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목회 현장

복음주의 거인 존 스토트의 삶과 설교

이창무 2016. 12. 22.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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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두란노에서 나온 '목회와 신학'에 나왔던 존 스토트의 삶과 설교에 관한 글입니다.

저는 존 스토트야말로 가장 균형 잡힌 복음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2007년 7월 17일 화요일 저녁, 존 스토트는 그의 생애 마지막 설교를 위해 그렇게 영국 중부의 케직 사경회 강단에 올랐다. 86세의 ‘노사도’는 그 연로함으로 지팡이를 짚고 다른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힘들게 강단에 올랐고, 참여자들은 그리스도의 교회와 복음주의 진리를 위한 그의 헌신과 희생에 대한 감사의 답례로 기립 박수를 보냈다.


한 세기 복음주의의 사도요, 주님의 신실한 말씀의 종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세례 요한과 같이 역사 속으로 조용히 퇴장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눈앞에서 바라보자니 필자로서는 표현하기 힘든 가슴 뭉클한 감동에 압도되었다. 설교가 시작되기 전, 케직 사경회 조직위원회는 그의 신실한 헌신과 봉사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영국식으로’ 선물을 준비했다.


그 선물은 다름 아닌 작은 ‘초콜릿 박스’ 였고 스토트는 잔잔한 웃음으로 답례하였다. 그리고 스토트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 설교를 엄숙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회중에게 들려준 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조용히 사라졌다. 그것이 필자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리고 얼마 전 2011년 7월 27일, 스토트는 마침내 하늘의 부르심을 받고 요단강을 건너 그토록 꿈에 그리던 영광의 도성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이 위대한 복음주의의 거인은 그의 소박하고 조촐한 장례식을 통하여 진정한 복음주의란 무엇인지에 관해 다시 한 번 남아있는 자들에게 무언의 웅변으로 설교해 주었다.


언젠가 스토트는 그의 책 「존 스토트 설교론」 (I Believe in Preaching)의 서문에서 지난 교회사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축복을 내리셨던 위대한 설교자들의 모범으로부터 배우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적이 있다.


이제 우리는 사려 깊고 현명했던 그의 조언처럼, 우리를 떠나간 그래서 우리 시대 이제 또 하나의 역사가 되어버린 그의 삶과 그의 메시지를 다시 한 번 반추(反芻)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우리를 떠나간 이 노장의 삶의 발자취와 그의 설교에 대한 회상은 그를 기억함과 동시에 그와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미래의 길에 작은 빛을 제공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존 스토트의 생애


 


스토트의 회심


존 스토트는 1921년 4월 27일, 수백 년간 영국 의학의 중심지였던 런던 할리(Harlery)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저명한 의사였던 아놀드 스토트(Arnold Stott)이며, 그의 아내는 벨기에 출신인 에밀리 캐롤라인(Emily Caroline)이다. 스토트의 아버지는 과학을 신봉하는 인본주의자였지만 그의 어머니는 루터교 신자였다. 어린 스토트는 그의 어머니를 통하여 기독교 신앙을 배웠으며 올소울즈교회에 성실하게 출석했다. 그러나 스토트는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해 특별한 신앙적 동기 때문이라기보다 단지 어머니께 대한 충성심 때문이었다고 고백했다.


스토트가 신앙의 전환점을 맞게 된 것은 13살 즈음에 진학했던 럭비 스쿨(Rugby School)에서였다. 스토트는 당시에 하나님의 실재와 존재를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십대의 스토트에게 마치 안개 속에 감추어진 분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나이 17세 되던 해, 학생들에게 ‘배쉬’(Bash)로 알려진 에릭 내쉬(Eric Nash) 목사와의 만남으로 스토트는 중요한 신앙의 전기를 맞게 된다. 에릭 내쉬 목사는 나라의 지도자가 될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자신의 전도 전략으로 삼았다. 1938년 2월에 개최된 한 모임에서 내쉬는 마태복음의 ‘빌라도의 질문’ 곧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마 27:22)는 설교를 통해 학생들에게 예수에 관하여 중립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빌라도처럼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함으로 예수를 거부하든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그를 영접하며 따를 것인지 도전했다.


그의 설교는 스토트에게 깊은 도전이 되었고1, 그날 밤 그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했다. 스토트는 훗날 그날 밤의 일을 그의 책 「기독교의 기본 진리」(Basic Christianity)에서 이렇게 썼다. “10대 후반의 한 소년이 어느 일요일 밤 자기 침대 곁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는 간단하고 사실적이면서도 명확하게 이제까지 자신의 삶은 엉망이었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자신의 삶 속에 들어오시기를 요청했다.”2 이후 에릭 내쉬는 스토트의 영적 멘토로서 그의 신앙 성장과 성숙을 도왔는데, 스토트의 한 책에 따르면 내쉬는 무려 7년 동안 매주 한 통씩의 편지를 그에게 보내주었다고 한다.


 


올소울즈교회(All Souls Church)의 목회자


이후 스토트는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와 리들리 홀(Ridley Hall)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영국 국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1945년, 자신이 어린 시절 출석했던 올소울즈교회의 해롤드 언쇼 스미스(Harold Earnshaw-Smith) 밑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해롤드 언쇼 스미스 목사의 건강 악화로 1950년 29세의 젊은 나이에 올소울즈교회의 새 담임목사가 되었다. 이후 스토트는 손님 초청예배(guest services)와 평신도 훈련학교를 비롯한 혁신적인 목회사역을 시작했으며 평생을 올 소울즈 한 교회에서 사역했다.3


비록 스토트의 사역이 전방위적으로 다양하지만 그러나 그의 특징적인 사역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뒤에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성경을 해설하는 전통적인 강해설교를 강조했다. 둘째는 대학생 선교 사역이다.


스토트는 그의 평생의 사역을 통해 특히 젊은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그런 까닭에 그는 케임브리지, 런던, 옥스퍼드를 비롯한 영국, 하버드와 예일을 비롯한 미국과 호주,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다양한 세계의 대학에서 개최되는 대학생 선교대회의 주강사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특히 스토트의 설교는 학생들 사이에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성경에 기반을 둔 지성에 호소하는 설교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강사와 대조를 이루었다. 올리버 바클레이(Oliver Barclay)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진지한 사고에 기반을 둔 변증적, 복음전도적 접근을 하는 새로운 유의 선교대회 강사였으며, 그리하여 대학 내에서, 심지어는 신학적으로 자유주의자들조차 복음주의자들에 대해 새로운 존경심을 갖게 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4


세 번째 사역의 특징은 성경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현대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에 관한 성경적 해결을 위한 적극적 참여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그의 강조점은 일반적인 다른 복음주의 지도자들과 구분되는 스토트의 삶과 사상의 독특한 특징이기도 하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스토트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관계에 관하여 일반적인 복음주의자들과 그 지평을 달리했다. 스토트는 역사적으로 과거 복음주의자들은 사회참여에 적극적이었음을 강조하며, 현대 복음주의자들이 복음전도에만 집중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사회복음’에 대한 반발심으로 사회적 관심사와 복음전도를 분리한 데서 비롯된 것임을 역설하였다. 스토트는 이렇게 단언했다.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이 경쟁 관계에 있는 것처럼 여기는 최근의 논쟁은 전혀 불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몸과 영혼, 이생과 내세 간의 비성경적인 이원론을 표현한 것이다.”5


이러한 그의 균형 잡힌 관심은 1974년 개최된 로잔대회(Lausanne Congress)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스토트는 이 대회에서 로잔언약 입안위원회 의장으로 활약했다. 이 위원회의 주요한 임무는 로잔회의 개최 전에 다양한 국가 참석자들의 합의문을 다듬어 회의 석상에서 선언문을 낭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스토트는 과거 복음주의자들이 복음전도와 사회적 관심사를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고 양 극단에 빠진 것에 애도를 표하고 그것의 균형을 강조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다소간의 논란을 야기했지만, 논의 과정은 잘 마무리되어 로잔 언약서가 최종 확정됐다.


영국복음주의연맹 총무이자 참석자 중 한 사람이었던 고든 랜드레스(Gordon Landreth)는 다양한 논점을 가진 로잔언약서를 입안하는 과정에서 스토트의 역할을 이렇게 논평한다.


“당시 우리가 정말 놀랐던 점은 이 문서가 그토록 다양한 관심사를 아우르면서 신학적, 교회적 지뢰밭 사이에서 중도를 지켰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대단한 작업의 배후에는 당연히 스토트가 있었다.”6


현대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 중 하나로 평가받고, ‘기독교 신앙과 관심사, 헌신에 대한 세기의 모범’으로 평가받는 로잔 언약서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관계를 바라보는 주류 복음주의자들의 시각에 큰 반향과 변화를 일으켰다.


 


더 넓은 지평


스토트는 단순한 한 교회의 목회자가 아니라 그가 자인하듯, ‘행동가의 기질’로 가득 찬 목회자였다. 스토트는 복음주의의 이상을 위해 다양한 기구를 설립하거나 그것에 관여했다. 이러한 기구 중 네 가지는 특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첫째, EFAC(Evangelical Fellowship in the Anglican Communion, 성공회 복음주의 협의회)의 설립이다. 스토트는 이 모임의 설립을 통해 영국 국교회 내에서 복음주의자들의 역할과 영향력이 증대되도록 시도했다. 또한 제3세계에서 온 성공회 학생들로 하여금 복음주의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장학사업도 병행했다.


둘째, ASIF(All Souls International Fellowship, 올 소울즈 국제협회)의 설립이다. 스토트는 내쉬가 그랬던 것처럼 미래의 지도자들을 길러내는 것에 전략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제3세계의 경우 서구에서 유학한 사람들은 주로 그 나라의 지도자가 될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토트는 외국에서 런던으로 유학 온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깊이 관심을 기울였다. 스토트는 말했다. “여기 바로 우리의 곁에 선교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을 장래의 기독교 지도자로 양육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바다 건너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현지인 지도자를 세우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셋째, LICC(London Institute for Contemporary Christianity, 런던 현대 기독교 연구소)의 설립이다. 스토트는 이 기구를 통하여 전통적인 복음주의의 약점으로 지적되곤 했던 현대사회에서 제기되는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성경적 세계관과 대안들을 제공함으로써 균형 잡힌 기독교를 추구했다.7


넷째, LPI(Langham Partnership International, 랭햄 국제 파트너십)의 설립이다. 1970년대 스토트는 대학과 신학교가 교계의 핵심 기관임을 확신하고, 자신의 저서를 통해 얻게 된 인세로 LPI를 설립해 영국에서 학업하는 북미와 유럽, 개발도상국 학생들의 학업을 지원했다. 스토트는 이 기구를 통해 ‘랭햄 장학생’(Langham Scholars)을 선발·지원하고 목회자를 훈련하는 사역에 전념했다.


아울러 스토트의 생애 중 간과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영국 복음주의의 부흥을 위한 그의 공헌이다.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영국교회 내에서 복음주의는 무시당하는 소수로 존재했었다. 스토트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1945년에 내가 안수를 받았을 때, 영국 국교회에 복음주의자는 거의 없었다. … 어느 대학에도 복음주의 감독들이나 복음주의 신학 교수들은 없었다. 얼마 안 되는 복음주의 성직자들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궁지에 몰려 있었다. 복음주의 운동은 멸시와 거부를 당했다.”8


그러나 1950년대 이후 복음주의는 크게 성장했는데, 알리스터 맥그라스(A. E. McGrath)는 영국 복음주의 부흥의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존 스토트의 사역을 꼽는다. 맥그라스는 말했다. “설교와 저술 사역을 통해 떠오르는 세대의 복음주의 학생들에게 끼친 그의 영향력은 쉽게 측정될 수 없다. … 만일 영국 복음주의의 괄목할 만한 성장의 공이 그 어떤 사람에게 돌려야 한다면 그것은 스토트에게 돌려야 한다.”9


특히 스토트는 지적인 엘리트주의를 견지함으로 평범한 그리스도인 신자들의 관심을 외면하는 학문적인 신학자나 깊이를 갖추지 못한 채 대중적인 호소를 하는 신학자들과 달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움직이며 교회의 성경적인 전망을 내실 있게 제시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스토트는 자연스럽게 그 권위를 얻게 되는 ‘유기체적 지성인’(organic intellectual)의 탁월한 전형으로 복음주의 신학의 대중화와 성숙에 기여했다.10 스토트의 소천 후 영국 BBC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스토트를 “복잡한 신학을 평신도도 이해하기 쉽게 해설했던” 목회자로 논평했다.11


이러한 그의 공헌은 그의 풍부한 저술 활동에서도 확인된다. 스토트는 일생 동안 50여 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저서는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변증적으로 잘 해설한 「기독교의 기본진리」 (Basic Christianity)와 스토트가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The Cross of Christ)다. 특히 스토트가 “이 책보다 제 마음과 정성을 쏟아 부은 책은 없다”고 고백했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출간 후 세계 20개 언어로 번역 출간됐는데, 제임스 패커는 이 책에 관해 이렇게 논평했다. “존 스토트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주제라고 할 만한 어려운 과제를 잘 소화해 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가 그에게 기대하는 훌륭한 자질들, 곧 성경적인 정확성, 신중함과 철저함, 질서와 방법, 윤리적 각성, 침착한 행보, 균형 잡힌 판단력, 현실적인 열정들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 책은 그가 쓴 어떤 책보다 탁월한 걸작이다.”12


그러나 이 같은 그의 폭넓은 사역과 함께 그의 소박한 삶의 단면 또한 기억할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스토트는 자신의 저술 활동으로 인한 인세를 제3세계 목회자를 위한 장학사업을 목적으로 설립된 랭햄 재단에 위탁하고 본인은 평생 소박한 삶을 실천하며 살았다. 1993년 스토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화는 그의 이러한 삶을 잘 보여준다.


스토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평소에 입던 깃이 다 해진 오래된 양복을 입고 입국했는데, 한국 측의 간곡한 부탁으로 낡은 옷을 벗고 새 양복을 입은 이야기나 한국에서 받은 설교와 강의 사례비들을 전부 IVF 발전기금으로 내놓고 빈손으로 간 이야기는 그의 소박하고 헌신적인 삶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스토트의 이러한 소박하고 진실된 성품은 그의 많은 친구들의 증언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스토트는 전 세계에 많은 친구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이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스토트는 한결같이 투명하고 신실하고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LICC의 도서관장으로 일했던 켄 페레즈는 스토트를 이렇게 묘사한다.


“대중들 앞에서는 굉장히 멋있는데, 개인적으로 만나면 실망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스토트는 반대였다. 목사님은 공석에서보다 사석에서 더 멋진 분이셨다. 그리스도를 닮았던 온화하고 친절하며 진실하셨던 그분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스토트의 비서로 약 50년간 그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했던 프랜시스 화이트헤드(Frances Whitehead)는 스토트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스토트는 늘 한결같은 사람이다. 말과 행동이 정확히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이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신실한 삶을 사는 것이 그의 삶의 전부였다…. 존 스토트의 진실한 성품이 아니었다면 5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하지 못했을 것이다.”


 


존 스토트의 설교 세계


 


“나는 설교를 믿는다”(I Believe in Preaching)


널리 알려진 것처럼 스토트는 기독교의 다양한 분야에서 공헌했다. 그를 묘사할 때 자주 인용되곤 하는 ‘개신교의 교황’13이나 혹은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이라는 언론 보도에서 보듯, 세계와 기독교계에 대한 그의 공헌과 봉사는 널리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그의 다양한 헌신에도 스토트의 삶과 사역을 규정짓는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그의 설교 사역이다.


케서우드(C. Catherwood)는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단정한다. “존 스토트는 뭐니뭐니해도 설교자다. 이 사실을 바로 알지 않고서는 그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14


스토트의 설교 세계의 온전한 이해를 위해선 그의 설교에 영향을 준 한 사람을 먼저 언급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스토트는 윌리암 윌버포스의 친구였던 찰스 시므온(Charles Simeon)을 그의 설교의 모델로 삼았다. 케임브리지의 홀리 트리니티(Holy Trinity) 교회에서 평생을 목회했던 이 설교자를 스토트는 ‘사람들의 맹렬한 반대에도 사도 바울의 족적을 따랐던 한 사람’으로, 그리고 ‘머리와 가슴, 이성과 감정의 모범적인 조화’를 이룬 설교자로 평가한다. 찰스 시므온이 자신의 설교에 끼친 영향에 관해 스토트는 이렇게 말했다.


“순종해야 하고 해설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시므온의 타협하지 않는 헌신은 나로 하여금 그를 깊이 흠모하게 했으며,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나를 사로잡고 있다.”15스토트가 자신의 사택에 찰스 시므온의 대형 판화를 걸어 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스토트는 당시에 유행하던 윤리적 설교나 주제 설교를 거절하고 당시에 한물간 것으로 취급되던 강해설교를 주창했다. 스토트는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말씀의 종교”이며 모든 참된 설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설하는 ‘강해설교’임을 확신했다. 따라서 설교자의 중대한 책임은 더하거나 빼거나 왜곡함 없이 본문을 분명하고, 명확하고 정확하고 적절하게 해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스토트는 과거의 그 말씀이 언제나 오늘 현재에 닿아있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런 까닭에 스토트는 설교의 참된 목표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말씀을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에 적절하게 적용하는 것”임을 역설했다.


스토트는 말한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공허한 그리스도가 아닌 한때 이 지상에서 살았다가 죽으셨으며, 지금도 살아 계셔서 인간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현대의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스토트의 설교에 대한 핵심적인 정신은 두 가지 확신, 두 가지 의무, 두 가지 기대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성경에 대한 두 가지 확신이다. 곧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와 영감과 섭리로 기록된 책”이라는 확신과 다른 한편 성경은 어떤 점에서 닫혀 있는 본문이며, 따라서 그것은 해석과 해설이 필요하다는 확신이다. 그런 까닭에 설교자는 디모데처럼 공중 앞에서 성경을 읽고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딤전 4:13).


그렇다면 영감된 본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 지점에서 설교자에게 두 가지 중대한 책무가 발생한다. 첫 번째 임무는 성경 본문의 원래 의미에 대한 충실함(faithfulness)이다. 성경을 읽을 때, 설교자가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실수는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의 사고방식과 문화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


설교자는 자신의 문화적 편견을 버리고 성경 저자들의 상황, 문화, 언어에 대한 성실한 연구를 통하여 본문을 바라봐야 한다. 만약 이런 노력을 하찮게 여기거나 소홀히 한다면 그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해 말씀하시기 위해 택하신 방법을 모욕하는 것이다. 두 번째 임무는 현대 세계에 관한 민감함(sensitivity)이다. 설교자는 본문의 본래적 뜻을 밝히는 것을 넘어 그 의미를 현대 세계에 적용하는 지점까지 나아가야 한다.


따라서 설교자는 이중의 의무를 지닌다. 곧 고대 세계 속에서 기록된 성경 본문에 대한 신실함과 현대 세계에 대한 민감성을 유지하면서 영감된 본문의 의미를 열어주는 것이다. 스토트는 특히 성경 본문에 대한 충실함과 현대 세계에 대한 민감함이라는 두 가지 균형은 자유주의와 복음주의 양 진영 모두에 필요한 부분임을 역설한다. 곧 복음주의자들의 특징적인 약점이 성경적인 측면은 강하지만 현실에 대한 이해에 취약한 것이라면, 자유주의자들은 현대 세계에 대한 이해는 뛰어나지만 성경적인 관점이 취약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와 관련 없는 본문의 주석은 비역사성에 무릎을 꿇는 셈이며, 해석 없는 현대적 적용은 성경의 계시와 무관한 실존주의에 굴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성실한 해석 작업을 통해 과거의 성경에서 현대의 세계로 다리를 놓아야 하는 책임이 있다. 스토트는 이를 위해 ‘이중적 귀 기울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스토트는 말한다.


 


“우리는 성실하고도 민감하게 고대의 말씀과 현대 세계를 관련시키기 위해 그 둘 다에(물론 존중하는 정도는 서로 다르지만)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 내가 확신하는 바는 만일 우리가 이중적 귀 기울임의 능력을 함양할 수 있다면 신실하지 못함과 부적절함이라는 반대되는 함정을 피할 수 있을 것이며, 오늘날 하나님의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16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때 설교자는 두 가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당신의 백성 가운데 들리는 것이요, 둘째는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순종함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곧 참된 강해설교를 통하여 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그의 백성들이 듣게 될 것이요, 참된 백성은 그 말씀에 순종함을 기대할 수 있다.


따라서 스토트는 설교를 “신실함과 민감함으로 성령으로 영감된 말씀을 열어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리게 하고 그의 백성은 그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함축적으로 정의한다.


 


존 스토트의 설교


스토트의 설교는 그의 목회의 주요 동력이었다. 스토트가 담임목사로 있던 당시 올소울즈교회는 런던 도심지에서 가장 많은 교인이 모였는데 올리버 바클레이는 이러한 주된 동인 중 하나로 스토트의 설교를 꼽는다. 성경본문을 철저히 연구하여 주의 깊게 다루는 스토트의 강해설교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특히 젊은이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세기 말 이후 성공회의 설교가 쇠퇴해온 상황을 고려한다면 스토트의 강해설교와 그것에 대한 회중의 폭발적인 호응은 하나의 새로운 현상으로 간주될 만한 사건이었다. 특히 스토트의 강해설교는 그리스도 신앙과 지성이 양립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대학의 기독교 단체에 속한 학생들의 사기 앙양에 기여했으며, 다른 교회의 목회자들에게는 지적이면서도 복음전도를 강조하며 국교회적이면서도 복음주의적인 교회의 모델을 제시해 주었다. 2005년 4월 10일 스토트가 「타임」(Time)지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뽑혔을 때, 그의 오랜 친구였던 빌리 그레이엄은 한 인터뷰에서 성경학자요, 강해자로서의 스토트의 자질을 이렇게 평가했다. “사람들에게 성경적 세계관을 효과적으로 소개한 인물로 그만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존은 진정한 성경적 학자의 표준으로 내세울 만한 사람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16세기 유럽 개혁주의자들 이후로 존 스토트에 견줄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17


스토트의 설교는 그의 초기 시절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1952년 스토트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CICCU 선교대회에서 설교할 때, 유명한 교회역사가인 오웬 채드윅(Owen Chadwick)은 “케임브리지 선교의 포문을 연 성 마리아 대성당의 첫 설교는 내가 지금까지 들었던 가장 훌륭한 설교였다”라고 평가했다. 또한 1954년 올소울즈교회를 방문한 ‘사마리아인’(Samaritans) 단체의 설립자인 차드 바라(Chad Varah)는 스토트의 설교 형태에 주목하고 이렇게 말했다 “스토트는 조용하고 설득력 있는 스타일로, 타성이나 속임수, 격한 말로 호소하지 않았다. 사탕발림이나 감상주의에 호소하지 않고 진지하고도 긴장감 있게 말씀을 전했다.”


올 소울즈에서의 스토트의 설교에 관해 보다 자세히 증언하는 사람은 미국인 설교가 윌버 스미스다. 1955년 7월 첫째 주일 올소울즈교회를 방문했던 윌버 스미스는 그날의 예배와 설교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교회는 비 내리는 날에도 아침저녁 할 것 없이 만원사례인데, 저녁 예배에는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들이 많았다. … 스토트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복음주의 설교자였다. … 스토트는 설교 시간에 순수하게 복음만 전했다. …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그 설교자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교양과 학식 있는 청중을 향해 이야기했다.


죄라는 병을 치료할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는데, 하나님의 어린 양인 그리스도께만 그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 그날 아침 내 영혼은 천국의 이슬로 목욕을 했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예배 전체가 하나님께 바치는 진정한 예배로 느껴진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그날 아침 올소울즈교회에서 드린 예배는 조국에서 오랫동안 드리지 못했던, 참으로 오랜 만에 경험하는 예배였다.” 18


 


그리고 1964년 12월, 미국 일리노이대학에서 열리는 어바나 대회에서 존 스토트의 고린도후서 설교를 들었던 OMF(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 미국 본부장 아더 글래서는 자신의 옆자리에 앉았던 목회자의 이야기를 이렇게 증언한다. “하나님이 도우사 저는 이제 설교 준비 없이는 절대 강단에 올라가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이 도우사, 저는 이제 강해설교를 할 것입니다. 저도 스토트 목사님이 오늘 아침에 하신 것처럼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강해설교가 얼마나 흥미로우며 큰 깨달음을 주는지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이와 같이 스토트의 강해설교는 영국과 세계의 강단에 새로운 활력을 제공했으며 복음주의 교회로 하여금 다시 성경의 권위에 겸손히 굴복하며 진리의 말씀에 귀 기울임으로 성경적 교회의 회복에 크게 기여했다.


스토트가 강단에 설교하러 올라가기 전 항상 드리던 그의 기도는 스토트가 꿈꾸었던 참된 설교의 정신을 잘 반영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당신의 임재 앞에 엎드리오니, 당신의 말씀이 우리의 법이 되시며 당신의 영이 우리의 선생이 되시며, 당신의 위대한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통해 우리의 최고의 관심이 되게 하소서.”19


 


존 스토트, 그를 가슴에 묻으며


필자가 믿기에 당분간 세계 복음주의 교회는 그 깊이와 넓이에 이런 균형 잡힌 지도자를 만나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특히 복음주의 교회를 표방하는 혼란 가운데 있는 많은 한국 교회는 그의 삶과 가르침에 더욱 겸손히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존 스토트의 소천 후 빌리 그레이엄은 이렇게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세계 복음주의 교회는 가장 위대한 대변인 중 한 사람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조언자를 잃었습니다. 나는 스토트를 내가 가게 될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기를 고대합니다.” 20


스토트는 참된 복음주의자는 언제나 성경의 사람이요, 복음의 사람임을 역설하였다. 또한 “결국 복음주의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과 복음이 그토록 강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영예이다”라고 강조했다.


세계 복음주의 교회는 그가 그토록 힘주어 역설했던 것처럼, 더욱 겸손히 성경을 연구하며, 진리의 말씀 앞에 교회와 우리의 야망들을 굴복시키며, 오직 그리스도 폐하의 깃발을 위해 겸손하고 용감하게 진리를 따라 행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천로역정」에서 요단강을 목전에 두었던 ‘진리의 용사’의 고백으로 우리 시대에 함께 호흡했던 그를 가슴에 묻는다.


 


“나는 내 아버지 집으로 가려 합니다.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많은 어려움들을 겪기는 했지만


조금도 후회는 없습니다.


나의 칼은 내 뒤를 이어 순례의 길을 따라올 그 사람에게 줄 것이며,


나의 용기와 칼솜씨도 함께 그에게


드리려 합니다.


하지만 내가 몸에 지니고 있는 상흔들은


이제 내게 상 주실 주님께


그분의 전투에 나가 싸웠음을 증명하는 증거로 보여드리기 위해


그냥 가지고 갑니다.”


 


성경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복음을 꿈꾸었던 그의 성경적 유산이 복음주의의 후예들을 통해 힘 있게 계승되며, 우리 시대 다시 이러한 복음의 거인을 허락하시기를 기도한다.


 


 


 


 


 



1. 스토트는 이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의 설명을 통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야말로 나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분임을 알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C. Catherwood, Five Evangelical Leaders(London: Hodder and Stoughton, 1984), 28.


2. Stott, Basic Christianity(Leicester: IVP, 1958), 128.


3. 스토트는 1975년 올 소울즈 담임목사직을 사임한 후 교회의 요청으로 그 교회의 명예목사(Rector Emeritus)로 남았다.


4. T. Dudley-Smith, John Stott: The Making of A Leader (Leicester: IVP, 1999), 339.


5. Stott, Christian Basics (Grand Rapids: Baker Book, 2003), 111. 스토트는 그것의 관계에 관하여 요약적으로 이렇게 천명하였다. “전도와 사회적 행동은 서로 동반자로서 서로에게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독립적이다. 양자는 각각 올바른 위치에 서 있으면서도 상호 협력적이다.” Stott, Christian Mission in the Modern World (Leicester: IVP,1984), 27.


6. T. Dudley-Smith, John Stott: A Global Ministry (Leicester: IVP, 2001), 214.


7. 이를 위해서는 Issues Facing Christians Today: A Major Appraisal of Contemporary Social and Moral Questions (Basingstoke: Marshall Pickering, 1984)를 참고하라. 한국에서는 「현대 사회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라는 제목으로 IVP에서 출간되었다.


8. T. Dudley-Smith, John Stott: The Making of A Leader (Leicester: IVP, 1999), 217.


9. A. McGrath, Evangelism and the Future of Christianity (London: Hodder & Stoughton,1994), 10. 35-36. Cf. Derek Tidball, Who are the Evangelicals? (London: Marshall Pickering, 1994), 3~4.


10. McGrath, A Passion for Truth: The Intellectual Coherence of Evangelicalism (Leicester: Apollos, 1996), 18~20.


11. http://www.bbc.co.uk/news/uk-14320915


12. http://www.ivpress.com/cgi-ivpress/book.pl/review/code=3320


13. David Brooks, ‘Who Is John Stott?’ New York Times (November 30, 2004).


14. Catherwood, Five Evangelical Leaders, 28.


15. Stott “Charles Simeon Personal Appreciation” in J. M. Houston (ed.), Charles Simeon: Evangelical Preaching (Vancouver: Regent College Publishing, 1986), xxvii.


16. Stott, The Contemporary Christian: An Urgent Plea for Double Listening (Leicester: IVP, 1992), 13. 이러한 정신 아래 탄생한 시리즈가 BST(Bible Speaks Today) 성경 강해 시리즈다. 스토트는 이 시리즈 작업을 위해 세 가지 원칙을 고수했다. 첫째, 본문에 충실하고, 둘째, 현대 세계에 적절하며, 셋째 읽기 쉬워야 한다.


17. http://www.time.com/time/specials/packages/article/0,28804,1972656_1972717_1974108,00.html


18. Dudley-Smith, John Stott: The Making of A Leader, 259~260.


19. Stott, I Believe in Preaching (London: Hodder & Stoughton, 1982), 340.


20. http://www.christianitytoday.com/ct/2011/julyweb-only/john-stott-obi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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