고 사퇴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이전 충남 지사도 비서를 성폭행하여 역시 사퇴하고 사법 처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정욕을 제어하지 못하고 무너지면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적극적으로 정욕의 죄와 싸워 반드시 이겨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사람들과 함께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22b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이란 누구를 가리킬까요? 바로 앞 절에 나왔던 자기를 깨끗하게 하여 귀히 쓰는 그릇이 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또는 그런 깨끗한 그릇이 되고자 하는 소원을 품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왜 필요합니까? 우리가 자기를 깨끗하게 하기를 원하지만 이것이 혼자 힘으로 하기에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청년의 정욕을 피하려고 해도 주변에서 다 정욕을 따르고 있으면 ‘어어’ 하다가 나도 휩쓸리기 쉽습니다. 내 옆의 깨끗한 그릇이 있어야 더러운 줄 알고 빨리 회개할 수 있습니다. 내가 유혹에 넘어지려 할 때 동역자들이 있어야 흔들리는 나를 붙들어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니엘 서에서 다니엘만 기억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만약 다니엘만 혼자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리 천하의 다니엘이라도 흔들리다가 결국 우상 숭배자들과 타협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 옆에는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할 때 다니엘은 어려운 고난을 이기고 자신의 결단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요회나 팀 모임을 하기는 하지만 식사 교제도 못하고 너무 아쉬운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동역자들과 몸은 거리 두기를 할지라도 마음으로는 함께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해 주고 응원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는 공동체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다 함께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되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모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어제 우리는 이곳으로 이사 온지 처음으로 센터 대 청소를 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물건들이 버려졌고 구석구석 평소 손이 닿지 않던 곳까지 청소를 했습니다. 여러 동역자 분들이 함께 해 주셔서 이처럼 청결하고 아름다운 센터 환경이 만들어지게 되어 감사합니다. 몇몇 앞으로 관리를 잘 해서 이 모습을 잘 유지해 가면 좋겠다는 말씀을 이구동성으로 하셨습니다. 그런데 센터 대 청소 못지않게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 우리 마음의 대 청소입니다. 우리 마음도 청소하지 않으면 점점 더 더럽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하나님이 더 이상 쓰실 수 없는 천한 그릇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을 예수님의 복음으로 씻고 쓸고 닦아내면 하나님의 집에 깨끗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한 일에 금 그릇, 은 그릇으로 귀하게 써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정욕을 피하고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는 가운데 영육 간에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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