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도데이 특강 / 이창무
잃어버린 아들들: 자유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
말씀 / 누가복음 15:11-32
서론
오늘 우리가 함께 깊이 탐구해 볼 이야기는 아마 여러분 모두가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법한, 아주 익숙한 이야기일 겁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 중의 비유, ‘탕자의 비유’ 혹은 ‘돌아온 탕자’라고 불리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저는 이 이야기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방탕한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눈물겨운 감동 스토리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살아가면서 나도 모르게 선택하는 두 가지의 아주 근본적인 삶의 방식을 보여줍니다.
혹시 여러분은 이 두 가지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십니까? 그리고 더 중요하게, 그 두 방식이 왜 결국 우리를 진정한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오늘 우리는 그 통찰을 함께 나누며 우리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I. 두 아들, 두 가지 삶의 방식
1.1 둘째 아들의 길
자, 이제 누가복음 15장으로 함께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떤 부자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죠. "아버지, 재산 중에서 제게 돌아올 몫을 지금 제게 주십시오."
여러분, 이 말이 당시 중동 문화에서 얼마나 충격적인 요구였는지 혹시 짐작하십니까?
단순히 재촉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 말은 사실상 "아버지, 당신은 이제 필요 없고, 당신 돈만 필요합니다. 당신이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요!" 라고 외치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정확히 이 길을 선택합니다. 그는 자유를 원했습니다. 아버지라는 권위, 가족이라는 관계, 전통이라는 제약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를 원했어요. 그의 마음속 외침은 이것이었을 겁니다.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다! 내 삶은 내가 결정한다!"
혹시 여러분 중에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있으십니까? "나만의 삶을 살고 싶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다." 사실 이것은 매우 현대적이고, 어쩌면 정당해 보이는 인간의 욕구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둘째 아들이 어디로 갔다고 말합니까? 그는 '먼 나라'로 갔습니다. 여기서 '먼 나라'는 단순히 지리적인 거리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근원, 자신의 정체성의 뿌리로부터 멀어졌습니다.
1.2 자유의 역설
그곳에서 그는 '허랑방탕하게' 재산을 낭비했습니다. 원문 헬라어로는 '아소토스(ἀσώτως)'인데, 이 말에는 '구원받지 못하게', 즉 자기 파괴적인 방식으로 낭비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가 그토록 추구했던 무제한적인 자유! 그 결과는 무엇이었을까요?
궁핍, 굶주림, 그리고 돼지우리. 유대인에게 돼지는 가장 부정한 동물이었습니다. 그는 재산을 잃은 것을 넘어, 자신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린 것입니다.
둘째 아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아주 불편한 진실을 가르쳐줍니다. 무제한적인 자유는 역설적으로 우리를 노예로 만듭니다. 욕망의 노예, 중독의 노예, 결국 공허함의 노예로 전락하게 만들죠.
우리 시대를 한번 보십시오. 우리는 역사상 가장 많은 선택권을 가진 세대입니다.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어떤 직업을 가질지, 어떤 관계를 맺을지.
그런데 왜 우리는 더 불안하고, 더 우울하고, 더 공허할까요?
1.3 첫째 아들의 길
이제 시선을 첫째 아들에게 돌려봅시다.
많은 사람이 이 비유를 읽으면서 둘째 아들에게만 집중합니다. 하지만 사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진짜 충격을 주려고 했던 대상은 바로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첫째 아들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었"습니다. 완벽한 모범생입니다. 그는 둘째와 정반대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자유가 아닌 의무, 일탈이 아닌 순종, 쾌락이 아닌 금욕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동생의 귀환 잔치 소식을 들었을 때, 이 착한 아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는 "집에 들어가기를 싫어합니다." 그는 분노하고, 원망하고, 비난합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어보세요.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그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여기서 핵심 단어가 무엇인지 여러분은 찾으셨습니까? "내게는... 그를 위하여..." 바로 비교와 보상 심리입니다.
1.4 의무의 감옥에 갇힌 영혼
첫째 아들의 순종은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거래였습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착하게 살았으니, 아버지라면 당연히 이 정도 보상은 해줘야지." 그는 아버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인정과 보상을 얻으려 했던 겁니다.
여러분, 첫째 아들은 몸은 아버지의 집, 바로 그 안에 있었지만, 마음은 아버지로부터 가장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그는 육체적으로는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돼지우리에 있는 동생보다 더 멀리 길을 잃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착하고 성실하게 살려고 하는 '종교적 윤리적 인간'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겉으로는 완벽합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 이런 교만이 자리 잡고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저 둘째 아들 같은 사람들과는 다르지. 나는 이 정도 대우는 받아야 마땅해.”
심리학자 칼 융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억압하는 어두운 면을 "그림자(Shadow)"라고 불렀습니다. 첫째 아들의 그림자는 무엇이었을까요? 표면적으로 완벽한 그 아래에 끓어오르던 분노, 질투, 비교, 정죄의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1.5 다르지만 다르지 않은 두 아들
자, 이제 우리는 하나의 놀라운 진실을 발견했습니다.
두 아들은 겉으로 보기엔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똑같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말했습니다: "아버지, 나는 당신의 재산은 원하지만 당신은 원하지 않습니다."
첫째 아들은 말했습니다: "아버지, 나는 당신을 위해 일하지만, 사실 내가 원하는 것은 보상입니다."
둘 다 아버지를 사랑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둘 다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둘 다 결국 자기 자신이 중심이었습니다.
목회자 팀 켈러의 말처럼, 죄는 도덕적 규범을 어기는 것 그 이상입니다. 죄는 하나님 대신 다른 무언가를 우리 삶의 중심에 놓는 것입니다. 그 중심이 쾌락일 수도 있고(둘째 아들), 도덕적 우월감일 수도 있습니다(첫째 아들).
이제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져봅시다.
우리는 어느 아들에 더 가깝습니까?
혹시 자유, 자율성, 자기실현을 추구하며 '내 마음대로' 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둘째 아들의 길을 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책임감 있게, 성실하게 살면서 "나는 최소한 저런 사람들보다는 낫지"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첫째 아들의 길에 갇혀 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이 두 길 모두 실패한 길이라고 말입니다. 둘째 아들은 돼지우리에서, 첫째 아들은 잔치 문밖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똑같이 길을 잃은 사람이었습니다.
II. 탕부의 은총
2.1 달려가는 아버지
자, 이제 이 비유의 진정한 주인공을 만날 시간입니다. 바로 아버지입니다.
둘째 아들이 모든 것을 잃고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올 때,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여러분, 이 대목에서 '달려가'라는 표현을 꼭 주목해 주십시오!
당시 중동 문화에서 나이 든 가부장이 겉옷을 걷어 올리고 달린다는 것은 매우 품위 없는, 심지어는 창피한 행동으로 여겨졌습니다. 체면과 존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였으니까요.
하지만 이 아버지는 어떻게 합니까?
체면도, 존엄도, 권위도 다 내려놓고 아들을 향해 맨발로 달려갑니다! 아들이 혹시라도 마을 사람들 앞에서 돌팔매를 맞거나 수치를 당할까 봐, 아들을 감싸기 위해 먼저 달려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이 준비한 회개의 연설을 다 듣지도 않습니다. 아들은 아마 이렇게 말하려고 했을 겁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아들 자격은 없으니, 저를 품꾼의 하나로 써 주십시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자격 조건이나, 아들의 회개 행위가 완성되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아들의 말을 중간에 끊어버리고 종들에게 명령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가져다가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2.2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
우리는 이 아버지의 행동에서 은혜(Grace)의 본질을 아주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여러분, 은혜는 자격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자격이 있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마땅한 임금이나 보수일 뿐입니다. 은혜는 자격 없는 자에게, 아니, 오히려 자격을 잃어버린 자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이 원리를 정확히 설명합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준 세 가지 상징적인 선물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제일 좋은 옷: 이는 신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다시 아들이 되었다는 선언이죠.
반지: 이는 권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아버지가 허락한 재산을 사용할 권한입니다.
신: 이는 자유인의 신분을 의미합니다. 당시 노예는 맨발로 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최고의 잔치를 베풉니다. 살진 송아지, 이것은 특별한 날에만 잡는 것이었습니다.
이 비유를 흔히 '탕자(Prodigal Son)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Prodigal'은 '낭비하다'라는 뜻이니, 둘째 아들은 재산을 낭비했기에 탕자라 불릴 만합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 봅시다. 정말 낭비한 것이 둘째 아들뿐이었을까요?
사실, 이 아버지는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둘째 아들에게 사랑을 낭비합니다. 값없이, 헤프게,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무모하게 보일 정도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아들의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탕부(Prodigal Father)의 비유'라고 불려야 마땅합니다!
2.3 첫째 아들에게도 찾아가는 아버지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잊기 쉬운 또 한 번의 '달려감'이 남아 있습니다.
잔치 소리를 듣고 화가 난 첫째 아들이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했을 때, 아버지는 또다시 스스로를 낮춥니다. 가부장이 잔치를 열어 놓고 아들이 삐쳤다고 하여, 밖으로 직접 찾아 나가 달래는 것은 당시 문화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만 은혜를 낭비한 것이 아니라, 분노와 교만에 사로잡혀 있던 첫째 아들에게도 똑같은 자비와 겸손을 낭비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에게 말합니다.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말씀을 보십시오! 첫째 아들이 그토록 원하던 것, 인정과 소유가 사실은 이미 다 그의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 살면서도,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도, 이 놀라운 사실을 몰랐고,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III. 대속의 신비
3.1 누가 대가를 치렀는가
이제 우리는 이 감동적인 비유를 덮기 전에, 아주 중요한 질문 하나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 잔치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둘째 아들의 죄는 실제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이 낭비되었고, 아버지는 사회적으로 큰 수치를 당했습니다. 첫째 아들 역시 분노와 모욕으로 아버지의 명예를 훼손했죠.
신학자 팀 켈러의 말처럼, "모든 용서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당신이 그를 용서한다면 당신이 그 고통을 흡수해야 합니다. 용서는 결코 공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정의(Justice)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누군가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습니까?
이 비유에서는 아버지가 그 대가를 치릅니다.
아버지는 재산의 손실을 기꺼이 감수했습니다.
아버지는 사회적 수치를 감당했습니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의 분노와 둘째 아들의 죄를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존엄을 낮추고 아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더 깊은 차원이 있습니다. 이 아버지의 행동은 궁극적으로 누구를 가리키고 있을까요?
3.2 또 다른 아들
이 비유가 완벽한 해피 엔딩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한 명의 '세 번째 아들'이 필요합니다.
둘째 아들처럼 '먼 나라'로 가셨지만, 단 하나의 죄도 짓지 않은 아들.
첫째 아들처럼 평생 아버지께 순종했지만, 거래가 아닌 사랑으로 순종한 아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죄인인 두 형제를 모두 구원하기 위해 대신 모든 대가를 치른 아들!
그 아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를 위해 이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 2장 17~18절 말씀은 그분이 바로 이 세 번째 아들의 역할을 하셨음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3.3 십자가를 가리키는 비유
예수님은 이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루살렘으로 가셨고, 결국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십자가야말로 아버지의 낭비된 은혜가 현실이 된 곳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습니까?
우리가 '제일 좋은 옷'을 입을 수 있도록, 그분은 옷을 벗김 당하고 조롱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그분은 가장 큰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그분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시며 아버지로부터 단절되는 고통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속의 신비입니다. 아버지의 탕부적인 은혜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것입니다.
3.4 비유의 결말
자, 이제 이야기의 마지막입니다.
우리는 첫째 아들이 아버지의 권유를 받아들여 잔치 안으로 들어갔는지 알지 못합니다.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화해했을지도 알 수 없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 중요한 비유를 열린 결말로 끝내셨을까요?
그것은 이 질문이 이제 우리에게 던져졌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의 결말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해피 엔딩이 될지, 아니면 여전히 문밖에서 서성이는 배드 엔딩이 될지는 결국 오늘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결론: 오늘 우리의 선택
1. 세 가지 길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두 가지 길이 결국 실패에 이른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첫 번째는 무제한적 자유의 길, 바로 둘째 아들의 길이었습니다.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려 했지만, 결국 욕망의 노예가 되어 돼지우리에서 비참해지는 길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율법적 순종의 길, 바로 첫째 아들의 길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착했지만, 마음속은 분노와 거래로 가득 차, 아버지의 집 안에서조차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문밖에서 서성이는 외로운 길이었습니다.
이 두 길은 모두 결국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제삼의 길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탕부적 은총의 길입니다!
우리를 위해 체면과 목숨을 아낌없이 낭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한 회복의 길입니다. 이 길은 우리의 공로가 아닌,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열린 길입니다.
2. 두 아들들에게
이 시간, 저는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에게 개인적으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지금 '먼 나라'에 계신 분이 있습니까? 방황하고, 길을 잃고, 모든 것을 탕진한 채 비참함 속에 계십니까?
그렇다면, 돌아오십시오! 아버지는 당신이 완전히 개선될 때까지, 당신의 행위가 완벽해질 때까지 단 1분도 기다리지 않으십니다. 지금, 당신의 모습 그대로, 주저앉아 있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하십시오. 아버지는 달려와 목을 안아주실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지금 '집 밖'에 서서 분노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나는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쉽게 용서받지?"라는 억울함에 갇혀 계십니까?
그렇다면,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여러분이 쌓아온 공로나 의로움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만이 당신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합니다. 이미 아버지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임을 깨닫고, 그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십시오.
오늘 여러분에게는 충분한 빛이 주어졌습니다.
이제 선택은 당신의 몫입니다.
당신은 계속해서 문 밖에 남아 외롭게 서성거리시겠습니까? 아니면 아버지의 은혜가 넘치는 잔치 안으로 기쁨으로 들어가시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 담긴 오늘의 요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다 같이 화면을 보시면서 큰 소리로 읽어주십시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누가복음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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