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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믿음을 지키는 자
    설교/요한계시록 2016.08.22 12:13

    요한계시록 제 12 강


    믿음을 지키는 자 


    말씀; 요한계시록 13:1 - 14: 20 

    요절; 요한계시록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시록 12장에서 용으로 상징되는 사단이 여자로 상징되는 교회를 공격하려다가 실패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제 용은 바다와 땅에서 짐승을 불러 들여 여자의 남은 자손인 교회와 후반전을 도모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이 땅에서 용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두 짐승과 치열한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짐승과의 전쟁에서 성도들에게 필요한 인내에 대해 배우고, 인내한 성도들이 누리게 될 최후 승리를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성도의 인내와 믿음 (13장) 


    1절을 보십시오.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옵니다. 그 모습이 어떠합니까? 짐승은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었습니다. 그 뿔 하나하나에 왕관을 쓰고 있었고, 그 머리 하나하나에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붙어 있었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습이 아닙니까? 바로 앞에서 본 용의 모습과 거의 흡사합니다. 아들이 아비를 닮듯이 이 짐승은 용을 꼭 빼어 닮았습니다. 모습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본성까지도 한결같이 닮아 있었습니다. 또한 짐승의 모습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았습니다. 이 짐승은 표범처럼 날쌔고 곰처럼 힘이 세고 사자처럼 용맹스러웠습니다. 마치 맹수 종합 선물 세트를 보는 듯 합니다. 하나도 상대하기가 벅찬데 셋이 한 몸에 있으니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입니까? 이 짐승은 로마 황제 더 나아가서는 적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때로는 군대나 경찰을 동원하여 반대자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합니다. 이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케 하는 두려움을 주는 세상 권세자들입니다. 


    2절에 보면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짐승에게 주었다고 했습니다. 마치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 영광과 권세를 주셨듯이, 사단도 능력과 권세를 이 짐승에게 줍니다. 이는 명백한 표절 행위입니다. 사단의 표절 행위는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짐승이 한 가지 깜짝쇼를 보여줍니다. 이 짐승의 머리 가운데 하나가 치명상을 입은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곧 그 치명적인 상처가 다 나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표절했겠습니까?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짝퉁 기독교, 유사 복음까지 만들어 내는 사단의 하나님 따라하기에 기가 찰 지경입니다. 사단은 한 마디로 짝퉁 대마왕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어두운 세상 사람들은 이것이 짝퉁인지 정품인지 분별을 하지 못합니다. 그저 깜짝 놀라서 이 짐승을 따르고 짐승에게 경배를 합니다. 당시 로마 황제인 네로가 죽었을 때 로마 제국이 붕괴되는 것이 아니냐는 큰 위기감을 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후 도미티안 황제가 등극하여 오히려 이전보다 로마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황제를 향해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누가 로마 황제와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이와 같은 경배와 찬양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돌려져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사단을 등에 업은 적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만 받으셔야 하는 경배와 찬양을 중간에 가로채서 자기에게 돌립니다. “하일! 히틀러!”(‘하일’은 ‘만세’ 혹은 ‘찬양하라’는 뜻의 독일어입니다) 히틀러가 그랬고, 일본 천황도 그랬고,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이 또한 그랬습니다. 탈북자들의 공통된 증언에 따르면, 남한에 와 기독교를 접하고 북에서 배운 주체사상과 너무 흡사하여 깜짝 놀란다고 합니다. 사단은 인간이 종교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참된 종교인 기독교를 없애 버리려고 각종 거짓 종교, 짝퉁 기독교를 마구마구 찍어내서 세상에 퍼뜨립니다. 또한 사단은 사람들이 복음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하려고 비방이라는 비겁한 수단을 이용합니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용에게서 하나님과 교회를 비방하라는 사명을 받습니다. 그래서 짐승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 기간에 줄기차게 교회를 비방할 것입니다. 초대 교회 때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식인종이다’하는 비방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찬을 나눌 때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고 하기 때문에 이를 꼬투리 삼은 것입니다. 또 기독교인들은 근친결혼을 한다는 비방도 있었습니다. ‘형제님’, ‘자매님’하다가 어느날 보니 결혼하더라는 것입니다. 한결같이 어처구니없는 모함이지만,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 비방하는 소리를 귀담아 듣습니다. 지금은 인터넷에 기독교를 비방하는 글들과 악성 댓글들이 가득합니다. 선배들은 신입생들에게 캠퍼스 선교단체를 조심하라는 당부를 하면서 갖가지 비방을 합니다. 신입생들은 이 말을 듣고 나서 겁을 잔뜩 집어 먹고 목자를 피해 도망 다니게 됩니다. 이런 일을 겪으실 때 이상히 여기지 마시고 그 배후에 짐승이 있고 또 사단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은 사단의 대리인인 짐승이 통치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짐승에게 경배하는 사람들과 경배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짐승에게 경배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8절에 보면 그들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때부터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짐승에게 경배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은 누굴까요? 반대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때부터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일 것입니다. 모두가 다 짐승에게 경배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어떻게 짐승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그 앞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이는 그들이 학벌이 좋거나 비상하게 똑똑해서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이미 성도들을 택하셔서 생명책에 그 이름을 기록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맛보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셔서 참되신 하나님을 알고 우리가 오직 그분께만 경배하도록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그런데 짐승을 경배하지 않고 진리를 따르는 삶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9)” 고난이 있다는 말씀은 우리가 잘 듣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요한은 먼저 귀를 쫑긋 세우고 잘 들으라고 권면합니다. 어떤 고난이 있을까요? 10절에 보면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가고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들 중에 체포와 투옥, 학살과 처형을 당하는 이들이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가복음 13장에서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회당에서 매질할 것이다(막1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인도 같은 곳에서는 힌두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은 불에 태워서 죽이기도 하고, 아예 그 지역에서 활동을 못하도록 매장을 시켜 버리기도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일제 시대 때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 참배를 거부하셨다가 투옥되고 고문을 받으셨습니다. 결국 고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시고 1944년 감옥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우리 중에도 제사 때 조상들 앞에 절을 하지 않는다고 이유로 핍박을 받는 목자님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왜 이런 시련이 성도들에게 있을까요? 사단이 하나님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7절에 보면 짐승은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는 권세를 허락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욕을 하면 욕을 먹고, 때리면 맞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말세의 모습입니다. 혹시 이런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기독교인들이 정권을 잡아서 기독교를 국교로 만들면 좋지 않을까?’ ‘교회를 비방하거나 핍박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법률을 만들어 복수하면 어떨까?’ 그러나 이 길은 이미 중세 시대 카톨릭이 시도했다가 교회를 타락으로 이끈 실패한 길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우리의 육체에 채우는 길입니다(골 1:24). 하나님은 말세의 때에 교회를 위해 일정한 분량의 고난을 예정하셨습니다. 우리는 고난 당할 때마다 고난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 의미를 마음에 새깁니다. 고난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게 합니다. 이 땅에 붙은 헛된 소망을 떨어내게 하십니다. 성도들은 고난에 참여함으로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와 신비롭게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이처럼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말세의 때에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선물입니다. 


    그러면 고난의 때에 성도들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합니까? 10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표준 새번역에는 이 말씀이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필요합니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꾹 참아야 합니다. 이 악한 시대를 끝까지 견뎌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다혈질이라서 성격 상 잘 참지를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내는 성격이나 기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내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인내와 믿음이 계속 짝꿍처럼 붙어 다닙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눈 앞에서는 짐승이 온 세상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는 실상을 깨닫게 해줍니다. 현실은 짐승에게 경배하고 짐승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자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승리함을 보게 해줍니다. 이 믿음이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실함을 지키게 해줍니다. 예수님도 믿음으로 인내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은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도 예수님처럼 믿음으로 고난의 시기가 지난 후에는 영원한 기쁨이 오리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잘 참았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핍박을 이길 수 있습니다. 조금만 더 참으면 술 마시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 참으면 우리 내면이 변화되고 없던 양도 생기고 있던 양들은 변화될 것입니다. 이렇게 조금만 더 참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더 이상 참지 않아도 됩니다. 그때에 우리는 주님과 함께 세세토록 왕노릇하며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번에는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 왔습니다. 그 짐승의 모습은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짐승은 첫째 짐승과 달리 아주 부드러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또 짐승은 용처럼 말을 했습니다. 이 짐승은 빼어나게 웅변을 잘 하는, 아니 용처럼 말을 했으므로 용변을 잘 하는 짐승이었습니다. 두 번째 짐승은 첫째 짐승이 가진 모든 권세를 그 첫째 짐승을 대신하여 행사했습니다. 이 짐승은 땅의 모든 사람들이 그 첫째 짐승에게 경배하게 했습니다. 짐승은 큰 이적을 행하였는데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했습니다. 또 짐승의 우상을 만들어 그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우상으로 말하게 하는 이적도 보여 주었습니다. 이 두 번째 짐승은 사단이 성령 하나님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성자 그리스도를 높이시고, 하늘에서 불처럼 임하기도 하시고, 마른 뼈에 생기를 불어 넣기도 하시니까 이 짐승도 그대로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하여튼 사단은 로열티 한 푼 안 내고 카피를 잘도 합니다. 이 짐승은 겉으로는 부드럽고 온유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자기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들을 가차없이 죽여 버리는 잔혹함을 감추고 있습니다. 이 짐승은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들어 있는 거짓 선지자를 말합니다(마 7:15). 이단 세력이나 사이비 종교, 인본주의 세력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땅의 짐승도 겉으로 볼 때는 선지자처럼 보입니다. 말을 잘합니다. 얼마나 잘 하면 용처럼 말을 한다고 했겠습니까? 거기다가 큰 이적까지 행합니다. 불치의 병을 고치기도 하고, 사람의 과거와 장래 일을 알아 맞추기도 하고, 이빨을 금으로 바꾸기도 합니다. 이렇게 능력 있는 선지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헷갈립니다. 말세에는 참된 선지자를 흉내 내는 거짓 선지자가 등장해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분별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보면 그가 하는 말이나 행한 이적을 보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또 ‘공인 받은 권세가 있느냐’로도 분별할 수 없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가?”를 보면 분별할 수 있습니다. “짐승에게 인도하는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가?” 로 알 수 있습니다. 참된 선지자는 우리를 죽임 당한 어린 양께로 인도하지만 거짓 선지자는 짐승 곧 적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합니다. 이단의 특징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척 하지만, 속으로는 이단 사이비 교주를 높이기에 여념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영적 분별력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땅에서 나온 짐승은 모든 자들로 그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했습니다. 여기에는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할 것 없이 예외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시자 사단도 따라서 자기 종들의 이마에 낙인을 찍도록 했습니다. 이 짐승의 표는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장식품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곧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을 나타내는 숫자로 표가 찍힌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팔거나 사거나 할 수 없었습니다. 이 표가 없으면 정상적인 경제 생활, 사회 생활을 할 수 없도록 사회 경제 시스템이 구축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설령 짐승에게 경배할 마음이 없다 할지라도, 다만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그 표를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 누구도 다른 사람과 내가 가진 자원을 서로 교환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살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짐승은 표를 매개체로 해서 성도들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키고 배제시켜 버려서 결국 극심한 고통을 빠트립니다. 여기서 이 표에 적혀 있다는 육백육십육이라는 숫자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동안 이 숫자가 바코드라는 설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말세에 모든 사람들의 이마나 손목에 생체 인식용 바코드를 이식하게 될 것이고, 이 바코드가 없으면 전자 결제를 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이 바코드의 숫자가 666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론의 치명적인 약점은 누구나 다 666이란 코드를 받으면 서로 식별이 안 되기 때문에 결제 수단으로서 가치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요즘은 바코드 시스템에서 무선으로 동작하는 RFID 시스템으로 넘어가는 중에 있기 때문에 이 이론은 곧 폐기 처분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이마에 인치신 표가 내적이고 상징적인 것처럼, 이 666이라는 표도 내적이고 상징적인 것입니다. 이 표가 우리 시대 외적으로 나타나면 뇌물과 청탁으로 일을 해결하려는 뿌리 깊은 관습, 오직 부자가 되려고 하는 재테크 열풍, 혼전 순결을 가볍게 취급하는 문란한 성문화 등등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대열에 같이 끼지 않으면 출세길이 막히기도 하고 왕따를 당하기도 하고 바보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두 번째 짐승은 물리적인 폭력을 동반하는 첫째 짐승의 방식보다 더 교활하고 더 악랄한 방식으로 성도들을 괴롭게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짐승의 표를 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당장 어떤 불이익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거부하시겠습니까? 다음 장에서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의 미래가 어떻게 되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II. 성도들의 새 노래 (14장) 


    14장 1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시온 산’은 하늘의 성전을 말하고, ‘십사만 사천’은 승리한 교회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이 땅에서 믿음을 지킨 사람들은 어린 양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서 있습니다. 짐승의 표 받기를 거부했던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찜해 놓으신 확실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들입니다. 이때 하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그 소리는 많은 물이 흐르는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았습니다. 그 음성은 거문고 타는 사람들의 노랫가락 같았습니다. 이 소리는 천군과 천사들이 부르는 찬송 소리였습니다. 여기에 화답이라도 하려는 듯 십사만 사천 명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일제히 새 노래를 불렀습니다. 십사만 사천 명 밖에는 아무도 이 노래를 배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땅에서 속량함을 받아 어린 양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어린 양과 같이 고난을 겪으며 슬픔의 탄식 소리를 낼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날에는 시온 산에서 어린 양과 함께 서서 아름다운 새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이 노래는 승리의 노래, 기쁨의 노래입니다. 유행가는 아무나 따라 부를 수 있지만 이 노래는 아무나 배울 수 없습니다. 이 노래는 오직 구속 받은 성도들만이 부를 수 있는 영광스럽고 신령한 노래입니다. 


    새 노래를 부를 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가 4,5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다는 말은 이 사람들은 하나님과 어린양에 대한 신앙의 정절을 지켜 우상 숭배와 배교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어린 양이 인도하시는 곳이라면 그곳이 편한 곳이든 험한 곳이든 관계 없이 어디든지 따라갑니다. 그들은 첫 열매로서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림으로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께 속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들은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습니다. 이 정도면 거의 성인의 삶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수준 높은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이렇게 살 자신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도저히 이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노력과 열심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라면 아마 새 노래는 예수님 혼자서 독창으로 부르셔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속량함을 받았다는 말에 비결이 있습니다. 십사만 사천 명이 함께 새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속량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잃어 버리시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속량함을 받았다는 말은 죄의 종이었던 우리를 예수님께서 그분의 보혈로 값을 대신 지불하시고 그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주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불의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칭의의 유일한 근거일 뿐 아니라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근원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9장 14절은 말합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대답은 “아니요. 할 수 있습니다” 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날마다 우리 속에 있는 죄를 죽이고 새 노래를 부르기에 합당한 삶으로 계속해서 변화시켜 주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 몸의 구속이 이루어질 때,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 이상 죄에 시달리지 않는 영화로운 존재로 변화될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요한은 한 천사가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에게는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이 있었습니다. 천사가 큰 음성으로 복음을 외쳤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심판의 시간이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소망이 있습니다. 두 번째 다른 천사가 이어서 외쳤습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여기서 큰 성 바벨론은 하나님께 반항하며 대적하는 세상 나라를 상징합니다. 세상 나라는 큰 성을 쌓아서 영원히 부귀 영화를 누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진노의 포도주로 심판하시자 큰 성 바벨론도 여지 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는 그들이 주변 나라들까지 부추겨서 우상 숭배를 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는 죄악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다른 천사는 만일 누구든지 짐승에게 경배하고 짐승의 표를 받으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을 경고했습니다. 그 진노의 포도주 잔에는 봐 주는 것이 전혀 없는 순도 100%의 하나님의 진노만이 담겨 있습니다. 이 진노의 잔을 받은 자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밤낮 쉼을 얻지 못하고 영원토록 고난을 받게 됩니다. 


    반면 인내하여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지킨 성도들은 어떻게 됩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믿음을 지킨 성도들은 수고를 그치고 안식을 얻게 됩니다. 이 땅에서 성도들의 삶은 수고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최후에는 주 안에서 영원토록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는 말은 성도들의 수고와 행위가 언제나 그들 뒤에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이 땅에서 보이지 않은 곳에서 행한 작은 수고 하나까지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시고 그날에 다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믿음을 지키는 자들을 어떻게 인도하십니까? 흰 구름 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리한 낫으로 익은 곡식들을 거두십니다(14-16). ‘익은 곡식’은 이 땅에서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을 말합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애쓴 성도들을 주님께서 거두어가십니다. 믿음의 중심을 지킨 자들은 하늘 성전에 입성하여 영원한 쉼을 누리게 됩니다. 반면에 적 그리스도를 경배하여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19절에 보니까 천사가 낫을 휘둘러서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진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포도주 틀은 지옥의 심판대를 상징합니다. 포도 열매를 포도주 틀에 넣고 짓밟으면 어떻게 됩니까? 붉은 포도주가 사방으로 튀기게 됩니다. 이처럼 장차 지옥에 들어간 자들은 무서운 심판의 틀에 던져져서 온 몸이 짓이겨져서 피를 흘리며 죽게 됩니다. 포도와 곡식의 차이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입니다. 죄인인 우리도 원래는 곡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포도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를 예수님께서 그 몸으로 대신 다 받으셨습니다. 마지막 한 방울의 진노의 포도주까지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다 받아 마시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몸은 십자가에서 으깨어지고 짓밟힌 포도처럼 상하셨고 마침내 하나님께 버림 받으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 위에 임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고난은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 아니라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에서 비롯된 징계요 훈련입니다. 내가 받을 하나님의 진노를 십자가에서 대신 다 받으신 우리 주님의 은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은혜를 힘 입어 우리는 하늘 창고에 들어갈 ‘익은 곡식’이 되었습니다. 


    혹시 캐시 버넬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렇다면 1999년 4월20일 미국 콜로라도 덴버의 컬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일어 났던 총기 난사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이 때 두 학생의 총기 난사로 13명의 학생과 교사가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사건을 저지른 해리스와 클리볼드라는 학생은 히틀러의 생일을 맞아, 독일 군복과 비슷한 코트를 입고 학교로 난입하여 광기 어린 학살을 감행했습니다. 그들은 도서관 벽에 학생들을 세워놓고 한 사람씩 총구를 갖다 대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 하나님을 믿느냐?” 이 질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살기 위해서 “믿지 않는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공포 분위기 가운데서 캐시 버넬이란 이름을 가진 여학생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너 하나님을 믿냐?” 캐시는 총구 앞에서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난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 너희들도 하나님을 믿어야 해.” 이 말을 떨어지기가 바쁘게 총알이 쏟아져 나왔고 캐시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캐시는 죽음 앞에서도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있은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미국의 십대들 사이에서 엄청난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캐시의 순교 앞에서 자신들의 비겁함을 한없이 부끄러워했습니다. 얼마 후, 남아 있던 학생들 사이에서 자신들도 캐시와 같이 담대한 신자가 되어야겠다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캐시의 순교적 결단을 기념하는 ‘국기 게양대 앞 기도회’가 생겨났습니다. 수많은 십대들이 “Yes, I believe in God”이라고 쓰여진 티셔츠를 입고 기도회에 나타났습니다. 한 소녀의 순교의 피가 미국 청소년들의 가슴에 놀라운 일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저를 또 놀라게 한 것은 이 사건이 있기 불과 2년 전만 해도 캐시는 마리화나를 상습 복용하는 마약 중독자요 ‘뉴에이지 운동’에 심취해 있던 우상숭배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캐시는 어머니의 끈질긴 기도와 사랑으로 복음을 영접할 수 있었습니다. 캐시는 자기 머리에 총구가 놓여진 상황에서도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건져 주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도저히 부인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캐시는 꽃다운 열일곱의 나이에 죽었지만 주 안에서 죽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분명 지금 천국에서 큰 상급을 받고, 사모하는 주님과 함께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말세는 두 짐승으로 대변되는 사단의 하수인들이 역사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고난이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인내와 믿음이 요구됩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키워드는 인내와 믿음입니다. 지난 한해 우리는 인내했습니다. 어떤 분은 질병 가운데 인내했고, 물질의 궁핍함 가운데서 인내했습니다. 또한 양들을 섬기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온 세상이 물질과 쾌락을 쫓아가는 시대에 짐승의 표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우리가 최후 승리를 바라보고 인내하고 믿음을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모두 어린 양과 함께 시온 산에 서서 새 노래를 부르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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