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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개의 소리와 하나의 고백
    설교/에스라 2015.10.21 21:35

    두 개의 소리와 하나의 고백


    말씀 : 에스라 3:8-13

    요절 : 에스라 3:11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2014년 9월 23일 일용할 양식 말씀을 먹고 나서 제게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감동을 언젠가는 메시지로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따로 표시를 해 놓았었습니다. 그 날 양식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에 해당하는 에스라 3장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전 착공식 장면을 배경으로 세대 간에 상반된 두 가지 반응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다른 경험을 세대들이 모인 하나님의 공동체가 하나를 이룰 수 있는지 배우고 이를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온지 2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2년 전 바사왕 고레스는 하나님으로부터 감동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본국으로 귀환을 허락하고 성전을 건축하라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이때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보니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은 모두 파괴되어 흔적조차 사라져 있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성전 재건이 시급한 과제였습니다. 2년간의 준비 기간을 거치고 비로소 이때부터 마침내 성전 건축을 위한 구체적인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레위인들을 세워서 여호와의 전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맨 땅에서 잡초를 뽑고 돌을 골라내었습니다. 부지를 고르고 평탄하게 하였습니다. 성전 기둥이 올라 갈 주춧돌을 갖다 놓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성전의 기초가 준비되었습니다. 이때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나왔습니다.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악기를 들고 나와서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찬송 내용이 무엇입니까? 다 같이 11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우리가 열왕기와 역대기 공부를 통해 본 바와 같이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악한 백성들이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제껴 놓고 여러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수없이 선지자들의 경고와 책망을 듣고서도 목이 곧고 뻣뻣하여 말씀을 듣지 않고 불순종했습니다. 이런 그들은 심판 받아 끊어져야 마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애굽의 바로처럼 강퍅하게 하셔서 100, 200년 동안 포로 생활하도록 두셔도 아무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하신 분이셨습니다. 인자하시고 자비하신 분이셨습니다. 백성들이 70년만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더 기회를 주셨습니다. 백성들은 아직 아무 건물도 없고 다만 성전의 기초만 놓여졌을 뿐인데 너무나 감격하여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찬송한 후 백성들의 모습이 두 가지로 갈렸습니다. 그 모습이 어떻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백성들은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모습으로 크게 나뉘었습니다. 한 쪽 편에서는 대성통곡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한 쪽 편에서는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참 재미 있는 광경입니다. 한 날 한 시에 같은 장소에 모인 사람들이 어쩌면 이렇게 정반대의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요? 이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서 누군가에 보여 주면서 어떤 상황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아마 저 사람들이 청백팀으로 나뉘어 시합을 하다가 한 쪽 편이 이겨서 환호하고 다른 쪽 편이 져서 슬퍼하는 모습이 아닐까요 라고 대답할 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깊은 사연이 있었습니다.  대성통곡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머리는 눈이 내려 앉은 듯 백발이었습니다. 얼굴과 이마에는 주름이 깊이 패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기뻐 환호하는 사람들의 검은 머리와 팽팽한 피부를 가진 젊은이들이었습니다. 노인들이 대성통곡을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들이 예전에 있던 솔로몬 성전을 기억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솔로몬의 성전은 이스라엘 역사의 전성기, 최고로 부강했던 시기에 지어진 성전이었습니다. 그 규모와 화려함이 엄청났습니다. 그 모습을 기억하던 사람들이 오늘 본 스룹바벨 성전의 기초는 그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축소된 성전, 허름해진 성전을 생각하니 노인들은 마음이 찢어지는 듯 했습니다. 어쩌다가 우리가 이렇게 되었을까 하는 물음과 함께 지난 세월에 대한 후회, 70년 동안 기다려온 일의 결과에 대한 실망 등이 겹쳐 갑자기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왔습니다.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닌데 성전의 과거를 기억하는 늙은이들은 모두 큰 소리로 목 놓아 울었습니다. 반면에 젊은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솔로몬 성전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말로는 들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별로 실감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여호와의 성전은 지금 자기들 눈 앞에 보이는 이 성전이 전부였습니다. 포로기에 태어나 이방땅에서 살면서 한 번도 성전이란 것을 구경도 못해 보았던 젊은 세대들에게 생애 첫 성전은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 손으로 지은 성전에서 우리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들은 벅찬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이구동성으로 함성을 크게 질렀습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습니다. 늙은이들과 젊은이들 중에 누가 더 경건한 사람일까요? 이 상황에서 누가 더 합당한 반응이 보인 것일까요? 나라면 누구의 손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서로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 이 두 그룹 중에서 누가 더 경건하냐 누가 옳고 그르냐를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늙은이든 젊은이든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사람들 모두는 하나 같이 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앞장인 2장에 보면 이때 바사에서 돌아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명단이 나오는데 생각보다 훨씬 적습니다. 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돌아오기를 포기하고 이방땅에 머물렀습니다. 이미 칠십년이란 세월 동안 고생 고생하면서 겨우겨우 자리를 잡았는데 이를 다 버려두고 예루살렘에서 새출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먼 길을 떠나 온 이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그 마음 중심이 하나님께 향해 있던 사람들이었음이 틀림 없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워진 성전 기초를 보는 감흥은 서로 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경험이 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성전을 본 경험이 있느냐 없느냐 그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경험의 차이가 똑 같은 현실을 보고서도 서로 상반된 반응을 낳게 한 것입니다. 만약 이 상황을 놓고 어느 편이 옳으냐 그르냐는 문제로 접근해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늙은이들은 젊은이들을 향해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저 친구들은 뭐가 좋다고 난리야! 이렇게 쪼그라든 성전을 보면 슬퍼해야 마땅하지 않아? 요즘 젊은 사람들은 성전 다운 성전을 한 번도 못 봐서 도대체 개념이 없네 개념이 없어" 반면에 젊은이들은 어떻습니까? "아니 저 올드한 양반들은 이 좋은날 왜 질질 짜고 난리야! 우리가 삼사년 전만 해도 어디 이런 날이 올 줄 상상이나 했었어? 하여튼 저 양반들은 맨날 과거의 추억에 잠겨 산다니까?" 만약 이렇게 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OB와 YB, 시니어 그룹과 주니어 그룹 양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싸움하느라 모든 에너지를 다 소모하게 될지로 몰랐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전 재건은 시작만 해 놓고 마무리까지 못하고 중도 하차할 위험성도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 우리 모임에 나온 때에는 우리 모임의 인적 구성이 아주 단순했습니다. 대부분이 20대였습니다. 경험도 비슷하고 생각도 비슷하고 고민도 비슷비슷했습니다. 모든 면에서 호모지니어스(동질적)한 때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5,60대부터 갓난 아기가 전 세대에 걸쳐서 골고루 포진되어 있습니다. 세대별로 경험이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고민도 다릅니다. 많은 면에서 헤테로지니어스(이질적)합니다. 그런데 그 다르다는 느낌이 저에게 아주 낯설게 다가 올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저는 우리의 학생 제자 양성 역사에 대해 애타는 마음이 있습니다. 바이블 카페나 여름 수양회 등을 섬기다 보면 가슴이 답답해질 때가 있습니다. 양이 겨우 이 정도 와서 어떻게 하는가 이러다가 우리 망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도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 리더들에게는 별로 그런 마음이 보이질 않는 것 같습니다. 저만 조바심을 나는 것 같습니다. 또 요즘 학생 리더들을 보면 졸업할 때까지 한 명의 양을 도운 경험 없이 졸업하는 사람들이 다수인 것 같습니다. 졸업하고 나면 더 바빠서 양 치기 힘든데 이때 안하면 언제 하려고 하나 하면서 또 걱정이 됩니다. 하지만 막상 당사자는 별 고민이 없어 보입니다. 뭘 하든 안 하든 마음만이라도 나와 함께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하는 아쉬움이 들 때가 참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인터넷에서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한 일곱가지 원칙'이라는 글을 읽고서 제가 이러다가 소위 말하는 꼰대가 되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위기의식이 들었습니다. 요즘 꼰대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꼰대란 옛날에 나는 안 그랬는데 너는 도대체 왜 그러니 라는 말로 수시로 잔소리를 하는 기성세대들을 가리켜 쓰는 말입니다. 꼰대는 매사에 젊은이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고 왜 그 모양이냐 왜 그것 밖에 못하냐며 타박을 줍니다. 젊은 사람들은 꼰대 같은 사람을 만나면 마음을 닫고 아예 소통하기를 거부합니다. 설령 그 중에 맞는 말이 있다 하더라도 나 잘 났고 너는 못 났다는 하는 그 느낌이 싫어서 받아들이질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에 보듯이 서로가 경험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요회 목자를 했는데 요회 동역자를 잘 만난 덕분에 리더가 단 두 명인 요회에 양들은 항상 열 두세명이 있었습니다. 제가 학창 시절에는 여름 수양회에 한 번에 육백명 칠백명이 그것도 일진과 이진으로 나누어서 같습니다. 이런 저에게 현재 역사가 성에 차지 않고 늘 아쉬워 보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마치 솔로몬 성전을 경험했던 백성들이 제 2 성전의 기초를 보고 대성통곡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이 없는 세대에게 작년에는 요회의 양이 두 명이었는데 올 해는 네 명이 되어도 대단히 기쁜 일입니다. 배가의 역사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게 겨우 네 명 가지고 뭘 좋아하느냐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꼰대가 되는 길입니다. 옛날 생각만 하지 말고 지금 캠퍼스에 나가 보면 한 명의 양 얻기가 얼마나 힘든지 금방 깨닫게 됩니다. 이번 학기만 해도 한 양을 소개 받았는데 첫 만남은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제가 보내는 모든 문자와 전화를 다 씹고 있습니다. 확실하게 보이던 한 양은 없는 전화 번호를 남긴 것을 확인하고 참 쓸씁했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성경 공부를 하고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한 일입니다. 또한 목자가 되고자 하고 성경 선생이 되고자 하는 소원이 있다는 것은 더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서로 경험이 다르고 그래서 반응이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을 놓고 제가 이해하지 못하고 너무 쉽게 가치 판단의 문제로 돌려 버린 것이 아닐까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멀리서 백성들의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분간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두 소리가 합쳐져서 하나의 소리로 들렸다는 말입니다. 이는 있는 사실을 그대로 표현한 말이면서 참 의미 심장한 은유라고 생각합니다. 한 공동체 안에는 젊은 세대와 나이 든 세대가 있습니다. 두 세대는 서로 경험이 다릅니다. 그래서 똑 같은 현실을 두고서도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고 다른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억지로 강요나 억압으로 하나로 만들려고 해 봐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소리는 합쳐져서 하나의 소리가 될 수 있습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자기 소리를 내되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리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의 경험은 다양했지만 찬양과 고백에서는 온전히 하나였습니다.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11)” 하나님은 80년대, 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어느 학번대의 사람이든 모두에게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경험은 다를지라도 이 찬송과 고백에 있어서만큼은 우리는 하나입니다. 또 모든 세대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같은 시대에 쓰여진 학개서 2장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 것 없지 아니하냐? ..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과거와 현재가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펼쳐나가실 미래가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 모습에 일희일비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미래를 함께 할 운명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미래를 공유하며 모든 세대가 어깨동무를 하고 힘차게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임 내에서도 세대에 따른 다양성을 포용하면서 이해하면서 또 한 편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찬송과 고백에 있어서 온전히 일치를 이루는 하나된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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