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사기

기드온의 두 얼굴

이창무 2023. 4. 30.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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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사기 제 8 강 / 이창무

기드온의 두 얼굴

말씀 / 사사기 8:1-35
요절 / 사사기 8:23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

제가 초등학교 때 아주 유명했던 “두 얼굴의 사나이”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습니다. 화가 나면 괴력을 지닌 헐크로 변신하는 데이비드 브루스 배너 박사가 드라마의 주인공이었습니다. 변신할 때마다 옷이 찢어지고 온 몸이 파랗게 변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친구들끼리 왜 헐크의 바지는 끝까지 안 찢어지는 지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두 얼굴의 사나이가 등장합니다. 그는 바로 우리가 삼 주 째 다루고 있는 기드온입니다. 그의 두 얼굴 중 한 얼굴을 보기 위해 본문 속에서 먼저 세 가지 사건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사건입니다. 뒤늦게 전쟁에 참여했던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을 찾아와 말합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1)

그들은 기드온에게 왜 처음부터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 따지고 시비를 겁니다. 숫자가 많은 에브라임 지파는 늘 이런 식으로 특별 대우를 받고자 하는 경향이 강한 지파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겠습니까? “막판이라도 기회를 준 것에 대해 감사하게 여길 일이지. 이게 무슨 망발이냐?” 이렇게 버럭 화를 낼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2-3)

에브라임은 도망가는 미디안의 두 장군, 오렙과 스엡을 잡았는데 기드온은 에브라임이 한 그 일을 치켜세워주며 자신이 한 일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이라고 높여줍니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입니다. 겸손하게 대합니다. 상대의 무례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싸우지 않고 평화를 추구합니다.

기드온의 이러한 겸손은 에브라임의 분노를 풀리게 했습니다. 자칫 이스라엘끼리 싸우고 갈라지는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는데 그런 위험을 기드온이 평화적으로 잘 막았습니다. 12장에 가면 에브라임이 뒷북치며 불평하는 태도가 한 번 더 나옵니다. 기드온에게 했던 것처럼 입다에게도 불평합니다.그러나 입다는 전혀 받아주지 않습니다. 심지어 많은 에브라임 사람들을 죽여 버립니다. 그와 비교하면 지금 기드온은 확실히 성숙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사건입니다. 에브라임과의 문제를 현명하게 처리한 기드온은 전쟁에서 패하고 도망간 미디안 사람들을 쫓아갑니다. 적들을 따라가 공격하고 달아나는 적들을 또다시 쫓아갑니다. 이정도로 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기드온은 미디안의 두 왕을 잡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합니다.

“세바와 살문나가 도망하는지라 기드온이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고 그 온 진영을 격파하니라“(12)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기드온은 포기하지 않고 미디안의 왕을 잡기까지, 적을 완전히 소탕하기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힘들지만, 피곤하지만, 배가 고프지만, 많은 수고가 따르지만, 그 어려움들을 다 극복하고 적의 왕들을 사로잡습니다. 완벽한 승리를 거둡니다. 이를 보면 기드온은 충성스럽고 맡은 바 사명에 투철한 사람입니다.

세 번째 사건입니다. 미디안의 두 왕까지 무찌른 기드온은 전쟁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말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하는지라“(22)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드온이 미디안의 손에서 자신들을 구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기드온에게 요청합니다.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이게 무슨 말일까요? 단순히 당신이 우리를 다스려 달라는 것이 아니라 기드온을 비롯한 기드온의 자손까지 우리를 다스려 달라고 합니다. 이 말은 비록 ‘왕’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백성들은 기드온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하는 말이 분명합니다.

이런 요청을 받은 기드온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저는 왕이 될 마음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정 그렇게 원하신다면 어쩔 수 없겠네요. 제가 한 번 왕이 되어 잘 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을까요? 실제 기드온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23)

정말 멋진 말입니다. ‘내가 아니라 우리의 왕으로 계신 하나님이 너희를 다스릴 것이다.’ 기드온이 큰 승리를 거두고 성공을 경험하고 있을 때, 충분히 유혹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한 말입니다. 기드온은 정말 중요하고 백성들이 꼭 들어야 하는 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본문의 세 사건을 간단하게 살펴봤습니다. 이 세 사건들 속에서 보이는 기드온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한 줄로 요약하자면 겸손하고 충성스러우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성숙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보고 배워야 할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것만 보고 평가하기에는 아직은 너무 이릅니다. 왜냐하면 기드온에게는 반전의 모습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반전을 매력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기드온의 반전은 매력이 아니라 우리에게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그럼 기드온의 또 다른 모습을 보기 위해 다시 세 가지 사건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다시 첫 번째 사건입니다. 첫 번째 사건에서 봤던 기드온의 모습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겸손한 태도를 보이며 같은 이스라엘 민족과 싸우지 않았던 기드온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에는 너무도 다른 기드온을 발견합니다.

기드온이 300명과 함께 도망가는 적을 쫓고 있을 때 숙곳이라는 곳에 이릅니다. 기드온과 함께한 사람들이 배고픈 상태로 지쳐있었기 때문에 기드온은 숙곳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청합니다. 그 요청에 대해서 숙곳의 지도자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6)

그동안 미디안에게 압제 받았던 숙곳 사람들은 미디안의 눈치를 봅니다. 기드온을 도와줬을 때 받을 수 있는 미디안의 보복이 두렵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미디안의 왕들을 이미 사로잡은 것이 아니라면 미디안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도와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서 기드온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에브라임에게 했던 것처럼 겸손하고 지혜로운 방법으로 설득하는 모습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기드온의 행동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넘겨 주신 후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 “(7)

그 다음 기드온은 브누엘로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도 같은 요청을 합니다. 그리고 같은 거절을 받습니다. 그러자 기드온이 말합니다.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에 이 망대를 헐리라”(9)

기드온이 한 말은 매우 잔인하고 위협적인 말입니다. 그가 왜 이런 식으로 말할까요? 자신을 홀대한 것에 대해서 화가 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반드시 거절의 대가를 치르도록 하겠다고 말합니다.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은 이방사람들이 아닙니다.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반응이 이러합니다. 물론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의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위험이 있더라도 전쟁을 승리로 이끈 기드온에게 고마워하며,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도와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기드온이 보여주는 태도는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만약 기드온이 에브라임에게 했던 것처럼 겸손한 태도를 보인다고 한다면,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며 하나님의 함께하심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으니 미디안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설득하는 과정이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말한 그대로 그들에게 행합니다. 

“그 성읍의 장로들을 붙잡아 들가시와 찔레로 숙곳 사람들을 징벌하고 브누엘 망대를 헐며 그 성읍 사람들을 죽이니라“(16-17)

이렇게 기드온은 자신의 동족을 죽이는 사사가 되었습니다. 이방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오히려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사건을 다시 생각하면서 우리는 기드온은 같은 편끼리 싸우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를 수 없는 상대와 싸우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힘이 있었기 때문에 기드온이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싸우지 않았습니다. 기드온이 평화를 위해서 혹은 동족을 위하는 마음으로 했던 일은 아닙니다. 반대로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은 기드온이 상대할 수 있는 약한 위치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부끄럼 많고 소심하고 매사에 조심하던 우리가 알던 그 기드온은 도대체 어디로 갔나요? 전에 없던 강력한 힘이 생기면 사람이 이렇게 변해도 되나요?

다음으로 다시 두 번째 사건입니다. 기드온은 포기하지 않고 미디안의 두 왕을 잡기 위해 수고했습니다. 그럼 이렇게 끈질기게 추격하며 미디안의 왕들을 잡았던 이유가 뭘까요? 맡겨진 일에 대한 충성만이 모든 이유였을까요?

“이에 그가 세바와 살문나에게 말하되 너희가 다볼에서 죽인 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더냐 하니 대답하되 그들이 너와 같아서 하나 같이 왕자들의 모습과 같더라 하니라“(18)

기드온이 사로잡은 미디안의 왕들에게 다볼에서 죽인 자들을 묻습니다. 두 왕은 자신이 죽인 자가 기드온과 같은 왕자들의 모습이었다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이 전쟁이 있기 전에 미디안 왕들이 다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였는데 그들이 죽인 사람이 기드온의 형제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기드온이 말합니다.

“그가 이르되 그들은 내 형제들이며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니라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만일 그들을 살렸더라면 나도 너희를 죽이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19)

우리는 여기서 기드온이 두 왕을 절실히 쫓았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기드온은 그들에게 복수를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을 죽였으니 나도 너희에게 갚아주겠다 합니다. 사명에 대한 충성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사적인 복수심이 그에게 중요한 동기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세 번째 사건입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청을 거절하며 분명하게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릴 거라고 말했습니다. 기드온이 백성들에게 정말 멋진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을 믿어도 되나요? 만약 기드온의 말이 진심이라면 당연히 행동으로 증명될 것입니다. 

이후 기드온이 어떤 일을 합니까?

“기드온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요청할 일이 있으니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내게 줄지니라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마엘 사람들이므로 금 귀고리가 있었음이라“(24)

기드온은 백성들에게 적군에게서 탈취한 금귀고리를 요구합니다. 이렇게 해서 기드온이 받은 금은 천칠백 세겔, 대략 20킬로가 되는 엄청난 무게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드온은 미디안 왕이 입었던 자색 의복과 장식들을 가집니다. 왕을 상징하는 의복과 그 장식을 스스로 취한 것은 의미가 있는 행동입니다.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27)

기드온은 모은 금으로 제사장의 의복인 에봇을 만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일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고 기드온은 번쩍번쩍 빛이 나는 화려한 금 에봇을 자기 성읍에 둡니다. 이로써 기드온은 자신이 있는 곳을 특별한 곳으로 만들고, 백성들이 자신을 주목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 또 하나의 새로운 우상을 낳고 말았습니다.

“기드온이 아내가 많으므로 그의 몸에서 낳은 아들이 칠십 명이었고”(30) 

이후 기드온은 왕이 하는 것처럼 많은 아내를 둡니다. 기드온이 그 아내들을 통해 낳은 아들만 칠십 명이 되는데, 아내뿐만 아니라 첩을 통해서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특별히 첩을 통해 낳은 아들의 이름이 “아비멜렉”입니다. 그 이름의 뜻이 ‘내 아버지는 왕이다’입니다. 누가 왕이라는 말입니까? 기드온이 왕이라는 말입니다. 기드온이 하는 행동들은 그가 했던 말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왕의 자리를 거절했지만, 사실상 그는 왕이 되어 있습니다.

기드온은 왜 이럴까요? 이는 기드온의 삶을 움직이는 동기가 어느새 기드온 자기 자신에게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알고 있는 답을 마음으로 깊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 입으로 말한 정답을 스스로 배반하는 삶!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옳은 일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내 입맛대로 행하며 사는 삶! 지금 기드온의 삶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기드온의 두 얼굴을 모두 다 살펴보았습니다. 한 쪽에는 겸손하고 충성스러우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성숙한 기드온의 얼굴이 있습니다. 다른 한 쪽에는 옹졸하고 감정적이며 자기 영광을 구하는 미성숙한 기드온의 얼굴이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얼굴이 진짜 기드온의 얼굴입니까? 헷갈립니다. 기드온을 찾아가서 이렇게 물어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기드온, 당신은 누구입니까?”

처음부터 기드온이 두 얼굴의 사나이였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 기드온은 자신의 약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보리떡처럼 보잘 것 없는 인물이요, 아무 것도 아닌 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지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었습니다. 7장에서 기드온이 출전하기 직전에 하나님께 경배했다는 구절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내 삶을 온전히 다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표현입니다. 이렇게 그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 그는 여호와의 칼날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승리하고 난 직후부터 조금씩 변하기 시작합니다. 목에 힘이 들어가고 자기의 욕망을 앞세우기 시작합니다. 성공한 후부터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에봇을 만들어 자신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만이 왕이시라고 선언을 해 놓고 자신이 왕처럼 삽니다. 기드온이 거둔 놀라운 성공이 오히려 그에게 독이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이 무엇일까요? 대부분 실패라고 답할 것입니다. 실패는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닙니다. 괴롭고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그 실패를 통해 우리는 깨닫고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와 약점을 깨닫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하나님 외에 내가 의지하던 헛된 우상이 무엇인지 드러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성공이 한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성공의 경험은 너무 짜릿한 경험입니다. 이것을 한번 맛보게 되면 성공 자체에 중독되기 쉽습니다. 성공에 의존하고 되고 다음에 더 큰 성공을 해야만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받게 됩니다. 결국 성공과 성취를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우상숭배자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공은 우리를 영적인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성공을 통해 너무도 쉽게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나를 부르시고 나를 붙드시고 나에게 확신을 주신 그분을, 나에게 승리를 주시고 나에게 성공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다 보면 이 모든 것이 다 은혜로 주어졌다는 것을 망각하고, 전부 다 내가 잘 해서, 내가 땀 흘리고, 내가 아이디어를 내고, 내가 용기를 낸 덕분에 이룬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인생의 주인이 내가 되어 내 중심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성공과 성공이 가져오는 만족과 부와 명예, 안락함과 자기 자랑은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앉게 만드는 위험 요소를 안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의 말하는 정답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삶 사이에 거리가 점점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왕이시라 고백을 하면서 동시에 교묘한 방법 내가 왕이 된 삶을 추구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을 입는 대신 내가 만든 화려한 에봇을 입으려 합니다.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한다고 말은 하면서 다른 것에서 만족을 구합니다. 주님이 나의 목자라고 말하면서 다른 것을 의지합니다.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는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두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절대 잊지 말고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셨고, 나와 함께 하셨고 나에게 일생 갚아도 다 같을 수 없는 큰 은혜를 베푸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종종 실패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성공했다면 우리는 더 많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실패의 때이든 성공의 때이든 우리가 붙들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8-10)

사사 기드온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나라를 구한 히어로인 동시에 안타깝게도 성공의 함정에 빠져 부패해 버린 안티 히어로이기도 합니다. 그는 사사로서 절반은 성공했지만 절반은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기드온의 실패를 만회한 완전한 구원자가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성공보다 세상의 부와 명예보다 하나님 뜻에 따라 사는 것을 최우선 순위에 두셨습니다. 순종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두셨고, 말씀하신 그대로 사셨습니다. 사탄이 보여주는 천하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거절하셨습니다. 왕이신 분께서 왕의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셨습니다. 자기 생명을 내어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은 성공에 대한 우리의 욕심과 성공이 주는 위험에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 주님을 바라보며 겸손히 주님을 의지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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