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성경신학

율법의 목적, 유대인의 오류, 오늘을 위한 교훈

이창무 2015. 5. 1.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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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목적, 유대인의 오류, 오늘을 위한 교훈



다음은 제가 사도 바울의 서신서 특히 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율법의 본래 목적과 이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류, 현재 적용점을 고찰해 본 내용입니다.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함께 고민해 보았으면 하는 취지에서 공유합니다.





율법의 목적 




율법은 사람들을 정죄하고 형벌을 내린다. 


율법이 가지고 있는 첫번째 목적은 사람들을 정죄하고 형벌을 내리기 위해서이다. 율법이란 완벽한 의의 표준을 제시한다. 즉 무엇이 옳은 것인가?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율법이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 다음에는 그 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 따르게 되는 형벌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것은 단지 율법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대부분의 법들 또한 이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법률에 어떤 지켜야 할 규정이 있다면 그 후에 이어서 그 규정을 범했을 때 그 사람에게 가해지는 처벌 규정이 뒤따르게 되어 있다. 이는 법이 가지고 있는 어두운 부분이면서 동시에 필연적인 결과이다. 법은 이와 같은 형벌 규정이 없이는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어길 경우 정죄와 형벌이 전혀 없는 법이라는 아무도 그 법을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또한 율법이 정죄와 형벌을 정의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율법은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을 가능성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만약 모든 사람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세상이라면 율법에 따르는 형벌 조항은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형벌 조항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이 그 율법을 어길 수도 있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다. 즉 율법은 제정하는 순간부터 율법의 적용 대상이 되는 모든 인간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본다고 말해도 큰 무리가 없는 것이다. 만약 어떤 인간이 지금까지 특정 율법을 어기지 않고 잘 지켜 왔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앞으로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것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어제까지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라고 주위에서 인정 받던 사람도 오늘 흉악한 범죄자가 될 수도 있다. 인간은 율법 앞에서는 이미 율법을 어긴 범죄자이든 앞으로 율법을 어길 수 있는 잠재적 범죄자로 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는 역할을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율법은 외면과 내면을 규제한다. 


법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헌법과 민법, 형법 등등의 법 체계가 존재한다. 이런 법들은 모두 실정법에 해당한다. 이는 우리가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데 필요한 법들로서 사회법, 시민법 등이 포함된다. 그런데 이 실정법의 특징은 외적으로 드러난 행위만을 규제하고 감독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한다고 해서 그 미운 마음을 품은 사람을 처벌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실제적으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사정들이 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과 감정을 알 길이 없다.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속담이 이를 잘 대변해 준다. 그러므로 설령 마음 속에 품은 생각에 대한 법을 세워 놓는다 할지라도 이를 실제적으로 적용할 길이 막막하다. 또한 마음 속에 일어나는 일들을 객관적으로 검증하거나 측량할 수단도 없다. 현실적으로 더 큰 이유는 이렇게 마음 속에 있는 일들까지 일일이 규제하고 처벌한다면 모든 사람이 범죄자가 되어 사실상 법을 강제적 물리적으로 집행하기 불가능하게 될 것이기도 하다. 모두가 범법자라면 그 법은 사회적으로는 실효적인 처벌을 가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율법은 이 점에서는 실정법과는 다르다. 실정법은 인간에 의해 세워지고 인간에 의해 집행되는 법인 반면에 율법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지고 하나님에 의해 집행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달리 각 사람의 내면을 감찰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인간들의 마음 속에서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현재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속속들이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경험을 본다 할지라도 내가 어떤 범법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고 해서 범법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운전 법규를 어기지 않고 잘 지키던 사람도 만약 주변에 감시 카메라도 없고 경찰관도 보이지 않고 사고의 위험성이 전혀 없다면 아마도 쉽게 법규를 위반하게 될 것이다. 사실 그 사람의 마음 속에는 늘 법규를 어겨서라도 남들보다 더 빨리 가고 더 쉽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법을 어겼을 경우 오게 될 처벌이나 체면 상실이 두려워서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을 뿐이지 마음 속에는 늘 범법의 욕구를 가지고 있던 것이다. 이런 경우에 과연 실제로 법규를 어긴 사람과 다만 마음 속에 가지고 있던 사람의 차이가 얼마나 크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물론 마음 속에 품기만 했던 사람과 이를 더 나아가 실행에 옮긴 사람의 범법함의 질이 차이가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품기만 한 사람보다는 실행에 옮기기까지 한 사람의 죄질이 더욱 나쁘고 더 큰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고 해서 법을 완전히 지켰다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양심에 의한 가책이 전혀 없이 말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십계명의 마지막 열 번째 계명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율법의 이러한 속성 즉 외면적인 것 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것까지 규제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계명이다. 탐심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실정법으로는 탐심 자체를 처벌할 수 없다. 그러나 율법은 마음 속에서만 일어나는 탐심의 문제도 정죄의 대상이 된다. 탐심에 대한 계명을 가장 마지막에 둔 것은 나름대로 큰 의의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앞에 있는 계명들 즉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거짓 증거하지 마라 등등의 계명들이 그 원인과 동기를 파고 들어가면 탐심에서부터 비롯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외적인 행위들을 아무리 흠이 없이 지킨다 할지라도 마지막 계명인 이 계명을 아무 문제 없이 지나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형제를 보고 바보라고 부르는 사람은 살인한 사람이며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도 간음한 자라고 하시므로 율법이 외면 뿐 아니라 내면의 영역 즉 마음과 동기까지 포함해서 그 영역에 두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셨다. 





율법은 교육적 기능이 있다. 


모든 법에는 그 법의 배후에 있는 법 정신이 있다. 법 정신은 상위 법으로 갈수록 명시적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우리 나라의 헌법에 보면 우리 나라 법 체계를 지탱해 주는 원리적인 원칙과 사상들이 표현되어 있다. 그 아래에 있는 법들은 이 원칙과 사상을 벗어나지 않아야 하며 이를 잘 반영하도록 구체적인 규정과 지침들을 내려주어야 한다. 만약 하위법에서 헌법에 나타난 정신과 위배되는 규정이나 법을 두고 있다면 우리 나라 헌법 재판소는 그 법을 판단하여 헌법 불합치 혹은 위헌 판결을 내릴 수 있다. 그렇게 보면 그 법률은 그 판결이 내려지는 그 시점으로부터 법으로서 효력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세부 규칙이라 하더라도 그 규칙을 자세히 연구하고 근원을 따져 보면 법 정신 혹은 법 철학에 이를 수 있다. 


율법도 마찬가지이다. 율법의 규정 하나 하나는 그냥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지만 그 율법 규정 속에는 율법을 제정한 이의 정신이 담겨져 있다. 다른 인간의 법들은 국회라는 곳에서 국회 의원들의 손에 의해서 혹은 행정부 관료들에 의해서 발의되기 때문에 어떤 정당이나 대통령의 정강 정책들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율법은 제정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제정 취지가 반영되어 있다. 하나님의 법 제정 취지를 알게 되면 그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율법은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교과서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혹은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해 주는 거울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율법의 수많은 규정들 중에서 희년에 관한 규정을 보고 매우 놀란 적이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희년에 대한 규정은 납득하기 어려운 규정이었다. 개인의 사유재산에 대한 보장을 절대시하는 사회 속에 살면서 일종의 무조건적인 채무 탕감을 규정한 이 율법은 매우 낯설게 느껴졌었다. 그리고 희년에 대한 규례가 제정된 이유와 배경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절망의 나락까지 떨어지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사람에게 재기의 희망을 주시고 자신의 인생에서 삶의 보람과 의미와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율법을 연구하다 보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라는 속성을 풍부하게 배우고 느낄 수 있다. 희년법과 같이 비교적 분명하게 그 의의가 드러나는 법이 아니라 할지라도 어찌 보면 매우 작아 보이는 율법이라 할지라도 자세히 궁구해 보고 당시 역사적 문화적 배경과 아울러 전후 문맥 상의 의미를 살펴 보면 의외로 깊이 있는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지식을 전달해 주는 교육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교육적 기능은 모세의 율법에서만 처음 나타난 것이 아니다. 이미 창세기 3장에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실 때부터 나타내신 뜻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왜 에덴 동산에 있었느냐고 따진다. 그것만 없었으면 죄를 지을 일도 없지 않았겠느냐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이 가진 교육적 기능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통해 더 높은 수준의 의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에덴 동산에 존재하고 있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신 뜻을 잘 묵상하고 소화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증진시키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면 아담은 영생에 이를 수 있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통해 영생하도록 하는 나무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율법은 인간에게 죄가 있는 상태이든 죄 문제가 해결된 상태이든 관계 없이 어느 때에든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오히려 더하게 한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양심이 있다. 율법을 전혀 모른다고 해도 양심은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에게는 양심이 율법의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양심은 율법과 유사한 기능을 하지만 율법에 비해 부족한 부분이 있다. 양심은 사람마다 그 작용하는 정도가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매우 양심이 예민한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작은 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여 죄를 자각하고 죄책감을 느낀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양심이 무딘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큰 죄를 짓고도 아무 가책이 없이 마음이 편한 사람이다. 이렇게 양심은 개인적 편차가 크기 때문에 객관적 지표로 삼기에 무리가 있다. 또한 양심은 문화적 지역적 특수성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다. 동일한 사안에 대해서라도 어떤 문화에서는 수용하는 반면 어떤 문화에서는 수용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수용되는 문화 속에 거하는 사람들은 그 행위에 대해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비근한 예로 군대를 예를 들 수 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과거에는 군대에서 구타가 빈번하게 행해졌다. 군대 밖에서는 당연히 구타가 있다면 이를 폭력 행위에 의한 법률에 의해 다스려진다. 또 법에 저촉되기에 앞서 폭력을 행사하면 주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자기 자신의 분노나 화를 절제하지 못했음으로 인해 가책을 받고 후회를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군대 안에서는 구타를 해 놓고서도 아무런 비난을 받지 않을 뿐더러 스스로도 자책을 받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렇게 죄에 대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지표가 없을 경우 인간은 양심만으로는 죄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우리에게 주셨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무엇이 죄인지에 대해 가장 정확하고 가장 객관적으로 가장 심오하게 기술된 체계이다. 그래서 율법책을 읽고 묵상한 사람은 이전까지 자신에 대해 의롭다고 여기다가도 죄인으로서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 율법을 통해 마비되었던 양심이 깨어난다. 이전까지 죄를 범하면서도 죄인지 모르고 있던 것들을 깨닫게 된다. 이런 일들은 도덕적인 죄 뿐만 아니라 영적인 죄에 있어서 더욱 현저하게 일어난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아니하고 감사치도 않았던 죄들에 대해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율법의 작용에 대해서 존 번연이 쓴 천로 역정에는 아주 재미 있는 비유로 표현되어 있다. 주인공이 어느 방에 들어갔더니 그 방이 참 좋은 방으로 보였다. 그러나 조금 있다가 어떤 사람이 방에 들어와서 빗자루로 방을 쓸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그 방 바닥에 엄청나게 많은 먼지들이 쌓여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너무 많은 먼지들이 일어나서 주인공은 기침을 하면 괴로워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빗자루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율법이라고 천로 역정은 소개하고 있다. 즉 율법이 임하기 전에는 아무 문제 없어 보이던 사람도 율법을 접하게 되면 자신이 큰 문제에 봉착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율법이 없던 먼지를 만든 것은 아니다. 다만 이미 있던 먼지들을 더 잘 보이게 만든 것이다. 율법이 없던 죄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지은 죄를 더 잘 깨닫도록 해 준 것이다. 


그러나 율법이 단지 죄를 깨닫는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율법은 한 걸음 더 나아서 죄를 더 범하도록 부추기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말은 얼핏 들으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말을 떠올려 이해하기 쉽다. ‘훔친 사과가 더 맛이 있다.’ 훔친 사과이든지 돈을 주고 산 사과이든지 사과 자체가 무슨 큰 차이가 있지는 않다. 그러나 훔친 사과가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은 훔친 사과는 금지된 사과였기 때문이다. 금지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금지된 것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탐심을 자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죄를 더 범하도록 부추긴다는 말은 율법 자체가 죄를 적극적으로 조장하거나 긍정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사실 죄를 범하는 것은 율법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부패한 본성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은 부패한 인간의 본성이 죄를 더 범하도록 부추기고 자극하는 방향으로 실제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인간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하고 악하다. 이전까지 아무 욕망이 일어나지 않던 대상이라 하지라도 금지를 선언하고 나면 그 때부터 그 금지된 것을 향한 욕망이 불일 듯 일어나곤 한다. 이와는 조금 다른 경우이기는 하지만 인간 사회에서는 법을 이용해서 오히려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많이 있다. 법의 맹점이나 법의 헛점을 이용했다는 말로 이와 같은 경우를 두고 표현하기도 한다. 기업에서 마땅히 내야 할 세금을 법에 있는 약한 고리를 이용해서 내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를 많이 목격한 적이 있다. 신약에서 보면 고르반이라는 규례를 악용해서 부모를 공양하지 않으려고 했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죄를 고발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도 이러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율법은 그리스도께 인도할 때까지 한시적이다. 


율법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 보면 항상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분명히 율법은 역사적 시작이 있었다. 그렇다면 율법은 끝도 있을 수 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면서 부여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이전 역사는 당연히 율법이 존재하지 않던 시기가 된다. 그 시기에도 아담,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등 중요한 인물들이 율법 없이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율법이란 하나님 신앙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핵심 요소는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만약 율법이 없이 하나님 신앙이 불가능하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도 율법을 주셨어야만 했다. 그러나 율법이 온 것은 그 이후로 거의 오백년이나 지난 후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핵심이 아니라 핵심에서 더하여진 것이다. 


그렇다면 핵심은 무엇인가?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 율법의 역할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에 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율법은 마치 몽학 선생과 같다는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개역 개정에는 몽학 선생을 초등 교사라고 번역하였다. 초등 교사라는 말은 초등학교 선생님을 말하는 것이다. 아니다. 사도 바울 당시 문화적 배경 속에서는 귀족의 자제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곁에서 훈육하던 가정 교사를 말하는 것이다. 아이가 어릴 때는 그 아이의 이해력이 아직 발달하지 못했으므로 이건 하라 저건 하지 마라는 식으로 간섭하고 교육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아이가 성장하여 스스로의 지각과 판단력으로 도덕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시기가 되면 가정 교사는 퇴장을 해야 한다. 만약 그만한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퇴장을 거부하고 계속 아이를 붙잡고 있다면 그 아이는 성숙에서 실패나 지체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율법도 그리스도가 오시기 까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 주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사전 지식을 형성하도록 돕는 보조자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데 만약 율법이 그리스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그리스도께 내어드리지 않고 계속 곁에 붙어 있다면 치명적인 월권 행위를 하는 셈이 된다. 





유대인의 오류 





율법은 구원의 수단으로 생명을 준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주셨다고 믿었다. 이는 그들이 율법이 생명을 주기 위한 수단으로 작정된 것이 아니라 정죄와 심판을 주기 위해 작정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계명을 주셨다면 인간에게는 그 계명이 지킬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만약 인간이 계명을 지킬 능력이 없다면 계명도 주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모든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는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렇게 의로운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상급으로 주실 것을 기대하였다. 물론 이들의 생각이 다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인간이 만약 모든 율법의 계명을 흠이 없이 지킨다면 그는 그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이는 율법 자체가 우리에게 그렇게 약속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히 진리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착각에 빠진 것은 그렇게 율법을 흠이 없이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었다. 율법은 선하고 의롭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율법을 선하고 의롭고 아름답게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없는 것이다. 애초부터 율법은 인간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질 때부터 생명을 주기 위한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율법은 인간에게 율법을 지킬 능력까지 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법을 안다고 해서 그 법을 자동적으로 지키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만약 법 자체에 그런 힘과 능력이 있다면 이 사회는 아무도 법을 어기는 사람이 없는 평화롭고 질서 있는 사회가 벌써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평소에 우리는 법에 대해 관심이 없이 살아나간다. 그러나 법이 정말 우리 가까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때가 있다. 바로 법을 어겨서 처벌을 받게 될 때이다. 그때서야 우리는 법이 살아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율법도 마찬가지이다. 율법이 율법으로 우리에게 작용할 때는 율법을 어김으로 해서 정죄와 심판이 임하게 될 때이다. 율법이 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 지키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함이 있을 때 지킬 힘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마음의 소원이 일어날 때 율법을 지켜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고자 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율법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을 불러 일으키지는 못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핵심 정신과 본질을 잃어 버린 채 출구 없는 감옥에 갇혀 버리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된 것이다. 





율법은 외면만을 규제한다?


율법을 외적으로 잘 지키면 율법을 만족시키는 것이라는 착각에 유대인들은 빠져 있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기를 겪은 이후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반성해 보았다. 결국 그들은 그 결론으로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징계하셨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에 대한 열심이 생겨났다. 심지어는 함께 살아 온 아내까지 쫓아 보내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그 이후 이 율법에 대한 열심이 이상한 방향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즉 율법을 법조문 지키듯이 외적으로 잘 지키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는 사상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를 가리켜 형성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문제는 율법이 제시하는 방향은 단순하지만 구체적인 상황은 항상 복잡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랍비들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율법을 어떻게 지키는 것이 바르게 지키는 것이냐에 대하여 연구하고 토론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쌓여지고 모아 놓은 것들이 예수님이 언급하셨던 장로들의 유전이 되었다. 특히 안식일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규정들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많은 유전들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매우 진지하고 심각한 문제였던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외적으로 드러나는 율법 준수에 집착하면 할수록 본질과 정신에서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율법의 외면적 행위는 잘 지키지만 사실 상 그들의 내면 속에는 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전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부르셨다. 겉만 번지르르 하지만 속에는 아무 것도 없는 회칠한 무덤과 같은 자들이라고 그들을 일갈하셨다. 


외면적인 율법 준수에 집착하면서 유대인들은 결과적으로 장로들의 유전까지 다 지킬 수 있는 특권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으로 양분되게 되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중산 계급 이었기 때문에 유전들을 준수 가능했다. 그러나 많은 농민들을 비롯해 하층 계급 사람들은 장로들의 유전까지 다 지킬 수 없었다. 결국 이렇게 이원화된 유대 사회는 율법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 말미암아 사회까지도 분열되고 갈등과 반목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율법의 외면을 중시하게 되면 더불어서 외적 표지의 유무가 구원 문제에 있어서 핵심 쟁점이 된다. 아마도 사도 바울 당시에 구원 문제에 있어서 외적 표지의 대표가 되는 것이 할례였을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교회를 세운 곳마다 골치를 썩어야 했던 부분이 바로 할례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던 유대주의자들의 문제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외적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율법의 행위로 의로움에 이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로움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의로움에 이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앞에서 율법이 생명을 주지 못한다는 부분에서 언급을 하였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문제는 바로 공로주의의 문제이다. 인간이 율법의 행위로 의로움에 이를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 인간의 공로를 인정하신다는 말이 된다. 의로운 행위는 하나님께 인정 받을 수 있는 공적이 된다. 이를 잘 쌓고 쌓으면 구원의 단계에 까지 올라가게 된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되면 이 공로의 사다리 위에 여러 단계들이 존재하게 된다. 위쪽의 사다리까지 올라 간 사람이 존재하고 아직 바닥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위쪽의 사다리에 있는 사람은 아래를 내려다 보면서 아직까지 너희들은 거기에까지 못 올라 왔느냐 하면서 우월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반면 아래 사다리에 있는 사람들은 절망감과 좌절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의 공로주의가 낳게 되는 필연적인 문제는 바로 아무리 그들이 외적으로 거룩하고 깨끗하고 도덕적으로 흠이 없이 살게 된다 하더라도 결정적으로 겸손이라는 열매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의로운 행위를 많이 하면 할수록 인간 본성의 교만이 더욱 더 강화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교만이 굳어지면 굳어질수록 하나님과는 멀어지고 하나님의 대적자로 남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교만한 자의 특징은 또한 사랑과 긍휼이 없다는 것이다. 교만한 자의 특징은 멸시와 차별이다. 교만으로 인해 그들은 자신들이 심령이 먼저 메마르게 되며 타인과의 관계성을 맺지 못하며 공동체를 이루는데 있어서도 실패하게 된다. 물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을 맺는 일에 있어서 가망 없이 실패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생겨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없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 없이는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지키려고 하니 얼마나 고역이 되었겠는가? 정말 불쌍하고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율법은 영원하다? 


유대인들의 또 한기 오류는 율법을 최종적인 수단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율법은 아직 최종적인 것이 오기 전에 예비 단계로 주신 것인데 유대인들은 그 점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율법이 최종적인 것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율법이 포함되어 있는 구약 성경 자체가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율법이 최종적이라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이후로 계시는 종료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모세 이후 다윗 언약이 등장한다. 다윗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 가운데 구원자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또한 예레미야나 에스겔서와 같은 선지자들의 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새 언약은 이전 언약과 달리 마음에 새겨질 언약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분명히 율법과 대비되는 것임을 천명하셨다. 율법이 최종적인 목표라면 다윗 언약이나 새 언약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불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을 이루도록 계시를 점진적으로 이스라엘 역사에 가운데 나타내 보이셨다. 따라서 율법은 그 전체 계시 중에서 조명되어야만 자기의 위치를 정확하게 자리 매김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을 최종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율법에 원래 부여되어 있었던 역할과 기능 이상을 율법에 기대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오류가 결국 최종적인 계시의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그 분을 알아 보지 못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 중에 하나가 된 것이었다. 마치 물고기들에게 눈 앞에 먹이를 보여주면 그 뒤에 있는 어부가 보이지 않듯이 눈 앞에 있는 율법에 눈이 가려 그 율법을 친히 만드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율법이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할 때 그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아직도 계시의 초보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나이는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날마다 초등학교 구구단을 다시 배우고 있는 셈이다. 


그들의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한 나머지 그들은 초기 기독교 전파 역사에서 핍박자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최종 계시를 거부할 뿐 아니라 그 계시가 이방인에게 전파되는 것을 방해하는 훼방자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사도 바울이 과거 자신을 묘사할 때 핍박자요 훼방자였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을 두고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일생일대의 큰 전환을 겪게 된다. 예수가 부활한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이 예수의 정당성을 인정하신 셈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인이 아닌 자를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큰 깨달음 가운데 바울은 지금까지 자기가 이해해 왔던 율법의 목적과 기능에 대해서 다시 바라보게 된다. 그리스도가 옳았다 라는 관점으로 다시 율법을 보게 되자 율법의 본래 모습이 그에게 밝히 드러나게 되었다. 동시에 유대인들의 오류에 대해서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바로 그 오류로 점철된 유대인들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왜 교회 내 유대주의자들에 대해서 그렇게 강경한 어조로 반대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배격하도록 권면했는가에 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을 위한 교훈 





율법을 열심히 배워야 한다 


이제까지 율법에 집착했던 유대인들의 오류에 대해서 논하고 나서 율법을 배워야 한다니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이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율법에는 분명히 반드시 필요한 고유의 기능과 목적이 있다. 우리에게 이미 최종적인 계시의 절정이 그리스도가 계시다 할지라도 율법이 가진 고유의 자리가 결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고유의 목적에 맞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을 더욱 열심히 잘 배워야 한다. 그 방향은 크게 세 가지가 될 것이다. 


첫째는 전도의 수단으로 율법을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해 준다고 하였다. 죄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느낄 리가 없다. 예수의 필요성을 절실히 알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를 수 있는가? 그러므로 전도할 때 율법이 필요하다. 복음을 제시하기에 앞서 먼저 율법을 전해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이 죄를 깨닫고 구주의 은혜와 도우심을 갈망하게 된다. 만약 이런 과정이 없이 곧바로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게 되면 그 은혜는 값싼 은혜로 전락하게 되기 쉽다. 첫 단추부터 이렇게 잘못 채워졌을 때 그렇게 태어난 신자는 곧 무율법주의자가 되어서 삶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전도를 위해서 율법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둘째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 율법을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앞에서 율법에는 교육적인 기능이 있다고 하였다. 이 기능은 신약의 교회라고 해서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신약 시대에는 구약에서 언급된 많은 의식법, 정결법이 효력을 그쳤다. 그러나 효력을 그쳤다고 해서 그 율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제정 의도와 취지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 의도와 취지 속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인자하시고 아름다우신 성품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단, 의식법이나 정결법 뿐만 아니다. 도덕법이나 사회법이나 시민법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만나게 된다. 율법의 의미를 설교자가 혹은 성경 공부 인도자가 깊이 있게 전달해 준다면 성도들은 전혀 기대하지 않던 곳에 큰 영적 유익을 얻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셋째는 신자의 총체적인 삶에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기 위해 율법을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복음은 우리를 의에 이르게 하고 구원과 생명을 얻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가족의 일원으로서, 사회인으로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 다양하고 복잡 다단한 삶 속에서 단순한 복음 선포만으로는 신자다운 삶의 전포괄적인 비전을 발견해 내기 쉽지 않다. 이때 율법을 공부함으로써 우리는 율법이 포괄하고 있는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낼 것인가? 즉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는 일에 동참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발견하고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경건의 표지에만 집중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 땅에서 신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주일 성수하고 술담배 안 하면 기독교 신자인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렇게 주일 예배 꼬박 꼬박 드리고 술담배 안하고 살면 신실한 기독교인이라고 인정해 줄 것이다. 세상 사람들 뿐 아니라 같은 신자들 사이에서도 이 정도면 인정할만 하다고 해 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경건의 외적 표지일 뿐이다. 만약 기독교가 이것이 전부라면 이것은 지극히 축소된 우스꽝스러운 기독교가 될 것이다. 주일에 꼬박 꼬박 예배를 잘 드리지만 막상 예배에 참석해서는 다른 잡다한 세상 일로 머리 속이 온통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이 예배를 드렸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술담배는 입에 대지도 않는 사람이지만 날마다 회사에서 부하직원들의 인격을 무시하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이고 인격이 비뚤어진 상사가 기독교인이라면 그가 바르게 신앙 생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런 외적 표지에만 집중하게 되면 유대인들이 빠졌던 것과 동일한 오류, 형식주의, 외식, 위선에 얼마든지 다시 빠져들 수 있다. 행위 속에 실질적인 내용이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주일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은 삶에서도 산 제사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다. 술담배에 절제하려는 사람은 분노와 탐욕에서도 절제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외적 표지에 집착하기보다는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가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참된 경건에 이르기를 힘써야 한다. 





신앙 생활의 공로주의를 배격해야 한다 


오늘날에는 유대인들처럼 율법 준수를 공로로 삼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를 대신하여 차지한 것이 있으니 바로 열심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교회 일을 열심히 했느냐에 따라 공로로 삼는 일이 있다. 즉 얼마나 전도를 많이 했느냐,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느냐 얼마나 성경을 많이 읽었느냐 얼마나 각종 모임이나 프로그램에 빠지지 않고 잘 참석을 했느냐에 공로가 많은 신자와 그렇지 못한 신자로 나누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전도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모이기에 힘써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나의 공로로 삼는 순간 나에게서 하나님의 인정은 떠나가고 내 속에는 교만한 자아가 더욱 강화되어 가면서 괴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대하기 불편하고 관계 맺기가 힘든 사람이 바로 교회일에 열심은 있는데 자기 의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교회 일에 열심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 없이 일이 되지는 않지만 결코 가까이 하고 싶지는 않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내 자신에게서 그와 똑 같은 모습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게 될 때가 종종 있다. 나 자신 역시 나보다 못해 보이는 신자와 어느 새 비교하면서 우월감에 젖어 그것을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그렇게 보면 자아를 부풀리면서 자기 의와 자기 공로를 쌓아 이를 드러내고 과시하고 싶은 교만의 욕망은 유대인들이나 현대인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방편들을 굳게 의지하면서 이런 교만과 싸우면서 자아를 죽이지 않으면 우리는 금방 다시 부패해져 옛생활의 습관들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종 율법주의인 열심으로 상급 쌓자는 생각들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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