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및 나눔/단상

나의 영적 여정

이창무 2015. 6. 18.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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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적 여정

2013.6.21.


신앙 생활의 시작

나의 신앙 생활의 시작은 대학교 2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교회 마당조차 밟아보지 않은 사람이었다. 흔한 여름 성경 학교조차 참여해 본 적이 없었다. 불신자도 보통 불신자가 아니라 안티 기독교인이었다. 작게는 동네에서 전도를 하시던 약국 아주머니가 동네 사람들로부터 돈을 빌린 후 야반도주하신 일로부터 크게는 고등학교 때 읽은 반기독교적 인문학 서적들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내가 대학교 선배의 초청으로 성경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성경 공부를 시작한 이유는 그 선배를 설득하여 나와 같은 무신론자로 만들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성경 공부는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 성경의 스토리도 재미가 있었고 특히 성경 속 인물들의 캐릭터에 흥미를 느꼈다. 선배와 일대일로 시작된 성경 공부의 텍스트는 요한복음이었다. 요한복음 속에 등장하는 니고데모,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인, 38년 동안이나 베데스다 못가에 누워있던 병자,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 등등 인물들을 보면서 세상에 참 다양한 죄인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별별 문제 많은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탐구하다가 어느새 이학년이 되었다. 나는 다시 다른 선배와 연결이 되어 새롭게 성경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번에도 또 요한복음을 시리즈로 공부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 해 전에 했던 같은 본문이었지만 이번에는 전혀 다르게 내게 다가왔다. 니고데모에게서 꽉 막힌 나의 모습을,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목마른 나의 모습을, 베데스다의 병자에게서 병든 나의 모습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남의 이야기로 들리던 성경이 나에 대한 이야기로 들리기 시작했다. 성경은 마치 거울처럼 하나님을 떠나 죄로 인해 망가진 나의 실존적인 모습을 비추어 주었다. 그 거울 속에는 겉으로는 명문대에 왔다고 거들먹거리지만 속으로는 한 없이 연약한 한 인간이 서 있었다. 하나님은 없다며 큰 소리를 치지만 실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허무 가운데 방황하는 한 인간이 서 있었다. 거짓 자아의 모습이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내 안에 있는 거짓 자아가 거센 저항을 하였다. 이제껏 자기 잘난 맛에 살아 왔는데 내 자신의 실체를 보고 나니 살 맛이 안 생겼다. 자존심과 자신감이 동시에 허물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너무 힘들고 괴로웠다. 그래서 내게 성경을 가르쳐 주던 선배에 이렇게 반문하였다. ‘선배가 분명 성경을 공부하면 기쁨과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했건데 지금 나는 성경을 공부할수록 괴롭고 힘이 들어요. 선배가 나를 속인 것인가요?’ 그러자 선배는 빙그레 웃더니 ‘올 것이 왔군요.’라는 알쏭달쏭한 한 마디 말만을 했다. 비록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지만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나처럼 문제 많은 인간, 거짓 자아로 점철된 인간을 당장에라도 심판하실 것 같았다. 절대자로부터 외면 당하고 거절 당하는 공포가 나를 엄습하였다. 그래서 생전처음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하게 봐 주십사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은 작은 신음 같은 내 기도를 들어 주셨다. 너무나 유명한 말씀인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묵상하던 중에 죄 많고 문제 많은 이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 나 같은 아무 자격 없는 자를 위해서 당신의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을 주신 은혜의 하나님이 내 앞에 생생한 실재로 다가왔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자 내 속에 있던 모든 두려움과 방어기제들이 허물어 졌고 마치 엄마 품에 안긴 아기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안에 안겨 그 따스함을 누렸다. 'Amazing Grace'의 가사처럼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보며 나의 신앙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거짓 자아의 발견

한동안 중생과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기쁨을 넘치도록 누렸다. 대학교 3학년 봄학기는 내 인생 최고로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하나님과의 첫 만남, 첫 사랑의 감격으로 일분 일초가 행복했고 좋은 일이 없어도 마냥 기쁘고 즐거웠다. 그러나 얼마 후 내 안에 있던 거짓 자아가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첫 번째는 질투심이었다. 나를 인도했던 대학 선배가 신앙을 멘토링해 주던 후배는 나 뿐만이 아니었다. 생물학과에 다니던 선배도 한 사람 있었고 일문과에 들어 온 후배도 있었다. 나는 그 선배의 관심과 사랑을 내가 독차지하지 못하는 것이 속이 상했다. 그 선배가 돕던 다른 사람들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저 사람만 없었으면 내가 더 누릴 수 있었는데 방해자가 나타났다고 여겨졌다. 심지어는 나에게만 사랑을 베풀지 않고 다른 사람도 사랑하는 선배까지도 미워지기 시작했다. 선배의 표정이나 말투까지 신경이 쓰이고 사랑을 빼앗겼다고 느꼈을 때는 오히려 못된 짓을 해서 관심을 끌려고 애를 썼다. 내가 보기에도 어린 아이처럼 유치해 보였다. 사람으로부터 전폭적인 애정을 받을 때 행복해질 수 있다는 내 속에 내장된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 하고 싶은 욕심이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내가 겪게 된 심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사람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였다. 나도 교회 안에서 이런 저런 일들을 맡아 섬기게 되었다. 기타를 칠 줄 알았기 때문에 찬양을 인도하기도 했고, 중창팀에서 베이스 파트의 리더가 되기도 했다. 나도 다른 후배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이런 저런 일들을 하는 가운데 이 일들을 통해서 내 존재 가치를 인정 받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 주는 것에 쾌감을 느꼈다. 더 큰 인정을 받기 위해 더욱 열심히 했다. 그래서 결과가 좋으면 내 가치를 입증했다고 여겨 만족해 했다. 그러나 결과가 신통치 않으면 내 존재감을 잃어 버린 것 같아 슬펐다. 여기에 너무 얽매이다가 학업까지 소홀히 하게 되었다. 교회에서 작은 행사가 있었는데 이를 준비하다가 중급 회계 시험 준비를 거의 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이 과목은 F를 받았고 졸업 때까지 골칫거리가 되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교회 사람들로부터 더 큰 인정을 받고 싶어 뻔히 결과가 보이는데 계속해서 열중할 수 밖에 없었다. 세 번째는 졸업 후 직장 생활하면서 사람들에게 품는 분노와 복수심으로 나타났다. 학교를 졸업 후 한 대기업에 입사하였다. 인사팀에 근무하였는데 같은 학교를 나온 심 과장님이란 분이 직속 상사분이셨다. 그분은 키가 매우 작아서 키 때문에 군 면제를 받았을 정도였다. 그런 열등감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기를 죽이려는 듯이 신입 사원인 나를 쥐잡듯이 하셨다. 별 것도 아닌 사소한 일을 트집 잡아 책망을 하기 일쑤였고, 특히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인격적인 모독을 주시는 일이 수차례 반복되자 내 속에는 분노와 복수심이 불붙기 시작했다. 주일 저녁만 되면 내일 아침이면 심 과장님의 얼굴을 다시 볼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출근하면 오늘은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지 조마조마했다. 때로는 바라지도 않는 선심을 쓰시면서 생색을 내시는 그분이 더욱 미웠다. 나는 표시 안나게 복수할 방법이 없을까 이리 저리 궁리해 보았지만 워낙 꼼꼼하신 분이라 쉽지 않았다. 어느 휴일 날 과장님의 임원 인사 업무를 보조하느라 회사에 혼자 나와 골방에서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었다. 마침 그 때 인사 담당 임원이 회사에 나왔다가 그런 나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다음날 본래 그 업무의 담당자인 심 과장님에게 이 임원분이 왜 자기 일을 부하 사원에게 맡겨서 혼자 휴일 근무를 하게 만들었냐며 질책을 하신 듯 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결국 심 과장님은 다른 부서로 가셨지만 제 2, 제 3의 심 과장님은 계속 새로 태어났다. 이렇게 내 안에 있던 거짓 자아는 신앙 생활을 시작한 이후 밀월 기간이 끝나자 자신의 정체를 드러나며 참된 행복을 앗아가고 있었다.


거짓 자아와의 싸움

나는 사랑을 독차지 하고 나만을 섬겨주기 바라는 나의 거짓 자아와의 싸움을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분명히 이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 정도는 나도 판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싸움을 위해 나는 그 선배의 도움을 받던 생물학과 선배와 일문과 후배에게 친절하게 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일문과 후배는 자주 밥도 사주고 교양 과목 숙제를 도와 주기도 했다. 생물학과 선배는 본인 전공 외에도 컴퓨터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분이었다. 나 역시 컴퓨터에 큰 관심이 있었다. 우리는 두 사람 모두의 공통 관심사를 발견하고 이에 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누고 교제를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 사람과 나와 둘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나를 인도하신 선배가 있는 자리에서는 이것이 쉽지 않았다. 그가 우리 세 사람 중에서 누구에게 더 큰 관심과 애정을 보이는지 신경이 쓰였다. 다른 사람에게 더 잘해 주는 것처럼 보이면 괜히 신경질을 내고 짜증을 내었다. 나는 넓게 사귀지는 못하는 성격이다. 그러나 한번 관계성이 형성된 소수의 사람들에게 너무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집착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써 보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 받으려는 욕구 또한 마찬가지였다. 인정의 욕구 때문에 나는 소위 말하는 업 다운이 매우 심한 사람이었다. 조금 인정 받는다 싶으면 업이 되었다가 인정 받지 못한다 느끼면 바로 다운이 되었다. 나는 내 자신의 이런 모습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결과에 매이지 말고 과정 자체를 즐기자는 것이었다. 내 스스로 생각해도 멋진 말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말하기는 쉬어도 실천하기는 무척 힘든 말이었다. 과정을 즐기는 것은 실행 가능했다. 그러나 결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결국 처음 내 의도와는 달리 과정도 즐기도 좋은 결과도 즐기려는 더 큰 욕심이 생길 뿐이었다. 그래서 한 동안은 아예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에도 매이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나를 점점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이제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기 때문에 점점 잊혀진 존재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면 하는대로 괴롭고 안 하면 안 하는대로 괴로우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너무 괴로워서 선배에게 조언을 구했다. 선배의 조언은 의외로 싱거웠다. 자기도 같은 문제로 힘들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겉으로는 잘 드러내지 않지만 누구나 이와 같은 거짓 자아와의 문제로 고통하며 또 거짓 자아와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 번째 나를 괴롭게 했던 분노와 원한의 문제를 다루는 일 역시 무척 힘겨운 싸움이었다. 내 마음에 받은 상처를 인해 용서가 되질 않았다. 용서가 성경에서 요구하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았지만 막상 용서하려니 나만 손해를 보고 바보가 되는 느낌이었다. 저 사람은 나를 힘들게 해 놓고 저렇게 잘 먹고 잘 사는데 사과도 없는 그에게 내가 일방적으로 용서를 한다는 것은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원수되었던 나를 위해 돌아가신 주님을 생각하면 용서가 되다가도 막상 눈 앞에 그 사람의 모습이 나타나면 죽은 줄 알았던 복수심이 되살아났다. 진정으로 용서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나도 키가 작고 심 과장님은 같은 학교를 나오고 같은 부서에 일하는 사람이라 누구보다도 친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가 더 힘들었다.


그리스도 자아로의 회복 여정

나의 아버지는 참 말씀이 없으신 분이시다. 집에 돌아 오셔서 가족들하고도 거의 대화가 없으셨다. 아버지께서 유일하게 말을 많이 하실 때는 친척분들과 고스톱을 치실 때뿐이었다. 어머니는 목소리가 크시고 화통하신 그런 성격이셨다. 반면 부드럽고 다정다감한 면은 좀 부족하셨다. 아무래도 아들만 셋을 키우시다 보니 그렇게 되신 것이 아닌가 싶다. 동생들하고 초등학교 때까지 같이 어울려 놀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그렇게 지냈다. 그러나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로는 관심 분야가 달라져서인지 서로 대화가 끊겼다. 나는 집에 들어가면 방문을 닫고 책상 머리에 앉은 후 좀처럼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었다. 유일하게 방문을 여는 경우는 화장실에 갈 때와 밥 먹을 때 뿐이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 적도 없었고, 속에 있는 고민을 비추는 일은 더욱 더 없었다. 그저 당연히 내 일은 그저 내 일일 뿐 ,누구도 나눈다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우리 집은 가끔 들리는 어머니의 호통 소리 외에는 적막이 흐르는 참 조용한 가족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친밀함'이란 것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었다. 경험해 보질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친밀해 지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누구를 대하든 늘 거리를 두려고 애를 썼다. 너무 친밀해져서 상대방이 내 속 마음과 생각까지 알게 되는 것이 싫었고 나도 상대방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았다. 친밀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늘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데, 가족 관계, 사회 생활이나 모든 면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친밀함이 아주 희박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이해가 되는데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도무지 와 닿지가 않았다. 그 증거가 기도 생활에서 나타났다. 성경 공부는 그래도 하나님과 약간 거리를 두고 할 수 있는데, 기도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내 기도는 늘 무미건조했다. 마치 어쩌다가 한 번 사장님 방에 실적 보고를 하러 들어 간 말단 사원처럼 기도 제목을 죽 나열한 후 후다닥 마치기가 일쑤였다. 두 세 시간 씩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참 신기한 사람도 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할 말이 많기에 그렇게 오래 기도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갖기에 앞서 먼저 친밀함이 무언지부터 경험해 보도록 내 인생을 인도하셨다. 그 길은 바로 결혼이었다. 내 아내는 누구와도 쉽게 친밀해 지는 성격으로 나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사람이다. 대부분 자매들이 그렇지만 아내가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는 것을 옆에서 들어 보면 있는 말 없는 말 다 하고 통화 시간이 두 시간을 넘기는 것은 기본이었다. 나도 아내 앞에서는 긴장을 풀고 대화하고 소통하는 가운데 친밀해 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교제를 나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내 사랑스런 세 딸들은 좀 과도하게 친밀함에 집착하는 아이들이다. 내가 뭐 특별히 잘 해 주는 것도 없는데 아빠를 좋아 하고 서로 아빠를 차지하려고 서로 싸워서 이를 말리느라고 힘이 들 정도이다. 나는 이런 가족들과의 관계를 통해 친밀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친밀함이 참 좋은 것이라는 것,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 다가 왔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 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위대한 구원 사역의 목적 중 하나가 바로 우리를 아바의 아들로 ,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는 자리로 이끄시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누리시던 그 친밀함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하게 누릴 수 있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시고, 화목을 이루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은 실적 보고를 기다리는 사장님이 아니라 아들을 기다리시는 아바 아버지이심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자 제일 먼저 나의 기도가 변하였다. 이전에 없던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싶다는 소원,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고 싶다는 소원,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감히 교제하고 싶다는 소원을 절실히 아뢰게 되었다. 하나님께 내 영혼의 두려움과 번민, 슬픔과 탄식까지 가감 없이 그대로 기도 시간에 아뢸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해 주셨고, 하나님과 친밀함이 가져다 주는 기쁨과 위로로 저의 영혼을 어루만져 주셨다. 때로는 아무리 기도해도 마치 하나님께서 내게서 얼굴을 돌리신 것 같은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때에도 더 갈급한 심령으로 기도할 때 어느새 장막은 걷히고 다시 주님이 주시는 햇살이 내 영혼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 때 기쁨은 참으로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기쁨이었다. 지금도 내 안에는 거짓 자아가 있다. 지금도 질투를 느끼고 인정에 목말라 하며 원한과 복수심에 칼을 갈 때도 있다. 거짓 자아와의 싸움은 안식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승리를 확신한다. 왜냐하면 이미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기 때문이고 내가 연약할 때마다 언제든지 하나님 아버지께 가까이 나아가 그 분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께 가까이'는 내가 참 사랑하는 찬양이다. 내 영혼이 품고 있는 간절한 소원을 잘 표현하는 노래이다. 그 가사를 옮기며 나의 영적 여정에 대한 짧은 기록을 마치고자 한다. 


주께 가까이 날 이끄소서 

간절히 주님만을 원합니다 

채워 주소서 주의 사랑을 

진정한 찬양 드릴 수 있도록 

목마른 나의 영혼 주를 부르니 

나의 맘 만져 주소서 

주님만을 원합니다 더 원합니다 

나의 맘 만져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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