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원수를 사랑하라

이창무 2022. 5. 10.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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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8-2 강 / 이창무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 / 누가복음 6:27-36
요절 / 누가복음 6: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 보면 전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잘 깨달어지지 않을 때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정말 이렇게 살고 있을까 의문이 드는 내용을 전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어려움 중에서 최정상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자격은 없지만 주신 소명이 있기에 오늘도 감히 예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자 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둔 전날 밤 제자들에게 이런 교훈을 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새 계명일까요? 예수님 이전에도 이후에도 사람들이 이런 말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 말씀을 새 계명이라고 하셨을까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말 속에 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이 다른 사람들의 사랑과 다른 것이기에 새 계명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이 다를까요?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들이 이제부터 실천해야 할 사랑이 어떤 사랑일까요?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27,2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수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정의에 따르면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 저주하는 사람, 모욕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려고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원수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적대적인 세상은 제자들에게도 역시 적대적입니다. 개독교니 뭐니 하면서 저주를 퍼붓습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려고 하면 상을 주어야 하는데 도리어 핍박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불쌍히 여겨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는데 목자에게 모욕하고 상처주는 말을 남기고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로 인해 우리는 고통을 받습니다. 그들 때문에 내 명예가 실추되고 실제적으로 손해를 입습니다. 이럴 때 너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잠이 안 오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맞서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수를 제거하든지 최소한 발을 끊고 멀리하기라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보편적인 대처 상식입니다. 율법도 이를 지지해 주고 있습니다. 신명기에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아주라고 했습니다. 적절한 응징을 해 주어야 나 자신을 지킬 수 있고 또한 사회를 정의롭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도무지 가능한 일일까요? 원수 사랑을 비현실적이라고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오늘날 사람들이 사랑을 주로 감정의 문제로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애틋한 감정이나 로맨스에 사랑의 핵심이 있다고 여깁니다. 가요, 영화, 드라마 등에서 다루는 사랑은 다 이렇게 뜨겁기도 식기도 하는 사랑입니다. 먼저 자연스럽게 좋은 감정이 생겨야만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원수에게 호감이 생길 리가 있겠습니까? 내 의지로 없던 감정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원수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원수를 선대하며 축복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선대하는 것은 잘 대해주고 친절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축복하고 기도하는 것은 그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도록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호감이 없어도 사랑의 행동, 사랑의 말을 하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계명에 대해 우리가 순종할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감정이 소중한 것은 사실입니다. 감정은 솔직하게 표현하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에게는 순종이 나의 기분과 감정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셀 수 없이 많을지라도, 우리가 일단은 순종해서 사랑의 말, 사랑의 행동을 보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29)”

뺨을 맞아 보셨나요? 뺨을 맞으면 아픈 것보다도 모욕감과 수치심을 더 크게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뺨을 맞았을 때 문자 그대로 꼭 다른 쪽 뺨도 돌려 대라는 것이 아닙니다. 모욕을 당했을 때 보복하지 말고 계속 같은 모욕을 당하는 것까지도 감수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사람들이 모욕할 때 예수님은 천군천사를 동원하여 그들을 징벌하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도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가고 매맞고 애매하게 고난을 당할 때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묵묵히 복음 전하는 것에만 힘을 썼습니다. 모욕을 참는 것,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의 행동입니다.

다음으로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겉옷이 여러 벌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단 한 벌의 겉옷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밤에는 겉옷이 이불 역할까지 했습니다. 만약 이 소중한 겉옷을 누가 가져간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장 달려가서 되찾아 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겉옷 뿐 아니라 속옷까지 줄 생각을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일반화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30)”

예수님은 우리에게 빌려가든 가져가든 누군가 너의 소유를 가져가면 다시 찾으려 하지 말라 하십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수치를 덮기 위해 겉옷과 속옷까지 다 내어 주시고 벌거벗은 몸이 되셨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우리를 위해 다 내어 주셨습니다. 제자들도 그러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는 자신의 소유를 자신의 것만으로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필요를 돌아보았습니다. 자신의 배타적인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내려 놓는 것,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방법대로 정말 이런 사랑을 해도 괜찮은가? 모욕을 참다가 병 나는 것 아닐까? 권리 주장을 세게 안 하면 호구 취급을 받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 길 외에 미움과 저주와 모욕을 해결할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똑같이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을 주는 것으로 상대를 이길 수 있습니까? 해결은 커녕 미움이 더 큰 미움을 낳고 복수가 더 큰 복수를 낳는 악순환 고리를 더욱 강화시킬 뿐입니다.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다크 포스(어둠의 힘)가 제다이 기사들을 타락시키는 방법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어둠의 힘은 제다이 기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뺏아가 갑니다. 그가 복수에 눈이 멀어 닥치는 대로 살육을 벌이다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어둠의 힘에 사로 잡힌 사람이 되고 맙니다. 결국 스타워즈에서 승자는 복수에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복수를 포기하고 자신을 희생하려고 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오직 선으로만 악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미움과 적대감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조건 없는 사랑뿐입니다.

사실 우리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는 사람, 알고 보면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 마음 속에 얼마나 상처가 많고 병들었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우리가 반격하면 할수록 더 세게 재반격을 해올 것이 뻔합니다. 그러나 반격이 할 줄 알았는데 반대로 더 잘해 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처음에는 무슨 꿍꿍이 속이 있나 의심할 것입니다. 하지만 계속 사랑하면 냉담했던 그 마음이 조금씩 풀리게 될 것입니다.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이 언젠가 열릴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미움과 적대감이 햇살에 눈 녹듯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반면 사랑 대신 복수를 선택하면 원수가 망가지기 전에 나부터 망가집니다. 미움과 복수심 때문에 내가 무너지면 내 삶이 황폐해지면, 제일 즐거워할 사람은 원수입니다. 나 자신을 지키려면 계속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최고의 복수가 무엇일까요? 사랑으로 항복시키는 것입니다. 원수가 무장해제될 때까지 적진에 섬김의 폭탄, 사랑의 폭탄을 아낌없이 쏟아 붓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이기는 사람, 위너(Winner)가 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말씀하신 사랑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포괄적으로 정리해 주십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31)”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황금률입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세네카는 남에게 호의를 입은 만큼 그 사람에게 돌려주라고 했습니다. 공자는 네가 원하지 않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받기 전에 먼저 대접을 하고,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애쓰라 하십니다.

남에게 어떤 대접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저는 다른 사람이 저에게 관대했으면 좋겠습니다. 질책하지 말고 저를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뭔가 잘못해도 상대방이 와서 다 용서한다고 말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저는 다른 사람이 저에게 잘 했다고 칭찬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의 필요를 누군가 알아서 채워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원하는 바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해주라고 하십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자는 정도로 소극적으로 대하지 말고 사람들이 예상하고 기대하던 수준을 뛰어넘어 적극적으로 베풀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세우신 사랑의 새로운 기준, 제자의 “New Normal” 입니다.

문제는 이 사랑의 기준을 어떤 사람을 대상으로 적용해야 할까 하는 것입니다. 대상에 따라서 우리는 적극적인 사랑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습니다. 남에게는 그렇게 까탈스러워도 자기 자신에게는 그렇게 관대할 수가 없습니다. 범죄자라 할지라도 자기 자녀만큼은 끔찍하게 사랑합니다. 소설 “대부”에 보면 이탈리아 마피아 두목 비토 콜레오레가 등장합니다. 그는 수많은 사람을 살해한 잔혹한 인물이지만 아들 마이클이 마피아가 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여 존경 받는 떳떳한 사람이 되길 바랬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나 자신이거나 자녀라면 어느 정도 적극적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 이런 종류의 사랑이라면 세상의 사랑과 별로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그 대상이 세상이 말하는 사랑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32-34)”

예수님은 참된 제자와 그렇지 않은 죄인들을 구별하고 계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문제는 이웃의 범위였습니다. 그들은 세상에는 이웃과 이웃 아닌 사람, 이렇게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웃의 범위를 확 줄이고 선을 확실히 그어버리면 내가 좋아하고 합이 잘 맞는 사람들만 사랑하면 됩니다. 이러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그리 실천이 어렵지 않습니다. 유대인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할 사람의 범위를 정하고 선을 긋는 일을 합니다. 심사숙고해서 사랑의 원 안에 들어올 사람을 선별합니다. 그리고 그 범위 안에 든 사람만 사랑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만약 제자들이 이런 사랑을 한다면 특별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다르게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모습에서 제자들이 세상과 구분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웃은 물론이요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하십니다. 곧 너희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는 자에게도 너희의 사랑을 보이라고 하십니다. 그럴 때에 사람들은 제자들을 주목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사람이 어떻게 저런 사랑을 할 수 있나?” 하며 관심 갖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믿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확실히 다르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내 주위에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 믿을 만한 사람만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런 환경에서는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것이 어렵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한 스텝 목자님이 함께 순회 교육을 받는 목자님들과 장막 생활했던 시절을 평생 잊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목자님들이 서로 먼저 섬기려고 더 많이 사랑하려고 치열한 경쟁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먼저 걸레질을 하겠다며 걸레를 가져가는 바람에 몇 바퀴를 돌고 나서야 겨우 청소를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천국이 있다면 바로 여기가 아닌가 싶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극히 예외적이고 일시적인 일입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먼저 섬기려 하면 그냥 계속 섬기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호의가 계속 되면 권리인 줄 압니다. 어쩌다 쉬려 하면 왜 이번에는 안 섬기냐고 주위에서 도리어 화를 내기도 합니다. 사랑 경쟁이 아니라 내 것 챙기기 경쟁이 벌어집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는 사랑하는 것이 너무 어렵고 힘이 듭니다. 그런 사랑을 하면 나만 손해 볼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데 그래도 사랑해야 되나요? 꼭 그래야 하나요? 네, 그래도 사랑해야 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35a)”

예수님은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사랑하기 어려운 이유는 손해 볼 것 같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저 사람은 아무리 사랑을 줘 봐야 절대 사랑으로 보답할 사람이 아닌 것 같기 때문입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헛된 일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반드시 보상을 받습니다. 결코 일방적으로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닙니다. 그 사람이 갚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상을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수요 예배 말씀은 룻기였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룻에게 어떤 보답을 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능력이 나오미에게는 없었습니다. 대신 보아스가 룻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룻의 자비를 보신 하나님께서 보아스를 보내 보상해 주신 것입니다. 갚아 주되 넘치도록 갚아 주셨습니다. 이처럼 땅에서 보상을 받기도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결코 손해는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하늘 나라에서 상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사랑을 실천해야 할 이보다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35b)”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고 계십니다. 작년에 개그맨 남희석의 11대 할아버지인 유학자 남구만의 초상화가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남구만 선생의 얼굴이 남희석 씨의 개성적인 얼굴과 꼭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아들은 아버지의 외모와 성격 등 여러 속성을 공유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는 어떤 속성을 가지신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계십니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있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그분의 은혜를 모르고 감사치 않는 사람들에게 대해 하나님께서 당장 천벌을 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인자하신 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바로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의 죄를 반복해서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셨습니다. 우리는 내가 뭔가 잘 한 것 같은데 그 대가가 돌아오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불공평하신 것 아니냐며 투덜대곤 합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께서 공평하게 하신다면 이 세상이 남아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받을 아무런 자격과 조건을 갖추지 못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가장 귀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고 그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이 되었습니다. 미움과 적대감과 이기심으로 가득 찼던 우리 마음에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주신 그 한량없는 사랑을 채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36)”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랑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운 분이시고 그분의 자비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성 삼위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사랑받기 위해 그리고 사랑하기 위해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지 보여주셨듯이 이제는 우리가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처럼 사랑한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자기들의 사랑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순간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고 높임을 받으시게 됩니다. 이것보다 더 기쁜 일, 더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참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수준 높은 사랑, 탁월한 사랑의 실천을 요구하셨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향한 기대 수준과 목표가 높다는 뜻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너는 어차피 안 될 테니 중간이라도 해라, 남들 하는 만큼만 사랑하라고 하셨다면 오히려 실망스럽고 섭섭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아직 수준이 한참 못 미친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기필코 우리를 오늘 말씀하신 높은 수준의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빚으시고자 하십니다. 빚으시고자 하는 의지만이 아니라 그렇게 만드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십자가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이 그 정도로 충분히 크고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난 아마 안 될거야. 절대 그런 사랑은 못할 거야.” 라며 미리 포기하지 맙시다.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자비를 제대로 알면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어찌하든 순종하고자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세상과 다른 사랑으로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을 이 땅 가운데 드러낼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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