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교회교육과 상담

종교중독: 또 하나의 불편한 진실

이창무 2016. 12. 19.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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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백석대학교 상담대학원 문희경 박사님이 종교중독에 관해 쓰신 글입니다.

종교 중독은 어쩌면 중독 중에서 가장 교묘한 중독일지도 모릅니다.


종교중독: 또 하나의 불편한 진실

 

문희경 박사(백석대학교 상담대학원)

 

   현대인의 삶은 전대미문의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때보다 불안, 좌절, 고립, 공허에 취약함을 안고 있다. 그 불편함들을 견디고 그래도 어렵사리 주어진 삶을 살아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알코올, 도박, 약물 등과 같이 눈에 띠는 형태의 중독에 빠지거나 일, 종교 등과 같이 눈에 잘 띠지 않으면서도 미묘한 형태의 중독에 빠져든다. 때로는 자신이 중독에 빠졌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전혀 인식도 없이 그렇게 휘둘리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일 뿐인데 중독이라니, 신앙생활을 충성스럽게 열심히 하는 것인데 중독이라고 하니 그 표현에서부터 낯선 느낌이 클 수밖에 없다.

   특히 종교중독(religious addiction)이라고 하면 그 말에서부터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다. 거기에다 영적 학대(spiritual abuse)라는 말까지 더해지면 그 거부감은 한층 증폭된다.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어쩌면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부분에 대해 ‘중독’이니 ‘학대’니 하는 말을 붙인다는 자체가 한 두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불편감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쳐왔던 성경을 조금만 차분히 다시 들여다보고 바쁘게 지나쳐만 왔던 역사의 뒤안길을 냉정하게 거슬러보면 표현의 문제일 뿐, 그 불편한 진실에 관한 것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성경과 역사가 가르쳐주는 온전한 하나님이 아니라 왜곡되고 뒤틀린 하나님에 집착하고 잘못된 현실인식으로 결국 이스라엘을 멸망에 이르게 했던 많은 종교중독자들과 영적 학대자들이 나온다. 그들의 종교에는 진리도, 생명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인간도 없었다. 선지자 이사야의 표현대로 종교의 형식은 그럴 듯하게 갖추고 있지만 하나님마저 거북해 하는 위선과 악독만이 가득했다. 예수님 당시에도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드러내기 보다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종교를 권력과 치부의 수단으로 삼고, 결국 스스로 눈먼 자이면서 눈먼 자들을 인도하려 했던 이들의 역사가 계속된다. 오늘날에도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이단과 사이비는 말할 것도 없고 정통교회의 간판을 달고서도 그에 못지않은 해로운 신앙(toxic faith)으로 신앙인들을 물들이는 이들은 적지 않다. 데이비드 존슨과 제프 반본데른이 말했듯이 그 형태가 더욱 교묘해지고 미묘해졌을 뿐 그 영향력은 훨씬 강력해졌는지도 모른다(『말씀 선포, 혹은 영적 학대』, 비전북).

   웨인 오우츠의 『신앙이 병들 때』(대한기독교출판사)에서처럼 신앙은 그 자체가 그저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신앙은 우리의 전 존재를 걸 만큼 소중하고 삶에 절대적이지만 그렇기에 그것이 병들고 해로운 형태를 띠게 되면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위험한 요소가 될 수 있다. 마치 한 잔 두 잔 마시던 술이 여러 잔이 되고 급기야 그 술이 마시던 사람을 마셔버리듯이 왜곡되고 해로운 신앙에 몰입하고 집착하고 그것에 의해 휘둘리게 되면 처음에는 그럴 듯한 느낌이 있을지 몰라도 어느 순간부터 그 종교가 우리 삶을 잠식하게 된다. 그런 신앙은 어떤 특징을 보이는가? 『해로운 신앙』(도서출판 그리심)의 저자 스티븐 아터번과 잭 팰톤은 다음과 같이 그 특징을 제시한다.

 

1)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내가 하는 행위에 달려있다.

2) 비극이 닥쳐올 때, 진정한 신자라면 그것에 대해 참된 평안을 가져야만 한다.

3) 만약 내가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은 나를 혹은 내가 기도하는 사람을 치유해주실 것이다.

4) 모든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신뢰할 수 있다.

5) 물질적 복은 영적 능력의 상징이다.

6) 하나님께 더 많은 돈을 헌금하면 할수록, 그분은 나에게 더 많은 물질을 허락하실 것이다.

7) 나는 행위로 천국에 갈 수 있다.

8) 삶 가운데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내가 지은 특별한 죄로 인한 것이다.

9) 나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어야만 한다.

10) 나는 항상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

11) 하나님은 영적인 거인들만을 사용하신다.

12) 진정한 신앙이란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를 기다리면서 그분이 행하실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13) 성경에 없는 것은 무엇이든 적절하지 않다.

14) 하나님은 나에게 완벽한 짝을 주신다.

15) 나에게는 모두 좋은 일만 일어난다.

16) 강한 신앙은 문제와 고통에서 나를 보호해줄 것이다.

17) 하나님은 죄인을 싫어하여 나에게 화를 내고 벌주기를 원하신다.

18) 그리스도는 단지 위대한 스승이셨을 뿐이다.

19) 하나님은 너무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에 나처럼 미약한 존재를 돌보실 수 없다.

20) 하나님은 그 무엇보다 내가 행복하기를 원하신다.

21) 나도 하나님이 될 수 있다.

 

   이상의 특징은 한 개인의 신앙을 특징짓는 요소로서 그 신앙의 중독성 정도를 분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신념들에 따라 종교에 강한 애착을 갖게 되면 그것은 종교중독이 되고, 영적으로 학대당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신앙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병리적인 종교에 대한 심리적 의존이 깊어지게 된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일어나는 이단 및 사이비 종교 집단의 사건은 매우 극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들은 신앙 아닌 것에 심리적으로 중독이 되어 스스로도 학대를 당하고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학대에 빠지게 하였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나 교회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고 반문할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적 학대』(생명의 말씀사)의 저자이자 사이비 집단 연구에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로널드 엔로스는 흔히 정통 교회라고 일컬어지는 교회 집단 내에서도 이러한 특징들이 나타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하였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이루어지는 영적 학대(spritual abuse)라고 하였고 이러한 현상을 보이는 교회 집단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제시하였다:

 

1) 영적 권위를 잘못 사용한다.

2) 집단원들을 조작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두려움과 죄책감과 위협을 사용한다.

3)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본다.

4) 생활 양식과 체험에 있어서 엄격한 태도를 조장한다.

5) 질문을 하지 못하게 막는다.

6) 거기서 빠져 나오기가 어렵다.

7) 경고를 남용한다.

 

   이런 집단에 매여 있다 보면, 초기에 주어지는 관심과 소속감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불안을 완화시켜주고 기분을 전환시켜주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개인의 삶을 왜곡시키고 가정을 무너뜨리고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더욱 염려가 되는 것은 기성 교회의 적지 않은 사역자들이 이런 해로운 구조 속에서 학대자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데도 스스로 자신의 상황에 대해 인식하지 못한 가운데 중독과 학대의 메카니즘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알코올 중독자가 자신이 중독자임을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런 진단을 받게 되도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면 이런 종교중독과 영적 학대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먼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종교중독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알코올이든, 도박이든, 약물이든, 최근 심각해지고 있는 인터넷이든, 중독에 빠지면 개인의 삶이 피폐해지고, 가정이 흔들리고, 인간관계가 파괴된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뭇 영혼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는”(요 10:10) 것이라면 그것은 생명의 종교이다. 이 본문에서 목회상담의 목표를 끌어냈던 목회상담학자 하워드 클라인벨이 제시했듯이 영성, 마음, 몸, 인간관계, 일, 놀이, 세계의 7가지 차원에서 전인적인 풍성함을 누리게 하는 종교는 생명의 종교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리를 병들게 하는 해로운 신앙 혹은 종교중독으로 의심해봐야 한다.

   분별과 인식은 치유의 시작이고 그 치유의 핵심에는 건강한 관계 경험이 있다. 따뜻한 만남이 있고 흐뭇한 나눔이 넘쳐나는 그런 관계 경험 말이다. 대상관계이론의 시각을 빌리자면 성장과정에서의 건강하지 못한 관계 경험은 후기의 종교 경험에 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만약 개인의 신앙 문제가 이전의 건강하지 못한 관계 경험에 의한 것이라면 문제의 해결은 그 관계의 회복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이러한 회복의 과정은 인간을 안으려 했던 하나님의 사역의 연장선상에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아주는 경험, 안아주는 환경을 제공하셨듯이(신 1:31; 사 40:11) 목회(상담)자는 종교중독의 문제를 안고 있는 내담자(교인)에게 유사한 환경과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 생각해보자. 우리가 모이는 교회에서는 이런 경험이 얼마나 일어나고 있는지. 안아주는 경험과 환경은 그 자체가 치유이기 때문 넓게는 교회가 그러한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결국 안아주는 경험과 환경 속에서 정서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재양육(reparenting)의 과정을 거쳐 가면서 종교중독에 빠진 이들은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종교중독은 신앙인인 우리에게 낯설지만 결코 멀리 있지 않았던 또 하나의 불편한 진실이다.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것 역시 이 시대의 진실일진대 나 혼자가 아닌 옆에 있는 이들과 함께 손은 맞잡고 지혜와 용기를 모아 대처해 나간다면 이 또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귀한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 될 것이다. 종교중독이라는 생소하면서도 쉽지 않은 영역이 이 시대의 아골 골짝 혹은 빈들일 수 있다면, 우리를 치유자로 부르신 그 분의 뜻을 따라 끝내 이 길도 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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