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사기

세대를 이어 하나님을 섬기라

이창무 2015. 4. 30.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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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를 이어 하나님을 섬기라


6.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들의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 7.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8.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9.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10.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사사기 2:6-10)


사사기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 중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입니다. 사사기 전반부는 그럭 저럭 봐줄만 합니다. 그러나 후반부로 넘어가면 막장으로 치달아 갑니다. 그 중에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두 가지 에피소드는 막장 중의 막장입니다.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우리가 사사기 공부를 할 때 고등학생도 이 말씀을 듣게 되겠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였습니다. 이 부분을 읽다 보면 과연 이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이 맞는가 싶습니다.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부여 받은 민족이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고 오히려 그저 그런 흔한 민족들보다도 더 엉망진창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처음부터 이런 모습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사기 바로 앞에 있는 여호수아서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물론 백성들이 완전무결하지는 않았습니다. 크고 작은 실수들이 있었고 허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백성들은 우상 숭배를 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가나안 정복이라는 사명을 등에 업고 하나님의 말씀과 지시대로 전진하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오늘 본문 6절과 7절이 이 사실을 말해 줍니다.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들의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길갈에서 온 백성이 할례를 행하여 자신을 정결하게 하였습니다. 요단강을 육지 같이 건너는 제 2의 출애굽 사건을 경험하였습니다. 백성들은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불리던 여리고성 주위를 일곱 번 믿음으로 돌아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아간의 범죄를 눈감아주지 않고 확실하게 징계하였습니다. 이미 자기 땅을 차지한 지파들도 힘을 모아서 다른 지파들이 땅을 얻을 수 있도록 함께 싸웠습니다. 백성들의 믿음은 살아 있고 헌신이 있었고 충성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변했을까요? 왜 백성들은 업그레이드는커녕 현상 유지도 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끝없이 추락했을까요? 왜 백성들은 위대한 하나님의 구속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더럽고 추한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을까요? 본문 8절부터 10절은 그 원인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8절과 9절은 여호수아의 죽음과 장사를 언급합니다. 여호수아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대로 모세의 뒤를 이어 가나안 정복 전쟁을 진두지휘한 지도자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갔을 때 갈렙과 더불어 유일하게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믿음의 보고를 했던 인물입니다.출애굽의 역사를 모세의 곁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경험했던 역사의 산 증인이었습니다. 이런 여호수아도 세월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백십 세나 살면서 장수했지만 결국 죽고 장사되었습니다. 이제 백성들 중 누구도 여호수아만큼 카리스마와 권위를 가지고 이끌만한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여호수아 사후 이스라엘은 각 지파를 대표하는 장로들의 집단 지도 체제 형식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장로들도 역시 곧이어 여호수아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여호수아와 함께 동고동락하면 산전수전을 다 겪었던 세대가 그 조상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여호수아 세대는 역사의 무대의 퇴장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다음 세대가 그 바톤을 이어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세대는 이전 세대와 결정적인 차이점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10절 하반절에 말씀하시는 바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말이 다음 세대가 하나님을 전혀 몰랐다는 뜻일까요? 그렇지는 아니었을 것이었습니다. 다음 세대들도 어릴 적부터 부모님을 따라서 제사를 드렸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리가 없습니다. 여기서 성경이 다음 세대가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부모님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도 알지 못했다는 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음 세대가 앞 세대에 있었던 출애굽 사건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시혼과 옥을 광야에서 물리친 사건도 잘 알았습니다. 다음 세대들은 국사 시간에 이런 문제가 나오면 만점을 맞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면서 성장한 세대였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알지 못했다는 말은 그 일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식은 있었지만 체험한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다음 세대는 간접적으로 들어서 알고 있을 뿐이지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듣고 만져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랬었구나’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정도일 뿐이었습니다. 마음 속 깊이 뼈 속에까지 새겨진 그런 앎이 아니었습니다.


다음 세대가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인격적으로 아는 일이 없었을 때 그 결과가 어떠합니까? 결과는 비극이었습니다. 그 비극의 모습은 가장 먼저 불순종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육신의 소욕을 이기고 말씀에 순종할 힘이 없었습니다. 신앙 생활의 동력이 사라졌습니다. 그 다음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이 원하는 대로 사는 삶이 따라왔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주변 민족들을 통해 백성들을 징계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정신을 차리도록 경책하셨습니다. 그러나 효과는 잠시 뿐이었습니다. 마치 태양에서 멀어지면 땅이 식어버리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열정도 간절함도 다 사그라져 갔습니다. 결국에는 각자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무법한 백성, 말씀과는 무관한 민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곧 사사기 시대입니다.


요즘 들어 부쩍 저를 사로잡고 있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경험의 차이는 말로서 다 메꿀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말을 통해서 서로의 느낌과 생각을 소통하고 공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말로서 완전한 소통을 이룰 수 있을까요? 어느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서로 경험이 다른 사람이 말로서 과연 어디까지 공유가 가능할까요? 평생 동안 눈이라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프리카 사람에게 눈에 대해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 얼마나 알 수 있을까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하나님께서 내 인생 가운데 행하신 큰 일에 대한 경험을 말로서 전달한다고 할 때 모든 내용이 충분히 전달되고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는 극적인 회심을 한 케이스입니다. 본래 안티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목자님을 무신론자로 만들려고 성경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 얍복강 나루터의 야곱처럼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또한 제가 학창 시절을 보낸 80년대 말, 90년대 초는 엄청난 제자 양성 역사가 일어나던 때였습니다. 당시는 엄청난 줄도 모르고 그저 당연한 줄로 알았었습니다. 여름 수양회에 칠백명이 참석하고 바이블 카페의 전신인 아카데미를 하면 목자가 두 명인 요회에 학생양들이 열두세명이 참석하곤 했습니다. 철의 장막, 죽의 장막을 뚫는 선교 역사가 있었습니다. 현재 사십이 넘는 대부분의 목자님들은 이와 같은 드라마틱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체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세대와 자녀들을 보면 이 같은 경험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장 제 자녀들만 봐도 성경에 대해 아는 것도 많고 들은 적도 많지만 저처럼 구원의 은혜에 대한 뜨거운 감격은 없습니다. 제가 돕고 있는 젊은 리더들을 보면 과거 선배들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한 사람의 양을 끈질기게 붙들고 씨름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아무리 과거의 내 경험을 이야기한다 해도 머리만 끄덕일 뿐이지 가슴으로까지는 전달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다음 세대, 나와는 다른 세대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앎도 당연히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보통 봅니다. 우리 모임이 시작된 61년부터 91년까지 30년, 61학번부터 91학번 사이에 계신 분들 중에 이미 연로하신 분들도 있고 주님 곁으로 가신 분들도 계십니다. 꼭 생물학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때가 되면 다음 세대에게 주도권을 넘겨 주는 것이 당연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시대에 맞게 역사를 계승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염려스러운 일은 앞선 세대의 아름답고 고귀한 경험, 하나님에 대한 생생하고도 인격적인 체험,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놀랍고도 기이한 이야기들이 망각된 채로 세대가 바뀌어 버리는 일입니다. 앞선 세대가 부족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미성숙한 측면를 결코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음 세대가 반드시 이 부분들을 보완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앞선 세대의 이 고귀한 경험들을 계속 이어가지 않느다면 이 또한 큰 비극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번에 요회가 개편되었습니다. 그 개편의 원칙 중에 다양한 세대가 같은 요회 안에 골고루 분포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원칙은 세대 간의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원칙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삼 대가 한 지붕 안에 모여 신앙과 성경 스토리를 전수했던 구약 백성의 전통을 잇는 아름다운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앞선 세대는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경험과 하나님의 놀라운 스토리를 다음 세대에 전수할 의무가 있습니다. 다음 세대는 앞선 세대로부터 센터 건물과 프로그램을 전수 받기에 앞서 바로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배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사사 시대의 비극을 피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 전체는 한 세대의 하나님 경험이 다음 세대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단절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임은 초창기 장막터를 넓히는 수평적인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대해 많은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수직적인 하나님 나라의 계승 역사입니다. 우리가 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후배들과 2세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바로 이 일을 위해 우리는 기도를 쉬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세대를 넘어 생생하게 전달되고 더욱 풍성해 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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