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고린도후서

모든 것을 가진 자

이창무 2024. 7. 28. 16:01
반응형

 

2024년 여름 특강 제 2 강 / 이창무

모든 것을 가진 자

말씀 / 고린도후서 6:3-10
요절 / 고린도후서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름은 12세기의 성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에서 온 것입니다. 그는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난 금 수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이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스스로 흙 수저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세속적인 재산과 권력을 포기했지만, 영적인 부요함을 누리며 이를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중세 카톨릭 교회와는 다른 길을 갔기 때문에 그는 많은 개신교인들 사이에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프란치스코보다 천 년 앞서 같은 길을 걸었던 사도 바울의 삶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의 자전적 고백 속에서 우리의 부르심과 인생 방향과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오늘 말씀의 바로 앞 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 5:18-19)

여기서 사도 바울은 ‘화목하게 하는 직분’에 대해 언급합니다. 화목이라는 단어는 그 이전에 화목하지 않은 상태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화목하지 않았습니다. 그 관계가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단절된 이유는 사람의 고의적인 반역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이 반역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범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사람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사람이 되게 하여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그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반역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 곧 복음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자신과 화목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누구도 죄 때문에 멸망에 이르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말씀 곧 복음을 부탁하셨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직분을 맡은 사람을 그리스도의 대사라고도 표현했습니다(5:20). 대사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말과 품행에 그를 보낸 나라의 명예가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특명 전권 대사로서 자신이 이 세상에서 우리를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예를 대변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이 직분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감당하고자 했을까요?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고후 6:3)

바울은 이 직분이 자신의 말과 행동 때문에 비방 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누구에게든지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만드는 일이 없게 하려고 늘 조심했습니다. 예를 들어 바울은 유대인 출신 신자들 앞에서는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고기를 먹을 자유가 있었지만, ‘우상에 바쳐졌던 제물의 고기가 아닌가’하여 마음에 걸려 하는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 자유를 포기한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완수하기 위해 철저하게 자신의 유익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덕분에 바울은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아니라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중학교 때 어머니께서 제 동생의 담임이었던 영어 선생님에게 촌지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얼마 후 그 선생님이 보내신 책 박스 하나가 저희 집으로 배달되었습니다. 열어보니 여러 권의 영문학 고전 소설과 두꺼운 엠마오 주석 성경이 들어있었습니다. 성경 안에는 선생님의 간증과 기도를 적은 손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영어 선생님은 제가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여러 디딤돌 중 한 분이 되어 주신 분이었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 입구에 있던 약국을 운영하던 약사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약을 사러 온 모든 손님들에게 전도를 하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분이 한밤중에 갑자기 사라지셨습니다. 알고 보니 동네의 거의 모든 아줌마들에게 얼마 씩 돈을 빌린 후 도망친 것이었습니다. 제 어머니도 돈을 빌려주셨고, 내가 이래서 교회와 상종을 안 한다고 고함을 치셨습니다. 그 약사분은 저와 가족 모두에게 걸림돌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디딤돌일까요, 걸림돌일까요? 혹시 디딤돌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걸림돌은 아닐까요? 저는 목자로 살면서 이 질문이 제일 두렵습니다. ‘혹시 내가 말 실수를 한 것은 아닐까? 내가 디딤돌이 되어야 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물론 주위에서 ‘사람이 어떻게 완벽할 수 있나? 늘 실수하기 마련이지. 문제라면 사람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하는 것이 문제지.’라고 말해주곤 하지만 별 위로가 되지는 못합니다. 대사가 잘못하면 국격이 실추되는 것을 피할 수 없듯이, 우리가 사람들을 실망시키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복음의 신뢰성에 금이 가게 하는 일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역시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맡기신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화목하게 하는 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길 뿐만 아니라, 지혜롭게 덕이 되도록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디딤돌이 되려면 고난 속에서도 원칙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걸림돌이 되지 않고 디딤돌이 되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첫째, 많은 고난을 견디었습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고후 6:4-5)

여기서 자천한다는 말은 자신을 추천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취업할 때 자기 소개서를 제출합니다. 저는 대기업 채용담당자로서, 또 팀장으로서 숱한 자기 소개서를 읽어보았습니다. 대부분 자기가 얼마나 많은 업적을 쌓은 사람인지,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인지 등을 어필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무엇을 근거로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임을 당당하게 내세우고 있을까요?

놀랍게도 바울은 자신의 성공 사례나 업적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세운 교회가 얼마나 많은 지, 가말리엘 교수님의 직속제자로서 학벌이 얼마나 대단한 지, 헬라어 토익 점수가 얼마나 높은 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내가 얼마나 많은 환난과 궁핍과 고난을 겪었는지를 보라고 합니다. 수 차례 매를 맞은 일, 감옥에 갇혔던 일, 난동이 일어나 질질 끌려 다녔던 일들을 말합니다. 전도 여행을 다니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지, 말씀을 연구하느라, 양들을 위해 기도하느라 밤에 잠을 못 잤던 일, 너무 바빠서 수시로 끼니를 걸렀던 일들을 언급합니다. 바울에게 딱히 이런 생활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화목하게 하는 말씀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계속 고난을 참고 견디는 수밖에 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흑역사는 될 수 있으면 감추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어째서 바울은 이것이 자신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추천하는 근거로 삼았을까요? 그 이유는 이런 바울의 삶이 그가 전하는 복음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낮은 땅 위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증언합니다. 복음은 십자가에서 고난당하고 죽으신 후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바울은 이 그리스도를 그저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삶이 뒷받침되었기에 사람들은 그가 전하는 복음에 반응했던 것입니다.

UBF 역사 초기에 왔던 분들은 이구동성으로 성경을 공부하러 온 계기가 사라 배리 선교사님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당시 대부분 미국 선교사들이 언덕 위에 하얀 색 2층 양옥집을 짓고 식모를 거느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라 배리 선교사님은 단칸방에서 연탄불을 갈며 김치를 먹으며 사셨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보도 많은 한국의 대학생들이 이분이 이런 삶을 기꺼이 살게 만든 성경이 도대체 어떤 책인지 궁금해서 성경 공부를 하러 나온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감당하려면 고난과 아픔이 뒤따릅니다. 목자가 얼마나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는 지 모릅니다. 스트레스가 계속 쌓이다 보면 번아웃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민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바울처럼 잠을 못 자거나 바빠서 끼니를 거르는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억울하게 비난을 받거나 오해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정말 속이 썩어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런 고난과 어려움이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다는 표지입니다.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도대체 복음이 무엇이기에 저 사람은 저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 것일까 궁금해할 것입니다. 고난을 견디고 이겨내는 모습을 보며 예수님을 믿는 것은 정말 나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소망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이런 삶은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디딤돌이 되어줄 것입니다.

둘째, 원칙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사람이 고난과 어려움을 많이 겪게 되면 어디에 쉽고 편한 길이 없을까 저절로 찾기 마련입니다. 그러다 보면 자꾸 꼼수를 부리게 되고 이 때는 이렇게 저 때는 저렇게 이익을 쫓아 왔다 갔다 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달랐습니다. 그는 원칙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어떤 원칙들이었을까요?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고후 6:6-7)

먼저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 이 네 가지는 바울이 고수했던 도덕적 원칙들입니다. 깨끗함은 물질 문제나 이성 문제에 있어서 순결함을 말합니다. 지식이란 이 세상에 대해 이해와 통찰을 의미합니다. 오래 참음이란 다른 사람에 대하는 관대한 태도를, 자비함이란 따뜻하고 친절한 태도를 가리킵니다.

다음으로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은 영적인 원칙들입니다. 성령의 감화는 자기 뜻을 고집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거짓이 없는 사랑은 아무 사심이 없는 진실한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화목하게 하는 말씀인 복음을 가리킵니다. 또한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할 때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 군인이 오른손에 칼을 들고 왼손에 방패를 들고 싸운 것 같이 양 손에 도덕성과 영성이라는 의의 무기를 들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무기에 비유한 것을 통해,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아 하나님의 일꾼으로 산다는 것은 내적인 싸움의 연속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도 마음에 내적 갈등이 많습니다. 예전 메시지 대충 베끼고 짜깁기해서 쉽고 편하게 말씀 전하고 싶은 마음과 본문과 씨름하고 기도하면서 성령의 감화를 받아 진리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원칙 사이에서 고민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까? 바울처럼 도덕적 원칙과 영적 원칙 모두를 견지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영적인 원칙만을 고수하려 하고 도덕적 원칙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저 사람 때문에 예수 못 믿겠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반면에 도덕적 원칙은 고수하지만 영적인 원칙에 무관심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주위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게 됩니다.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는 들을 지 몰라도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디딤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최악은 도덕적 원칙도 없고 영적 원칙도 없고 아무 원칙이 없이 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도덕성과 영성을 모두 다 겸비하여 주위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도 바울이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감당하기 많은 고난을 견디고 원칙을 지키는 삶을 살았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삶을 산 바울에 대한 평판이 어떠했을까요?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고후 6:8a)

두 가지 반응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어디를 가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인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떤 때는 영광으로 돌아오고, 어떤 때는 욕됨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뒤에는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이 함께 뒤따라 다녔습니다. 바울을 가리켜 거짓말쟁이, 이단의 괴수, 공부를 너무 많이 한 바람에 미쳐버린 자, 천하는 어지럽게 하는 자, 심지어 전염병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바울은 선지자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진리의 교사로, 영적인 아버지, 사랑 받는 자로 불리웠습니다. 바울이 늘 ‘바울’했을 뿐인데 어떻게 평가가 이렇게 극명하게 나뉘었을까요?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렇습니다. 제 어머니께서 소천하시고 장례식을 치르던 날에 저는 외삼촌에게 크게 혼이 났습니다. 생전에 어머니께서 제가 출세하고 성공할 것을 많이 기대하셨는데 네가 그 길을 가지 않아 어머니를 실망시켜 드렸으니 너는 불효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교회 권사님이신 고모께서 네가 이 집에서 제일 먼저 예수님을 믿고 결국 어머니도 복음을 영접하고 천국 가게 하셨으니 네가 제일 큰 효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저는 불효자입니까? 효자입니까? 진정 우리는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8b-10)

이 구절들은 다 ‘A와 같으나 B이다’라는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앞에 나오는 A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시각이고 B는 실제 우리의 참된 정체성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부분입니다.

먼저 사람들은 우리를 속이는 자로 봅니다. 곧 진실이 아닌 것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자로 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고 죽은 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전하니 21세기 과학 기술이 이처럼 발전한 시대에 이것이 말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참 진리를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결코 속이는 자들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안 소망 목자님이 여름수양회 메시지를 전했다고 해서 기자가 취재하러 오지 않습니다. 안암 1부 유튜브 채널 구독자 수는 500명이 채 되지 않으며 그나마 국내 지부들 중에서는 가장 많은 수준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이미 천국 뉴스 1면에 안 소망 목자님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실렸습니다. 세상은 몰라도 예수님이 인정하고 알아주십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는 죽은 자 같고 징계를 받는 자 같아 보입니다. 이 말은 고생하고 힘든 일을 많이 겪는 이로 본다는 뜻입니다. 열심히 노력을 했지만 실패하고 섬기던 양도 떠나가고 갑자기 병이 들어 몸이 아프게 되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기도 합니다. 거의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고 신이 내린 형벌을 받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뚝이처럼 또 일어납니다. 주님의 은혜로, 복음의 능력으로 안 죽고 다시 살아납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가진 것이 별로 없고 그래서 걱정 근심이 참 많겠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은 부동산이다 주식이다 코인이다 해서 잔뜩 쌓아놓은 것이 많은데 당신들은 노후를 어떻게 할 생각이냐’ 하면서 대신 걱정해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근심하기는 커녕 항상 기뻐합니다. 가진 게 왜 없습니까? 한 영혼을 살리고 풍성하게 할 수 있는 복음의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은 없지만 온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자존감이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SNS에서 ‘좋아요’를 많이 받을 때, 넓은 아파트에서 살 때, 외제차에서 내릴 때, 럭셔리 명품 백을 들었을 때, 잘 생기고 예쁜 외모로 시선을 받을 때 자존감이 상승합니다. 이런 것들이 없으면 자존감이 지각을 뚫고 맨틀까지 내려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들의 시선에 따라 자존감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영광스러운 이 직분 곧 화목하게 하는 직분인 목자의 직분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은 고난 속에서 삶이 초라하고 칙칙해 보일지라도 두고 보십시오. 걸림돌이 되지 않고 어떻게 하든 디딤돌이 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린 사람은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도구가 간절히 기도합니다. 세상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주님의 명예를 대변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반응형

'설교 > 고린도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0) 2022.06.27
주의 영광을 보매  (0) 2015.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