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이것은 내 몸이니라

이창무 2024. 12. 7.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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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27강 / 이창무

이것은 내 몸이니라

말씀 / 마가복음 14:1-26
요절 / 마가복음 14: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사람은 사랑을 받을 때 참된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으면 우리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고, 눈빛은 반짝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행복의 전부가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행복은 배가됩니다. 과학자들은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의 몸에서 행복을 주는 호르몬들이 분비된다고 말합니다. 사랑할 때 우리는 더 아름다워지고, 열정과 에너지가 솟구칩니다.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께 값진 향유를 부어드린 한 여인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녀는 온 마음을 다해 예수님을 사랑한 인물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예수님을 배신할 계획을 세우는 유다도 등장합니다. 한쪽은 사랑받고 사랑하며 진정한 행복을 누렸고, 다른 한쪽은 사랑을 거절하며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요?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1. 십자가 사랑을 아는 사람은 아낌 없이 자신을 드립니다.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있었던 한 여인의 놀라운 헌신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여인은 한 사람의 일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여인의 행동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많은 오해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마저도 이 여인을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4)

그들의 시각으로는 여인의 행동이 매우 비효율적이고 낭비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여인의 행위를 어떻게 보셨을까요?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8-9)

예수님은 여인의 행동을 자신의 죽음과 연결시켜 주시며,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언제나 기억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장례를 급하게 치르느라 시신에 향유를 부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이 미리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셈이 되었습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을 보고 예나 지금이나 두 가지 서로 다른 종류의 반응을 나올 수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이건 낭비다. 매우 비합리적이다. 미친 짓이다’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상식과 합리성을 갖춘 교양인들이거나 휴머니스트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믿어도 좀 적당히 믿지 너무 광신적으로 믿지 마라’고 합니다. 그들의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여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향유를 부은 여인은 너무나 귀한 일을 했다. 나도 이 여인처럼 살고 싶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삶을 주님께 쏟아 붓는 헌신의 삶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고 여깁니다.  주위 사람들의 눈에는 누구보다 헌신하는 사람이지만, 정작 자신은 내 헌신은 늘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은 무엇 때문에 이런 차이가 나는 것입니까? 그 차이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아느냐 모르느냐는 차이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자기와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예수님을 향한 헌신과 사랑의 행동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이 바로 내 죄 때문이고 그분의 못 박히심이 바로 내 허물 때문임을 아는 사람은 이 여인의 헌신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은 나의 전부 나의 모든 것이 되심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속해 있습니까? 향유를 주께 부은 여인의 편입니까? 아니면 이것을 보고 허비한다고 책망하는 사람의 편입니까? 우리가 속해야 할 곳은 명확합니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나의 향유 옥합을 열어 주님께 부어 드리는 그곳이 바로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사랑 받고 사랑 하는 그 자리에 우리의 행복과 기쁨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자리에서 조금 멀어져 있었다면 어서 제 자리를 찾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 은혜와 사랑을 날마다 더욱 넘치게 경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십자가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주님을 배신할 수 있습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10-11)

향유 부은 여인과 극명히 대비되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 가장 충격적이고 슬픈 사건은 유다의 배신입니다.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3년을 동고동락 했지만, 결국 돈 몇 푼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말았습니다.

유다가 왜 예수님을 배신하게 되었을까요? 단순히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돈이 목적이었다면 대제사장과 흥정을 했을 것입니다. 유다가 배신한 더 근본적인 이유는 유다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이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예수님의 뒤를 따라왔습니다. 이런 유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저 처절한 실패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전 인생을 걸고 예수님을 따른 자신을 예수님이 먼저 배신했다고 생각했을 지 모릅니다.

우리와 가룟 유다와 거리는 얼마나 될까요? 겉으로는 믿음의 공동체에 속해 있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을 깊이 알지 못하고 그분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지 못할 때, 우리도 유다처럼 예수님을 외면할 수 있는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우리의 마음이 여전히 세상의 유혹에 끌리고,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깊이를 깨닫게 되면, 이용과 배신이 아닌 순종과 헌신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의 사랑을 기억하며, 그 사랑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고 그분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 십자가 사랑을 기억하고 누리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알리시며, 그들 중 한 명이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을까요?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19)

제자들의 반응은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불안을 드러내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과 맺고 있는 관계가 정말로 지속가능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향유 부은 여인이 예수님께 대한 관계의 진정성을 보여준 반면,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몇 년간 동고동락하며 친밀한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따라 예수님을 넘기기로 결정했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합니다. 이것은 생존 본능에 뿌리를 둔 자연스러운 경향입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이러한 인간 본성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가룟 유다와 향유 부은 여인 사이에 서 있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헌신했지만, 아직도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어중간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이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친밀함이나 이익의 관계를 넘어 예수님의 그 이상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통해 제자들에게 십자가에서 흘리실 피의 의미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2-24)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에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떡을 나누는 행위는 단순히 식사의 의미를 넘어서는 깊은 영적 상징을 담고 있습니다. 떡은 예수님의 몸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몸을 먹음으로써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 되심을 의미합니다. 마치 떡이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양식이듯,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양식이십니다. 예수님과 연합하지 않고서는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잔을 들어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잔에 담긴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합니다. 또한 그 피를 통해 맺어진 새로운 언약을 나타냅니다. 피는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을 맺을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생명을 대가로 하는 관계의 결속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는 인간의 죄를 영원히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피를 흘리심으로써 완전하고 영원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의 피를 통해 이 언약을 절대로 깨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옛 언약이 인간의 순종에 따라 유지될 지 폐기될 지 여부가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하나님의 변치 않는 신실하심 위에 세워졌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통해 우리를 영원히 붙드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담고 있는 의미를 열두 사도만 알면 됩니까? 모든 성도들이 다 알아야 하고 당연히 우리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주님은 성만찬이라는 성례를 제정하셨습니다. 이 땅의 모든 교회가 성만찬의 떡과 잔을 나누어 먹고 마시며,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깨닫고 마음에 새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만찬을 중요하게 여기고, 여기에 참여해야 합니다. 성만찬을 시행하는 것은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핵심적인 표지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우리에게는 성만찬이 아니어도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얼마든지 깨닫고 마음에 새길 수단이 있다. 소감을 깊이 쓰고 메시지를 잘 들으면 된다.’라고 말할 지 모릅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십자가 은혜를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만찬에는 말씀에서 받는 은혜와는 또 다른 은혜가 있습니다. 말씀은 주로 귀로 듣고 머리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만찬에서는 우리 눈으로 떡이 나누어지고 찢겨지는 것을 보고, 포도주의 붉은 색을 봅니다. 손의 감촉을 떡을 만지고 코 안으로 포도주의 향이 들어옵니다. 또 입으로 떡과 포도주를 맛봅니다. 우리의 모든 감각 기관이 거의 총동원 되다시피 합니다. 온 몸으로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통로가 바로 성만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이 제정하신 성만찬의 예식을 시행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성만찬을 통해 나를 위해 자기 몸을 찢어 내어주신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만찬을 통해 십자가 사랑의 그 은혜를 우리 마음에 새기고 향유 부은 여인처럼 예수님께 온 마음 다해 사랑하는 행복한 사람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게 있는 향유 옥합>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주께 가져와
그 발 위에 입 맞추고 깨뜨립니다
나를 위해 험한 산 길 오르신 그 발
걸음마다 크신 사랑 새겨놓았네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주께 가져와
그 발 위에 입 맞추고 깨뜨립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 발
흘린 피로 나의 죄를 대속하셨네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주께 가져와
그 발 위에 입 맞추고 깨뜨립니다
주님 다시 이 땅 위에 임하실 그 때
주의 크신 사랑으로 날 받아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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