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사기

보리떡과 칼

이창무 2023. 4. 23.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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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사기 제 7 강 / 이창무

보리떡과 칼

말씀 / 사사기 7:9-25
요절 / 사사기 7:20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이르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하고”

한자 중에 익힐 습(習) 자가 있습니다. 이 글자를 보면 깃 우(羽) 자와 흰 백(白) 자가 합쳐진 모양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뜻은 흰 새가 날기 위해 백 번을 퍼덕거리며 나래 짓을 하는 모양을 그린 글자입니다. 흰 새란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어린 새를 지칭합니다. 어린 새가 수도 없이 날개 짓을 해서 그것이 몸에 익을 때에야 비로소 하늘을 나는 새가 될 수 있다는 뜻을 이 글자 안에 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겁쟁이였던 기드온이 진짜 큰 용사가 되어 승리를 거둡니다. 이런 엄청난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지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시고 다양한 수단으로 확신을 심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 한 사람을 낳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감당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택하신 수단이 바로 보리떡과 칼이 등장하는 이상한 꿈 이야기입니다. 이 꿈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 말씀에서 소명과 약속과 도전이라는 단축키로 기드온을 새로고침 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새로고침을 받은 기드온은 미디안과 전쟁을 벌이기 위해 여기 저기 사신을 보내서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모은 사람들 거의 대부분을 돌려보내셨습니다. 기드온의 곁에는 단 3백 명만 남아있습니다.

이때 기드온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3백 명으로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 미리 유서라도 써 두어야 하나? 그냥 도망쳐 버릴까?’ 그날 밤 기드온은 별별 생각에 잠 들지 못하고 이쪽 저쪽으로 몸을 뒤척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드온의 마음을 아시고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 주었느니라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와 함께 그 진영으로 내려가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그 진영으로 내려가리라”(9-11)

하나님은 또다시 기드온에게 승리를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미디안 진영으로 내려가서 그들이 하는 말을 도청해 보라고 하십니다. 이에 기드온은 자신의 부하와 함께 적의 진영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메뚜기와 같은 수많은 적들과 해변의 모래와 같은 낙타들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 안 그래도 두려웠던 마음이 더 두려워졌습니다. 이왕 온 김에 미디안 병사들이 무슨 말을 하는 지 들어나 보기로 했습니다. 귀를 기울여 보니 어떤 미디안 병사가 그의 친구에게 자기가 꾼 꿈에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곧바로 친구가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꿈의 주인공이 기드온 자신이었습니다. 꿈은 기드온을 두 가지 사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보리떡입니다.

“기드온이 그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엎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13)

그리고 또 하나의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칼입니다. 

“그의 친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더라”(14)

한 사람을 표현하고 상징하는 말이 두 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개의 말들은 서로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떡은 물컹물컹합니다. 하지만 칼은 단단합니다. 떡은 뭉툭합니다. 하지만 칼은 날카롭습니다. 우리가 보통 떡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까? 대개 형편 없음, 별 볼 일 없음, 실패 등을 상징합니다. 보리떡은 더욱 그러합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보리떡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었던 개떡과 비슷합니다. 흔히 ‘오늘 기분이 개떡 같네.’ ‘오늘 날씨가 개떡 같네’ 이런 식으로 쓰입니다. 그러나 칼은 다릅니다. 칼은 예리함을 의미합니다. 칼은 떡을 자르는 매서움, 단호한 결심을 의미합니다. 칼 같은 성격, 칼날 같은 기상, 날선 진리 이런 식으로 쓰입니다. 이 두 개의 말이 하나의 대상을 지시할 수 없습니다. 도저히 한 사람에 대해서 같이 쓸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을 향해 “너는 떡이다. 그런데 동시에 너는 칼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드온은 정말 보리떡과 같은 사람입니다. 기드온이 등장하던 첫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포도주 틀 안에서 깨작깨작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소심하고 두려움이 많은 사람입니다. 또한 기드온을 보면 빨리 빨리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굉장히 느립니다. 이것이 다른 사사들과의 차이점입니다. 옷니엘이나 에훗, 드보라 같은 앞선 사사들은 하나님이 부르시면 바로 바로 즉각 반응을 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큰 용사로 부르심을 받고 나서도 6장이 다 지나가도록 도무지 나서질 않습니다. 7장에서도 계속 머뭇머뭇합니다. 게다가 기드온은 얼마나 말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의 입에서는 “이걸요? 제가요? 왜요?”라는 반응이 계속 나옵니다. 그는 또 양털 가지고 이랬다저랬다 합니다. 기드온을 보고 있자면 속이 터집니다. 다른 사사들과 비교하면 기드온은 정말 보리떡 같은 사사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드온과 함께 있는 병사들을 보십시오. 겨우 삼백 명입니다. 그들도 역시 보리떡 같습니다.

왜 기드온은 이렇게 느릴까요? 왜 이렇게 못나고 변명이 많을까요? 사사기를 연극의 무대 조명에 비유한다면 사사기는 한 장, 한 장 더 진행할수록 조명이 어두워진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상과 점점 더 비슷해져 갑니다. 세대가 흐를수록 백성들은 세상과 점점 비슷해져 갔기 때문에 점점 더 고집스럽고 강퍅해졌습니다. 사사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자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 시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역할이기도 합니다. 너무 느린 기드온, 너무 고집 센 기드온, 너무 생각이 복잡하고 핑계가 많은 기드온! 이것은 세상과 비슷해져 가던 당시 하나님 백성의 모습을 대변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기드온 속에 곧 하나님 백성 속에 걷어 내야 하는 장애물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뜻입니다. 장애물들이 많을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 속으로 들어오기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이것이 기드온의 모습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현주소였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에게는 더 많은 단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에 코로나 이후 거의 4년 만에 오프라인에서 처음 열린 선교 보고 대회가 있었습니다. 시카고 문누가, 문폴린 선교사님과 서요한 선교사님이 은혜로운 선교 보고를 해 주셨습니다. 세 분의 선교 보고를 들으며 감동을 받는 한편,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분들이 옷니엘, 에훗, 드보라라면 나는 보리떡이구나’ 이분들이 말씀하시는 내용이 지금과 달랐습니다. 예전에는 말씀 공부 한 번 만에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름수양회에 한 번 참석하고 나면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은혜 한 번 받으면 일생을 주님께 헌신하기로 결심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제 은혜 한 번으로 안 됩니다. 말씀 공부 한 번으로 안 됩니다. 여름수양회 한 번으로 변화되질 않습니다. 몸이 아프거나 진로가 막히거나 자녀에게 큰 문제가 생겨야 겨우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려고 합니다. 말씀 한 마디가 우리 마음에 깊이 역사하기 위해서 먼저 치워져야 할 수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우리가 세상과 비슷해져 있다는 반증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보리떡 세대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원조 보리떡 기드온을 보십시오. 이 사람 기드온이 드디어 여호와의 전쟁에 나섭니다. 기드온이 어떻게 담대하게 전쟁에 나설 수 있게 되었을까요? 그런 변화의 힘은 기드온 자신에게 나온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적진 한 가운데서 미디안 군사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를 듣게 하심으로 기드온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떡과 칼의 이야기입니다. 둥근 떡이 굴러오는데 그것이 칼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기드온은 보리떡이 바로 자기 자신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보리떡이 칼로 변신하는 것이었습니다.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엎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 .......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보리떡! 저건 나 기드온인데 그런데 어떻게 칼날로 바뀌어 버리네.” 떡인데 칼이 되는 것입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두 물건, 떡이 칼로 변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이 고집 센 사람 기드온이 드디어 일어나서 여호와의 전쟁을 수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 속에 있던 마지막 장벽을 무너뜨려 주신 것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일으켜 세울 수 없었던 이 보리떡 인생을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신 것입니다.

이어서 기드온과 삼백 군사가 싸우는 모습을 보십시오. 이들이 들고 싸우는 무기를 보십시오. 칼과 창과 총이 아닙니다. 나팔과 항아리와 횃불입니다.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이르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하고”(20)

전쟁에 나섰다면 당연히 들어야 하는 무기가 무엇입니까? 당연히 칼입니다. 그런데 칼은 한 자루도 없고 나팔이나 불고 항아리나 부수고 있습니다. 무슨 축구 경기 응원하러 왔습니까? 더 아이러니한 것은 칼 한 자루 없는데 이스라엘 군사들은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라고 외칩니다. 보리떡 같은 무기, 개떡 같은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서 뭐라고 외치는데 ‘이것이 우리의 칼이다’ 라고 외칩니다. 칼로 변한 보리떡이 이렇게 믿음으로 일어서니까 미디안 군사들이 하나같이 떡실신하고 말았습니다. 서로 칼로 치면서 개떡처럼 망가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와의 전쟁에 나서기 위해서는 용감하게 무너뜨려야 하는 장벽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나안 곧 세상과 비슷해져 있을수록 그 장벽들은 더 많아질 것이며 더 강력할 것입니다. 그 장벽들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자아의 장벽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고 말씀하셔도 기드온은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볼 때 큰 용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밤에 우상을 부수는 그 부끄러운 순종이라도 억지로 하게 하심으로 기드온의 자아의 장벽을 균열이 가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도 반복된 실패을 경험하며 낙심, 자기 연민, 피해 의식에 빠져 있으면 이런 반응이 나옵니다. ‘한 영혼의 목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 자아의 장벽을 먼저 무너뜨려 주고자 하십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험을 감수하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의 보여야 할 반응은 순종입니다. 작은 순종도 좋고 부끄러운 순종도 좋고 소심한 순종도 좋고 어찌되었든 순종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아의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빚어 가시는 나를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두 번째 장벽은 불신의 장벽입니다. 불신의 장벽이란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잘 믿겨지질 않고 경험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봐도 그렇고 세상을 보아도 그렇고 도무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처럼 보이질 않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이 장벽이 거대해서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전쟁터로 바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양털 뭉치에만 이슬이 젖게 해 달라.’ ‘양털 빼고 다 젖게 해 달라’ 이런 요구를 하나님께 했습니다. 하나님을 내 손으로 만져 보지 않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을 것 같아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드온의 무리한 요구에도 응답하셔서 두 번째 장벽을 무너뜨려 주셨습니다. “주님을 믿게 해 주십니다. 주님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또 하나님께 실망할까봐 제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는 이 장벽을 무너뜨려 주십시오.” 우리도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자신의 살아계심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마지막 장벽이 한 가지 더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두려움의 장벽입니다. 자아와 불신의 장벽이 무너져 전쟁터에 왔는데 기드온은 내려가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움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쟁터에 와서 보니 나는 보리떡이었습니다. 저 수많은 미디안 군사들이 가진 칼날을 보고 기드온은 두려워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교제를 하고 나면 승리할 것 같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막상 세상에 나가보면 나는 여전히 보리떡이고 세상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즐비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워 할 말도 못하고 할 일도 못하게 됩니다. 이 두려움의 장벽이 무너져야 합니다. 이 장벽이 우리 영혼 속에서 와르르 무너져야 주님과 함께 믿음의 싸움을 싸울 수 있습니다.

어떻게 두려움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까? 어떻게 강한 용사가 될 수 있습니까? 상식적으로 볼 때 강하게 되기 위해서는 미디안처럼 힘을 길러야 할 것 같습니다. 메뚜기 같은 많은 수의 군사를 모아야 하고 칼과 창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반대로 하도록 하셨습니다. 32,000명이었던 군사들을 300명으로 줄이도록 하셨습니다. 가지고 있던 무기를 내려 놓고 대신 나팔과 횃불과 항아리를 들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강하게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약하게 만드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면 이미 있던 두려움의 장벽이 더 높아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두려움의 장벽을 무너뜨려야 할 순간에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백성이 두려움을 이기고 강하게 되는 길은 세상의 길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에서 그때까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도 바울이 다음 세대에 믿음의 싸움을 수행할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딤후2:1)

이 말은 너무나 이상한 말입니다. 과연 은혜 안에서 강할 수 있습니까? 강하기 위해서는 은혜 안에 있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권면합니다. “은혜 속에서 강하라.”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내가 무능하다는 것, 내가 가난하다는 것, 나는 부족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만이 나의 능력이 되신다는 것,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자랑이요 나의 의가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은혜가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은혜 입은 자는 담대해 집니다.

기드온 속에 있는 장벽을 끝까지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마지막 펀치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나는 보리떡이지만 자비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손에 잡힐 때 칼날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이 기드온의 영혼에 결정적인 자유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나는 보리떡이다. 그런데 보리떡이 엉금엉금 굴러가면 여호와의 칼날이 된다.” 정말로 부족하고 콤플렉스 투성이에 느려터진 보리떡 같은 인생이 칼날 같은 인생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칼날처럼 보였던 미디안이 보리떡, 개떡이 되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다 보리떡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다 핸디캡이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 화려하고 당당해 보이는 사람도 다 마음에 아픔이 있고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저마다 다 약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허락하십니다. 신체적인 약점, 정서적인 약점, 성격적인 약점, 가정적인 약점일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 조건, 인간관계의 약점일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엄격한 품질 검사를 통과한 정품이 아닙니다. 다 어딘가 흠이 있는 B급입니다. 전부 보리떡입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이 보리떡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고 살아갈 때 그때 보리떡이 칼날이 되어 버립니다. 이 보리떡이 믿음으로 살아갈 때 이 세상을 향해 돌진할 때 이 보리떡이 칼날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본질입니다.

저는 기드온을 보면 남 같지가 않습니다. 꼭 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저는 같은 학번 동기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런데 제 동기들은 다 옷니엘 같고 에훗 같은 믿음의 용사들이었습니다. 젊을 때부터 풀타임 목자가 되거나 선교사로 나가 지금 라트비아, 뉴욕, 멕시코 등등 전세계에 포진해 있습니다. 반면에 저는 동기들에게 비해 영적으로 느렸습니다. 느려도 너무 느렸습니다. 기드온처럼 말이 많고 복잡하고 두려움도 많았습니다. 보리떡 개떡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저를 오래 참으셨습니다. 제 안에 있는 자아의 장벽, 불신의 장벽, 두려움의 장벽을 하나씩 하나씩 부수어 주셨습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 있는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누리게 하심으로 이 일을 이루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이 보리떡 개떡 같은 인생이 여호와의 칼날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칼처럼 예리하게 한 영혼의 심령을 찔러 쪼개는 말씀의 종이 되고자 하는 비전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한편 아직도 저는 실망하고 낙심 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이 없어서 어떻게 하나? 우리가 이렇게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무엇을 할 수 있나? 우리가 이렇게 세상에 물들어 있는데 하나님이 과연 우리를 쓰실 수 있을까?’ 고민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립니다. ‘우리가 보리떡이구나!’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붙들게 도와주십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장벽을 부수고 계시다. 자아의 장벽, 불신의 장벽, 두려움의 장벽을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은혜의 힘으로 무너뜨리고 계시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마침내 우리는 여호와의 칼날이 될 것이다. 세상을 이기는 주님의 군사가 될 것이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아멘!

보리떡은 보리떡의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보리떡은 미디안 군사처럼 살면 안 됩니다. 보리떡은 보리떡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보리떡은 이 세상 속에서 칼날이 됩니다. 보리떡 정신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 안에서 강해지는 것입니다. 미디안의 칼날 정신에 세뇌당하지 않고 보리떡 정신 곧 ‘나는 은혜 아니면 살 수 없다. 내게 참된 평안과 위로는 오직 예수님 뿐이시다.’는 각오로 고집스럽게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바보 같아 보였는데 나중에 보니 속이 꽉 찬 인생이 됩니다. 겉으로 보면 허접해 보였는데 알고 보니 하나님을 향한 경건이 있고 헌신과 사랑이 있는 아름다운 인생이 됩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충성과 헌신이 있는 멋진 인생이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여호와의 칼날입니다. 보리떡 같았던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칼날로 바꾸어 주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가 은혜의 힘으로 자아와 불신과 두려움을 장벽을 허물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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