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성경신학

마가복음 2:1-12에 대한 석의의 예

이창무 2016. 12. 18.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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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1-12

1단계: 본문 선정과 개인 번역

[개역개정]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새번역]

1. 며칠이 지나서,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다. 예수가 집에 계신다는 말이 퍼지니,

2.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서, 마침내 문 앞에조차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 때에 한 중풍병 환자를 네 사람이 데리고 왔다.

4. 무리 때문에 예수께로 데리고 갈 수 없어서, 예수가 계신 곳 위의 지붕을 걷어내고, 구멍을 뚫어서, 중풍병 환자가 누워 있는 자리를 달아 내렸다.

5.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6. 율법학자 몇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한단 말이냐?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나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하였다.

8. 예수께서,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곧바로 마음으로 알아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9. 중풍병 환자에게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쉬우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려주겠다." -예수께서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집으로 가거라."

12. 그러자 중풍병 환자가 일어나, 곧바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리를 걷어서 나갔다.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라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는 이런 일을 전혀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공동번역]

1. 며칠 뒤에 예수께서는 다시 가파르나움으로 가셨다. 예수께서 집에 계시다는 말이 퍼지자

2.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마침내 문 앞에까지 빈틈없이 들어섰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계셨다.

3. 그 때 어떤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들고 왔다.

4.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가 계신 바로 위의 지붕을 벗겨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요에 눕힌 채 예수 앞에 달아 내려보냈다.

5.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6. 거기 앉아 있던 율법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7. "이 사람이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가? 하느님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중얼거렸다.

8.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알아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는 것과 '일어나 네 요를 걷어가지고 걸어가거라.' 하는 것과 어느 편이 더 쉽겠느냐?

10. 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그리고 나서 중풍병자에게

11. "내가 말하는 대로 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어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12. 중풍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곧 요를 걷어가지고 나갔다. 그러자 모두들 몹시 놀라서 "이런 일은 정말 처음 보는 일이다."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NASB]

1. When He had come back to Capernaum several days afterward, it was heard that He was at home.

2. And many were gathered together, so that there was no longer room, not even near the door; and He was speaking the word to them.

3. And they came, bringing to Him a paralytic, carried by four men.

4. Being unable to get to Him because of the crowd, they removed the roof above Him; and when they had dug an opening, they let down the pallet on which the paralytic was lying.

5. And Jesus seeing their faith said to the paralytic, "Son, your sins are forgiven."

6. But some of the scribes were sitting there and reasoning in their hearts,

7. "Why does this man speak that way? He is blaspheming; who can forgive sins but God alone?"

8. Immediately Jesus, aware in His spirit that they were reasoning that way within themselves, said to them, "Why are you reasoning about these things in your hearts?

9. "Which is easier, to say to the paralytic, 'Your sins are forgiven'; or to say, 'Get up, and pick up your pallet and walk'?

10. "But so that you may know that the Son of Man has authority on earth to forgive sins"--He said to the paralytic,

11. "I say to you, get up, pick up your pallet and go home."

12. And he got up and immediately picked up the pallet and went out in the sight of everyone, so that they were all amazed and were glorifying God, saying, "We have never seen anything like this."

[원어]

1Καὶ εἰσελθὼν πάλιν εἰς Καφαρναοὺμ δι' ἡμερῶν ἠκούσθη ὅτι ἐν οἴκῳ ἐστίν.

2καὶσυνήχθησαν πολλοὶ ὥστε μηκέτι χωρεῖν μηδὲ τὰ πρὸς τὴν θύραν, καὶ ἐλάλειαὐτοῖς τὸν λόγον. 

3καὶ ἔρχονται φέροντες πρὸς αὐτὸν παραλυτικὸν αἰρόμενον ὑπὸτεσσάρων. 

4καὶ μὴ δυνάμενοι προσενέγκαι αὐτῷ διὰ τὸν ὄχλον ἀπεστέγασαν τὴνστέγην ὅπου ἦν, καὶ ἐξορύξαντες χαλῶσι τὸν κράβαττον ὅπου  παραλυτικὸςκατέκειτο. 

5καὶ ἰδὼν  Ἰησοῦς τὴν πίστιν αὐτῶν λέγει τῷ παραλυτικῷ, Τέκνον,ἀφίενταί σου αἱ ἁμαρτίαι. 

6ἦσαν δέ τινες τῶν γραμματέων ἐκεῖ καθήμενοι καὶδιαλογιζόμενοι ἐν ταῖς καρδίαις αὐτῶν, 

7Τί οὗτος οὕτως λαλεῖ; βλασφημεῖ: τίςδύναται ἀφιέναι ἁμαρτίας εἰ μὴ εἷς  θεός; 

8καὶ εὐθὺς ἐπιγνοὺς  Ἰησοῦς τῷπνεύματι αὐτοῦ ὅτι οὕτως διαλογίζονται ἐν ἑαυτοῖς λέγει αὐτοῖς, Τί ταῦταδιαλογίζεσθε ἐν ταῖς καρδίαις ὑμῶν; 

9τί ἐστιν εὐκοπώτερον, εἰπεῖν τῷπαραλυτικῷ, Ἀφίενταί σου αἱ ἁμαρτίαι,  εἰπεῖν, Ἔγειρε καὶ ἆρον τὸν κράβαττόνσου καὶ περιπάτει; 

10ἵνα δὲ εἰδῆτε ὅτι ἐξουσίαν ἔχει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ἀφιέναιἁμαρτίας ἐπὶ τῆς γῆς λέγει τῷ παραλυτικῷ, 

11Σοὶ λέγω, ἔγειρε ἆρον τὸνκράβαττόν σου καὶ ὕπαγε εἰς τὸν οἶκόν σου. 

12καὶ ἠγέρθη καὶ εὐθὺς ἄρας τὸνκράβαττον ἐξῆλθεν ἔμπροσθεν πάντων, ὥστε ἐξίστασθαι πάντας καὶ δοξάζειντὸν θεὸν λέγοντας ὅτι Οὕτως οὐδέποτε εἴδομεν.

[개인 사역]

  1. 그가 며칠 후에 가버나움으로 돌아왔을 때 그가 집에 있다는 말이 들렸다.

  2.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였다. 그래서 거기에 더 이상 빈 자리가 없었는데 심지어 문 근처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그 말씀을 말하고 있었다.

  3. 그리고 그들이 네 사람에게 운반하게 하여 한 중풍병자를 그에게로 데려 왔다.

  4. 군중 때문에 그에게로 갈 수 없어 그들은 그 위에 있는 지붕을 제거했다. 그리고 그들이 구멍을 내었을 때 그들은 중풍병자가 누워있었던 매트리스를 아래로 내렸다.

  5. 그리고 예수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면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아들아, 너의 죄들이 용서받는다.”

  6. 그러나 서기관들의 일부가 거기에 앉아 있었고 그들의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7. “왜 이 사람은 저런 식으로 말하는가? 그는 신성을 모독하고 있다. 홀로 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8. 즉시 예수는 그들이 그들 안에서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라는 것을 그의 영 안에서 깨달으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 너희들은 너희 마음 속에 이런 것들에게 대해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너의 죄들이 용서받는다’라는 말을 하는 것과 ‘일어나라, 그리고 너의 매트리스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을 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쉽냐?”

  10. “그러나 너희들이 사람의 아들이 이 땅에서 죄들을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그가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너의 매트리스를 집어라. 그리고 집으로 가라”

  12. 그리고 그가 일어났고 즉시 매트리스를 집어 올리고 모든 사람의 눈 앞에서 나갔다. 그래서 그들이 모두 놀라고 “우리가 이와 같은 어떤 것을 본 적이 없다” 하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있었다.



본문은 한글 개역 개정판 성경에 〇를 기준으로 마가복음 21절부터 12절까지를 한 단락으로 삼았다.

개인 사역을 위해 개역 개정, 새번역, 공동 번역, 영문 NASB, 원어 헬라어 성경을 이용하여 상호 대조 비교하였다..

2절에 한글 개역판에 도라고 번역된 다른 번역 성경에는 말씀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번역되어 있다. 도라는 단어는 동양권에서 노장 사상을 연상시키는 단어이므로 배제하고 원문에 기초해서 그 말씀으로 번역하였다.

3절에 보면 새번역과 공동 번역은 네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짊어 지고 온 것처럼 묘사되어 있는 반면 개역 개정과 NASB를 보면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는데 네 사람에게 메워서 온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전자가 맞다면 함께 온 사람들은 네 명이고 후자라면 몇 명인지 확정할 수 없다. 개인 사역에서는 NASB를 따라 사람들이 네 명에게 메워 온 것으로 번역하였다.

5절에 원어 테크논을 개역 개정에는 작은 자야, 새번역에서는 이 사람아로 , 공동번역에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이 생략되었으며, NASB에서는 아들아로 번역되어 있다. 각각의 번역 마다 뉘앙스가 조금씩 다르다. 작은 자란 말은 나이가 어리다는 의미가 강하고 새번역과 공동번역에서는 중립적인 의미를 갖게 되고 NASB에서는 친밀성이 강조된다. 사역에서는 전체적인 분위기와 흐름에서 볼 때 ‘아이야 혹은 아들아’라는 표현이 적합한 것으로 보여 최종적으로 아들아로 번역하였다.

8절에 개역개정에서는 중심에, 새번역에는 마음으로 생각을 알아챘다고 되어 있으며, 공동번역에는 그저 생각을 알아챘다고만 되어 있다. NASB는 그의 영 안에서 인지했다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사역에서는 NASB를 따라 영 안에서 깨달았다는 말로 번역하였다. 이 말에 대한 별도의 신학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른 번역에서와 같이 서기관들이 말을 하지 않았지만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셨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2단계: 본문의 문학적 문맥 연구: 인접문맥과 보다 큰 문맥



본문은 마가복음 21부터 36절에까지는 이르는 더 큰 주제의 일부분이다. 이 부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예수와 기존의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갈등과 마찰이다. 그 양상이 죄사함의 문제, 세리와 죄인들과의 식사 문제, 금식 문제, 안식일 문제 등등으로 소재는 달라지지만 갈등의 대상과 원인은 대동소이하다고 볼 수 있다. 마가는 여러 개의 페리코피들을 수집하여 배열하면서 이와 같은 주제 하에서 의도적으로 이 부분에 집약하여 복음서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공생애의 초기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부분에서 이렇게 유대 종교지도자들과의 갈등이 점점 첨예하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결국 십자가에서 종교지도자들의 음모와 고발에 의해 고난 받게 되실 그 사건이 사역의 초기부터 있었던 사건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같은 사건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갈등의 원인은 결국 예수가 누구신가에 대한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수 자신께서 가지셨던 구원하는 메시야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의식이 표출되는 순간 갈등은 필연적이었고 예수께서는 이런 갈등을 굳이 회피하려고 하지 않으셨음을 볼 수 있다.



3단계: 본문의 구조 파악 (언어적 접근/linguistic approach)

1. 그가 며칠 후에 가버나움으로 돌아왔을 때 (종속절 시간)

그가 집에 있다는 말이 들렸다.

2.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였다.

그래서 거기에 더 이상 빈 자리가 없었는데 (결과절)

심지어 문 근처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그 말씀을 말하고 있었다.

3. 그리고 그들이 네 사람에게 운반하게 하여 (종속절 부대 상황)

한 중풍병자를 그에게로 데려 왔다.

4. 군중 때문에 그에게로 갈 수 없어 (원인, 이유 종속절)

그들은 그 위에 있는 지붕을 제거했다.

그리고 그들이 구멍을 내었을 때

그들은 중풍병자가 누워있었던 매트리스를 아래로 내렸다.

5. 그리고 예수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면서 (종속절 부대 상황)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아들아, 너의 죄들이 용서받는다.”

6. 그러나 서기관들의 일부가 거기에 앉아 있었고 (적대적 상황으로 전환)

그들의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7. “왜 이 사람은 저런 식으로 말하는가?

그는 신성을 모독하고 있다.

홀로 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8. 즉시 예수는 그들이 그들 안에서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라는 것을

그의 영 안에서 깨달으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 너희들은 너희 마음 속에 이런 것들에게 대해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너의 죄들이 용서받는다’라는 말을 하는 것과

‘일어나라, 그리고 너의 매트리스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을 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쉽냐?”

10. “그러나 너희들이 사람의 아들이 이 땅에서 죄들을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명사절)

알게 하려고”

그가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너의 매트리스를 집어라.

그리고 집으로 가라” (병렬 명령문)

12. 그리고 그가 일어났고

즉시 매트리스를 집어 올리고

모든 사람의 눈 앞에서 나갔다.

그래서 그들이 모두 놀라고

“우리가 이와 같은 어떤 것을 본 적이 없다” 하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있었다.



4단계: 본문의 내용 파악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있는 한 집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실 때였다.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이 많은 군중으로 인해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지붕에 구멍을 내어 병자를 예수 앞에 달아 내렸다. 예수는 이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셨다. 서기관들은 예수의 죄사함 선포가 신성 모독죄에 해당한다며 비난하였다. 이에 대해 예수는 자신에게 죄 용서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중풍병을 그 자리에서 치유하시는 이적을 통해 입증하셨다. 이 사건을 목격한 무리들은 매우 놀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5단계: 본문의 구성 파악 (문학적 접근/literary approach)



첫째, 2절에서 ‘심지어 문 근처에도 없었다.’는 표현은 현재 집에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문 근처라는 것은 사람이 많이 있을 경우라도 빈 공간이 생기기 마련인 곳인데 그 문 근처에서도 빈 공간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언급함으로 붐비는 상황을 강조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것이 실제적인 상황인지 혹은 과장된 표현인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기대 효과 측면에서 보면 과장법적 표현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둘째, 9절에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질문하신다. “중풍병자에게 ‘너의 죄들이 용서받는다’라는 말을 하는 것과 ‘일어나라, 그리고 너의 매트리스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을 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쉽냐?” 겉으로 보기에는 어느 것이 더 쉬운지를 질문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질문의 의도는 답변을 얻고자 한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답변을 듣기도 전에 바로 다음 말씀을 이어가신다는 점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이 질문에 답을 굳이 하지면 ‘어느 것도 쉽지 않고 모두 다 어렵다.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다.’ 정도가 될 것이다. 결국 불가능해 보이는 두 가지를 병렬 제시하고 비교해 보도록 질문함으로써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불가능성에 대해 더욱 깊이 빠져들도록 하는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종의 대조법의 문학적 효과가 사용된 부분이다.

셋째, 11절에 예수께서는 ‘일어나라, 너의 매트리스를 집어라. 그리고 집으로 가라’고 명령하신다. 여기서 목적은 중풍병자의 치유를 보이고자 하심이다. 그렇다면 중풍병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연속하는 세 개의 명령을 통해서 병자의 치유가 확실하게 일어났다는 것을 보이고자 하심이다. 일어남과 매트리스를 집음과 집으로 감은 점점 그 강도가 강하여 지고 있다. 결국 이 부분에서 점층법적인 문학 표현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6단계: 본문의 주제와 관련된 중요 단어 연구(word studies)



첫째, 중풍병자. 중풍병은 뇌 혈관이 막히거나 출혈을 일으켜 신경에 마비를 일으키는 질병이다. 마비를 일으킨 정도에 신체의 일부, 반신 혹은 전신에 마비가 올 수 있다. 본문에 중풍병자는 침상에 누운 채로 이동한 것으로 보아 전신 마비에 해당하는 중증의 병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심각한 질병에 걸린 경우 유대인들은 이 병이 죄로 인한 저주의 결과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욥을 찾아 왔던 세 친구들의 말이나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사람에게 가졌던 제자들의 질문이 이와 같은 생각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이 중풍병자 역시 자신의 불행이 자신이 저지른 죄로부터 왔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죄책감으로 인해 짓눌리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이 점에서 예수께서 중풍병 치유에 앞서 죄사함을 선포하신 것은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신성 모독. 원래적인 의미는 분수에 지나치도록 함부로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나 말을 지칭하는 말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실 때 종종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 혹은 대제사장들로부터 신성을 모독했다는 혐의로 비난을 받으셨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짐승이 하나님을 훼방하는 것을 가리켜 동일한 말을 사용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사함을 어찌 인간인 예수가 선포할 수 있느냐는 의미에서 서기관들로부터 비난을 받으신 이유가 신성 모독이었다. 당시로서는 이 일로 돌에 맞을 수도 있는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

셋째, 사람의 아들. 구약에서는 단순히 사람을 뜻할 때 인자라고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선지자를 인자라고 부르기도 했다.(에스겔서)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키실 때 이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다.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로 호칭하실 때는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실 메시야를 가리키는 다니엘서의 인자를 염두에 두신 것으로 보인다.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설령 메시야라 하더라도 죄사함의 권세는 그에게 속하지 않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인자이신 자신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증거하신다.



7단계: 역사적-신학적 정황 연구(historical-theological context)



첫째, 죄 용서의 방법. 구약 시대에서 죄 사함을 받는 길은 제사 제도였다. 제사를 통해 죄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했다. 먼저는 제물이 필요했다. 또한 제물을 가지고 반드시 성전(성막)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 제물은 제사장의 중보 사역을 거쳐서 하나님께 드려져야만 했다. 이는 모세의 율법을 통해 규정된 것이었다. 그런데 본문에는 죄사함의 조건이 되는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도 만족을 시키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장소는 성전도 아니며 제사장도 없고 제물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죄사함을 선포하시자 서기관들은 이에 대해 마음 속으로 분명한 반대를 말하여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마가는 예수께서 죄사함의 모든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분임을 암묵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자기에게 나오는 예수를 향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외쳤다. 이는 곧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세상 죄를 속할 제물로 드리실 사건과 깊숙이 관련을 맺고 있다. 또한 예수께서는 ‘성전을 헐라 사흘만에 다시 세우리라’는 말씀을 통해 자신의 성전됨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 되심을 증거하고 있다. 결국 예수 자신께서 제물도 되시고 성전도 되시고 제사장도 되시므로 예수 안에서 얼마든지 죄용서의 길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둘째, 예수의 신성. 본문은 예수께서 자신의 신성에 대한 분명한 자의식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서기관들이 말한 바 하나님 외에는 죄사함의 권세를 갖지 못한다는 말에 대해 예수께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셨다. 문제는 예수께서 삼위일체 중 한 위격이신 성자이시라는 것을 그들이 모르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중풍병자 치유 사건이라는 이적을 통해 예수는 자신의 신성을 입증하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성경에 나타난 계시 중 하나로 본문을 이해하고 취급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정당하다고 본다.



8 단계: 본문의 책-(intra-textual studies) 및 책-(inter-textual studies) 연구



첫째,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 온 사람들에게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풍성한 관련절들을 발견할 수 있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나온 사람들은 타인의 집의 기물을 파손하고 집회를 방해한 무례를 범했지만 예수께서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나 비난을 하지 않으시고 오직 그들의 믿음만을 보시고 병자에게 죄사함과 치유를 선포하셨다. 이와 관련된 구절들을 복음서 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0: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8: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9:29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7: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7: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17: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18:42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위에서 본 것과 같이 공관 복음서 내에서는 믿음으로 예수께 나오는 것에 대해 예수께서 깊이 인정하시고 이에 기초해 능력을 베푸시는 일을 매우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는 이와 같은 구절이 전혀 없다는 점도 기억해 볼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공관 복음서의 관점은 사도행전에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14:9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둘째, 본문에서처럼 예수께서 자신에게 나온 사람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시는 장면은 흔하지 않지만 누가복음에서는 향유을 부은 여인에게 직접적으로, 요한복음에서는 38년 동안 병에 걸렸던 자를 고치시는 곳에서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7: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셋째, 동일한 마가복음 내에서 대제사장 집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심문 받으실 때 신성 모독으로 고발 당하는 장면을 발견한다. 이에 대한 형벌이 사형에 해당한다고 이구동성으로 고발되는 모습에서 본문이 가지는 심각성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요한복음에서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자신을 증거하심으로 인해 신성 모독으로 비난 받는 본문과 유사한 장면을 발견할 수 있다.

14:64 그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10: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넷째, 시편 32편과 이사야서 43장을 통해 죄사함을 베푸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시라는 점이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

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다섯째,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사람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듣지 않고도 아시는 분임을 증거하고 있다. 본문에서도 서기관들의 생각을 그의 영 안에서 다 알고 계셨다.

2:25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9단계: 본문의 해석 에세이 (interpretive or explanatory essay) 쓰기

1~2

예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에 계실 때였다. 그가 한 집에 들어가셨다. 그가 집에 계신다는 소문이 났다. 이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얼마나 많이 모였나 하면 문 앞에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마가복음 1장에 보면 예수께서 병자를 고쳐 주시고 귀신을 내어 쫓은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께 병도 고침 받고 여러 가지 실제적인 문제들을 해결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말씀을 전하셨다. 예수께서는 다른 일보다 말씀 전하시는 일에 우선 순위를 두셨다. 병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은 그가 전하는 말씀이 진리임을 증명하는 증거들일 뿐이었다.

3~4

이때 지각생들이 있었다. 중풍병자 한 사람을 메고 온 사람들이다. 아무래도 혼자 오는 것이 아니라 병자를 들 것에 메고 오느라 늦었던 모양이다. 중풍병은 뇌에서 혈관이 터져서 생겨서 마비가 오는 병이다. 침상에 누운 것 보니 상태가 심각했다. 이 병자의 나이는 예수께서 소자라고 칭하신 것을 보니 젊은 사람인 것 같다. 나이도 어린데 온 몸이 마비되었으니 친구들이 보고 매우 안타깝게 여겼을 것이다. 그들도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예수께 나아가기만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래서 서둘러 온다고 왔는데 와서 보니 사람들이 집에 꽉 차 있었다. 보통 사람 같은 그 자리에 기다리든지 다음을 기약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고 옥상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걷어 내고 구멍을 내었다. 거기로 침상을 달아 내렸다. 이런 발상을 한 것도 놀랍지만 그대로 실행했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여기는 남의 집이었다. 또 안에서는 집회 중인데 결과적으로 집회를 방해했다. 늦게 와서 예수 바로 앞 자리로 가겠다니 예의가 없다. 사람들이 보기에 결코 호평을 받지 못하고 악평을 들을 수 밖에 없는 비윤리적인 행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5

그런데 예수께서는 꾸짖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흐뭇하게 여기시고 감동을 받으신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거친 행위 속에서 믿음을 보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반응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어떻게 보시느냐’이다. 예수의 관점은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이다. 그리고 곧이어 예수께서는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어찌보면 생뚱 맞은 말씀이었다. 여기서 병과 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원래 창조된 이 세상에는 병이 없었다. 아담이 죄를 범한 이후에 병이 생긴 것이다. 죄의 결과 죽음이 왔는데 그 죽음의 일부가 병이다. 질병의 문제가 해결되려면 먼저 죄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한다. 죄가 해결되면 그 다음 순서로 죄의 결과 죄의 저주인 죽음 문제가 해결되고 질병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또한 예수의 치유는 전인적인 치유이다. 육체의 질병이 치유되더라도 영혼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진정한 치유가 아니다. 그 중에서도 죄의 용서가 먼저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중풍병자 마음 속에 응어리졌던 죄책감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을 주시는 메시야로서 자신을 나타내시고자 하셨다.

6~9

이 말씀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서기관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죄를 사할 권세가 없다고 믿었는데 예수의 선포는 결국 신성 모독이라고 보았다. 이들이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하나님 한 분만 죄사함을 선포할 수 있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몰랐다. 이때 예수께서는 네 자리를 들고 가라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중에 어느 것이 쉽냐고 물으셨다. 물론 둘 다 어렵다. 사람이 할 수 없는 말이다. 둘 중 하나가 참이면 나머지도 참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죄 문제를 제물을 들고 성전에게 나아가 제사장을 통해 해결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성전도 제사장도 제물도 없이 죄사함을 선포하셨다. 예수께서는 자기 육체를 가리켜 성전이라고 하셨다. 히브리서를 보면 예수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라고 하였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다. 예수께서는 성전도 되시고 제사장도 되시고 제물도 되신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홀로 죄사함을 얼마든지 선포하실 수 있다. 죄사함의 선포는 오직 예수만이 하실 수 있다. 인간은 예수 안에서 죄의 굴레와 속박으로 벗어나 자유를 경험한다.

10~12

예수께서는 자신이 죄사함의 권세자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중풍병자에게 치유를 선포하셨다. 그러자 예수의 말씀대로 중풍병자는 그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가는 행위를 통해 즉각적인 치유를 나타내었다. 이 이적을 통해 예수께서는 죄사함을 선포하실 수 있는 분이요 신성을 가지신 분으로서 자신을 입증하셨다. 이 사건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송하였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좀 더 명확하고 진전된 인식에까지 이르게 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서기관들과의 관계에서 적대감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어서 이 사건의 여파가 십자가 수난 사건에 까지 이어지게 된다.



10단계: 본문의 주제문(thematic statement) 작성



 예수께서는 이 땅에 죄사함을 주시기 위해 오신 메시야이시다. 죄사함이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화의 문제 해결하고 화해시키는 사역이다. 이 죄사함의 결과 죄로 인해 생긴 저주의 결과들 그 중에 특별히 질병의 문제도 궁극적으로 해결되게 된다. 구약 시대에는 이 죄사함의 화해 사역을 이루기 위해 제물, 성전, 제사장이란 세 가지 요소가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이곳에 오셨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요소가 더 이상 요구되지 않는다. 예수 자신이 제물이자 성전이자 제사장이 되시기 때문이다. 죄사함과 치유라는 하나님 나라의 복을 받는 자들은 예수께 대한 신실한 반응 즉 믿음으로 나아오는 사람들이다.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이를 계시하시고자 믿음으로 나온 중풍병자의 질병을 치유하심으로 죄사함의 권세자이심을 입증하셨다. 그러나 이일로 말미암아 서기관들과 같은 기존 종교 지도자들과 갈등과 반목이 시작되었으며 이 사건의 그림자가 결국 십자가 수난에까지 이어지게 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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