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창무 2022. 6. 5.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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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13 강 / 이창무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말씀 / 누가복음 8:40-56
요절 / 누가복음 8:50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요즘 자녀가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제가 “딸만 셋입니다.”라고 대답했을 때 반응이 대부분 일치합니다. “와! 성공하셨네요.” “걱정이 없으시겠네요.” “얼마나 좋으십니까?” 이렇게 부러워하는 반응이 대부분입니다. 이럴 때마다 ‘세상이 참 많이 달라졌구나’ 하고 느낍니다. 또한 ‘딸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 좋기도 하지만 어려운 점도 많은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의 주요 등장 인물은 아버지와 딸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 되시는가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40)”

예수님이 거라사 지역을 떠나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이미 선착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배에서 내릴 때 가장 먼저 앞으로 나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41)”

바로 회당장 야이로였습니다. 회당장은 회당을 관리하고 예배를 주관하는 사람으로서 지역 사회에서 존경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누구에게 허리를 굽힐 일이 거의 없을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일이 일어납니다. 야이로가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자신의 집에 오시기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야이로는 지위와 체면을 다 내던지고 예수님 앞에서 이렇게 자신을 낮추는 것일까요?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려들더라(42)”

야이로에겐 열두 살 된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이 딸은 지난 12년 동안 아빠에게 큰 위로와 많은 기쁨을 주었습니다. 야이로가 회당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 ‘아빠’하고 달려 나가 그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런데 삶의 의미요 희망이었던 야이로의 어린 딸이 중병에 걸렸습니다. 열이 펄펄 끓고 자리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대로 가면 곧 죽을 것 같았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살릴 수만 있다면 야이로에게 체면이나 평판 따위는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오셔서 딸에게 손을 얹어 주시기만 하면 죽어가는 딸이 고침을 받을 것이라고 야이로는 굳게 믿었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예수님은 야이로의 믿음의 간구를 들이시고 기꺼이 그와 함께 나섰습니다. 이때 큰 무리가 따라가며 예수님을 에워싸 밀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 틈을 비집고 몰래 나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43)”

그는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않아온 여자였습니다. 혈루증은 부정기적으로 피를 흘리는 부인과 질환입니다. 이 때문에 여자는 만성 빈혈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또 늘 비릿한 피 냄새가 났습니다. 이런 상태로 12년을 보냈습니다. 그 삶이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을까요? 그러다가 여인은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중풍병자가 일어났다는 소식, 문둥병자의 몸에 손을 대자 깨끗하게 되었다는 소문, 한 손 마른 사람의 손을 회복시켜 주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이라면 내 병도 얼마든지 고쳐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그녀 앞에서는 큰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혈루증은 부정한 병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처럼 공개적으로 예수님 앞에서 나가 간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사람이 너무 많아 안 되겠구나. 여기서 접자’ 하며 포기했을까요?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44)”

여인은 앞으로 갈 수 없으니 대신 뒤로 갔습니다. 몸을 만지면 들킬 테니 느끼지 못하게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렇게만 해도 구원 받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믿어도 되는 것인가요? 이게 무슨 아무 믿음 대잔치입니까? 그런데 이 믿음이 역사했습니다. 단 한 번의 접촉이 있었을 뿐인데 그 순간 12년 동안 흐르던 혈루 근원이 곧 말랐습니다. 서서히 말라 죽어가던 여인의 온 몸에 생명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 손을 댄 행동은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45)” 사람들은 모두 ‘아니라’고 부인하며 말합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누구나 알고 있는 분명한 사실을 언급합니다.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이 말은 ‘주님,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밀고 당기고 있는데 누군들 주님을 안 만졌겠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예수님은 단지 사람들이 떠밀려서 자신을 만지는 행위가 아니라, 병 낫기를 바라고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만진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능력이 자신에게서 나갔다는 사실을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을 만진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다. 지금 몰라서 묻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스스로 사람들 앞에 나와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경험한 것을 고백하게 하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인은 더 이상 숨기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밝힙니다. 두려움으로 떨며 사람들 앞으로 나아와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이 손을 댄 이유와 즉시 낫게 된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만일 예수님이 그냥 모른 척하셨다면 어땠을까요? 왜 굳이 조용히 빠져나가려던 여인을 붙잡으셨을까요? 우리는 그 답을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48)”

첫째,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고자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두 명의 딸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된 딸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입니다. 공교롭게도 둘 다 12라는 숫자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12년 동안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중병에 걸렸습니다. 이 때 이 어린 외동딸에게는 사회적 신분이나 체면을 다 내던지고 자기를 살리기 위해 무릎을 꿇고 간청하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혈루증 앓던 여인에게는 그런 아버지가 없었습니다. 12년이나 되는 긴 세월 동안 병으로 고통을 받았지만 자기를 위해 대신 간청해 줄 아버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혼자 예수님께로 와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자기를 숨긴 채 비굴하게 예수님의 뒤로 와야만 했습니다. 아마도 여인은 좀 전에 야이로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딸을 위해 간청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나에게도 저런 아버지가 계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혈루증에 걸린 것도 서러웠지만, 저런 아버지가 없는 것이 더 서러웠을 지 모릅니다. 저런 좋은 아버지가 없어서 자기를 숨긴 채 예수님의 뒤로 와야 하는 자기 처지가 더 서러웠을 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첫 마디가 무엇입니까? “딸아!” 여인이 지난 12년 동안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여인의 현재 나이를 고려해 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딸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자비하신 아버지, 영원한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인은 이제 더 이상 아버지 없는 외로운 여자가 아닙니다. 올 때는 혼자서 서럽게 왔지만 갈 때는 어깨를 펴고 당당히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나에게 ‘딸아’ 불러 주는 세상에서 제일 든든한 아버지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도 최고의 아버지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나를 향해 아들아! 딸아! 불러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아버지가 없는 사람처럼 서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지 없는 사람처럼 기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사랑 받는 아들 딸로서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평안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여인을 가게 두지 않으시고 불러내신 것은 창피를 주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평안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약 여기서 여인이 그냥 돌아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의 은총을 도둑질했다는 죄의식이 남았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알게 되면 자기를 용서하지 않고 판단하고 비난할 것이라 생각에 불안했을 것입니다. 비록 몸은 건강해졌을지라도 마음 한 구석에 평생 어두움이 남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병이 나은 것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여전히 따돌림을 당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을 딸이라 부르시고 여인의 믿음 외에 아무것도 보지 않으셨습니다. 옛말에 딸이 친정집에 오면 부지깽이까지 가져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딸이 아버지의 능력을 가져갔는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예수님은 아버지요 이 여인은 딸이니 딸이 아버지를 신뢰함으로 한 행동은 아무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이제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다 알게 되었으니 여인은 더 이상 숨겨야 할 이유도 사라졌습니다. 사람들과 자유롭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데 어떤 장애물도 없어졌습니다.

여인의 육신의 병을 고침 받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인이 기대하지도 않았던 마음의 병, 영혼의 어둠까지 다 치유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이 여인의 아버지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압니다. 자녀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돈을 준비하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는 존재가 아버지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잘 알지 못할 때 예수님이 그 문제를 먼저 아십니다. 왜 우리에게 평안이 없는지 우리보다 더 잘 아십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나서십니다. 우리는 다만 예수님을 믿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그분이 숨기지 말고 고백하라 하시면 고백하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여인과 대화가 길어질수록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회당장 야이로였습니다. 딸의 생명이 꺼져가는 심지처럼 위태한 순간에 나타난 이 여인이 얄미웠습니다. 그런 여인을 굳이 불러 세우신 예수님도 야속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설마 했던 일이 현실로 닥치고 말았습니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49)”

예수님이 아직 여자와 말씀하실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50)”

첫째,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죽은 딸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셨습니다.

야이로가 처음 예수님께 올 때부터 딸은 이미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딸은 언제든지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딸이 죽었다고 해서 새삼스럽거나 놀랄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딸이 죽었다고 해서 야이로가 여기서 딸을 이대로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포기하지 않고 죽은 딸을 살리고자 할 것인가 정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집에서 온 사람은 야이로가 이대로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분명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계속 매달릴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천하의 예수님이라도 이미 죽은 딸을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딸의 죽음을 알리면서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죽음이라는 차가운 현실을 빨리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최고의 충고이자 조언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딸을 포기하라고 해서 야이로가 포기할 수 있을까요? 도저히 그럴 수 없습니다. 야이로는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포기하는 것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라 할지라도 포기 못하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가능성이 0.0001% 만 되더라도 붙들고 싶은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가 아닌 사람은 이 마음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야이로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이미 죽은 딸이라도 다시 살리고 싶은 그 애타는 마음, 간절한 마음을 아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야이로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시기로 마음을 먹으셨습니다. 소식을 전하러 온 사람은 야이로에게 “당신의” 딸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라는 말을 빼고 “딸”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은 소녀를 야이로의 딸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딸로 여기신 것입니다. 야이로가 아버지로서 할 수 없는 딸의 구원을 예수님께서 대신 이루어 주고자 하십니다. 이 예수님은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죽음 너머의 희망을 주시는 전능하신 아버지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대신 계속 믿기만 하도록 야이로를 도우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뒤집으면 야이로에게 두려움이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어떤 두려움이었을까요? 야이로는 딸을 포기할 수는 없지만 결국 희망한 대로 딸을 살릴 수 없을 것 같아 두려웠을 것입니다. 딸에 대한 사랑이 이제까지 그의 삶의 기쁨이요 원동력이요 행복이었습니다. 앞으로 딸이 없는 삶을 살아낼 자신이 없어 야이로는 두려웠을 것입니다. 이 순간만큼은 야이로는 아버지가 아니라 두려워 떠는 한 아이였습니다. 한계 앞에 절망하는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그런 야이로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야이로야! 더 이상 불안해하지 말고 겁내지 말아라. 내가 있지 않느냐? 나만 믿어라. 나에게 기대고 의지해라. 나는 예수니라” 알고 보니 아버지 야이로도 기대고 의지할 아버지가 필요한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야이로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인생 최악의 순간에 이런 좋으신 아버지가 곁에 계셔 희망과 믿음을 잃지 않도록 북돋아 주시니 야이로는 얼마나 복 받은 인생입니까?

야이로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딸 가진 아버지들에게는 어느 정도 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해 주고 싶은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딸이 성장하면서 아버지로서 해 주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당장 중학생만 되어도 수학 문제가 너무 어려워서 초등학교 때처럼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뭔가 큰 고민이 있어 보이긴 한데 뭔 지 알 수가 없습니다. 솔직하게 털어 놓는다고 해서 다 들어 봤는데 들어봐도 도통 모르겠습니다. 나름 조언을 한다고 해 봤는데 딸의 표정이 “역시 아빠도 꼰대였어”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점점 자신감이 없어집니다. 딸이 원하는 것을 다 해 주고 싶어도 여건 상 형편 상 다 해 줄 수 없습니다. 딸에게 나의 단점과 약점까지 물려준 것 같아서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고 나이가 들수록 나는 딸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아버지인가 짐만 되는 아버지인가 물으며 자괴감에 빠지곤 합니다. 아들 가진 아버지도 대동소이할 것입니다. 내가 무능하고 한계가 많은 아버지라는 사실이 아버지들을 두렵게 합니다.

그러나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성육신 하실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한계가 없으시고 자연 세계와 영적 세계, 질병과 죽음까지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모르는 것을 다 아시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 아들 딸들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는 두려워하는 대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면 됩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가 무릎 꿇고 간구하는 것, 상황이 변한다 하더라도 변함 없이 예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몫입니다. 그 외에 우리가 할 수 없는 것, 영혼과 생명과 인생 전체를 인도하시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저도 아버지이긴 하지만  한계가 많은데 예수님이 기꺼이 제 딸들의 전능하신 아버지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아버지이긴 하지만 속으로는 두려움이 많은 아이인데 이런 저에게 예수님이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험한 세상을 우리가 하늘 아버지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야이로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는 예수님이 자기 집으로 가는 것을 막지 않습니다. 계속 믿기로 한 것입니다. 이제 드디어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에 이르렀습니다. 집은 이미 사람들의 슬픔의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상식 밖의 말로 시끄러운 소리를 잠재우십니다.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52)” 야이로의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사람들은 비웃음으로 반응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지금 울며 통곡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는 자로, 자는 것과 죽은 것도 구별하지 못하는 무지한 랍비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죽음은 잠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아버지가 아이의 잠을 깨우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아이야 일어나라(54)” 그러자 아이의 영이 돌아와 아이가 즉시 일어납니다. 곧바로 음식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완전히 살아났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열 두 해 동안 혈루증 않던 여인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열 두 살 난 한 소녀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딸의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던 야이로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매개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다른 것은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믿음으로 자기에게 나아온 사람을 예수님은 아들과 딸로 영접해 주십니다. 믿음으로 나아온 사람의 자비하신 아버지, 전능하신 아버지가 되어 주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우리가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 있는 평안과 구원을 체험하고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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