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영생을 얻는 길

이창무 2022. 11. 28.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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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32 강 / 이창무

영생을 얻는 길

말씀 / 누가복음 18:18-30
요절 / 누가복음 18:29,30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지난 15일에 성복 중앙 교회에서 5년 만에 캠퍼스 청년 사역 컨퍼런스가 있었습니다. 올해 실시한 대학생 의식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였습니다. 내용을 정리해서 조만간 공유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제가 참석해서 느낀 점을 유명한 영화 대사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바로 이것입니다. “살아 있네” 길고 힘든 코로나 기간을 통과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캠퍼스 사역자들이 견디지 못하고 다 현장을 떠날 줄 예상했었습니다. 그러나 다들 죽지 않고 살아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안 죽고 살아있을 수 있었을까요? 대부분 기초생활 수급자로 살면서 어떻게 캠퍼스 선교 단체 간사로 버틸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아직도 이 캠퍼스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는 것을 꿈꿀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 말씀 속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8)”

어떤 관리가 등장합니다. 관리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그는 산헤드린 공회의 공회원이거나 회당장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또한 그는 재물이 많은 부자였습니다. 마가복음은 이 사람을 청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 높은 사회적 지위도 얻고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다니 대단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어릴 적부터 나쁜 것은 쳐다보지도 않고 욕 한 마디 한 적 없는 바른 생활 사나이였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딸 가진 부모 입장에서 보면 사윗감으로 욕심 낼 만한 사람입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께 나와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부릅니다. 그냥 선생님이라고 해도 될 것을 왜 굳이 선한 선생님이라고 했을까요? 혹시 예수님을 비꼬아 놀리기 위해 이런 표현을 쓴 것 아닐까 의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바른 생활 사나이에게 그런 불순한 의도가 있었을 리 없습니다. 부자 청년이 진정 예수님을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예의 있게 높여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은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나요’ ‘무엇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인생일까요‘하는 말로 바꿔도 좋을 것입니다. 좋은 문제 의식을 담은 질문이고 모든 사람이 치열하게 씨름해보아야 할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떤 답을 주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19)”

예수님은 먼저 ‘왜 나를 선하다 부르느냐’고 반문하십니다. 평소답지 않게 좀 까칠해 보이십니다. 예의 있게 예수님을 높여 부른 부자 청년 입장에서는 무척 무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선하신 분으로 알고 있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굳이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청년이 먼저 인간이 결코 선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청년의 질문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선한 사람만이 영생을 얻는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선하게 살려고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항상 뭔가 2퍼센트 부족하다고 느껴왔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저보다 선한 사람인 것 같으니 저에게 한 수만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신의 선함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의 어떠한 노력으로 스스로 선함에 이를 수 없다. 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다. 네가 하나님인 줄 아느냐? 착각하지 마라.”

그리고 난 후 예수님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했던 관리의 질문에 답을 주십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20)”

예수님은 십계명의 후반부인 5번부터 9번까지의 계명을 언급하십니다. 십계명의 전반부는 하나님 사랑과 관련되어 있고 이 부분은 전부 이웃 사랑과 관련된 계명입니다. 예수님이 전반부는 왜 인용하지 않으셨을까요? 경건한 유대인인 이 청년이 우상 숭배나 안식일 준수 등과 같은 계명을 철저하게 지켰다고 자부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에 대해서는 그렇게 자신 있게 답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이 계명들을 통해서 자신이 선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요? “제 안에 선함이 없습니다. 선을 행할 능력도 없습니다. 알고 보니 저는 죄인이었습니다.”하는 고백이 나오지 않을까요? 그러나 청년의 대답은 놀랍습니다.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21)”

그는 ‘이것을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대답합니다. 지금 그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선생님! 좀 실망입니다. 제가 십계명을 모를 리 있습니까? 아주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계명들을 지금까지 잘 지켜왔습니다. 지금까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착하게 살려고 최선을 다해 살아왔습니다. 영생을 얻는 조건이 그것이라면 저만큼 충분한 자격을 갖춘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의 대답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실제로 사람이 이렇게 살 수 있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살짝 마음이 거북합니다.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는 그 말이 정말인지 이렇게 한번 검증을 해보고 싶습니다. “정말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나요? 한 번도 남의 물건에 손을 댄 적이 없나요? 부모님께 떼를 쓰거나 반항한 적도 없어요? CCTV 까고 추적 들어갑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보면 이 부자 청년이 이 말이 덧붙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그는 겉으로 볼 때 아무런 부족함이 없어 보이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절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 똑바로 살려고 노력 많이 했거든요. 정말 많이 했거든요. 하지만 왜 제 안에는 하나님이 나와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없을까요? 왜 여전히 죽음이 두렵고 평안함이 없을까요? 아직도 부족한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이런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인생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을 가진 보기 드문 이 청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결정적인 것이 무엇인지 분명한 해답을 다음과 같이 주십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22)”

예수님은 그에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부자 관리에게 이것을 요구하셨을까요? 혹시 십계명으로 부족해서 열 한 번째 계명을 덧붙이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지금까지 그의 선행이 부족했으니 통 크고 화끈하게 선행을 해 보라는 뜻일까요? 그런 뜻은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명령을 통해서 그가 영생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 막고 있는 치명적인 장애물이 무엇인지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사실상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우상의 정체를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재물의 신입니다. 이 청년은 한 번도 이방신의 신전에 들어가 우상 숭배를 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삶 속에서 자기의 시간과 생각, 정력과 헌신의 대부분을 재물에게 바쳤습니다. 의식 속에서는 나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는 믿음으로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무의식 속에서는 하나님보다 자신의 많은 소유를 더욱 더 의지했습니다. 그는 늘 신사적이고 예의 바르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 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웃을 섬기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물질을 쓸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처럼 그는 재물이라는 우상에게 사로 잡혀 있기 때문에 나 이외의 다른 대상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었고,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네가 섬기는 신인 재물을 네 삶에서 몰아내고 나를 따르라. 그러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영생과 하늘에 속한 모든 복을 내가 주리라” 이것이 영생입니다. 예수님을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그 발 아래에 두는 것입니다. 내 영혼의 생명 되신 그분을 얻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 한 분을 알기 위해 다른 것을 알지 않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17:3).

부자 청년에게 영생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그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예수님, 감사합니다. 제가 재물의 종 노릇 해왔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재물을 과감하게 팔아서 다 나눠주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그는 영생의 기쁨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어깨를 견줄 만한 탁월한 제자가 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23)”

부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의 많은 재물을 그를 망설이게 했습니다. 마가는 그가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고 말합니다. 그는 간절히 영생을 얻고 싶었지만, 그것을 위해 자기의 재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영생의 문턱에서 그만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24, 25)”

당시 유대인들에게 재물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었습니다. 부자는 하나님의 축복은 받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재물이 있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힘들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힘든 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하나님 나라는 겸손하고 믿음 있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가진 것이 많으면 자연스럽게 교만해지기 마련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목에 힘이 들어갑니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에게도 겸손은 힘든 법인데, 가진 것이 많으면 얼마나 더 힘들겠습니까? 또 가진 것이 많으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점점 약해지기 쉽습니다. 가진 것에 기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같이 하나님을 순전히 믿고 겸손히 그분 앞에 나오는 일에 많은 소유는 큰 걸림돌이 됩니다.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26)”

이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인 재물을 많이 받은 부자가 구원을 받기 어렵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냐는 말입니다. 재물이 많든 적든 물질에 대한 욕망은 우리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어 하나님을 거부하게 만듭니다. 자식 사랑이 우리 마음 중심에 차지하여 하나님을 밀어냅니다. 내 안락함과 평안함이 삶의 목적이 되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물질, 자녀, 성공이라는 우상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게 되면 믿음과 겸손을 몰아냅니다. 그 대신 교만과 불신이 들어와 마음을 딱딱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면 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27)”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겸손하게 하십니다. 돌처럼 굳었던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십니다. 불신을 제거하시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넣어 주십니다. 예수님도 믿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만 믿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하시면 자기만 사랑하던 사람이 온 맘 다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은혜의 역사입니다.

이런 은혜의 역사가 실제로 이미 일어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산 증인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28)”

그 증인은 바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배와 그물을 버리고, 가족도 맡기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베드로만이 아닙니다. 우리라고 한 것을 보면 모든 제자가 다 이렇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무엇을 약속하십니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29, 30)”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재물을 희생하고 가족 관계보다 주님과의 관계를 더 우선시한다면 그에 대한 보상을 이 땅에서 여러 배 받고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은 약속하십니다. 영생은 둘째 치고 이 땅에서 여러 배 받는다는 말씀이 마음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그 보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사는 집보다 몇 배 아니 몇 십 배나 큰 본관과 교육관이 있습니다. 부모님 같고 형님 같은 선배 목자님들이 계시고 동생 같고 아들 같은 후배 목자님들과 양들이 있습니다. 제 친동생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더 깊이 이해해 주시는 동역자분들이 계십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이미 우리는 몇 배의 보상을 받고 있습니다. 내적으로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구원의 평안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성령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보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장차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살 것입니다.

감히 저도 증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고등학교, 대학교를 함께 다니고 지금도 종종 연락하는 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가 저를 볼 때마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먼저 된 자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 먼저 된다는 말씀이 진리라는 것은 너와 나를 보면 된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때 교회 회장으로 저를 전도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완강하게 거절하는 것은 물론이요 언젠가는 내가 너를 무신론자로 만들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임 사역자가 되었으니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제가 생각해도 너무 신기합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교만하기 짝이 없던 저를 하나님이 낮추셨습니다. 불신을 제거하시고 믿음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돌처럼 굳었던 제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셨습니다. 저는 십자가에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신 예수님 앞에 두 손 들고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저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공통 분모라고 생각합니다.

서두에서 캠퍼스 사역자들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분들도 우리들처럼 각자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경험한 분들입니다. 그분들이 코로나 기간을 거치는 중에도 안 죽고 살아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은혜의 역사가 다른 사람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청년들을 영생으로 초청했을 때 누군가는 부자 청년처럼 근심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또 누군가는 베드로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하는 사람이 나올 것을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변하고 동역자가 변하고 아들딸이 변하고 양들이 변하는 것, 사람은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암 1부를 엿보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물질주의가 워낙 거세고 전도도 안 되고 하니 다 죽을 줄 알았는데 … 살아 있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다른 그 무엇보다 주님과의 관계성을 앞세울 것을 단호하게 요구하십니다. 이것이 제자도의 핵심입니다. 많은 사람이 부자 청년처럼 여기서 주저합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얻기 위해 다른 것을 손에서 놓으면 왠지 손해볼 것 같습니다. 미련해 보입니다. 이 땅에서 손해만 보다가 죽고 나서 아무 것도 없는 망한 삶이 될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의 이 요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삶이 피폐하게 되거나 고갈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고자 했던 아브라함,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친 한나, 그리스도를 얻고자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 사도 바울, 아버지의 엄청난 유산을 뿌리치고 탁발 수도사가 된 성 프란치스코, 아우카 족에게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짐 엘리엇 선교사, 이들은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았지만 실상은 가장 소중한 것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영생을 축복으로 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장애물이 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과감하게 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영생의 기쁨을 맛보고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되는 참된 축복을 누리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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