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마가복음 30강 / 이창무
그가 살아 나셨다
말씀 / 마가복음 16:1-20
요절 / 마가복음 16: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혹시 우리 인생에서 "더는 돌이킬 수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눈앞이 캄캄해지고, 마치 무거운 돌로 꽉 막힌 무덤 앞에 선 것처럼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둠과 절망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부활의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제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오늘의 말씀에는, 새벽에 무덤을 찾은 세 여인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세 여인이 마주했던 무덤 앞의 무거운 돌처럼, 우리 각자가 인생에서 마주하는 ‘무거운 돌’ 앞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어떤 길을 열어 주시는지 기대하며, 말씀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겠습니다.
1. 부활의 증인은 낮은 자리에서 묵묵히 섬김의 도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1,2)
마리아 막달라,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는 안식일이 지난 새벽,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용기를 내어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무거운 돌로 막힌 무덤 입구를 어떻게 열 것인지 염려하면서도, 그들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깊은 사랑과 충성은 그 어떤 장애물도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들의 행동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도의 기준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행 1:21-22)
이 여인들은 열두 사도로 공식적으로 임명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증인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분이 무덤에 묻히실 때, 그리고 그분이 부활하실 때, 이 여인들은 결코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큰소리만 치며 자신감을 보이던 열두 사도들보다, 말없이 끝까지 예수님 곁을 지킨 이 여인들의 모습이 더 진정한 사도의 모습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당시 사회에서는 여인들이 법정에서 증언할 자격조차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왜 이 여인들을 부활의 첫 증인으로 세우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기준을 넘어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필수적인 자질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 겸손, 그리고 섬김의 마음이었습니다. 이 마음 덕분에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분을 지킬 수 있었고, 그 결과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한때 한국 교회에 ‘고지론’이라는 사상이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고지론은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위치, 즉 고지를 점령하여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고지론자들은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의 주요 영역에서 지도적 위치에 올라야 기독교적 가치를 효과적으로 전파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사상은 당시 큰 호응을 얻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고지에 오르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인의 제자도가 점차 희미해지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고지에 오른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졌지만, 정작 세상과 지나치게 동화된 나머지 세상을 변화시킬 영적 힘을 상실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은 높은 지위나 화려한 업적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겸손과 섬김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서 이루어집니다. 세상이 보기에는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 큰일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낮은 자리에서 충실히 섬기고, 작은 행동에도 진실한 마음을 담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순종과 헌신을 사용하셔서 세상을 변화시키십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증인으로 부름받은 자들의 삶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예수님의 증인으로 부르시고, 겸손과 섬김의 삶으로 주님을 따르게 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작고 초라해 보일지라도,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고 사용하신다는 사실에 큰 위로와 용기를 얻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과 사랑이 더욱 선명히 드러나고, 주님의 영광이 우리 주변 세계에 널리 전파되기를 기도합니다.
2. 부활의 증인은 십자가가 실패가 아니라 승리의 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여인들이 고민했던 돌의 무게는 단순히 물리적인 제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돌은 죽음과 절망이라는 더 큰 문제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셔서 이 모든 문제를 깨끗이 해결해 주셨습니다.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4,5)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무거운 돌은 이미 굴려져 있었습니다. 무덤 안으로 들어간 여인들은 흰 옷을 입은 청년, 곧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를 발견했습니다. 놀란 여인들에게 천사는 이렇게 전했습니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6)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기억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필수 요소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은 우리의 믿음의 근간을 이루는 역사적 진리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당시 여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에만 온통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기억 속에서 예수님을 찾으며, 너무 그리워했지만 다시는 그분을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또한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악의 세력에 대한 울분도 컸지만, 결국에는 “어쩔 수 없지” 하며 체념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여인들에게 천사는 놀라운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가 살아나셨다." 천사는 여인들을 부활하신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그분이 현재 살아 계심을 증언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단지 역사적 인물로만 기억하는 데서 나아가,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경험하라는 초청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은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싯다르타도, 공자도, 마호메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무덤을 찾고 그들을 기억하며 기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아무도 찾지 않습니다. 그 무덤은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지금 이 순간도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교제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기억 속에만 머무르지 말고, 오늘 이 순간에도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참된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일까요? 팀 켈러 목사님의 책 <부활을 입다>에는 “인생 단 하나의 희망, 하나님의 위대한 반전”이라는 부제가 쓰여 있습니다. 이 말 그대로 부활은 하나님의 위대한 반전입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16강전에서 안정환 선수의 골든골로 우리나라가 이탈리아를 상대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 것처럼, 예수님께서 죽으신 지 삼 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전승을 이루셨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궁극적으로 승리했음을 선언하는 하나님의 인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셨으나, 부활은 그 길이 결코 실패로 끝나지 않았음을 분명히 증명합니다.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마가복음을 꾸준히 공부해 왔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속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이 문제만 만나면 크게 거부 반응을 보이곤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가 그들의 아킬레스건이었던 것이죠. 왜 그랬을까요? 제자들에게 십자가는 처절한 실패이자 패배이며 수치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것이 끝장나는 일이었고, 모든 희망이 무너지는 절망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대반전을 가져다준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죽고 무덤에 묻히셨던 예수님께서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부활의 빛 아래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니,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승리였습니다. 십자가는 수치가 아니라 영광이었습니다.
제가 대학교 4학년이었을 때, 아버지께서 사업에 크게 실패하셨습니다. 믿었던 친구이자 동업자에게 배신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일로 집에 채권자들이 찾아오고, 전화요금을 내지 못해 전화가 끊기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을 겪으면서 저는 이 세상이 결국 선이 패배하고 악이 승리하는 곳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마저도 선을 이루려 하셨지만, 악에게 패배해 십자가에 죽으신 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우울했던 저는, 신문을 보면서 ‘사고로 고통 없이 죽는 방법’을 진지하게 찾아볼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참석하게 된 한 수양회에서 “광명의 십자가”라는 전체 타이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가 어떻게 어둠이 아니라 광명이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수양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게 찾아오셨습니다. 머릿속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부활의 복음이 제 마음 깊은 곳까지 다가온 것입니다. 그 뜻은, 예수님께서 결코 악에 패배하신 분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 그리고 사탄의 권세를 이기신 참된 승리자이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니, 제 내면을 짓누르고 있던 깊은 어둠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제자들과 사도 바울과 그리고 제 인생에도 가장 극적인 반전을 이룬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고난 중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섬김과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굳게 확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 길 끝에는 영광과 승리가 기다리고 있음을 믿으며,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바로 부활을 믿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부활의 믿음으로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우리가 만나는 이들에게 참된 승리의 소망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 부활의 증인은 세상 가운데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여인들은 천사의 메시지를 통해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그들이 보인 반응은 우리가 예상할 만한 기쁨이나 흥분이 아니었습니다.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8)
오히려 그들은 몹시 놀라 떨며 무덤을 떠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이 두려움은 단순히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한 당황스러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앞에서 느껴지는 경외심이었습니다. 모세, 기드온, 이사야 등 성경 속 여러 인물들이 초월적이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건을 접했을 때 자연스레 보였던 바로 그 경외심이었습니다.
여인들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이유는, 부활 사건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에 완전히 압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침묵은 오히려 부활 사건이 지닌 묵직한 무게감을 우리에게 더 선명히 전달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사건은 단지 역사적 기록이나 기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전환점으로서, 하나님의 권능과 성품을 드러낸 결정적 순간이었습니다.
제 은사이신 류호준 교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라는 책에서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습니다. “놀라고 두려워 소스라친 여인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는 광경으로 끝을 맺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부활의 신비를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부활절 아침에 발생한 일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고자 함입니다. … 부활은 다른 세계로부터 온 그 무엇입니다.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부활에 직면해 본 사람은 그들의 눈과 귀와 마음의 역량을 넘어서는 무엇이라는 사실을 경험합니다. 사람들의 눈은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귀는 그것을 들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과연 부활의 신비를 얼마나 깊이 경험하고 있을까요? 혹시 예수님의 부활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이는 어쩌면 우리가 부활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부활은 죽음을 이긴 승리이자,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앞에 서면, 기쁨과 함께 거룩한 떨림을 느껴야 합니다. 부활을 진정으로 체험한다면, 우리의 삶은 그 은혜와 능력으로 분명 변화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부활이 내 삶에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그 능력을 얼마나 경험하고 있는지 돌아보며, 부활의 신비를 더욱 깊이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
이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이 단순히 육체적 생명의 회복이 아니라, 그분의 신성을 드러내는 결정적 사건임을 보여 줍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여러 차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이 선언을 모든 사람 앞에서 확증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부활은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넘을 수 없는 죽음의 권세를 깨뜨린 사건이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권능을 분명하게 나타냅니다. 이를 통해 믿는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이 진리임을 더욱 확신하게 되고, 그분의 신성과 구원의 능력을 찬양하게 됩니다.
신앙의 여정 속에서 많은 성도들은 ‘이미 구원받았다’고 믿으면서도, 여전히 육신의 질병과 고난, 그리고 궁극적으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해 의아해하곤 합니다. 왜 믿는 자들에게조차 죽음이 ‘불가피한 관문’으로 남아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절대적이거나 압도적인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의 값을 치르신 뒤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에 대한 선포이며, 죽음의 권세가 더 이상 궁극적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함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신자들은 죽음이라는 현실적인 고통 앞에서도 “이것이 영원한 끝이 아니다”라는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해, 죽음이 과거에는 “인간이 결코 넘을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절벽”이었다면,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는 “누군가 이미 깨뜨리고 지나간 문턱”이 되었습니다. 물론 죽음은 여전히 무섭고 두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 강력한 부활이 있기에,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의 권세에 의해 지배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지난주, 화제의 드라마 〈오징어 게임〉 시즌 2가 방영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시즌 1’과 ‘시즌 2’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마가복음이 시즌 1이라면, 사도행전은 시즌 2라고 할 수 있지요. 놀랍게도, 시즌 1과 시즌 2에서 제자들의 모습은 상당히 다릅니다.
시즌 1의 제자들은 두려움이 많고 소심하며, 영적으로 둔감한 모습을 자주 보였습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며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나오는 제자들은 마치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며, 어떤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책망의 메시지를 전했고, 단 한 번의 설교로 삼천 명을 회심시켰습니다.
보통 드라마에서 같은 캐릭터가 시즌 1과 시즌 2에서 너무 다르게 행동하면 시청자들에게 “개연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이러한 변화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고, 그분이 약속하신 성령을 받음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마가복음을 통해 시즌 1의 제자들을 배우고 묵상했습니다. 그들의 연약함과 실패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끝까지 사랑하고 인내하셨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새해에는 사도행전을 공부하며, 시즌 2의 제자도를 본받고자 합니다. 우리가 맞이할 “시즌 2”는 단순한 속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기초하여 완전히 새로운 장을 열어가는 여정이 될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이 우리 삶을 새롭게 하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2025년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과 권능을 붙들고, 매일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진정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 우리들의 밝은 빛>
예수 우리들의 밝은 빛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주
의의 길을 따라가는 주의 자녀들에게
항상 밝은 빛을 비추시네
그는 구원의 주 하나님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네
주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부어주시는
놀라운 주님의 영광
하늘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주의 영광
이 땅에 오셨네
어둠을 밝히고 새 생명 주시네
영원히 빛나는 나의 예수님
높이 영광과 찬양 받으실 그 이름
경배합니다
슬픔을 거두고 내게 자유 주시네
기쁨의 노래를
영원한 나의 빛 예수께
예수 우리들의 밝은 빛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주
의의 길을 따라가는 주의 자녀들에게
항상 밝은 빛을 비추시네
그는 구원의 주 하나님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네
주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부어주시는
놀라운 주님의 영광
하늘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주의 영광
이 땅에 오셨네
어둠을 밝히고 새 생명 주시네
영원히 빛나는 나의 예수님
높이 영광과 찬양 받으실 그 이름
경배합니다
슬픔을 거두고 내게 자유 주시네
기쁨의 노래를
영원한 나의 빛 예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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