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사기

이스라엘을 구원한 벌레를 아십니까?

이창무 2015. 4. 30.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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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이스라엘을 구원한 벌레를 아십니까?

본문 : 사사기 10장 1절, 2절

"아비멜렉의 뒤를 이어서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그가 에브라임 산지 사밀에 거주하면서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이십삼 년 만에 죽으매 사밀에 장사되었더라"


혹시 야구를 좋아하십니까? 흔히들 야구를 가리켜 투수 놀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야구에 있어서 투수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어릴 때 동네에서 야구 시합을 하면 늘 서로 자기가 투수를 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분쟁이 있었습니다. 반면 아무도 안 하겠다고 해서 분쟁이 생기는 자리가 있는데 바로 포수입니다. 포수는 쭈그려 앉아서 폼도 안 나고 별 하는 일도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구를 좀 깊이 아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포수가 승패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좋은 포수는 상대편 타자의 강점과 약점을 꿰뚫어 알고 거기에 맞게 투수를 리드해 줍니다. 좋은 투수는 좋은 포수가 뒷받침을 해 주어야 빛을 발합니다. 사사기에는 여러 명의 사사들이 등장합니다. 그들 중에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사들이 있습니다. 야구로 치면 투수 같은 사사들입니다. 그러나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포수 같은 사사들도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 하나인 사사 돌라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시간 그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본문 1절은 '아비멜렉의 뒤를 이어서'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누구입니까? 아비멜렉은 그 유명한 사사 기드온의 아들입니다. 기드온은 사사기에서 전반부와 후반부를 가르는 분수령에 놓인 사사입니다. 사사기 전반부에 등장하는 사사들은 옷니엘, 에훗, 드보라와 같이 인격과 신앙 그리고 사역에 있어서 모범이 될 만한 사사들이 등장합니다. 반면 사사기 후반부에 등장하는 입다나 삼손은 문제가 많은 사사들입니다. 그 중간에 등장했던 사사 기드온은 또 다시 그의 인생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의 기드온은 큰 용사로 부르심을 받아 삼백명의 군사를 이끌고 미디안 족속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냅니다. 참 대단합니다. 그런데 후반부의 기드온은 변합니다. 과거 자기 집에 있던 우상을 도끼로 찍어 내던 기드온이 이제 스스로 에봇을 만들어 우상숭배를 조장합니다. 수많은 첩을 두고 무려 70여명의 아들을 얻었습니다. 기드온은 왕이 되기를 거절하였지만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는 삶을 삽니다. 그의 아들 중에 아비멜렉이 있었습니다. 아비멜렉은 '내 아버지는 왕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아들의 이름을 통해 기드온이 은연 중에 자신을 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이 죽은 후 아비멜렉은 아버지가 못 다 이룬 꿈을 완수하겠다는 듯이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야심을 품습니다. 교활하게도 자기 고향인 세겜 사람들의 지역 감정을 부추겨 권력 기반으로 삼습니다. 또한 이복 형제들 70명을 바위 위에서 죽이는 끔찍한 학살극을 벌입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지 겨우 3년 만에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 버립니다. 분노에 휩싸여 제 정신을 잃은 아비멜렉은 세겜 주변 성읍을 마구잡이로 공격합니다. 그 와중에 아비멜렉은 한 여인이 망대 위에서 던진 돌에 맞아 머리가 깨져 죽고 맙니다. 왕이 되고자 했던 거대한 야심을 품었던 아비멜렉의 최후 치고는 너무 황망하고 어처구니 없는 씁쓸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은 그렇게 갔지만 그가 남긴 상처와 후유증은 매우 깊었습니다. 아비멜렉에 의해 학살 당한 70명의 형제들의 가족들 가슴 속에는 피맺힌 한이 있었습니다. 아비멜렉에게 붙었다가 되려 화를 당한 세겜 사람들도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세겜 사람들 뿐 아니라 아비멜렉의 공포 정치 하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 속에도 깊은 어두움의 그림자가 덮였습니다.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으로 상징하는 비극적 시대가 갑작스럽게 끝이 난 후 이 상처 투성이, 만신창이가 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누가 어루만져 주었습니까? 1절은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났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돌라'라는 이름을 가진 사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아마 모르셨던 분도 많을 것입니다. 돌라는 그리 유명한 사사가 아닙니다. 사사기에서 소사사라고 불리는 여섯 명의 사사 중의 한 사람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겨우 두 절로만 언급된 이 사사에게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돌라'라는 이름의 뜻은 벌레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사사 돌라는 이름까지도 별 볼 일이 없습니다. '내 아버지는 왕이시다'라는 뜻을 가진 아비멜렉과 참 대조가 됩니다.


벌레처럼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사람, 특별한 야심도 없고, 군사적 재능도 없던 돌라가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어났다'는 표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사기 다른 곳에서는 사사가 등장할 때 일으켜 세워졌다는 수동형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돌라의 경우는 능동형으로 일어났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암시해 주는 바가 무엇일까요? 돌라가 아비멜렉의 통치 하에 신음하던 백성들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스스로 일어났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수많은 번민의 날을 보내었을 것입니다. '이 벌레 같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벌레 같은 나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실제로 그는 일어났습니다. 돌라의 경우는 다른 사사들과 달리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었다는 표현도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다른 사사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을 보내시고 돌라에게는 보내시지 않으셨을까요? 돌라가 다른 사사에 비해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서 그럴까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사들의 경우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는 신비한 체험이 없이는 스스로 일어날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에 의해 강권함으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돌라는 스스로 일어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굳이 하나님의 영을 통해 강권적으로 일으키실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일어난 돌라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본문은 돌라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사기에서 구원은 전쟁의 승리를 통해 대적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켰을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어떠한 대적의 이름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전쟁을 벌였다는 기록도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돌라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는 말에서 구원은 어떤 구원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는 돌라가 아비멜렉이 남긴 상처와 고통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뜻입니다. 아비멜렉이 할퀴고 간 자리에 약을 바르고 무너진 공의와 법도를 다시 세울 사람이 필요했고 그 일에 응답한 사람이 바로 돌라입니다. 본문은 돌라가 사사로서 이렇게 이십삼 년을 섬기고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십삼 년이라면 적지 않은 기간입니다. 여호와께서는 혼란과 무질서의 아비멜렉 시대에서 이후 돌라의 시대 23년을 이어지게 하심으로 질서와 평화를 회복하도록 하셨습니다. 돌라는 막장으로 치닫던 시대에 잠시 숨 돌릴 틈을 열어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긍휼의 목자였습니다. 돌라의 사역은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외적을 물리치는 구원은 표시가 잘 나고 주목을 받기 쉽지만 내부의 질환을 해결하는 사람은 잘 드러나질 않습니다. 열심히 일을 잘 해도 인정 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잘 해야봐야 본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돌라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노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아비멜렉이 곳곳에 득시글 득시글하는 세상입니다. 가정에서 아비멜렉이 있습니다. 학교에도 아비멜렉이 있습니다. 직장에도 아비멜렉이 있고 군대에 가면 아주 많습니다. 정치인 들을 보면 딱 하는 짓이 아비멜렉과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아비멜렉들 아래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설령 아비멜렉의 손에서 벗어났다 할지라도 그가 남긴 상처를 부여잡고 고통합니다. 한 고대생이 안녕들 하십니까? 라고 물었고 여기저기서 안녕하지 못하다고 고통을 호소하였습니다. 누구 그들을 도울 수 있습니까? 단 삼백 명만을 데리고 적진 한가운데 뛰어들어 놀라운 반전의 승리를 가져왔던 기드온 같은 대단한 영웅일까요?  놀랍게도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벌레라고 칭했던 돌라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아이작 와츠가 지은 찬송가 143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우리도 다 돌라처럼 별 볼 일 없는 벌레 같은 존재들 아닙니까? 가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능력도 없습니다. 스스로 보기에도 한심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벌레 같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제 또 주님은 이 벌레 같은 우리를 부르셔서 이 고통 받는 시대를 구원할 목자로 삼으셨습니다. 목자의 삶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고생을 해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어렵습니다. 20년, 30년을 헌신한다해도 후대에 그 이름은 곧 잊혀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성경이 다른 화려한 사사들에게 썼던 표현 그대로 '돌라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노라'라고 기록했듯이 하나님은 이 시대 양들을 향한 목자들의 섬김을 결코 가볍게 여기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이작 와츠의 찬송가 143장은 이렇게 끝납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다음 주부터 전국 학생 수양회가 있습니다. 전국에서 모인다고는 하지만 200여명 밖에 되지 않습니다. 200 명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학생이 뭘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돌라는 한 사람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200명은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돌라가 되면 200개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벌레라도 들어 쓰셨습니다. 아니 스스로 벌레라고 여기며 몸 밖에 드릴 것이 없는 작은 자를 들어 쓰십니다. 이번 학생 수양회가 이 시대를 구원할 돌라와 같은 목자들을 세우는 수양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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