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이창무 2021. 7. 4.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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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16 강 / 이창무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말씀 / 요한복음 12:1-8
요절 / 요한복음 12: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선교 역사 가운데 빠질 수 없는 “찰스 스터드”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자주 이분에 대해 심포지움도 하고 전기도 읽어 보았기 때문에 저에게 친숙한 이름입니다. 선교사님 중에 찰스가 있다면 이분의 이름을 딴 것일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그는 영국의 명문 캠브리지 대학을 다녔고 교내 크리켓 팀의 최고 선수이자 주장이었습니다.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하는 엄친아였습니다. 그러다 D.L. 무디가 연 집회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일생 십자가를 증언하는 일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중국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함께 중국 선교사가 된 일곱 명을 가리켜 “캠브리지 세븐”이라고 부릅니다. 이때 주위에서 “경솔한 행동이다. 학식과 재능의 엄청난 낭비다” 떠들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영국으로 귀국한 뒤에는 강연을 통해 수많은 선교사, 캠퍼스 사역자를 배출했습니다. 말년에는 아프리카 콩고에 또 선교사로 나아가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헌신했습니다. 찰스 스터드는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분이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그분께 드리는 어떤 희생도 결코 크다고 말할 수 없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줄곧 이 분이 생각 났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와 여러 면에서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 모두 주님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향유 옥합을 깨듯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주님께 부어드렸습니다. 어떤 사람의 눈에는 이런 행동이 광신이나 극단주의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보시기에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주님 보시기에 향기로운 제물이 될 수 있을까요?

때는 유월절 엿새 전이었습니다(1). 이 유월절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예정된 유월절이었습니다. 이미 죽음을 향한 카운트다운은 시작되었습니다. 남은 숫자는 고작 여섯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외에 아무도 이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철없는 제자들은 서로 누가 더 크냐를 놓고 도토리 키 재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라는 마을에 계셨습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이 죽었던 나사로를 살려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잔치가 열렸습니다. 늘 그래왔듯이 마르다는 “백종원의 요리비책”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늘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던 마리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 나사로가 앉아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어디 있습니까?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3)”

잠시 후 마리아가 들어왔습니다. 마리아의 손에는 향유를 담은 옥합 하나가 들려 있었습니다. 이 향유는 인도에서 자라는 나드 나무 추출액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 가격이 삼백 데나리온 정도, 노동자의 일년치 품삯에 해당할 정도로 순도 높은 고급 향유였습니다. 마리아가 이만큼 모으기가 어디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까페 알바로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구한 것이었습니다. 아이폰을 사고 싶었지만 꾹 참고 중국산 저가폰으로 버티며 모은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마리아가 이 귀한 향유를 한 두 방울 예수님의 머리에 떨어뜨릴 줄로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리아는 옥합을 팍 깨트리더니 이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몽땅 부어 버렸습니다. 향유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했습니다. 마리아의 돌발 행동에 왁자지껄하던 잔치 집에 홀연히 적막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곧이어 마리아가 머리를 풀어헤쳤습니다. 길고 고운 생머리가 처렁거렸습니다. 무릎 꿇은 마리아는 그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정성스럽게 닦아 드렸습니다. 발은 물로 닦은 뒤 수건으로 물기를 제거하는 것이 상식 아닙니까? 마리아의 행동은 누가 봐도 비상식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엄청난 파격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왜 이렇게 했을까요? 마리에게 그 이유를 직접 들어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말없이 행동만 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예수님과 마리아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따라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은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삼 남매를 특별히 아끼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예루살렘 근처에 오실 때마다 베다니에 들려 함께 식사도 하시고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부모님 없는 삼 남매에게 예수님은 마치 아버지 같은 존재였습니다. 특히 마리아는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얼마 전 마리아는 죽은 오라비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살려 주시는 장면으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이때 예수님께 대한 감사가 얼마나 차고 넘쳤겠습니까? 마리아는 자신의 사랑과 감사를 어떤 모양이든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있는 가장 값진 것을 주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마리아가 가진 가장 값진 것은 단연 향유였습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 드렸습니다. 이로서 예수님의 가치를 결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평소 아무 미용실이나 다니지 않고 소중하게 관리하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부끄러웠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도리어 예수님의 발을 자기 머리로 닦아드릴 수 있는 것이 자신에게 큰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대단한 헌신 아닙니까? 그러나 정작 마리아 자신은 겨우 이 정도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예수님의 가치는 향유나 머리카락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마리아의 마음이 이해가 되십니까? 사랑을 해 본 사람은 마리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 헨리의 단편 소설 중에 ‘크리스마스 선물’이 있습니다. 가난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부부 짐과 델라가 있었습니다. 짐은 할아버지 때부터 물려 받은 시계가 자랑거리였고 델라는 아름다운 갈색 머리카락이 자랑거리였습니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 날 델라는 남편에게 시계와 어울리는 시계줄을 선물해 주고 싶었지만 수중에는 겨우 1달러 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길고 고운 머리카락을 잘라서 판 돈으로 20달러까지 시계줄을 삽니다. 시계줄을 받은 남편은 난감한 표정을 짓습니다. 사실은 시계를 팔아서 당신에게 줄 이 선물을 샀다며 고급 머리 장식 세트를 내놓습니다. 이 모순적인 상황 앞에서 델라는 울음을 터트리고, 짐은 괜찮다며 델라를 달래면서 이야기는 마무리 됩니다.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최고의 것을 주고도 아까워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 사랑하는 대상의 가치가 그 어떤 것보다 더 크고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허비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말씀을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비유의 이름이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탕자의 비유가 아니라 탕부의 비유라고 불러야 마땅하다는 주장입니다. “탕”는 낭비한다는 뜻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낭비했기 때문에 탕자입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왜 탕부입니까? 아버지는 사랑을 마구 퍼 주기 때문에 탕부입니다. 자격 없는 둘째 아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이런 사랑입니다. 사랑 받을 자격 없는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죽어 마땅한 자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죄의 종이 되었던 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십니다. 주님이 왜 날 사랑하나? 왜 이렇게 나에게 사랑을 퍼 주시는가? 우리는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게 주신 이 사랑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나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마리아의 이 행동, 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이해할 뿐 아니라 “나도 마리아처럼 살고 싶다. 그렇게 살지 못해서 부끄럽다.” 이런 마음을 갖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바로 가룟 유다였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5)”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라는 유다는 주장합니다. 어떻습니까?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교양과 상식에 근거한 말로 들립니다. 유다가 말할 때 아마 주변 사람들도 맞장구를 쳐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게 말이야. 부을거면 바닥에 비닐이라도 깔고 부을 것이지 아깝구만. 아까워.” “아니 사람이 무슨 대책을 세워놓고 일을 저질러야지. 앞으로 마리아는 시집가기 힘들겠어.” 성경 역시 유다의 말 자체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말에 진정성이 있었는지를 검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6)”

유다의 말은 겉보기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속셈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는 돈 관리를 맡고 있었습니다. 만약 마리아가 향유를 팔아 헌금을 한다면 그 돈을 몰래 횡령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회를 놓쳐서 화가 났을 뿐이었습니다. 유다는 남들 앞에서 상식 있는 교양인인 척 코스프레하고 있지만, 모두 다 가짜였습니다. 그에게는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본질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주의자였습니다.

상식이 있는 교양인이 되는 것은 참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나라 교육의 목적 중의 하나가 교양 있는 민주 시민을 양성해 내는 것입니다. 교양은 대체로 늘 옳은 말을 합니다. 그러나 교양 있는 말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정말 교양 있는 사람일까요? 다른 사람들 눈에 괜찮은 사람, 품위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교양이 있는 것처럼 포장할 수 있습니다. 공정과 정의, 윤리와 시민의 의무를 늘 강조하지만 뒤에서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편법과 반칙을 서슴지 않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더 나쁜 것은 자기도 따르지 않는 교양을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무기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교양이 없다. 무개념이다.” 마구 남을 손가락질해 놓고, 자기는 몰래 더한 짓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살면서 이런 허울뿐인 교양인을 만나 본 적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때 얼마나 실망이 큽니까? 동시에 혹시 나도 똑 같은 사람이 아닐까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나 자신 역시 늘 옳은 소리를 하지만 결국 자기만 위하고 진정한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닐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교양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이 교양을 자신의 속물 근성을 숨기는 도구로 이용하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람이 교회 안에는 없겠습니까? 사랑과 믿음보다 교양과 상식이 더 중요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믿어도 좀 적당히 믿어라. 광신자가 되지는 말라. 이거 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 자신의 사랑 없음이 드러날까 하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겉과 속이 다른 가룟 유다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면 이 상황에서 가룟 유다가 했던 그 말 자체는 옳은 말일까요? 항상 시민의 교양과 상식에 근거해서 판단하는 것만이 정답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이어지는 예수님의 반응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7-8)”

예수님은 일단 마리아를 가만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를 방해하거나 말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막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리아의 행동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준비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에는 죽은 사람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는 장례 풍습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님의 몸에 미리 향유를 바른 셈이 됩니다. 특별히 골고다 언덕길로 올라가실 그 발, 굵은 대못이 박히실 그 발에 향유가 부어졌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미리 알고 그랬을까요? 평소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던 마리아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이 죽으실 것을 예감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알지 못하고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마리아가 미리 알았느냐 몰랐느냐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의 행동을 자신의 죽으심을 드러내는 계기로 삼으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고자 하십니까? 죄인들을 대신하여 저주와 심판을 담당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 죄인들 중에 마리아도 들어 있습니다. 이제 얼마 후 예수님은 마리아를 위해 대신 죽으실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대신해 죽어 주었다면 그 사람의 시신에 향유 한 옥합을 깨트려 부어드리는 것을 아깝게 여기겠습니까? 이것이 비상식적이고 과도한 행동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나 대신 죽으실 주님을 위해 마리아처럼 행동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지닌 가치, 그 죽으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드러내는 아주 시의적절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헌신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유다의 말에 상처 받았던 마리아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큰 위로를 얻었습니다. 더불어 이 마리아의 헌신은 십자가의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어 고독하셨던 예수님께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마26:13)”

제가 알기로 이보다 더한 주님의 칭찬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비록 상식과 교양이 훌륭한 것이기는 하지만 결코 만능은 아닙니다. 영생과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교양과 상식이 제공해 주지는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 복음만이 우리가 저주 받을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 되는 길을 제시해 줍니다. 십자가 복음만이 구원과 영생을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또한 교양은 나를 치장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개념 있는 신사 숙녀로 보이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힘은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복음만이 예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바로 내 죄 때문이고 예수님의 못 박히심이 바로 내 허물 때문임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한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 사랑을 깨닫은 사람은 예수님 사랑하기를 멈출 수 없고, 누구도 그를 말릴 수 없습니다.

지난 6월 한 달 동안 여러 선교사님들의 인생 소감을 들었습니다. 세르비아의 한 자매 선교사님들은 한국에서 대학원까지 나온 인재였지만 선교지에서 자립하기 위해 가사도우미 일을 하셨습니다. 환경이 아주 열악한 A국에 나가신 한 선교사님은 쥐 꼬리가 음식에서 나오는 기숙사에서 사시면서 한 달 만에 십 킬로그램이나 몸무게가 빠지기도 하셨습니다. 제대로 된 음식을 살 돈이 없으셨습니다. 돌이 지나지 않은 아이가 음식 그림을 핥은 적이 있다는 말씀을 하실 때는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선교사가 되지 않아도 선한 일 할 기회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재능의 낭비, 기회의 낭비 아닐까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죽음에 담긴 의미를 전파하도록 하여라” 누구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헌신을 꾸짖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변호해 주십니다. 교양과 상식의 잣대로 그의 삶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복음의 무한한 가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무한한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어떤 헌신도, 희생도 광신일 수는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한 번도 보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가서 자기의 인생을 허비하는 수많은 선교사님들이야말로 세상이 볼 때는 광신자들이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이야말로 내 죽음의 무한한 가치를 아는 자들이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본문이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에 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우리는 유다의 편, 교양과 상식의 편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마리아의 편, 십자가 복음의 편에 서 있습니까? 교양을 앞세워 나의 정당함과 옮음을 드려내려 합니까? 아니면 사랑하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향유를 부어 드리려 합니까? 누구도 우리에게 향유를 부으라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요구한다고 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도 마리아처럼 행동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와 그 사랑을 깨닫는 만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되면 마리아처럼 행동하고 마리아처럼 살고 싶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가치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드려도 그 가치를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난감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어떻게 하든 표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 말라고 해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담긴 의미를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일에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차오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사 자신의 모든 것, 가장 귀한 생명까지 나를 위해 주셨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찰스 스터드의 말을 기억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분이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그분께 드리는 어떤 희생도 결코 크다고 말할 수 없다.”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주께 가져와
그 발 위에 입맞추고 깨뜨립니다
나를 위해 험한 산길 오르신 그 발
걸음마다 크신 사랑 새겨 놓았네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주께 가져와
그 발 위에 입맞추고 깨뜨립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오르신 그 발
흘린 피로 나의 죄를 대속하셨네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주께 가져와
그 발 위에 입맞추고 깨뜨립니다
주님 다시 이 땅 위에 임하실 그때
주의 크신 사랑으로 날 받아 주소서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와 그 한량없는 사랑을 마리아만큼 아니 마리아 이상으로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그분의 죽으심의 무한한 가치를 우리 삶으로 온전히 드러내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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