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목회 현장

존 스토트, 복음주의 운동가

이창무 2016. 12. 22.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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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청어람 아카데미 양희송 대표께서 쓰신 존 스토트에 대한 회고문입니다.


존 스토트, 복음주의 운동가


John R. W. Stott, an Evangelical





존 스토트의 별세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그에 얽힌 추억을 되새긴다. 그의 책뿐만 아니라, 그와의 작은 만남과 기억이 이토록 다양하게 회상될 수 있다는 것도 경이로운 일이다. 내게도 그는 단지 책 속의 인물 이상이었다. 영국 유학 시절 그를 직접 만나 인터뷰 했던 기억도 있고(<복음과상황> 2002년 1월호에 수록), 그의 영향력이 영국 복음주의운동에 드리운 폭과 깊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실감하기도 했다.



그를 처음 접한 것은 아마도 대학 1학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읽었지만, 흔히들 접하는 신앙서적처럼 감동적인 것은 아니었고 좀 무미건조했다고 기억된다. 정작 그의 책에 맛을 들인 것은 성경공부를 위해 추천받은 <성경연구 입문>이었고, 성경 본문 공부와 묵상에 맛을 들이면서 영어공부를 겸해 선택한 그의 <산상수훈> 강해였다. 로이드존스의 장황한 스타일에 비해 그의 간명한 스타일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이어서 읽어나간 그의 강해집들은 성경연구의 어떤 기준을 잡아주었던 것 같다. 본문과 상관없는 장광설에 별 감동이 없고, 웃기는 예화들로 점철된 설교가 그닥 흥미롭지 않은 것은 거의 전적으로 그때 존 스토트의 설교집을 만나고 탐독한 때문이라 생각한다. (1995년도에 유럽 배낭여행을 갔다가 런던의 올소울즈 교회를 방문해서 그의 설교를 직접 들은 적이 있다. 영어가 서툰 내게도 그의 설교가 얼마나 정갈한 언어와 명료한 논리로 이어지던지 황홀했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론을 둘러싼 신학적 논의에 눈을 뜨게 만드는 계기이기도 했다.



대학 때부터 시작된 나의 복음주의 운동가로서의 정체성의 아마도 8할은 존 스토트의 영향일 것이다. 내가 무언가 기준과 판단이 필요하면 우선 그의 글을 찾아보았고, 언제나 도움을 얻었다. 물론, 내가 그의 일방적 추종자가 된 것은 아닌데, 종종 나는 그가 좀 더 과감했으면 했고, 그의 성경해석이 좀 더 전진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20세기를 살아온 복음주의자들 대다수에게 하나의 시금석 역할을 잘 감당해 주었다. 한국 복음주의, 특히 청년운동도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런데, 그의 영향력은 전모가 잘 전달된 것일까 묻고 싶다. 그를 탐독한 광범위한 독자군을 염두에 두고 존 스토트의 수용과정과 그 영향력을 꼼꼼히 따져보는 작업은 별도로 반드시 필요할 듯하다. 내가 이 길지 않은 글에서 오히려 말해야 한다고 느끼는 부분은 이제 그의 죽음과 더불어 서둘러 닫히고 말 존 스토트 읽기의 빈구석과 맥락을 과제로 적시해서 남겨놓아야 하지 않겠나 싶은 것이다. 나는 굳이 이 내용을 객관적이거나, 공적인 문체로 쓰기보다는 주관적이고, 사적인 성찰의 틀로 표현하는 것이 나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같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첫째, 그는 나에게 영국 복음주의 운동의 전통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최근 국내 언론 지상에 ‘복음주의’란 용어가 많이 오르내리지만, 거의 대부분이 미국적 상황과의 관련 하에서 나오는 경우들이다. 나는 존 스토트를 통해서 영국 복음주의 전통을 소개받았고, 매력을 느꼈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의 신학공부를 미국이 아니라 영국을 택한 이유도 거의 전적으로 그 영국 복음주의를 직접 호흡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종종 말하거니와, 영국 복음주의에서 배울 것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한다. 미국 복음주의에서는 그토록 희귀해진 ‘지성운동’의 면모가 영국에는 살아있고, 다양한 실험과 행동의 공간이 영국 복음주의에는 꽤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 나는 종종 사람들이 ‘영국 기독교는 죽었다’는 선언을 무책임하게 해댈 때, 사실은 한국 기독교가 아직 가보지도 못한 수준의 부흥을 경험했던 그 나라의 복음주의 전통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지에는 전혀 무지한 채 그런 주장을 하는 것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 개교회의 크기만 가지고 비교하려고 하는 이들에게 나는 영국 복음주의 운동 내부에서는 매년 부활절 기간이면 7-9만명이 모이는 ‘스프링 하베스트’ 같은 수련회가 열리고 있으며, 여름에는 1만 명이 넘는 바이블캠프들이 이곳저곳에서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싶다. 150년이 넘도록 지속되는 수련회 운동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도 기억하고 싶다. 영국 복음주의자들의 구호기금이 영국 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표적인 제3세계 구호단체 역할을 한다는 것도 짚어줘야 하리라. 그리고, 이 모든 영국 복음주의의 르네상스에 밑그림을 그린 대표적 인물이 존 스토트란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국 개신교의 성장세가 꺾이고, 무언가 갱신의 계기를 찾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영국 복음주의 전통은 다시한번 재검토 될 필요가 있다. 아직 우리는 그들로부터 배울 것을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 




둘째, 그는 나에게 ‘목회자는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영국서 공부하던 기간에 한번 그를 인터뷰 할 기회가 있었다. 미리 편지를 띄웠고, 시간을 정해 찾아가 만났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런던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교회 근처에 있는 그의 집은 저택이 아니라 여느 사람들의 집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플랫(Flat)이었다. 그는 종종 외국 유학생들이나 영국 젊은이들을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도록 하기도 했다. 자신의 저서에서 나오는 수익금은 전액 제3세계 유학생들, 특히 신학생들을 돕는 랭함파트너십(Langham Partnership)으로 들어간다. 최소한의 생활기반 외에는 사실상 거의 무소유나 다름 없는 모습이었다. 나를 만나기 전에 내가 보낸 편지를 한 번 더 읽어 보았던 듯, 그는 편지에 썼던 내 가족의 안부와 학업의 진척을 물어주었다. 자신이 만나는 사람의 눈높이에서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드문 사람이었다. 자신의 위상에 대한 자의식이나 존재감이 도대체 느껴지지 않는 소탈함이 눈물 나게 감동적이었고, 그 자체가 울림이 큰 메시지였다. 나는 목회자들이 너무 위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 바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 자신감에 가득 차 있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목회자에게 강요할 일은 아니겠지만, 존 스토트를 만나고 나오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그는 한 교회에서 60여년 간 목회를 하고 은퇴했다. 그 교회는 여전히 메가처치(mega-church)가 아니다. 그는 성공회 내의 위계질서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많은 유력한 단체나 기구에 이름을 올리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그는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잘 알뿐 아니라, 그 자리를 다른 무엇에 빼앗기지 않고 평생을 살아온 행복한 목회자였다.




셋째, 그는 복음주의자들이 ‘성경의 권위’를 존중한다고 할 때, 그것이 어떤 의미이며 얼마만큼의 무게인지를 삶에 실어 보여주었다. 그는 평생 사역 과정에 몇 번의 논란을 거쳤다. 아마도 가장 최초의 것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conscientious objection)’ 문제였을 것이다. 그는 대학진학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시기, 회심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에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따라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주의가 성경적으로 옳다고 느꼈고, 목회자후보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대체복무를 선택함으로써 군의관이었던 자신의 아버지와 심각한 가정불화를 겪었다. 대학에 들어간 후 그는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정당한 전쟁론’으로 수정함으로써 이 논쟁에서 이론적으로는 벗어나게 되지만, 이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갈등은 피하지 않았다. 그가 목회하던 초창기인 60년대에 영국 복음주의권에서는 ‘은사주의’ 논란이 일어났다. 방언과 예언 등 은사주의 현상이 그의 교회에서도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존 스토트가 어떤 입장을 내어 놓을지 궁금해 했다. 그는 1964년에 성령론에 대한 책 <성령세례와 충만>을 통해 이후 복음주의권의 표준적 견해로 여겨지는 입장을 천명함으로써 논쟁을 정돈했다. 반면 한참 후인 1988년에는 ‘자유주의자’ 데이빗 에드워즈와의 대화를 엮어낸 <복음주의가 자유주의에 답하다>에서 지금도 이슈가 되는 ‘영혼멸절론(annihilation)’을 제기함으로써 문제 제기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 견해는 복음주의 신약학자 존 웬함(John Wenham)의 영향도 있었다지만, 역시 그 나름의 성경 연구와 신학적 사유의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단순한 복음주의 ‘진영’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그런 기대를 할 때, 종종 그는 그 기대를 깨고 더 나아갔다. 혹은 반대로 더 나아가주기를 기대할 때, 단단히 머물렀다. 그는 성경이 자신을 이끈다면, 혹은 신학적 사유가 그를 밀고나간다면 기존의 생각을 바꿀 수도 있고, 가보지 않은 길도 택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진정한 지도자의 자격을 갖고 있었다. 1974년 로잔언약이 애초 예상보다 훨씬 포괄적이고, 강력한 사회참여의 내용을 담을 수 있었던 것은 그해 초 존 스토트가 직접 남미로 가서 르네 빠디야, 사무엘 에스코바르 등 남미의 복음주의자들과 대화하면서 서구 백인 복음주의자들의 협소한 시야를 넘어서고자 노력했기에 가능했던 열매였다. 그의 말년으로 오면서 그의 시야와 사고의 범위는 점점 더 확장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1999년에 낸 <복음주의의 기본진리>는 복음주의권에게 던지는 하나의 유언과 같은 책이라 볼 수 있는데, 서문에서 그는 자유주의자들, 동방교회 등에게서 우리가 얼마나 배울 것이 많고, 배워야 하는지를 결코 가볍지 않게 이야기 한다. 그의 과거 저술을 통해 그를 복음주의권의 대변자, 논객으로만 기억하던 이들의 눈에는 범상치 않은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를 복음주의 진영의 수호자로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배우고, 변화할 자세를 갖고 있었던 한 ‘제자’로 기억한다면 그보다 더 웅변적으로 ‘신실한 순종’을 배울 롤 모델은 많지 않을 것이다.



     


넷째, 그는 무엇보다 전도자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그는 복음은 자신을 위한 복된 소식일뿐 아니라, 이웃과 세상을 위해서도 그러하다는 신념을 갖고 평생 살아왔다. 그에게 복음은 기꺼이 전하고 싶은 ‘기쁜 소식’이었다. 그가 영국 복음주의권에서 일약 활동폭을 넓힌 것은 아마도 1954년 한달간 진행된 빌리 그래함의 역사적인 런던 헤링게이 전도집회 때였을 것이다. 영국 복음주의권에서 빌리 그래함에 대한 인식이 썩 호의적이지 않던 시기였는데(로이드존스도 부정적 평가를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전도집회의 대성공으로 빌리 그래함은 일약 전세계적인 복음전도자로 주목받게 된다. 그때 그는 빌리 그래함과 적극 동역하였고(이것이 1974년 로잔대회를 비롯 빌리 그래함과의 평생에 걸친 동역으로 이어진다), 그 자신도 대학생을 비롯한 지성인 층을 위한 전도자로 평생의 역할을 감당한다. 그가 현대사회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인 이유도 그것이 해명되지 않고서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내용으로 복음이 전달될 수 없다는 확신에서 비롯된다. 그가 말하는 “이중적 듣기”(double listening)은 한편으로 성경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또 한편으로는 세상의 소리를 새겨듣는 자세를 뜻한다. 그는 결코 복음전도의 우선성을 강변하면서, 세상을 읽어내고 이해하려는 더디고 힘겨운 작업을 경시하지 않았다. 사회참여는 복음전도의 시급성 때문에라도 더욱 긴급하게 수행되어야지, 복음전도를 위해 생략될 수는 없다는 것이 존 스토트가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 웅변으로 전달한 메시지이다. 





다섯째, 그는 복음주의 지성운동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잘 보여주었다. 존 스토트가 등장한 시기는 영국 복음주의권의 대약진 시기와 일치한다. 원래 복음주의자란 영국에서는 19세기 말, 20세기 초까지 비국교도(non-conformist)이자, 블루칼라층으로 대변된다. 즉,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성공회 출신이 아닌 기독교인들을 말한다. 이들은 주로 단순하고 정서에 호소하는 설교를 선호하고, 쉽게 선동되고, 체제나 권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반골기질이 있는 이들로 그려진다. 이런 전형적인 그림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확연하게 변모한다. 대학생운동을 해오던 UCCF(한국에는 IVF로 알려진)쪽에서 복음주의 성서학자들로 진용을 꾸려서 성경사전(New Bible Dictionary)을 편찬하는 등 매우 과감한 시도를 하면서 지성적 면모를 일신하는 일이 벌어진다. 아울러, 앞서거니 뒤서거니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를 졸업한 성공회(anglican) 출신의 복음주의자들이 등장했다. 마이클 그린, 제임스 패커 등과 더불어  존 스토트도 이 시기의 대표적 인물들인데, 당시 이들의 신앙강연을 듣고 자란 이들이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mcGrath) 같은 그 다음세대 인물들이다. 특히나 성경의 권위를 중시했던 복음주의권의 특성으로 인해 유능한 성서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하워드 마샬, FF 브루스, 리차드 보컴, 앤터니 티즐턴, 고든 웬함, 제임스 던, 톰 라이트 등의 등장이 복음주의권의 성서학 중시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한 세기만에 복음주의운동이 블루칼라 중심의 반지성적 대중운동이란 이미지에서, 잘 교육받은 이들이 심사숙고하며 받아들일 수 있는 지적 기반이 있는 신앙운동이란 인식을 얻게 된다. 단순히 경제적 중산층의 유입이 많아져서 복음주의자들이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는 인식이 아니라(나는 미국의 복음주의는 이 경로를 밟은 것으로 보인다), 복음주의자란 대화와 설득이 가능하고, 지적으로 존중받을 만한 신앙적 태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비쳐지게 된 것은 상당히 다른 결과를 낳는다. 



존 스토트의 일대기, 혹은 그의 저작들을 읽다보면, 그가 살아오면서 고민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나는 그의 질문이 어렵지 않게 이해되었고, 그의 대답에 잘 설득되곤 했다. 90 평생을 한결같이 걸어온 한 사람이 떠나고 난 후의 족적을 되짚어 보노라니, 이제 그가 하던 질문을 던지고, 그가 내놓을 법한 대답을 찾는 일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 생긴다. 빈자리가 커 보이고, 남겨진 몫이 무겁게 느껴진다.




양희송: 청어람아카데미 대표기획자. 전 <복음과상황>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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