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스라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이창무 2017. 1. 14.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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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신년말씀 2강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말씀: 에스라 3-4장

요절: 에스라 4:3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서정윤 시인의 ‘홀로서기’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숱한 불면의 밤을 새우며 <홀로 서기>를 익혀야 한다.” 오늘 말씀에서 성전 재건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홀로서기를 시도합니다. 그들도 분명 실리와 믿음 사이에서 고민하며 숱한 불면의 밤을 새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건물만이 아니라 마음속에 세워질 거룩한 성전을 꿈꾸며 홀로서기를 결단했습니다. 우리도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희망으로 새롭게 일어서는 공동체,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는 예배 공동체의 꿈을 가슴 속에 품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장 1절을 보십시오. 각자의 성읍에 흩어져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왜 하필 일곱째 달이었을까요? 유대력으로 7월은 초막절이 있는 달이었기 때문입니다. 초막절은 조상들이 광야 생활했던 것을 기억하고 그 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를 위해 일주일 동안 온 백성들이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제사장 예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을 비롯하여 온 백성들이 모였습니다. 본문에서 '일제히'라는 말은 원어로 보면 '한 사람처럼'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마치 한 사람이 된 것처럼 몸과 마음을 같이 하여 예루살렘에 집결했습니다.   그러자 주변국에서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저 사람들이 무슨 단체행동을 벌이려는 거지? 수상해." 백성들은 저들에게서 어떤 견제와 태클이 들어올지 몰라 두려움에 빠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본래 성전이 있던 터에 단을 쌓고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율법에 기록된 규례대로 매일 정한 수만큼의 번제를 드렸습니다. 5절 하반절에 보면 백성들이 여호와께 즐거이 예물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백성들은 다 함께 모여서 초막절을 지키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 그 자체가 백성들에겐 큰 기쁨이고 감격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난 수십 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는 동안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바벨론 사람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무시를 당하며 학대와 착취를 당하는 것이 무척이나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마음껏 자유롭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사를 드리고 싶어도 번제를 드릴 제단이 없었습니다. 매년마다 7월이 돌아왔지만 강제 노역을 하느라 초막절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예배를 드리고 자유롭게 절기를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그래서 백성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모여서 즐거이 헌신하고 기쁨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고 있습니까? 별로 크게 감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예배를 소홀히 여길 때도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늦게 오기도 하고 예배에 집중하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보내기도 합니다. 내내 졸다가 성경을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김기드온 목자님은 군에 입대하여 훈련소에서 드렸던 첫 예배를 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배가 시작되자 속에서 무엇인지 모르는 뭉클한 것이 올라오고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고 했습니다. 군에 갔다 온 많은 형제 목자님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저는 자대 배치를 받고 나서 첫 예배에 너무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고참들이 무서워서 차마 교회에 가고 싶다는 말을 못 꺼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옆 내무반에서 제대를 며칠 앞 둔 병장 한 사람이 들어오더니 이렇게 외쳤습니다. "누구 나랑 같이 교회 갈 사람? 어이 거기 신병! 나랑 같이 예배 가자" 다짜고짜 내 손을 이끌고 예배에 데려갔습니다. 저는 속으로 이름도 모르는 이 병장님은 제가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주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찬양 시간에 '아침 안개 눈 앞 가리듯'이라는 찬양을 부르는데 저는 눈물이 눈앞을 가려서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로 전역할 때까지 수요예배, 주일 오전 예배, 주일 저녁 예배를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북한에는 지하 교회가 있습니다. 은밀하게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만약에 찬송가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면 잡혀서 수용소로 끌려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리를 내지 않고 입모양만으로 찬송가를 부른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간절한 소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죽기 전에 찬송가 한 번 속 시원하게 불러보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원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풍요함과 자유에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감격이 없이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왜 인간은 꼭 예배를 잃어봐야 예배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일까요? 풍성하고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을 때 더욱 감사하고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마음껏 누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이 회복되려면 먼저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배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번 겨울 방학에 예배 학교가 개설된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주님을 예배함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주님을 예배함이 우리의 힘입니다. 주님을 예배함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예배의 감격을 다시 회복하고 감사와 경외심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지 거의 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때부터 드디어 성전 건축을 위한 구체적인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레위인들을 세워서 여호와의 전 역사를 감독하도록 했습니다. 황폐한 성전 터에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부터 뽑았습니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돌들을 골라내었습니다. 부지를 고르고 평탄 작업을 했습니다. 성전 기둥이 올라갈 주춧돌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이제 막 성전 기초가 준비되자 성전 기공식 행사가 열렸습니다. 제사장들이 화려한 예복을 입고 나와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빰빠밤 빰빰빰 빰바밤"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어쿠스틱 기타, 베이스 기타, 키보드, 드럼 등 각종 악기를 들고 나와서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찬송 내용이 무엇입니까? 11절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찬양팀의 싱어들은 두 파트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한 편에서 "주는 지극히 선하십니다."하자 다른 편에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십니다."라고 화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온 백성들도 큰 소리로 즐거이 따라 부르며 여호와를 찬송하였습니다. "주는 지극히 선하십니다.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십니다." 어떤 점에서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신 분이십니까? 이스라엘은 악하고 목이 곧은 백성이었습니다. 살아계신 참 하나님을 저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과 같은 죽은 거짓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의 경고와 책망을 듣고도 말씀을 듣지 않고 불순종했습니다. 이런 백성들은 진작 심판을 받아 끊어져야 마땅했습니다. 한 이삼백년 동안 계속 포로생활을 한다고 해도 아무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겨우 백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자기 백성을 다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허물어졌던 제단이 복구되었습니다. 가끔 지나가는 짐승 소리만 들리던 예루살렘 거리가 초막절을 지키는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습니다. 잡초만 무성하던 성전 터에 새 성전의 기초가 놓였습니다. 이렇게 다시 한 번 회복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생각할 때 백성들은 감격에 겨워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쁘고 감격스러운 순간에 한 쪽 구석에서 눈물을 쏟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포로로 끌려가기 전에 화려하고 웅장했던 솔로몬 성전을 본 기억이 있는 노인들은 대성통곡하였습니다. 이들의 눈에 비친 성전 터는 너무 작고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쪼그라든 성전 터를 보니 마음이 아프고 이렇게 된 것이 자신들의 죄 때문이었음을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아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예전 성전을 본 적이 없는 젊은이들은 마냥 신나고 즐거웠습니다. 이 성전이 자신들 인생의 최초의 성전이 될 것이기 때문에 기대가 크고 마음이 설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대성통곡하고 한쪽에서는 환호하고 참 묘한 분위기가 연출되었습니다. 하지만 멀리서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울음과 웃음소리가 한데 뒤섞여 분간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장면이 어처구니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아직 성전의 아무 형상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둥 하나 서지 않았습니다. 문짝 하나 달지 않았습니다. 다만 성전 기초만 놓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성전이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황폐하였던 옛 성전 터에 성전 기초가 놓였다는 점에서 희망의 싹이 텄습니다. 이 희망의 싹이 자라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날이 올 것을 믿었습니다.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이 날에 큰 목소리로 목청껏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잔치를 벌이고 함께 어울려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우리 가운데 학생 제자 양성 역사의 기초가 다시 놓이고 있음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2010년 가을 제자 수양회를 기억하십니까? 그때 우리에게는 학생 제자가 너무 없었습니다. 제자수양회를 안 할 수는 없지만 막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심포지엄을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습니다. 넓은 잔디밭에 불판이 줄지어 서 있는 장관이 펼쳐졌습니다. 저녁에는 부부 열창 대회를 열었습니다. 그때 명아브라함 명사라 목자님 가정이 '무조건'이라는 트로트를 개사하여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감동적으로 노래하셨습니다. 이렇게 잘 먹고 즐겁게 보내기는 했지만 뭔가 씁쓸한 여운이 남았습니다. 학생 제자 양성 역사가 다 무너져가나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작년 가을 수양회 때는 세 팀으로 나누어서 갔음에도 불구하고 각 팀마다 학생들이 다섯 여섯 명씩 심포지엄을 발표하였습니다. 심포지엄의 질적 수준도 역대급이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불과 6년 만에 이런 변화가 일어났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나 1980년대를 기억하시는 목자님들 중에는 여전히 성에 안 차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학창 시절 때 여름수양회를 하면 우리 센터에서 900명 정도가 참석을 했습니다. 그것도 대다수가 다 학생들이었습니다. 제가 섬기던 요회에는 리더가 달랑 두 명이었지만 아카데미를 하면 하루에 양들이 열두 명 정도가 왔습니다. 너무 많아서 나중에 누가 왔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 때와 비교를 하면 현재의 모습은 한 없이 초라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모습이 전부가 아닙니다. 현재의 모습을 기초로 해서 앞으로 세워질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사야서 43장 18, 1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를 통해서 새 일을 행하실 줄 믿습니다. 광야에 길이 나고 사막에 강이 터지듯이 굳게 닫혀 있었던 양들의 마음에 말씀의 길이 나고 사막 같은 캠퍼스에 복음의 생수가 터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심령에 이런 희망의 빛을 비추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새 역사가 시작될 비전을 꿈꾸며 2017년 새해를 힘차게 시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장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이 와서 한창 성전 공사 중인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이 얼마나 반가운 소리입니까? 귀환한 백성들이 막상 성전을 재건하려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자금과 일손이 부족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와서 함께 성전 건축을 하자고 하니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스룹바벨과 족장들은 어떻게 대답하였습니까? 다같이 3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겠습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스룹바벨은 이들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였습니다. 비록 자신들의 힘만으로 성전을 짓는 것이 어렵고 힘들겠지만 절대 당신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립적으로 짓겠다고 하였습니다. 왜 스룹바벨과 장로들이 이렇게  딱 잘라 거절했을까요? 그 이유를 알려면 도대체 이 사람들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1절에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라고 표현된 그들은 구체적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마리아는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했던 북이스라엘 왕국의 수도가 있던 곳입니다. 앗수르 왕 에살핫돈은 사마리아 사람 일부를 강제로 앗수르로 끌고 가고 또 앗수르 제국 내 여러 민족들을 사마리아 땅에 이주시켰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 민족 사이의 혼혈이 생겨났습니다. 섞인 것은 혈통만이 아니었습니다. 종교도 혼합 종교가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에는 여호와의 제단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각 나라에서 들어온 우상들도 한 자리 씩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의 숙곳느곳 신, 굿 사람의 네르갈 신, 하맛 사람들이 가져온 아시마 신, 아와 사람들이 들여온 닙하스와 다르낙 신, 스발와임사람들이 가져온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 신 등등 각종 우상들이 즐비하였습니다. 사마리아는 여호와 하나님도 섬기고 다른 신들도 함께 섬기는 혼합주의, 잡탕 종교의 본산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들이 성전 건축 역사에 들어와서 함께 참여하게 되며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신앙의  순수성이 위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국 새 성전 안으로 여러 우상들이 따라 들어 올 것이 뻔했습니다. 포로 기간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우리가 망했는가? 멸망의 원인을 치열하게 고민했습니다. 결론은 하나 곧 우상 숭배의 죄를 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근원은 솔로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솔로몬은 주변국들과 외교 관계를 맺는다는 명분으로 여러 나라의 공주들과 정략결혼을 했습니다. 무려 천여 명의 왕비를 거느렸습니다. 그때 왕비들이 궁에 혼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자기들 나라의 우상을 같이 들여왔습니다. 앞에서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뒤뜰에 가서는 산당을 짓고 자기들의 신을 섬겼습니다. 이것이 혼합주의 종교의 시작입니다. 솔로몬 때부터 시작된 이 혼합주의 신앙 때문에 나라의 영적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성과 순수성을 상실하였습니다. 그 결과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하고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망했습니다. 그래서 포로가 된 백성들은 '다시는 우상 숭배의 죄를 저지르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겨우 회복의 역사가 시작되려 하는데 여기서 또다시 우상숭배에 빠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과는 불 보듯 뻔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혼합주의 종교가 비집고 들어 올 틈을 열어 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 길은 예배를 더럽히지 않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제 막 시작된 회복의 역사는 또다시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혼합주의 종교는 사마리아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도 있습니다. 이 시대 혼합주의 종교는 먼저 종교 다원주의를 꼽을 수 있습니다. 간혹 신문에 보면 성탄절에 스님이 성당에 와서 축사를 해 주고 돌아갔다는 기사가 실립니다. 다음 해 사월초파일에는 신부가 절에 가서 축사로 답례를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얼마나 훈훈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냐고 말합니다. 일치와 연합이라는 명분을 앞세워서 종교와 종교 간의 차이는 축소하고 교류와 협력을 늘려 나가자는 주장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연합이 아니라 혼합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점점 약해지는 것은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의 주님이시고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각 종교마다 다 구원이 있으니 더 이상 전도하고 선교할 이유가 사라집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예배하겠다고 모인 자리에서 굿판이 벌어지는 참담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또 다른 형태의 혼합주의로 우리에서는 기복신앙, 미국에서는 번영복음이라 불리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도 섬기고 겸하여 돈도 섬깁니다. 하나님은 그저 나를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시는 분으로만 여깁니다. 예배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실상은 맘몬신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기독교 인본주의라는 혼합주의 종교가 신앙의 순수성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내세우는 것은 동성애 옹호입니다.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들고 나옵니다. 교회는 동성애를 죄악시하지 말라고 요구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여기로 넘어갔습니다. 얼마전 미국장로교단(PCUSA)마저도 동성애자 목회자에게 안수를 하겠다는 결의를 하는 충격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동성애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는 죄임을 신구약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동성애 문제는 단지 동성애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따를 것이냐 아니면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따라 성경을 뒤집을 것이냐 하는 싸움입니다. 이런 현대판 사마리아 사람들, 복음의 대적들과 기독교라는 큰 우산 속에서 같이 잘 지내자 하다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 점차 말씀에 대해 상대적인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배가 타락하게 될 것입니다. 영혼 구원의 열정이 다 사그라들게 될 것입니다. 결국 복음의 순수성, 신앙의 순수성을 다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유럽은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의 총본산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유럽의 교회는 해가 날수록 쇠퇴하고 있습니다. 예배당이었던 곳이 팔려서 술집이 되고 나이트클럽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혼합주의 신앙과 타협하다가 복음의 생명력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혼합주의 세력에 대해 이렇게 단호히 말해야 합니다.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우리가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말씀 중심, 복음 중심, 그리스도 중심의 순수 신앙을 지켜가야 합니다. 이것을 지키지 못하면 영적으로 나도 죽고 양들이 죽고 우리의 자녀들이 죽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 교묘하게 교회에 침투하여 복음 신앙을 무너뜨리려는 대적들과 맞서 싸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앞으로 계속해서 말씀 중심, 복음 중심, 그리스도 중심의 참된 믿음의 집을 건축해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스룹바벨에게 거절당한 사마리아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그 땅 사람들은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성전 건축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순수하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의도로 접근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손을 약하게 한다는 말은 의욕을 상실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처음에 의욕을 가지고 시작했던 일이라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방해를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엔 이루어 보려던 마음이 다 사라지고 손을 놓게 됩니다. 바로 이것을 노리고 대적들은 방해 공작을 펼쳤습니다. 그들은 포크레인 소리 때문에 낮잠을 잘 수 없다며 구청에 민원을 넣었습니다. 공사 차량이 지나가야 할 도로에 드러누워서 날마다 성전 재건 결사반대 시위를 벌였습니다. 또 뒤로는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서 성전 재건 공사를 막으려 했습니다. 이들에게 뇌물 먹은 관리들이 도장을 안 찍어 주어서 도무지 일이 진척될 수가 없었습니다. 별 것도 아닌 일에 트집을 잡아서 수시로 공사 중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결과 고레스 왕의 시대부터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무려 16년 동안이나 성전 재건 공사가 중단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인들은 성전 재건 공사만 방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아하수에로와 아닥사스다가 바사 제국을 통치하던 시기에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도 방해하였습니다. 그 내용이 본문 6절부터 23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적들은 왕에게 음해성 편지를 보냈습니다. 세금을 내지 않고 반란을 일으킬 목적으로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세금과 반란에 민감한 왕은 그들의 말을 받아들여 공사를 중단시키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우리도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하면 반드시 대적이 일어납니다. 적당히 타협하면서 신앙생활하려고 하면 적이 없는데 믿는 자로서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를 뒤에서 음해하려는 사람이 생겨납니다. 결단을 하면 연단이 따라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 곧이어 사단의 역사가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이때 우리는 ‘희망 찬 새 출발을 하려고 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낙심하고 주저앉기 쉽습니다. 그러나 정체성은 주변과의 부대낌을 통해서 더욱 분명해지고 단단해지는 법입니다. 사자성어 중에 송백지질(松柏之質)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서리를 맞고 더욱 무성해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 할수록 역경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를 더욱 단단하게 해주고 영적 성숙과 성장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결국에는 우리 삶에 풍성한 복음의 열매, 믿음의 열매들이 맺히게 할 것입니다. 2017년 우리는 신년 말씀과 함께 희망찬 새해를 열었습니다. 목자학교, 예배학교, 양식훈련, 성경다독, 어린이 찬양예배 등등의 기초가 놓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올 해도 틀림없이 복음의 원수가 우리를 방해하고 주저앉히려 시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이 역경을 딛고 일어나서 올해 무성한 축복의 가지를 캠퍼스와 삶의 현장에 뻗고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선하고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분이시기에 반드시 그리 이루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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